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제 고인이 된 시인의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 한 구절이다.
그래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겠지 하는 짐작은 하면서도 그럼 나를 키워낸 것은
무엇일까?를 표현해야 한다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럼 나를 키워낸 것은 이슬. 태양, 아니면 달빛?
모두 다 아니다. 그저 나 같은 오리지널 촌놈을 키워낸 것은 바람도 이슬도 달빛도 아닌
얼마간 유치하다고 흉이 되더라도 고구마라고 해야 한다.
팔할쯤은 못 되더라도 아마 삼할쯤은 될 것도 같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가 있었다.
그러나 단 한번 그 고구마가 진저리나게 미웠던 적이 있었다.
이제 기억도 어렴풋하지만 초등학교 사학년 가을 소풍이었던가 싶다.
주변에 유적지라든가, 관광지가 없던 옹색한 벽촌이었던지라
봄에는 갯벌에 꼴망둥어나 능쟁이 황바리라고 불리던 게가 까맣게 기어 다니던 천수만의
이름 없는 바닷가로, 가을이면 교가에도 나오는 우리 동네 뒷산인 은하봉으로 소풍을 가곤 했었다.
그래도 소풍날이 정해지면 얼마나 그날을 기다리며 설레었던가?
몇일 전부터 잠을 설치고 비가 오지 않기를 기다리고, 지난 추석날 하루 신고 선반위에
아껴두었던 운동화도 꺼내 신어보고.
어른들은 소풍을 원족(遠足)이라고 하셨다.
드디어 소풍가는 날, 새벽잠을 설치다가 밖에 나와 하늘을 본다.
별이 총총한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다.
다른 날보다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신 것 같았다.
“엄마 오늘 간식은 뭐야?”
“여기서 열어보지 말고 가서 열어봐라”.
찐 계란 하나 싸주실 형편이 안 되는걸 알면서 왠지 기대가 되었다.
명색이 반장인데 선생님 김밥 도시락은 몰라도 오십원 인가 하던 아리랑 담배는 한갑 사다드려야
할 텐데, 겨우 주머니를 털어 주시는 용돈은 삽십원 이었다.
그래도 그날은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하는 등굣길이 가벼웠다 .
오늘도 대머리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일장훈시가 이어지고, 뒤 열의 아이들은 딴 짓들을 하고.
드디어 출발. 추석빔으로 입은 옷에 그래도 있는 집 애들은 플라스틱 물통도 하나씩 메고,
추수가 시작된 들길을 지나 산등성이를 오르면 널다란 둔덕이 나타났다.
반별로 나뉘어 장기자랑,
남진의 '님과 함께'는 빠지지 않았고 재주가 메주인 나의 장기는 '발동기 시동연습'이었다
장기자랑, 수건돌리기, 보물찾기가 끝나면 점심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기대를 하면서 도시락 도자기를 풀었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쌀이 더 많이 들어있는 밥과 멸치볶음,
그리고 그 옆에 도시락과 함께 넣어주신 것은, 다름 아닌 햇고구마 3개였다.
세상에, 소풍날에 고구마를 쪄, 넣어주시다니.....
혹시 옆에 동무가 볼까봐 얼른 보자기를 덮었다.
그리고 은하봉 산등성이를 냅다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바위위에 올라 그 고구마들을 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아무리 싸주실 게 없기로 소풍날 고구마를 싸주시다니!
그날은 어머니가 한 없이 야속하고 미웠었다. 죄 없는 고구마는 말할 것도 없고
늘 보리밥만 먹다가 오랜만에 먹는 쌀밥과 고소한 멸치볶음도 그날은 맛이 하나도 없었다.
내 고향에서는 표준어인 고구마란 말은 잘 쓰지 않았다.
한 여름 하지에 수확하는 감자와 이름을 같이 썼다.
고구마라고 표현하면 상당히 유식해 보이는 축에 들었으니 말이다.
