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의 흐름 1
-70년대후반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1)
1.70년대 후반 민중가요의 성립
[출처]꽃다지 기획실-꽃다지에서 민중가요의 흐름을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정리한 글입니다.
[출전]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창간호
(1) 민중가요문화성립의 배경: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
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으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
다. 따라서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
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 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
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
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
으며,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
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민중가요의 시작
민중가요는 처음에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이 시기부터 성립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이러한 민
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이었을 따름이었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
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포크풍 대중가요성향을 띈 취미써클
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
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
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3)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정의가>, <탄아 탄
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등에 75년 이후 <훌라
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
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
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세계 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혼
자 소리로는>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 열거한 대개의 노래들은 얽매
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
이 어그러지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
과 의지를 담고 있다.
(4)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김민기의 노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
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예를 들어, <친구>나 <아침이슬>등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결단 등으로 재해석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당시의 김민기 노래
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들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
이 될 근거가 되었다.
김민기는 70년대 후반에 군을 제대하고 야학을 체험하면서유신말기에
들어 작품의 경향이 변화하게 된다. 우선, 작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
고,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대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
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지
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났다. 이런 노래들로는
<식구생각>, <소금땀 흘리흘리>,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늙은
군인의 노래>등이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김민기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민
기의 민중지향성의 최고수준
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
빛>(78년)이다. 동일방직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이 작품은 민족극운
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민중가요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뮤지컬
같은 작품으로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있으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5)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하
게 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예술운동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장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
가무(樂歌舞)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특성 등으
로 인해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잖은 작품적 성과
를 남겼다. 이종구의 <마라데스>(<소리굿 아구> 삽입음악), <빈산>(김지하
시),김구한의 <서울길> (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 <개구리 소리>(이오덕 시) 등을 그 성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
되고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 등), 한
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그송들 (<행복의 나라로>,
<서울하늘>, <타박네>, <한중가>등)과, 그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
기>, 동요인<우리의 소원은 통일>, 60년대 대중가요인 <아다다>, 민요인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까지도 이 시기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 있었
다.민중가요의 흐름 2
-80년대초반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2)
2. 광주항쟁과 80년대 초반의 민중가요-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6월호에서
(1)'80년, 민주화의 봄'이라는 시기
70년대의 마지막이자 80년대의 시작이 바로 '80년의 봄'이었다.
'80년대의 봄' 민주화투쟁과정을 통하여, 70년대 후반의 민중가요가
대학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확산되면서 민중가요의 대중적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노래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성, 즉 민중가요가 ,
집단적 정서를 고양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확인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대학내의 노래써클들도
초기 포크송 경향의 취미써클로부터 민중가요 일반을 받아들
이고 보급하는 운동성을 띤 써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발전과 그 경향
① 처음부터 민중가요로 만들어진 노래들의 생산
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부터 이제 민중가요는 기존에 이미 만들어
져있는 노래가 사회적 의미로 취사선택 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 스스로의
손으로 창작되어진 노래들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② 단조 행진곡의 시대
가.행진곡의 서정성 획득<임을 위한 행진곡>, <전진하는 새벽>,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등 이 시기의 행진곡은 단순히 구호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는데, 이는 곧 이들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운동을
단순한 명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장조의 세계에서 단조의 세계로 70년대까지 <해방가>, <정의가>, <솟아라>등
행진곡의 대부분은 장조였고, 복음성가류 역시 장조의 노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80년 겨울, <전진가>(일명<가자 가자>, 박치음 작사.작곡>)가 나와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면서 80년대 초반 단조행진곡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단조행진곡은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절망의 비장함과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몇가지 대표적인 노래를 거론하자면, 앞에서 이야기 한
<임을 위한 행진곡>(81년), <전진하는 새벽>(82년),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이 외에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선봉에서>(84년경), <광주출전가>, <민족해방가 1>
(85년경)로 이어지면서단조행진곡은 우리 민중가요 행진곡의 전형을 이루어 후에
살펴보게 될 80년대 후반의 노동가요로까지 계승된다.
