“영화제 준비는 요리하는 과정과 비슷해요. 멋진 영화를 발견하면 좋은 재료를 찾은 요리사와 같은 감정을 느끼죠. 그걸 어떻게 요리해서 내놓느냐 하는 게 요리 과정이고요.”
올해로 5회를 맞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제천 청풍 호반과 시내 곳곳에서 열렸는데, 밤새도록 영화 관람과 라이브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원 서머 나잇’, 신인 뮤지션들이 기량을 겨루는 ‘거리의 악사 페스티벌’ 등 음악제 기간 내내 영화와 음악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다.
한여름 밤 청풍 호반의 야외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콘서트를 즐기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원 서머 나잇’에서는 1920년 제작된 독일의 무성영화 〈골렘〉 상영 후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와 부활, 더블유 앤 웨일, 오! 부라더스 등 한국의 밴드 공연이 이어졌다.
영화 〈퀸 락 몬트리올 씨네 사운드 버전〉 상영 후 김장훈, 나무 자전거, 보드카 레인의 공연, 오스트리아의 음악영화 〈유니버설 러브〉 상영과 이 영화를 연출한 오스트리아 밴드 ‘네이키드 런치’의 몽환적이면서 센티멘털한 공연에 이어 김창완 밴드, 언니네 이발관 등이 무대에 섰다. 영화 〈마지막 갈채—탱고 까페 엘치노〉 상영 후 전설적인 테너 색소폰 주자 베니 골슨과 한국의 재즈 연주자 말로, 전제덕의 공연으로 ‘재즈 나잇’을 만들었다. 영화 속 음악가들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게 이 영화제만의 특징이었다. ‘음악영화’라는 특정한 장르로 영화를 골라 영화제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일 텐데,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도 120%’라고 말했다.
“외국의 음악영화제들도 엔니오 모리코네 등 유명한 영화음악가들이 직접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그곳에서 영화와 음악을 함께 만끽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어요. 정말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행복하죠. 제가 느꼈던 그 행복감을 우리 관객에게도 전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우리나라 관객이 제천영화제에 특별히 열광하는 이유도 영화와 공연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영화들을 중심으로 다루는 음악영화제와 영화음악에 초점을 맞춘 영화제는 세계적으로 20여 개가 된다. 그중 벨기에 ‘겐트영화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In-Edit Beefeater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제’, 체코 프라하의 ‘모품영화제’, 프랑스 ‘옥세르영화제’, 영국 ‘센소리아 국제음악영화제’, 독일 ‘함부르크 국제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대표적이다. 해외 음악영화제에 참가해 제천영화제를 알리는 것도 그가 할 일 중 하나다.
|
‘원 서머 나잇’에서 세계적인 색소폰 주자 베니 골슨(왼쪽)의 공연도 즐길 수 있다. |
“네트워킹이 중요하니까요. 다른 영화제에 참가해 앞으로 나올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고, 제작사나 배급사 부스를 돌아다니며 친분을 쌓습니다. 주말에 주로 열리는 파티에도 얼굴을 내밀지요.”
세계적인 영화음악가들을 초청해 영화 상영과 공연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제천영화제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놈만 팬다’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이제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참여하는 세계음악영화축제를 만들 수 있었다. 그가 프로그래머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참여한 것은 2회 때 부터. 그전에는 대학에서 영화관련 강의를 하면서 방송국에서 음악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음악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해 왔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후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프랑스에서 다큐멘터리 이론을 전공했다. 유학하기 전에도 영화연출부, 삼성영상사업단의 음반 프로듀서, 음악 잡지 기자 등을 두루 거치며 영화와 음악을 함께 섭렵했다.
“영화연출부 생활을 할 때는 3개월짜리 어음을 월급으로 받았어요. 눈물 없이는, 소주를 곁들이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이죠(웃음).”
고모부 하길종 감독 사망 후 ‘영화하겠다’ 선언
그의 감수성은 어릴 때부터 길러진 것이라 한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다. 생물학과 교수였던 아버지는 물고기 채집을 할 때 그를 데리고 다녔고, 좋은 영화가 있으면 함께 보았다.
“초등학교 때 본 프랑스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그 속에 담긴 음악과 함께 남았고, 영화에서 음악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죠. 그 시절을 산 사람치고는 문화적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팔 뻗으면 닿는 곳에 늘 책과 음반이 있었으니까요. 아버지와 물고기를 채집하러 가면 일단 채집한 물고기의 길이를 재고, 꼼꼼히 관찰한 후 함께 요리해서 먹었어요. 음식 솜씨가 남다른 외할머니와 어머니 덕분에 요리도 좋아하게 됐지요.”
|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인 <솔리스트> |
관심 분야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좋은 재료를 찾기 위해 전국의 시장을 다닐 정도로 요리에도 일가견이 생겼고, 그중에서도 생선 요리가 주특기라고 한다.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중3 때.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했던 하길종 감독이 그의 고모부인데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신 후였다.
“영화 검열이 심하던 때여서인지 술을 많이 드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린 마음에도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내가 고모부 뒤를 이어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공표(?)했어요.”
하길종 감독의 아들인 하지현 씨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되었는데, 정작 영화일은 처조카인 그가 하게 되었다. 그의 큰고모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 어릴 때는 ‘자살한 전혜린 가족이 사는 집’이라는 이유로 그의 집을 기웃거리는 여고생이 많았다. 파리 유학 시절, 그는 고모의 자취를 좇아 뮌헨을 자주 찾았다. 유럽의 벼룩시장을 도는 것이 취미였던 그는 그때 클래식에서 월드뮤직까지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LP판을 많이 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음악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영화음악가들이 정말 좋은 대접을 받고 있고,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자리 잡는 것 같습니다. 영화와 음악이 함께하는 낭만적인 여름밤 축제, 여러분도 함께 즐기시지 않겠습니까?”
사진 : 김진구
장소 협찬 : Js 레시피 (02-326-0205)
■ 전진수 프로그래머가 추천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추천작 ■
〈솔로이스트〉
개막작. 삶에 지친 신문기자와 노숙자가 된 천재 음악가가 만나 우정을 나누고 음악을 통해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의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하고, 실제 뮤지션이자 2005년 〈레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이미 폭스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앤빌의 헤비메탈 스토리〉
1980년대 영국의 전설적인 헤비메탈 밴드 ‘앤빌’의 현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생활고에 시달리는 50대가 된 멤버들은 13번째 앨범 발표를 앞두고 20년 만에 유럽 투어를 계획한다. 사차 지바시 감독은 15세 때 ‘앤빌’의 콘서트에 갔다가 여름방학 동안 그들의 공연을 따라 다니며 드럼을 배운 인연이 있다.
〈파두의 전설 아말리아〉
슬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커리어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기까지, 포르투갈 최고의 파두 가수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노래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소년과 바이올린〉
아버지에게 심한 학대를 당한 뒤 말을 잃은 일곱 살 소년 오뇩이 아동보호시설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며 치유되는 이야기. 필리핀 대중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 가족 영화로 좋다.
〈하우 투 비〉
우울한 삶을 살던 20대 중반의 아트는 싱어송 라이터가 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외국의 ‘88만 원 세대’를 다룬 성장통 같은 영화. 〈트와일라잇〉으로 스타덤에 오른 로버트 패틴슨이 아트로 분한다. 뉴올리언스영화제 관객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