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멕스(WOMEX, The World Music Expo)는 1994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된 월드뮤직 박람회로 세계 각국의 페스티벌과 이벤트 기획자, 음반사 관계자들이 참석해 현장에서 공연을 구매한다. 공식 쇼케이스는 참가자들이 이들에게 음악을 선보이는 워멕스의 가장 큰 행사다. 그만큼 무대에 서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올 워멕스는 역대 최다인 760개 팀이 응모, 엄격한 심사를 거쳐 들소리를 비롯한 37개 팀이 선정되었다. 들소리의 이번 워멕스 무대는 국내 최초이기도 하지만 아시아권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쇼케이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문갑현 대표와 단원들을 만나기 위해 마포구 성산동 들소리 사무실을 찾았다. 연습실에서는 정기공연을 위한 연습이 한창이었고, 사무실에서는 두 명의 기획팀원이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워멕스 이후 세계 각국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 최근 기획팀의 업무는 몇 배로 늘었다고 한다.
소감을 묻자 문 대표는 “워멕스에 공식 초청되면 음반에 워멕스 인증 마크를 달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음악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며, “월드뮤직 전문가들에게 음악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는 의미”라고 즐거워했다.
문 대표가 들소리를 만든 것은 25년 전. 대학 시절 탈춤 동아리 활동을 했던 그는 경남 진주에서 들소리의 전신인 놀이패 ‘물놀이’를 결성해 마당극 위주의 공연을 했다. 이후 공연 내용을 풍물과 놀이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1999년, ‘좀 더 큰 물에서 놀아 보자’는 생각으로 서울로 왔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던 전통 음악을 고집한데다, 지방 출신 그룹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는 번번이 그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그가 ‘정말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겠다’는 오기를 품고,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방에서는 그래도 꽤 인지도가 있었는데, 서울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무 기반도 없는데다 제가 국악 전공자도 아니니 우리는 마이너(minor) 중의 마이너였지요. 그래서 아예 우리 놀이문화를 상품화해서 세계시장에 내놓자는 구상을 하게 됐어요. 당시엔 ‘놀이를 어떻게 상품화하느냐’고,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충분히 된다고 확신했어요.”
그는 자신의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스토리는 배제하고, 북의 신명과 에너지를 강조하는 타악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꾸몄다.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는 놀이판도 만들었다. 우리 고유의 마을 축제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들소리의 대표작 ‘타오(Tao, 道)’는 그렇게 탄생했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덕분에 서게 된 첫 세계 무대
작품을 들고, 그는 무작정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월드뮤직이라는 장르가 있다는 것도, 대규모 월드뮤직 시장과 축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2004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츠 마켓(Arts market)에 무작정 지원서를 넣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당시 중국・홍콩 등지에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엄청나게 유행할 때였어요. 그것 때문에 유럽의 여러 팀들이 불안하다고 불참을 선언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갈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나서 대타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첫 무대라 외국인들의 반응이 어떨까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문 대표는 “아츠 마켓을 계기로 들소리가 세계 월드뮤직 관계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며 “사스가 우리를 살린 셈”이라고 한다. 아츠 마켓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세계 최대의 월드뮤직 축제인 워매드(WOMAD·World of Music, Arts and Dance) 초청 공연으로 이어졌다.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워매드는 1982년 시작된 국제 음악축제로 대륙마다 조직위원회를 두고 지역 단위로 월드뮤직 그룹을 섭외해 그 지역 무대에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와 호주 아델라이드의 워매드 페스티벌이 유명하다. 들소리는 호주 워매드뿐만 아니라 월드 뮤지션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영국 워매드 무대에도 섰다.
문 대표는 “해외시장 개척은 황무지를 일구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시장을 넓혔고, 그 과정에서 노하우를 쌓았다”고 한다. 레퍼토리도 다양화했다. 타악 외에도 가야금·대금·소금 같은 악기들로 다양화하는 한편, 농악놀이·판소리·퍼포먼스 등도 가미했다. 때로는 애절한 선율로, 때로는 강렬한 비트로 역동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외국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결과, 외국에서 공연 요청은 점점 늘었고, 공연 개런티도 몇 년 새 10배 이상 올랐다.
런던과 뉴욕에 거점 공간도 마련했다. 1년에 적게는 30~40회, 많게는 80회 이상 해외 공연을 하다 보니 이동하느라 발생하는 경비, 시간의 손실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 들소리가 세계적인 그룹임을 일러 주듯 사무실 벽에는 서울·런던·뉴욕의 현재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 세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들소리의 단원들은 모두 15명. 입단을 원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오디션을 볼 수 있다. 학력・나이도 불문이다. 문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열정 한 가지다. 실제로 단원의 절반은 국악을 전공한 대졸자들이지만 절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들소리에 들어와 10년 가까이 내공을 쌓은 사람들이다.
입단하면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북을 배운다는 것도 특징. 가야금·대금·소금·징·꽹과리 등의 국악기도 모두 익혀야 한다. 즉, 국악 멀티 플레이어가 되는 교육을 받는다. 문 대표의 궁극적인 꿈도 들소리를 교육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음악 학교를 만들어 극소수의 학생을 선발, 집중 투자와 교육으로 ‘월드 뮤지션’을 양성하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우리 놀이를 상품화하겠다는 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각 분야에서 우리 전통의 세계화 바람이 거세고 일고 있는 요즘, 공연예술계에서 들소리가 전해 줄 낭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사진 : 이창주
공연사진 제공 : 들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