(3)단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의 비장함은 비단 행진곡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느리고 유장한 이른바
서정가요에서도 단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비로소 이 시기
부터 행진곡과 서정가요의 작품경향이 일정하게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불리워진 단조 서정가요로는 <친구 2>(81년경), <타는 목마름
으로>(82년경),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민중의 아버지>, <이
산하에>(문승현 작사.작곡), <노래 2>(김남주 시), <사월 그 가슴
으로>,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 등과
그 외에 드라마 주제가 <예성강> 등을 꼽을 수 있다.
(4)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작품경향과 그 의미
1) 비장함, 희생, 격렬함
80년대 초반, 5공화국 초기인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이미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를 경험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롭고 억
압적인 상황이었고, 자유와 진리와 양심과 민중의 모든 권리와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든 요구가 무참하게 압살당하는,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상황, 바로 그것이 8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어두운 죽음의 시대', '밤', '하나님의
혀가 짤린 세계', '사슬에 묶임' 등, 당시 노래들의 가사는 대개 비유적
표현으로 형상화 되어 있고, 또한, '죽음'과 '희생'의 이미지
가 뚜렷하다. '동지는 간데 없고', '친구는 멀리 가다', '쓰러져 간
사람들', '피', '쓰러진 전우', '뿌려진 피땀' 등의 표현은 억압적인 세계의
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상
황을 극복하고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혼신의 노력이 만들어낸
희생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노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광주사태, 광주항쟁에 대한 패배의식이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월의 노래>, <무등산가>,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 <부서지지 않으리>, <광주출전가> 등의 노래는 학살, 죽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부터 부활하는 광주, 투쟁하며 승리하는
광주의 이미지로 나아가고 있다.
2) 양식적 변화의 의미
양식적으로 볼 때, 단조 행진곡은 단조 군가(진중가요)의 영향을,
단조 서정가요는 단조 스탠다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포크에 비해 보다 넓은 계층, 보다 넓은 연령층에 호소력이
있는 스탠다드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민중가요가 포크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 보다는 더욱 넓은 연령
층에 호소력을 지닐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격렬한 절정부, 절절한 비극성이 있으며, 비극, 슬픔과 눈물은
있으되 뽕짝처럼과잉되지 않고 나름의 절제를 해내고 있는 이 시기
민중가요의 변화, 즉 포크(복음성가류 포함)에서 단조 행진곡
과 서정가요로의 변화는 작품에서 그리는 인간형이 혼자 담담하게
사색하는 지식인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격렬하게 고뇌하는 지식
인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있으며, 따라서 70년대 후반에 비해
김민기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84년 노래모임 새벽 창립 후 문승현의 <이 산하에>가 드디어
민중가요의 중심에 지입했고, 이는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성지의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등 단조 서정가요로 나타난다. 그 외
< 부서지지 않으리>(김준태 작시, 이미영 작곡), <코카콜라>
(곽재구 작시, 김제섭 작곡) 등이 있다.
(5) 민요운동의 시작과 고민
84년에 민요연구회가 창립되어 민요운동이 시작되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진 민요연구회는
당시 전통민요 보급으로부터 창작민요 창작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둥당에타령>, <액맥이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등 전통민요와 <진도아리앙>, <아리랑타령> 등 신민요,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
(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 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
(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 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민요운동의 시작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큰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민요의
적극적 계승은 쉽게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됨에 따라
아이러니칼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다.
한편,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 수용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6)그 밖의 노래들
김민기의 작품창작이 뜸해진 대신, 기층 민중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포크로
담아 내는 한돌의 작품들이 김민기의 뒤를 이어 생산되었다. 당시
한돌의 작품으로는 <갈 수 없는 고향>, <터>, <땅>, <가지꽃>, <소>,
<내일이면 간다네>, <못 생긴 얼굴> 등이 있다.
그 외의 노래로는 70년대 말부터 불리워진 김의철의 <군중의 함
성>, <이 땅의 축복위하여>, <불행아> 등과 안혜경의 70년대 <민
주>, <허깨비>, <황혼>, <까치길>과 80년대 <침묵의 봄>, <작업장
타령> 등, 그리고 박용범(박치음)의 <전진가> 외에 <산처일기>, <땅
의 사람들>이 있고, 기타<이 세상 사는 동안>, <작업장>, <서울
길>, 구전가요 <해야 솟아라>, <고아>, 대중가요 <에레나로 불리운 순이> 등이 있었다.