고구마 농사는 3월부터 시작한다. 종자로 쓸 건실한 것 여러 개를 몰래 감춰놓으신 어머니는
3월말이 되면 함지박에 황토 흙을 담아 종자 고구마를 묻고 사랑방에 들여 놓으셨다.
일주일쯤 지나면 흙 거죽을 뚫고 자주 빛의 어린 고구마 싹이 돋아나오기 시작했고,
그 메마른 봄에 돋아나는 새싹의 경이로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늘 허기를 달고 살았던 아이들은 감히 그 종자고구마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절대 표시가 안 나도록 마무리를 했는데도,
어머니는 귀신같이 알아내시고 날벼락을 내리셨다.
4월이 되면 텃밭에 온상을 설치하고 고구마를 옮겨 심었다.
밑에는 두엄을 넣어 열을 내도록 하고 위에는 왕겨를 덮고, 대나무를 걸쳐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새순이 나기 시작하는 고구마를 옮겨 심었다. 저녁나절에는 꼭 물을 주어야 했고 만상(晩霜,마지막 서리)이 지나고 오월이 되면 비닐을 완전히 걷어 냈고 이때부터 왕성하게 순이 자라기 시작했다.
오월 중순이면 모내기가 시작되고, 유월 초 망종이 지나면 보리는 완전히 여물어서 베게 된다.
보리타작이 끝나고 중순이 되면 대개 장마철이 시작되고, 청승맞게 맹꽁이는 밤새 울어대고, 아직 모를 심지 못한 천수답은 모내기 하랴, 들깨 모종 옮겨 심으랴! 그 바쁜 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일, 고구마 심을 준비를 하야 하는 것이다.
장맛비가 시작되면 온 식구가 모여 전날 저녁부터 텃밭에서 자란 고구마 순을 베어다가 토방이나 헛간에 들여놓고 낮이나 가위로 두세 마디씩 잘라, 짚으로 열개씩 스무개씩 나눠 묶어놓았다.
고구마 심을 밭은 사전에 쟁기질로 아랑을 만들어놓고, 비 오는 날 우의대신 비닐조각을 몸에 묶어 우의처럼 뒤집어쓰고 고구마를 심었다.
봄`가을 농번기에는 학교에서 '가정실습'기간이 주어졌고 그야말로 농사실습을 해야했다
고구마를 심는다는 것은 삽목(揷木,휘묻이)이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이 아니면 활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그것이 일이라 기보다 장마가 시작되고 비가 와서 고구마를
심을 수 있게 된 것에 더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고구마 순을 베어낸 씨감자는 한쪽으로 새살이 오르기도 하고 한참을 더 두면 새끼를 치기도 하였다. 후에 고구마 순을 한번 더 잘라 보식을 하고나면 그 씨감자는 캐어 껍질을 벗겨내고 당원(감미료의 일종)물을 치고 쪄 먹으며, 그래도 먹을 만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아래 고구마순은 서로 엉키고 밑이 들어간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면 고구마뿌리는 자줏빛으로 굵어져간다. 이때쯤이면 고구마 서리가 시작되고. 고구마 밭은 지나다가 자연스럽게 발로 땅을 쳐내든지 덩굴을 잡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드러낸 줄기에 딸려온 고구마는 날것으로 먹거나 불을 피워 군고구마를 만들어 먹었다.
추석이 지나면서 한 양동이씩 캐어다가 간식으로 쪄먹었다.
돌담사이 고샅길로 떠다니던 고구마 익는 달콤한 냄새, 그것은 늘 허기를 달고 살았던
아이들을 키워내는 생명의 향기였다.
시월이 넘어서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집집마다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다.
고구마를 캘 때는 먼저 덩굴을 걷어내야 했다. 덩굴 걷어내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고
밭고랑이 길 때는 힘이 많이 들었다. 걷어낸 고구마순은 겨우내 염소나 소의 귀한 사료가 되었기 때문에 밭 가 나무줄기에 걸쳐 말렸다.
