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홍진기
“일제 36년 손해배상하라” 건국 후 첫 문제 제기
유민(維民) 홍진기(洪璡基)는 건국 후 최초로 대일 손해배상청구 작업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한 지사적 관료이다. 그는 6·25전쟁 후 제네바회담 대표로 참석하여 남북 평화통일의 원칙을 마련했다. 자유당 말기 격동기에 최연소(42세) 법무부 장관을 지낸 데 이어 내무부 장관 재직 중 일어난 4·19혁명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때의 좌절을 떨치고 일어난 유민은 중앙일보 창간과 TBC방송을 함께 묶어 종합 매스컴의 바람직한 전형을 제시한 탁월한 언론기업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홍진기는 1917년 3월 13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1동 841번지에서 홍성우(洪性佑)와 이문익(李文益) 사이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계는 남양 홍씨 남양군(南陽君)파이며 모친은 전주 이씨이다.
“유민 집안은 선대엔 관직에 오른 분이 많았으나 조선조 후기에 들면서 정치와는 무관한 포의의 선비로서 서울 근교에서 전원생활을 했던 듯하다. 조부가 부지런하고 이재에도 밝아 정미소 운영으로 가산을 일으켰다. 하왕십리 집은 대지가 1000평이 넘는 저택이었다.”(‘유민 홍진기 전기’ 중앙일보사)
홍진기의 부친은 외아들이고 친구와 술을 즐겨 가업을 거의 돌보지 않고 나들이가 많았다. 조부는 외아들 교육에 실패한 것을 손자에게서 회복하려는 듯 홍진기를 열심히 가르쳤다. 술 마시는 법도도 엄격히 가르쳤다. 자세는 바로 하고 취하지 말며 언제나 적정선에서 술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진기의 부친은 조부가 일군 가산을 지키지 못했다. 추풍령 부근의 금광에 투자해 번번이 실패했다. 67세로 작고하고 재산도 거의 없애 모친이 집안을 관리했다. 조부와 마찬가지로 모친도 엄격했다. 모친은 모든 부문에서 절제할 줄 알고 사리가 분명할 것 등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가르쳤다.
홍진기는 여섯 살 때 사숙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다 이듬해 왕십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30년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들어간다. 당시 집안형편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할머니께서는 아버지가 학교 다니실 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지요. 여름에는 동복이 전당포에 가 있고, 겨울에는 하복이 전당포에 가 있었다고 하셨어요.”(4남 석규씨)
어려운 살림살이는 오히려 홍진기의 면학열을 더욱 자극했다. 하루빨리 모친에게서 가사의 짐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효심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재들의 집단에서도 전 학년 성적이 전교생 200명 가운데 10등 내외를 차지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꿈꾸던 낭만주의자
1934년 홍진기는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다. 이 무렵 모친은 남은 가산을 정리하고 경성제대 예과가 있는 청량리로 집을 옮긴다. 생활의 방편으로 하숙을 쳤다. 계창업(변호사 역임)과 문홍주(문교부 장관 역임)는 대학의 전 기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예과 1년 후배인 황산덕(문교·법무부 장관 역임)·김봉관(농림부 차관 역임), 2년 후배인 선우종원(국회사무총장 역임)도 이 하숙집에 들어왔다. 경성제대 예과의 모범생들이 하숙하던 홍진기의 청량리 집은 일종의 문화살롱이었다. 홍진기는 프랑스 문학에 심취하여 항상 보들레르 시집을 들고 다녔고 앙드레 지드를 특히 좋아해 ‘좁은문’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 ‘좁은문’과 관련한 황산덕의 말이다.