민중가요의 흐름 3
-80년대중반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3)
3.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의 변화와 기타의 노래들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7월호
(1) 84년과 85년이라는 시기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단조 행진곡을 중심으로 단조 스탠다드풍의
서정가요가 보족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 초 민중가요의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는
비단 민중가요뿐 아니라, 민족극, 민족문학 등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여러 장르에서
동시적으로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였던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84년은
이른바 유화국면, 자율화국면이 시작된 해이다. 80년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진영이 일정한 세력의 회복을 하게 된다. 각 이념써클의
조직적 회복으로 운동권의 수가 증가하며, 시위의 회수와 강도도 높아진다거나,
학도호국단에 학생운동의 침투한다거나 대학축제를 대동놀이등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5공화국 정군의 일보후퇴가 이루어졌다.
제적생의 복교와 총학생회의 부활, 대학 내의 대중집회 허용, 상주 기고낭원의 철수등이
이루어지고, 이른 바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들이 발족하게 된다.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족(의장 김근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시발로,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85년 3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의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발족되었다.
84년이야말로 80년대 초반의패배를 딛고 상승하는 분위기의 최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조행진곡, 마당극, 시 등 80년대 초반의 민족예술이 성과가 최절정에 도달한 것도
역시 84년 이었다.
80년대 초반 84년까지의 예술작품들은 격정적이며 주장이 단순하고 뚜렷하였다.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은 타도 대상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타도 의지가 강하고, 이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며, 할 필요도
없었고 이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위의 시절 이었다.
84년 무렵까지의 민중가요 역시 이런배경으로 인하여 감정의 선이 굵고 뚜렷하며
의미 단위가 짧고 단순했던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전진가>같은 경우
음악적으로 2마디가 기본이며, 8마디에서 모든 노래가 끝난다. 가사도 '가자', '나가자',
'단결하세'식으로 단순한 의미가 기본을 이루는 노래도 많았다.그러나, 85년 하반기부터
운동의 발전속도가 둔화하게 된다. 85년 하반기부터 정부측의 탄압이 강화되고, 다시
제적생, 구속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운동의 발전속도가 눈에 띠게 둔화하게
되었고, 84년까지 이루어낸 한 단계의 발전을 딛고 새로운 단계로의 85년 하반기부터는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운동에서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정서를 갖게 되었다. 가자, 나가자
식의 단순한 주장이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열정을 가라 앉히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싹 텄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복잡하고 다기한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둘러싸고
비합법문건들을 통한 격렬한 논리투쟁, 사상투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때였다.
진달래, 오월, 붉은 꽃잎 등의 시어들만으로도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감동스러웠던 시(時)의 시대가 가고 소설(小設), 특히 장편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선 굵은 집단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마당극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2)민중가요의 작품경향 변화
1. 행진곡 중심에서 서정가요 중심으로
대중의 정서가 변화함으로 인해, 단순하고 선 굵은 정서의 행진곡보
다는 보다 개인적이고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서정가요를 더
요구하게 되었다. 물론, 행진곡은 계속 만들어졌으나 그 전만큼 인기를
주도하지는 못하였다.< 이 산하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85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큰 인기를 얻어갔고, 이 뒤를 이어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작자 미상), <노래2>(김남주 시, 김경주
작곡) 등 서정가요 계열의 긴 노래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정가요의 인기는 대학 노래팀들이 84,8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
어 졌다는 데에 그 한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공연을 통한
서정가요의 집중적인 보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2. 행진곡의 길이가 길어짐
80년대 중반의 행진곡은 노랫말이 길어지고, 논리가 복잡해 지는
시기였다. 대표적으로는 <전진하는 오월>, <민족해방가 1>을 들 수 있다.
