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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 손창섭, 1958.
만기치과의원(萬基齒科醫院)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悲憤慷慨)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온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익준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한 것이었다. 그런 날은 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저고리를 벗어붙이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기 때문이다.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닥에 물을 뿌리고 방구석이나 테이블 밑까지 말끔히 쓸어 내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을 서는 그의 성품은 이런 데도 잘 나타났다. 청소가 끝나면 익준은 작달막한 키에 가로퍼진 그 등실한 몸집을 대합실 의자에 내어 던지듯 털썩 걸터앉아서 신문을 본다. 그러노라면 원장과 천봉우가 대개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도 간호원을 도와 실내 청소를 마치고 난 익준은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펴들었다. 아마도 세상에 그처럼 충실한 신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 구독하고 있는 두 종류의 신문을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시간을 소비해 가며 첫줄 첫 자에서 끝줄 끝 자까지 기사고 광고고 할 것 없이 하나도 빼지 않고 죄다 읽어버리는 것이다. 익준은 또한 그저 신문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거기 보도된 기사 내용에 대해서 자기류의 엄격한 비판을 가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익준은 신문을 보다 말고 앞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격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천하에 이런 죽일 놈들이 있어!』
참지 못해 신문을 든 채 벌떡 일어섰다. 익준은 진찰실로 달려들어가서 그 신문지를 간호원의 턱 밑에 들이대며,
『미스홍 이걸 좀 봐요. 아니 이런 주리를 틀 놈들이 있어 글쎄!』
눈을 부라리고 치를 부르르 떨었다. 신문 사회면에는 어느 제약회사에서 외국제 포장갑(包裝匣)을 대량으로 밀수입해다가 인체에 유해한 위조품을 넣어 가지고 고급 외국약으로 기만 매각하여 수천만환에 달하는 부당 이득을 취하였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인숙이가 그 기사를 읽는 동안 익준은 분을 누르지 못해 진찰실과 대합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혼자 투덜거렸다. 이윽고 인숙에게서 신문지를 도로 받아 든 익준은 그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옆에 있는 의자를 한 번 딱 치고 나서,
『그래 미스 홍은 어떻게 생각해. 이놈들을 어떻게 처치했으면 속이 시원하겠느냐 말요?』
마치 따지고 들 듯 했다.
『그야 뻔하죠 뭐. 으레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익준은 한층 더 분개해서 흡사 인숙이가 범인이기나 한 듯이 핏대를 세우고 대드는 것이었다.
『뭐라구?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게라? 아니 그래 이따위 악질 도배들을 그 뜻뜻미지근한 의법처단으루 만족할 수 있단 말요? 미스 홍은 그 정도루 만족할 수 있느냔 말요. 무슨 소리요, 어림없소. 이런 놈들은 그저 대번에 모가질 비틀어 버리구 말아야 돼, 아니 즉각 총살이다. 그저 당장에 빵빵 하구 쏴 죽여버리구 말아야돼. 그리구두 모가지를 베어서 옛날처럼 네 거리에 효수(梟首)를 해야 돼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단 말요!』
『어마 선생님두 온. 끔찍스레 그렇게까지 할게 뭐에요!』
『끔찍하다? 아 그럼 그놈들을 몇 만환의 벌금이다, 몇 년 징역이다 하구 감방 속에 피신시켜 놓구 잘 처먹구 낮잠이나 자게 하다가 세상에 도로 내놔야 옳단 말요?』
익준은 잠시 인숙을 노려 보듯 하다가,
『이거 봐요, 미스 홍,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못 사는지 알우? 우리나라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피폐해 가는지 알우? 모두가 이따위 악당들 때문이요. 이거봐요. 그런 놈들은 말야 이완용이나 마찬가지 역적이요! 나라야 망하든 말든 동포들이야 가짜 약을 사쓰구 죽든 말든 내 배때기만 불리면 그만이라구 생각하는 그딴 놈들은 살인강도 이상의 악질범이요. 그런 놈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으니까 유사한 사건이 꼬리를 물구 발생한단 말요. 난 그놈들의 뼈를 갈아 마셔두 시원치 않겠소......』
익준은 아직도 분을 끄지 못해 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는 대합실 의자에 돌아가 앉아서 다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갑자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푸우 내쉬고는,
『천하에 죽일 놈들 같으니......』
내뱉듯 하고 비참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가 나머지 기사를 죄다 주워읽고 차츰 흥분도 가라앉을 때쯤 해서야 이 병원의 주인이 나타났다. 서만기 원장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가방을 들고 문안에 들어선 것이다.
『어서 나오게!』
익준은 늘 하는 식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서 만기가 흰 가운을 걸치고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여보게 만기, 세상에 그래 이런 날도둑놈들이 있나!』
그렇게 개탄하고 신문을 펴들고 만기 곁으로 가 앉는 익준의 얼굴은 흥분으로 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만기는 여전히 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지 않아두 집에서 신문을 보구 자네가 또 몹시 격분했으리라그 짐작했네.』
그러면서 담배 케이스를 열고 먼저 익준에게 권하였다. 권하는대로 익준은 손을 내밀어서 한 대 뽑아들었다.