“유민과 ‘좁은문’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중간도 못 읽었는데 유민은 그걸 다 이해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나는 분명 ‘좁은문’ 일역본이 조선에 깔리자마자 구입했고, 당시 유민은 책을 살 돈이 없었다. 나중엔 결국 샀겠지만 알고 보니 유민은 서점에서 그 책의 처음·중간·끝 부분을 부분적으로 보고 전체를 이해한 것이었다.” 홍진기는 음악과 영화와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계창업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다방 전원(田園)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홍진기가 조선어학회 인사들과 교류한 증언도 있다. 홍진기의 차남 석조씨는 “아버지께서 최현배 선생이 강의하는 한글 강습소에 우리말 공부를 하러 다녔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며 “강습소가 경성제일고보가 있던 화동과 인근 재동 사이에 있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경성제대에는 두 개의 교가가 있었다. 일본어로 된 공식 교가와 조선 학생들만이 비밀리에 부르는 민족의 얼을 북돋는 우리말 교가였다.”(‘경성제국대학’ 이충우)
일제의 차별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는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전집 등을 독파하는 게 크게 유행했다.
“아버지가 나한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내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법대는 절대 안 갔지. 나는 훌륭한 문학가가 꿈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해 보고 싶고…’ 아버지는 그렇게 낭만이 있으셨던 분이었고 사랑도 멋지게 하셨어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청년 시절 두 번의 뜨거운 연애를 하셨어요.”(장녀 라희씨)
경성지방법원 사법관 시보로 출발
홍진기는 술도 좋아했다. 훗날 아들들에게 ‘홍씨 가문은 반주 정도는 해야 한다’며 식사 중에 술을 권할 정도였다. 차남 석조씨는 ‘경성제대 시절 아버님께서 하도 취하셔서 차도와 인도 사이에 있는 턱을 베개 삼아 주무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눈 오는 날 술에 취해 길에서 잠을 자다 동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
홍진기는 1937년 본과로 진학하여 법학과를 선택한다. 그는 “어느 땐가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민족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믿었다”고 말했다. 1940년에 홍진기는 경성제대를 졸업한다. 라희씨(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부인)는 이런 말을 들려 준다.
“할머니께서 아버지 졸업식 직전에 빚을 내어 새 교복을 장만하셨다고 해요. ‘우리 아들에게 낡은 교복을 입혀 내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빚을 얻어서 새 교복을 장만한 거다.’ 나중에 아버지가 나에게 ‘너희 할머니가 그런 분이시다’라고 하셨어요.”
홍진기는 법문학부 법학과 조수(助手)로 근무한다. 조수에서 강사, 조교수로 올라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조선인이 조수가 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이듬해 홍진기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홍진기는 출세의 최대 관문을 통과하고도 대학교수가 되어 학문을 하고 싶었다. 상법의 권위자인 니시하라 교수의 자상한 지도와 배려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홍진기의 꿈은 깨지고 만다. 조선인 조수 중에 공산당 사건과 연루된 자가 있어 조선인 조수제도가 아예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1942년 홍진기는 차선책으로 경성지방법원 사법관 시보가 된다. 대학을 떠났어도 그의 논문은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하늘같이 높은 도쿄대 다나카 교수가 그의 논문을 인용하여 도쿄제대 학보에 실었다. 홍진기에게는 다시없는 영예였다. 1943년 12월 27일 김신석(조흥은행 상무)과 남의현의 맏딸 김윤남(金允楠·이화여전 졸업)과 결혼한다. 전주지법 판사 시절이다.
3권짜리 대일 배상청구조사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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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을 맞은 홍진기는 조선 해방의 국제법적 의미를 골똘히 생각한다. 해방이라는 정치 현상은 기존의 국제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치 현상이다. 이러한 거시적 안목으로 홍진기는 미군정청과 새 정부의 내각에서 실무적으로 건국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다짐을 한다. 그는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편찬부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조선의 법전을 정리하고 새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는 데 필요한 기초작업을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법무부 조사국장 때 홍진기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일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는 해방의 논리에 입각한 ‘원상회복의 원칙’을 내세운 증빙자료로 방대한 세 권짜리 대일 배상청구조사서를 작성한다. 이 자료는 후일 대일청구권의 유일한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그뿐 아니라 1951년 미 국무부가 대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약안을 만들었을 때 홍진기는 그 초안에 한국에 관한 조항이 누락된 사실을 발견하고 외무부에 통보하는 한편 경무대에 보고하여 내각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비상이 걸린 외무부는 뒤늦게나마 혼신의 힘을 써서 그 조약안에 대일 청구권, 귀속재산 처리건, 재일동포 법적 지위 문제 등 한·일 간의 제문제 조항을 첨가하도록 대미교섭을 벌여 우리 입장을 관철시켰다.