3. 장조 서정가요의 시작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작품의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장조 서정가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조 서정가요는 단
조행진곡과 단조 서정가요에서 드러나는 격정적 감정을 자제하고, 보다
절제되고이성적이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85년, 문승현 작사.작곡)이 86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불려짐으로써
장조 서정가요들은 차츰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날이 오면>은
80년대 장조 서정가요의 시발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긴 의미단위를 갖고 있으면서, 낭만적 격정을 내면에
감춘 절제된 감정을 운용하고 있고, 고전적인 차분한 화성과 선율을 전개하고
있어서 매우 부르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수 있다. 단조 서정가요가 60년대
단조 스탠다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면, 이들 장조 서정가요는 찬송가와
가곡, 포크의 영향을 강하고 받고 있다. 그리고, 올겐 반주나 혼성합창의
편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문승현은 그의 또 하나의 역작
<이 산하에>로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 노래로부터
민중가요의 경향을 미리 짚고 선도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산하에>의 뒤를
이어 추모곡이면서도 장조의 노래인 <벗이여 해방이 돈다>(86년, 이성지 작사.
작곡/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곡)가 발표되어 대중들에게 많이 불리워지면서
장조 서정가요의 경향을 확정짓게 되었다.
4. 개사곡의 급격한 퇴조
학생운동의 상승이 뚜렷했던 83년 부터 대학에서 개사곡의 붐이 일었다.
그 이전의 노동자들의 개사곡(노래가사 바꿔부르기)이 주로
노동자들이 부를 민중가요의 부재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서
생겨난 것이거나, 노동자 교육용 프로그램(즉,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주체적으로 사고하기 등을 위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학생들의
개사곡은 주로 반전의 재미를 중심으로 하는 풍자적인
개사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개사곡으로는 < * 大는 짭새땅>
(원곡:독도는 우리땅),<아, 대한민국>등이 있다.
즉,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는 노래를 가져와서 가사의 몇 부분을 바꿈으로써,
기존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래장난으로서 개사곡이
83년 부터 대학가에서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류의 개사곡들은
비록 민중가요의 주도적인 노래는 아닐지라도, 일반 민중가요서는채워주지
못하는 희극성, 풍자의 재미를 만끽하는 노래로서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3) 기층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과 노동자가 부르는 민중가요
1. 70년대 이래 연민주의적 시선
지식인이 만들어낸 노동자나 농민의 삶의 모습은 가난하고 슬프며 무력하다.
<서울로 가는 길 >, <공장의 불빛>(김민기), <황혼>, <까치길>(안혜경),
<하얀 비행기>(김제섭), <약수 뜨러 가는 길>(정종수), 한돌의
<소>, <갈수없는 고향>, <땅>등. 이 노래들은 지식인들에게 여태까지
한번도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기층 민중,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의 시작이였고, 이러한 연민은 못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의 발로였다.그들의 삶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들면서도 직설적인 설명을 피하려고 형상화한 흔적이 역력했고, 또 이미 그들의
삶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 노동자나 농민 등 기층민중의 삶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부를 것을 전제로 하여 창작을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들
노래는 대부분은 그 양식이 포크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들 노래는 포크적 질감과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2. 극복, 탈피의 노력
그러나, 80년대 초반 이후, 실제의 노동자들과 접하게 되면서 실제
의 노동자의 모습이 지식인들이 책에서 읽고 머리속에서 그려온 민중들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기층민중에
대한 연민주의적 시선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로
우선 그 양식에서 민요풍의 노래가 등장을 하는데 이는 민요풍의 노래가,
민요가 지니고 잇는 민중성과 역동성(직설성에서 오는)을 빌어온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전의 포크풍의 노래와는 다른 질감을 갖을 수 있었다.
<작업장 타령>(안혜경, 85년경). <서울길 2>(김지하 시, 오용록 작곡, 82년) 등)
그러나, 아직 이들 노래 역시 여전히 설명적 이었다.