『이게 나 혼자만 격분할 일인가? 그럼 자네나 딴 사람들은 심상하다 그 말인가?』
『아니지. 남달리 정의감과 의분이 강한 자네니까 남보다 몇 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말일세. 그렇지만 혼자 흥분해서 펄펄 뛰면 뭘하나!』
만기도 탄식하듯 하였다. 둘이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정의감이 강약이 문젠가, 이 사람아. 그래 이런 극악 무도한 놈들을 가만하구 있을 수 있겠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데 잠자쿠 있을 수 있느냐 말야!』
익준은 만기가 함께 흥분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봉우가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문안에 들어섰다. 언제나 다름없이 수면부족이 느껴지는 떠름한 얼굴이다. 그는 먼저 인숙이 쪽을 바라보고 다음에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면서 멋적게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거의 자기 자리로 정해진 대합실 소파의 맨구석 자리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그러자 자기의 흥분을 같이 나눠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듯이 익준은 탁자 위에 놓았던 신문을 집어서 봉우 눈앞에 바로 가져다 댔다.
『봉우 이거 봐, 글쎄 이런 능지처참할 놈들이 있느냐 말야.』
익준은 핏대를 세우며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봉우는 선잠을 깬 사람처럼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익준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흥미 없이 신문을 받아들었다.
『뭐 말이야?』
『뭐 말이야가 뭐야, 이런 빙충이 같은 녀석. 아 그래 자네 눈깔엔 이게 안 뵌단 말야?』
화가 동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익준은 손가락 끝으로 톱기사의 주먹 같은 활자를 찔렀다. 봉우는 강요당하듯이 제목을 입속 말로 읽었다. 내용은 마지못해 두어 줄 읽다가 말았다. 이어 딴 제목들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봉우는 도로 신문을 접어서 탁자 위에 얹었다. 그러더니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쳐다보고 웃으려다가 말았다. 익준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왜 아무 말이 없는거야?』
봉우는 동정을 구하듯 하는 눈동자로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았다.
『임마, 그래 넌 아무렇지두 않단 말야? 눈뜬 채 코를 베어 먹히구두 심상하단 말야?』
『누가 코를 베어 먹혔대? 난 잘 안 봤어!』
봉우는 얼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익준은 그 신문지를 홱 나꿔채서는 탁자 위에다 힘껏 동댕이를 치고 나서,
『이런 쓸개 빠진 녀석..... 예잇 난 다신 자네들과 얘기 않네!』
우뚤해 가지고 홱 돌아서더니 댓바람에 문을 차고 나가버리었다.
익준이 다시는 안 올 듯이 밖으로 사라지자 한동안 어리둥절 하고 있던 봉우는 언제나 그랬다. 거슴츠레한 낯으로 대합실에 나타나면 익준이가 한 자 빼지 않고 샅샅이 읽고 놓아둔 신문을 펴들고 건성건성 제목만 되는대로 주워 읽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처럼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자주 간호원에게로 간다. 그때만은 그의 눈도 노상 황홀하게 빛난다. 그러다가 간호원과 시선이 마주치면 봉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빼빼 말라붙은 몸집에 키만 멀쑥하게 큰 그는 언제나 말이 적고 그림자처럼 조용하다. 어딘가 방금 자다 깬 사람모양 정신이 들어 보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다. 하기는 그는 대합실 구석 자리에 앉은 채 곧잘 낮잠을 즐긴다. 봉우의 낮잠 자는 모양이란 아주 신기하다. 소파에 앉은 대로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얹고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고 자는 것이다. 그는 밤에 집에서 잘 때에도 자세를 헝크르지 않는다고 한다. 천장을 향하고 반듯이 누우면 다음날 아침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대로 잔다는 것이다. 그러한 봉우는 언제나 수면 부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6·25 사변을 치르고 나서부터 현저해졌다는 것이다. 전차나 버스를 타도 자리를 잡고 앉기만 하면 그는 으레 잠이 들어버린다. 그렇지만 자다가도 그는 자기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다. 자면서도 그는 차장의 고함소리를 꿈속에서처럼 어렴풋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밤에 집에서 잘 때도 그렇다. 자는 동안에도 그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 재깍재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 천장이나 부엌에 쥐 다니는 소리, 아내나 아이들의 잠꼬대며 바깥의 바람소리까지도 들으면서 잔다. 말하자면 봉우는 오관(五官) 중 다른 감각 기관은 다 자면서도 청각만은 늘 깨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자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된 연유를 그는 6·25 사변으로 돌리는 것이다. 피난 나갈 기회를 놓치고 적치(赤治) 삼 개월을 꼬박 서울에 숨어 지낸 봉우는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잠시도 마음놓고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밤이나 낮이나 이십사시간 조금도 긴장을 완전히 풀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처럼 불안한 긴장 상태가 어느덧 고질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꼬집어 말하면 그는 자면서도 깨어 있고 깨어 있으면서도 자고있는 상태인 것이다. 까닭에 그는 밤낮 없이 자면서도 항시 수면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오는 증상이기보다는 더 많이 정신적인 데서 결과하는 심리적 현상인 것이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언니, 나 형부를 사랑해두 좋아?』
다들 웃었다. 물론 농담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와 그의 아내만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은주의 말이 결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작년부터는 가족들 사이에 자주 은주의 결혼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장모가 들를 적마다 사위와 딸 앞에서 은주의 나이 걱정을 해서다. 하기는 아버지 없는 은주에게 대해서 언니나 형부 노릇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까지도 대신해야 할 그들의 처지로서는 은주의 결혼 문제에 무심할 수가 없었다. 만기 부처는 기회 있는 대로 은주의 배필을 물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적당한 상대가 나서면 사진을 구해 두었다가 은주가 들를 때 내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은주는 그때마다 사진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안합니다. 누가 시집 간댔어요!』
그러고는 장난꾸러기 같이 어깨를 으쓱하여 쿡쿡 웃었다.