또 법무국장 때 홍진기는 한·일회담 대표로 참가해 일본 대표의 오만불손한 구보다(久保田) 망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일대 논쟁을 벌여 끝내 사과를 받아내었다. 홍진기는 미리 공부해둔 해방의 논리를 펼친 것이다. 김동조(훗날 외무부 장관 역임)는 “구보다 대표의 논지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 그에 따른 법질서의 필요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법률가인 홍 대표는 해방의 논리라는 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치에서의 새로운 현상을 들어 논박했다”고 증언한다.
“해방이라면…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에 기초를 둔 식민통치나 적국의 점령상태가 전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불법에서 벗어나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참뜻을 일본은 고의적으로 외면하려 한 것입니다.”(월간중앙 1977년 5월호 홍진기)
4·19혁명 발포 책임자로 몰려
1954년 홍진기는 법무부 차관으로 승진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국회 법사위 소속 위원으로 홍진기를 자주 만났다고 한다.
“당시 나는 20대의 최연소 국회의원이었고, 홍진기씨는 30대의 젊은 차관이었다. 법사위 의원들과 법무부 관계자가 술자리를 가질 때면 장관 대신 홍 차관이 주로 나와 의원들과 대작했다. 홍 차관은 술이 셌다. 그때는 술잔을 돌리던 때라 엄청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홍 차관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이야기 홍진기’ 김영희)
휴전 이듬해 제네바회담 대표로 임명된 홍진기는 대한민국의 ‘법적 동일성’에 기초한 평화통일방안을 마련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는 한국의 평화통일방안으로 정착시킨다. 이때 변영태 외무장관은 홍진기를 외무차관으로 오라고 제의하나 홍진기는 사양한다.
1958년 홍진기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국무회의의 핵심관료로서 국정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혼미를 거듭하는 자유당 정권 말기 홍진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막후 지시로 조병옥 야당 당수와 만나 정권교체에 관한 협의를 하지만 여·야 강경파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한다.
홍진기는 1960년 3·15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최인규 장관의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에 발탁된다. 이어 4·19혁명이 터지자 홍진기는 발포 명령의 원흉이라는 정치적 지탄을 받는다. 경무대 앞의 발포명령자는 경호실장 곽영주로 밝혀졌으나 그밖의 서울 시내 일원의 발포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내무장관과 치안국장에게 그 굴레가 씌워졌다.
이병철 회장과 사돈 맺어
4·19 법정에서는 증거 희박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재수감되어 계엄령하의 군사법정에 회부된다. 4·19 재판에서 홍진기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장까지 체포하는 판국에, 이성을 잃은 군사재판은 홍진기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형 확정 때 그나마 무기로 감형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유민이란 아호도 옥중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중재 전 경성전기 사장(자유당 기획위원으로 구속됨)이 시경에서 따온 유방(維邦)으로 쓰라고 했으나, ‘저는 늘 백성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유민으로 했다. 군부세력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회복하자 법조계 재야인사들이 그가 국익을 위해 공헌한 업적이 지대하다며 형집행정지 처분을 탄원한다. 그는 1963년 12월 16일 석방된다.
