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된 1910 년 이후에 식민사관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1867 년 막부정치를 끝내고 명치왕을 세운 서향융정(사이코다카모리)이 1873 년 설립한 명치왕군부의 참모부로 보는 것이 옳다.
재일교포 고고학자 이희진의 <광개토왕릉비 탐구>에 의하면,
사이코는 1873 년부터 이조선과 청국으로 육군 장교 수십 명을 밀정으로 파견하여 온갖 정보를 수집했었고, 특히 1882 년 청국 봉천부 우장에 파견된 육군 중위 주구경신이 고구려 영락태왕비문 중 신묘년 문장을 변조하고 쌍구탑본하여 일본으로 들여온 이후 참모부 주도로 비문을 해석하였고 1889 년에는 정탁본이라 속여 게시하고 해석문까지도 공식 발표했다고 한다.
결국 영락태왕비문의 신묘년조 내용이나 해석문을 발표할 때 <임나고>도 첨부된 것을 보면 정한론에 맞춘 조선 역사 난도질은 대략 1883 년부터 1889 년까지 사이에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포함하여 집중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7 년 사이에 왕검조선.단군부여의 2000 여 년 역사는 전설로, 한 시기의 요서.요동군 위치는 지금의 란하 중.하류 지역에서 지금의 요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전면적인 지리 조작도 끝냈다는 얘기다.
사실 현재의 중국전도를 신뢰하여 한반도 평양이 한 시기의 낙랑군 위치라는 주장도 한심하지만, 식민사관의 뿌리가 조선총독부라는 주장도 어설픈 것이다. 즉 조선총독부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진전좌우길이나 금서룡 등이 식민사관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훨씬 전인 명치왕 초기인 1870 년대 초 군軍 참모부의 기획으로 지리의 밑그림 자체가 조작된 것이다.
결국 아무리 진전좌우길이나 이병도 등을 욕하더라도 현 중국전도 표시 하에서는 낙랑군 등의 지리 문제를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참고>
아래는 국가급 기관인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자료실에 있는 <아세아동부여지도-이하 아동도라 함>라는 조작지도다.
그 주는 아래와 같다.
일본, 육군참모국, 1875년, 134.6×88.8㎝
이 지도는 일본의 육군참모국이 작성한 일본의 공식관찬지도이다. 일본, 한반도, 중국이 그려져 있다. 동해 해역을 일본해로 표기했다. 그런데 이 지도는 ‘동해’ 명칭을 다른 해역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황해 아래쪽에 있는 한반도 남쪽과 일본의 규슈, 오키나와 제도, 대만과 중국의 동남 쪽 등에 둘러싸인 바다를 ‘동해’로 표기했다.
동해 해역의 한 가운데에는 마쓰시마(松島)가 그려져 있는데 이 섬은 경위도와 그 모습으로 보아 울릉도를 그린 것이다. 그 서쪽에 다케시마(竹島)가 그려져 있으나, 이 섬은 경위도로 보아 1789년에 영국의 제임스 콜넷이 울릉도를 잘못 측량해 명명한 아르고노트 섬으로 판단된다. 독도에 해당되는 섬이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육군참모국이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지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1875 년 당시 이조선과 청국 국경선은 압록강이였고 압록강에서 서쪽으로 120 리 떨어진 곳에 청국 관문인 책문을 설치하였었고 책문부터 압록강까지는 공지였었다.
그러면,
1875 년 간행된 일본의 공식 관찬지도라는 <아동도>의 청국과 이조선의 국경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동북아재단이나 독도연구소 쯤이라면 일본해 운운보다 양국의 국경선이 떨어져 있는 사유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대체 보통 수준의 어느 한국인이 이조선과 청국 국경선이 멀리 떨어져 그려진 저런 지도를 수긍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