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된 음악을 얻으려면, 악기가 바른 성음(聲音)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악기가 바른 성음을 낼 수 있도록 조율되려면, 율관이 필수적이다. 세종대왕이 아악정비에 뜻을 두고 악기제작을 명하자, 박연(朴堧, 1378~1458)은 먼저 해주의 거서(黍:기장)로 고설(古說)에 의거하여 황종율관을 제작했으나, 그 소리가 중국의 종(鐘)ㆍ경(磬)보다 약간 높으므로, 1427년(세종 9) 4월경 기장 모양을 따라 밀랍을 녹여 조금 큰 낟알을 만들어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1낟알을 1분으로 삼고 10낟알을 1촌으로 하여, 9촌을 황종 길이로 삼고, 원경(圓經)은 3분(分) 4리(釐) 6호(毫)의 법을 취하여, 해죽(海竹)을 잘라 만들고, 밀랍으로 만든 기장 낟알 1천 2백 개를 관(管) 속에 넣으니 진실로 남고 모자람이 없었으며, 중국의 종ㆍ경 및 당피리의 황종 소리와 서로 합치되었으므로, 이 관을 삼분손익하여 12율관을 만들었다. 1427년(세종 9) 5월에 박연이 바친 편경은 바로 이 율관으로 조율하여 만든 것이다. 세종은 중국에서 보내준 편경과 새로 만든 편경을 율관에 맞추어 보게 하고는, “중국의 편경이 과연 잘 조화되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이 맞는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은 것이 이미 하나의 행운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뜻밖에 율관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해보기까지 하니, 매우 기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연의 산물인 기장(黍)을 쓰지 않고, 밀랍으로 기장 형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황종율관의 양(量)을 쟀다는 점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므로, 1430년(세종 12)에 박연은 또다시 자연산의 기장을 써서 율관을 제작했다. 기장을 재배하여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기장 1200낟알이 들어가는 관을 만들어, 그 중 중국의 황종과 합치되는 것을 택하는 방법을 썼다. 당시 박연은 ‘역대(歷代)로 율관을 만들 때 기장으로 기준을 삼았으므로 일정하지 않아, 성음의 높낮이도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인데, 오늘날 중국의 율이 오히려 참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기장이 도리어 참된 율을 얻을지 어찌 알겠사옵니까?’라며, 중국의 황종율에 맞추지 않고 독자적으로 만들 여지도 있음을 언급했지만, 바로 뒤이어 ‘율관과 도량형을 만드는 일은 천자(天子)의 일이고 제후국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중국의 황종에 합치하도록 율관을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라고 아뢴 것은 황종관에서 도량형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 문화권에서 도량형이 서로 다르면 혼란스럽게 되므로, 황종관을 독자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황종율관으로부터 도량형을 만든다는 것은 황종관을 만사(萬事)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 황종율은 단순한 음고(音高)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한편 대로 만든 율관은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여 볕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아지므로, 1430년(세종 12) 경에 기후의 영향을 덜 타는 구리로 율관을 만들어 음을 맞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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