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목사님이라고 불러보자니 어쩐지 두둘기며 건너야 할 돌다리가 저 멀리 보이는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김진영 친구야!. 하고 불러보니 마음이 편한 것 깉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진영 목사는 저 멀리 떨어져 사는 성인(聖人)으로만 생각해 왔었는데
지지난 달인가 하여튼 우연한 기회에 완산국민학교 38회 동창인 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
갑자기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내가 전주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기독교계에서의
원로목사님으로 이목의 존경을 받는 결코 쉽사리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 만은 사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인 1953년에 창간한 복된말씀 발행인으로 그 이후 유신독재와 홀로 고독하게
싸워온 김진영 목사를 모른다고 하면 아니 몰랐다고 하면 그는 진정 스스로 지성인이기를 포기한
경우라고 아니할 정도로 유신독재와 참으로 외롭게 투쟁해 온 우리의 친구 김진영 목사이다.
내경우는 이와 아주 상관관계가 되는 것으로 생각는데.... 사실은 나는 전주에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정부 보조금을 받아 발행하는 향토종합지 노령 편집인으로 김진영 친구가 외롭게 투쟁해왔던 당시의
정권의 실세인 우리 친구 최규장과 규장이와 절친한 허모장관의 도움으로 당시에는 잡지 등록이
하늘의 별따기 였던 계간지 등록증을 단 하루만에 받았던일이 없잖아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신문 잡지를 마구 폐간 시키는 정책이라서 등록증을 상당한 고가로 넘기라는 유혹이
없잖아 있었지만 무가지로 발행하면서 말은 듣기 좋게 원고료라고는 쥐꼬리보다 더 짧은 쬐개 주는
그런 잡지를 만들고 있었으니 김진영 목사와는 평행선일 수 밖에 없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 친구들 중에 전충환이며 정교관 이충우 또 누구더라 하여튼 많은 친구들이 귀한 원고들을
보내주어 지면을 꽉 채우기도 했다.
하여튼 이런 생각이 떠올라 이러한 옛날의 추억을 굳이 꺼집어 내어 회상하도록 만들어 준 계기는 바로
김진영 친구가 우리 홈페이지에 송영상의 주소가 알고 싶다는 공개장을 띄워 나와 친구인 줄 알았고
그러다 보자니 완산국민학교 동창인 것도 확인되 6.25한국전쟁 당시 학교 강당이 없어 완산칠봉 기슭에서
졸업장을 받았으며 졸업 당시에 당돌하게도 프린트물이나마 졸업기념 교지 편집장이었던 옛 추억을 회상시켜준
김진영 친구를 이렇게 알게 되었으나 막상 얼굴은 보지 못한 보고 또보고 싶은 친구를 꼭꼭 만나보고 싶어진다.
자 더 잔소리해서 뭣하랴. 봐서 아니 날 잡아 전주에 내려가 얼사안고 춤이나 춰 볼까 하는데 다 늙은 팔순 나이
노인네라서... 더군다나 나는 키가 작은데 김진영 친구는 키가 커서 전봇대를 안고 말지 어찌해야 할까 싶어
망설여 진다. 하여튼 간에 김진영 친구를 만나고픈 일에는 乞 期待.
산지기 산죽 박종락 친구가 김진영친구의 25번째로 다움 대열에 참여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ㅋㅋㅋㅋㅋㅋ 참 웃긴다. 웃겨. 이게 인생살이인가. 나이들면 추억을 되씹어먹고 산다는데 그런 것인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 ㅋㅋㅋㅋㅋㅋㅋ
첫댓글 완산국민학교 38회 동창인 줄을 몰랐다고?
완산국교가 엄청 컸던 개비네
전주상생학교나 풍남학교 보다 컷능 개비어 이?
김진영 목사와 해곷 송영상 성과의 키는
도토리와 상수리 즉 도토리 키 재기지 쯤
둘이서 춤추면 환상의 콤비가 될 것 같은데
날자 잡아 한 번 돌아보셔.....ㅎㅎㅎㅎㅎ
13일 오늘에서야 이 글을 보았네. 14일 중앙회관에서 윤석정군이 점심을 낸다네.
23금요일은 안과에 가야 하고, 17토요일 11시에 전주 34크리스찬모임이 있는데
옛날 예수병원 옆 선교사 집 전북기독교원로원에서,
그날 함께 점심을 해도 좋고, 깁병기 송봉상 박여양이 나오네. 강기훈 장로는
요양원에 있고, 박희열 장로는 사정이 있어 못 나오고, 김순선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오봉옥 장로는 함열에 살고, 다들 반갑게 월1회 만난다네.
목사는 동무 아닌가? 한 번은 완산 친구 정두영이가 "야 이 새끼야,왜 그냥가냐"
해서 얼마나 반가웠는데.. 그놈 소식도 없네. 자전거 타고 째내던 최병춘 장로도.
얼른 한 번 만나보세. 010-6633-9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