이듬해 홍진기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라디오서울 사장에 취임하며 동양텔레비전방송을 개국한다. 1965년에는 중앙일보 부사장에 취임하여 9월에 창간한다. 1967년에는 장녀 라희씨가 이병철의 3남 건희씨와 결혼한다. 홍진기는 1968년에 중앙일보 사장, 1969년 동양방송 사장에 취임하며 1970년 한국신문협회 부회장에 취임한다. 홍진기의 절제되고 합리적인 태도가 동료 신문 경영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홍 사장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사임할 때까지 12년 동안 고락을 같이하면서 언론계 정화에 기여했다. 풍부한 법률론과 냉철한 사고로 협회 내에서 ‘홍 판사’로 불린 그의 중용지도를 오늘의 후배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조선일보와 45년’ 방우영)
장남 홍석현, 종합언론의 꿈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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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의 장남인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홍진기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앙일보를 단기간에 정상급 신문으로 부상시키며, 이와 함께 동양TV를 보도·교양·오락 면에서 모두 앞서는 한국 최초의 바람직한 종합언론매체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1980년 신군부가 언론통폐합 조치로 TBC방송을 폐사시켜 홍진기는 그의 분신을 잃고 만다. 홍진기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발사업 등에도 크게 기여한 경영전문가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홍진기는 1985년 중앙일보사 신사옥을 개관하고 이듬해 7월 13일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도 양주군 희천읍 옥정리 선영에 안장된다.
홍진기가 근무하던 그 집무실에서 만난 장남 홍석현(중앙미디어네트워크·중앙일보) 회장은 부친의 유지를 이어 방송을 다시 부활시키는 감회가 벅차오르는 듯했다.
“제 나이가 지금 62세이니 부친께서 종합언론에 한창 매진하셨던 바로 그때가 아닙니까? 다시는 방송을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기회가 왔으니 심혈을 쏟아부어야겠지요. 당시 경영책임자였던 홍두표 사장님도 강한 의욕을 보이시고, 무엇보다도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수많은 TBC 가족들의 의기와 노하우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요.”
석유공사 사장, 한국산업리스·동양증권 회장을 역임한 홍진기의 동생 은기(서울대 상학과 졸업)씨는 2010년에 별세했다. 홍진기의 장남 석현(62·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씨는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며느리 신연균(58·이화여대 사회학 학사 및 석사)씨는 신직수 전 법무부 장관의 장녀로 재단법인 아름지기 이사장이다.
홍진기의 장녀 라희(66·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씨는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한국메세나협의회 부회장이다. 차남 석조(58·서울대 법학과 졸업, 하버드대 법학 석사)씨는 법무부 검찰국장, 광주고검장을 역임했으며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으로 양경희(양기식씨의 차녀)씨와 결혼했다. 3남 석준(57·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노스웨스턴대 경영학 석사)씨는 삼성SDI 경영기획실장(부사장)을 거쳐 보광창업투자 회장으로 정경선(정석원씨의 장녀)씨와 결혼했다. 4남 석규(55·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외교학 석사)씨는 외무부 기획조사과장을 거쳐 보광휘닉스커뮤니케이션스 회장으로 이계명(이장헌씨의 차녀)씨와 결혼했다. 차녀 라영(51·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 뉴욕대 예술경영학 석사)씨는 삼성문화재단 상무를 지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으로 노철수(노신영 전 총리 장남)씨와 결혼했다.
홍진기의 장손 정도(34·미 웨슬리언대 경제학과,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졸업)씨는 액센추어 컨설턴트, 중앙일보 전략기획실장을 거쳐 현재 중앙일보 지원총괄 겸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전무(COO)이며, 장손녀 정현(31·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씨는 이화여대 미술사학 석사이고, 중손 정인(26·프린스턴대 졸업)씨는 보스턴 컨설팅그룹에 근무하고 있다.
유민의 장외손 이재용(43·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게이오의숙대학원 경영관리 석사)씨는 현재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 사장(COO)이고, 외손녀 이부진(41·연세대 아동학과 졸업)씨는 호텔신라 사장, 삼성에버랜드 사장, 삼성물산 상사부문 고문이며, 이서현(38·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 졸업)씨는 제일모직 패션사업총괄부사장, 제일기획 기획담당부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