85년 이후, 노동자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대개는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래들로는 <귀례 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박잠>,
<우리 이야기>(김보송 작사.작곡), <밥, 자유, 평등, 평화>(김보성 작사, 김용수 작곡),
<대결>(박노해 시, 김보성 작곡)과 노래로 하는 라이프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살아온이야기>(노동자 공동창작, 김용수 정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노래들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쟁적인 노래가 한 두곡씩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의 표현에
있어서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 질긴 생명력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깜박잠>처럼 어리고 곱고 연약하며 무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양식은
포크에 묶여 있고, 그 포크의 연약함과 비생활성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노래의 몇몇 곡들은 노동교회를 통해 노동자들에게로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노동자들 보다는 역시 대학으로 더 많이 퍼져 나갔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는 아직은 어려운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제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는 <사노라면>과 <불나비> 등과 같이
대중가요 중에서도 보다 더 대중적인(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한 노래들 이었다. 특히, <불나비>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풍의 속화된 록을 그 양식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좋아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들은 그 가사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성에 잘 맞았고,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이 잘 살아,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투쟁이 일상화될 수 없었던 80년대의 중반이므로
어차피 일상의 표현이 중요했음) 또한, 표현은 직설적이며 외향적이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직설적이며 외향적인 것은 이전의 포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나,
단조 스탠다드의 비일상적으로 비장한 서정가요 작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민중가요의 흐름 4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4)
-4.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노동가요-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8월호
(1)87년 항쟁과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
의 대중화를 실현한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도 가능해졌다.
(2)노동가요의 의의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노래사 이래 최초로, 이
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8.9
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들의 각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에 크게 힘 입은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의의는 노동자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3)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
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
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8.9
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
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태까지 학생.지식인 중심
의 민중가요가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소시민적 지식인적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
직 이 시기 노동자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 출정가>, <진군가>, <동지>등이었다.
그 외에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하기도 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막장을 간다>,
(<전선을 간다>개사곡) 등반면,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 <불나비>와 같은
일상적 분위기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잘 불려지지 않았다.
(4)<파업가>와 <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1) 88년 가을 김호철<파업가>, <노동조합가>의 발표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 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 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2) 행진곡 주도
왜 이 시기의 노래는 행진곡 뿐일까? 노동가요가 경직 되었기 때문일까?그 이유
는 민주노조가 없었던 당시의 상태에서 노동조건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
노조설립투쟁 등의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로 행진곡이 이 시기 노동가
요의 주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 <공장가는 길>(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서울에서
살꺼야> (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퍼져 나가지 못하고 사장 되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
지만, 이 시기에는 일상가요들도 이미 80년대 중반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연민주의적 시각을 잘 극복하고 있다.
3)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가지 사실그 사실 중의 첫번
째는 우선 새로운 노동가요의 생산에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집단들이 완전히 무
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
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 시키게 되었다. (마산 등에
서 몇 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
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 되었다)또 한가지 사실은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
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 인식,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의 바탕 위에서 89년 하반기
에 들어서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
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활동(창작, 공연과 노래교육)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5)89년 하반기 부터 90년까지의 변화
1)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의 시작89년 하반기를 지나 90년에 들어서면서,
물론 행진곡의 주도가 계속 되긴 하였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노동가요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행진곡 주도의
노동가요에서도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가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2) 일상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노동자 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
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세
상>(이상 조민하)등이 이시기에 창작되어 불리워진 일상가요들인데, 이러한 노
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
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변증법적으로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다.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
탠다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마
치, 여태까지 포크, 군가, 가곡, 느린 단조 스탠다드, 찬송가 등을 민중가요의
음악적 자산으로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 시기 일상가요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노동자 대중의
노래문화적 관행 때문이었다.
3) 서정가요
이 시기의 서정가요로는 <끝내 살리라>, <열사의 그 뜻대로>, <꽃다지>, <골리
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 등이 있는데,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4)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전노협 진군가>, <구속동
지구출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
석) 등, 그 시기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노동가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1) 91년 상반기의 당혹감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
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
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
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공권력 투입, 대
량 구속, 자본 철수, 공장 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노조
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
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작사.
작곡), 그리고 이전의 작품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노동자 2>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2)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이 주는 교훈에 입각하여,
91년 하반기부터 노동가요의 창작자들은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
생산하게 되는데,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나간 2,3년 동
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
습을 부각 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는 <희망의 노래>(김호
철 작사.작곡),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조호상 시, 김성민 작
곡) <다시한번 투사가 되어>(조민하 작사.작곡),<사람이 태어나>(유인혁 작사. 작곡)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노래패 꽃다지의 단결투쟁가 대편성(신양묘 편곡, 92년)과 같이 이전의 투
쟁가를 2,3년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도 있었으며, 그 이후 자
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전화카드 한 장>(이상 조민하), <편지 3>,(윤민석 작사, 김신애 작곡), <내일
엔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