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후대에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칭하면서 주몽 = 동명성왕 = 동명왕 모두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고 있으며 근래 학계에서도 별다른 구분 없이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서들을 연구하면서 동명과 주몽은 전혀 다른 인물임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아래 영상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KBS 역사스페셜 다큐멘터리입니다.
* 해당 영상에서는 강단사학의 입장에 따라 졸본의 위치를 중국 환인 오녀산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 탁리국은 고리국의 오기로 보고 있는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처음으로 동명이라는 이름이 언급된것은 후한 때 왕충이 지은 논형이라는 책입니다.
고리국(탁리국)이라는 나라에서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쳐서 부여를 건국 했다고 하는데 내용이 주몽 설화와 거의 똑같습니다.
즉 주몽 설화는 동명 설화를 차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학계에서 아직까지도 부여의 건국자가 북부여의 해모수냐? 동명왕이냐? 명확히 정리하고 있지 못합니다. 어느 책에는서는 해모수, 어느 책에는 동명 도대체 건국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분명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다양한 부여가 존재 함에도 아직까지 학계에서 부여의 역사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지 못하고, 교과서에서 조차 부여라는 국가가 있었다고 만 적당히 배우고 끝납니다. 부여가 어떤나라인지...이전의 고조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이후의 고구려와는 어떤 관계인지 배우거나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현재 부여사는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 왕사의 흐름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갈사국), 연나부(부여) 등 다양한 부여가 존재하며 이 내용들을 근거로 부여 왕족의 계보 흐름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습니다.
[연남산 금석문]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4]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북부여 조의 동명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인데, 해모수 북부여 건국 시점이 BC 59년, 주몽 탄생이 BC 58년이므로 이 시기에 주몽은 동명이라 불리지 않았습니다.(부연설명 참고). 또한 해당 구절에서 해모수의 아들을 해부루로만 지칭한 부분을 보더라도 동명제는 주몽이 아니며 따라서 해모수(북부여) - 해부루(동부여) - 동명왕(부여) - 주몽(고구려)로 계보가 연결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도착하고, 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이었다고 나옵니다. 즉 해모수(북부여) - 해부루(동부여) - 동명왕(부여) - 부여왕(졸본부여) - 주몽(고구려)의 계보가 만들어집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북부여 조의 원문(立都, 稱王國號北扶餘, 立都于卒夲州爲卒夲扶餘)을 다시 보면, 동명왕이 건국한 부여는 졸본부여입니다.
부연설명 : 고구려(BC 37~AD 668) 때까지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만 불렸고, 주몽을 동명과 동일시하게 보는 시점은 주류 사학에서도 AD 1011년 이후로 동명왕의 사당에 훈호(勳號)를 더해준 시점부터로 보기 때문입니다(송영대, 《고려의 주몽·동명 인식과 동명성왕 관념 성립》,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부여사의 흐름을 크게 2개의 흐름으로 정리하면 사료를 통해 추정한 북부여 ~ 고구려까지의 계보는
백제의 계보는 동명왕~졸본부여왕-소서노-비류/온조(백제) 로 혈통이 이어 지기에 동명왕은 온조의 먼 할아버지가 됩니다. 즉 동명 왕의 부여의 정통성은 백제로 이어 지게 됩니다. 즉 온조가 동명왕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동명왕은 자기를 버린 주몽이 아니라 졸본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입니다. 또한 백제 성왕은 부여의 정통성을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