그리고 고구마 순을 걷어 내기 전 먼저 고구마 순을 잘라낸다.
고구마 줄기는 취나물, 머위순과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물들이다. 된장국으로 끓이기도 하고
되쳐서 양념으로 무치면 찰진 맛이 났다.
그리고 삶아서 말렸다가 정월대보름 나물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하였다.
고구마를 캘 땐 고구마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상처가 생기면 빨리 썩기 때문이다.
고구마 밭에는 굼벵이가 유난히 많았다. 매미의 애벌레로 7년 동안 땅속에서 도를 닦아야 매미가 되고 열흘정도나 살다가 죽는다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고구마를 캐고 나면 지게나 리어커로 집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사랑방에 수숫대나 호밀대로 퉁가리(원형의 저장공간)를 만들어 그 안에 저장하였다.
사랑방에 고구마 퉁가리를 해놓으면 늘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오늘 즘슨은 감자여” 그러면서 어머니는 숭늉그릇에 동치미한 그릇과 고구마 한 소쿠리를 들이 미신다. 그저 보리밥이라도 먹고 싶은데 밥은 따로 주지 없었다.
저녁 밥 지은 아궁이에 고구마를 묻어놓는다. 그리고 저녁에 출출하거나 이웃집 아저씨가 마실 오면 그 군고구마를 꺼내 놓았다. 고구마를 구울 때는 콩대 등의 너무 괄(세다)거나 약하지 않은 불씨가 적당하다.
마치 요즘 손님이 오면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을 내놓듯이...
그리고 다음날 아침밥에도 까만 보리밥 속에 누런 고구마가 듬성듬성 박혀있었다.
양식을 아끼기 위한 어머니의 안타까운 노력이었지만 밥 속에 들어있는 그 들큰한 고구마는 별로였다..
한나절 보리밭을 달리며 연을 날리다가도, 얼음을 지치다가 출출하면 집에 들어와 날 고구마를 두어 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선다.
칼로 껍질을 벗겨먹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입으로 껍질을 벗겨내면서 먹었다.
그래서 그 당시 길에는 그 고구마 껍질들이 무수히 널려있었다.
있는 집이나 없는 집 아이들이나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긴 겨울을 지내면서 고구마는, 아니 감자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간식이면서 주식이었다.
내 유년의 봄은 늘 사랑방에 통가리 해 놓은 고구마가 바닥을 보이면서 오기 시작했다.
동지가 지나면서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진 해는 입춘이 지나면서 낮 길이를 늘려가고 손등을 쩍쩍 갈라지게 하는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학교에서 다녀와 아무리 살강문을 여닫아 봐도 먹을 거라고는 이제 군둥내가 나기 시작한 시큼한 짠지 뿐 이었다.
그나마 바닥을 보인 고구마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하고.
그래서 종자로 묻어 놓은 고구마에 감히 손을 대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즘엔 그 고구마가 무공해에다 건강식품이라니, 하긴 그 건강식품을 하도 많이 먹어서 지금 건강한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 먹는 김 맛이 예전의 김 맛이 아니듯이 고구마 또한 그 예전의 고구마 맛이 아닌 것 같다.
어린시절 나를 키워낸 것은 바람도 이슬도 달빛도 아닌 것으로 고구마가 있었다.
퉁가리에 고구마가 바닥을 보이면서 해는 길어지고 허기도 깊어갔다.
한 해나 두해 걸러 잦은 이사를 다니면서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만 서너포기라도 고구마를 심고 가꾸었다.
그 고구마를 먹고 자란 촌놈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위한 나만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사락 사락 함박눈이 내리는 밤, 고향집에서 얼음이 서걱서걱 씹히던 그 동치미 국물과 어머니가 쪄주는 고구마를 먹고 싶다.
내가 고구마에 애틋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내가 촌놈이라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