『애두, 그럼 평생 처녀루 늙을래?』
언니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형부만한 신랑감을 골라주신다면......』
또 아까와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나보다 몇 갑절 나은 청년야. 우선 사진이나 구경해.』
만기가 남자 사진을 눈 앞에 들이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구 시집을 가란 말씀예요!』
정색하고 은주는 사진을 받아 던지었다.
『그렇지만 딱허지 않니? 형부를 이제 와서 둘이 섬길 수두 없구.... 그럼 차라리 내가 형부를 양보할까?』
만기 처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고 미묘하게 웃었다.
『언니, 건 안 될 말씀. 난 언니두 사랑하는걸요!』
그러고는 살며시 다시 앉으며 서양 사람이 그러듯 언니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보, 세상에 나 같은 행운아가 어딨겠소. 선녀처럼 예쁘구 어진 당신과 비너스 같이 황홀한 우리 은주 아가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됐으니 말이요!』
은주의 태도를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구슬려 버리려는 만기의 의도를 은주는 묵살해 버리듯,
『언니, 나 꼭 한 번만 형부하구 키스해두 괜찮우?』
어리광 피우듯 해서,
『여보, 이 애 소원을 풀어 주시구려!』
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만기를 쳐다보았더니 은주는,
『가짓말, 언니 가짓말』
언니를 나무라듯 몸부림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언니 무릎 위에 푹 엎드려버리고 말았다. 얼마 뒤에 고개를 드는 은주의 두 눈이 의외에도 젖어 있었다. 신뢰에 찬 미소로 시선을 교환하는 만기 부처의 얼굴에는 똑같이 복잡하고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행한 것은 만기와 단둘이 만났을 때는 은주는 추호도 연정(戀情)을 표시하는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처제의 위치에서 형부를 대하는 담담한 태도였다. 은주가 만기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언동으로 표시하는 것은 반드시 언니가 동석한 자리에서만이었다. 그만큼 은주는 깨끗한 아이였다. 만기 처 역시 그랬다. 형부에 대한 은주의 사랑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남편과 동생의 사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만치 남편과 동생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알뜰한 아내와 은주 사이에 끼어서 만기는 참말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하기를 주위에서들 아무리 달래고 권해도 은주는 영 듣지 않았다. 한평생 만기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깨끗이 혼자 늙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단순한 흥분에서가 아니라 필사적인 각오로 은주 스스로가 택하는 자기 인생의 엄숙한 선언이었다. 그러니 만치 주위 사람들도 다 함께 괴로웠고 당자인 만기는 더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봉우 처마저 노골적인 추태로써 만기를 위협해 왔고 봉우와 미스 홍의 어쩔 수 없는 문제, 외면해버릴 수 없는 익준의 암담한 가정 내막, 나날이 더 심해가는 경제적인 고통, 이런 복잡한 관계들이 뒤얽히어 만기의 마음 속을 더욱 어둡고 무겁게만 해 주었다. 그러나 만기는 역시 외면의 잔잔함만을 잃지 않았다. 한결같이 부드럽고 품 있는 미소로써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삼십이 좀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봉우 처의 편지를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다. 만기는 남자에게 의자를 권하고 편지를 펴 보았다. 비교적 달필로 남자 글씨처럼 시원스레 내리갈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일전에는 실례했나 봐요. 저를 천한 계집이라고 아마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지극히 인격이 고상하신 도학자님의 옹졸한 취미를 저는 구태여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한편 저 같은 계집에게도 선생님 같이 점잖은 분을 비웃을 권리나 자격이 어쩌문 아주 없지도 않을 거예요. 삶을 대담하게 엔조이할 줄 아는 현대인 가운데 먼지 낀 샘풀처럼 거의 폐물에 가까운 도금(鍍金)한 인간이 자기 만족에 도취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꼴을 아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표본이야요. 선생님에게 또 비웃음 받을 이따위 수작은 작작하고 그러면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 날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병원 시설을 작자가 나섰을 때 팔아치울 생각입니다. 이 편지를 갖고 간 분에게 기구 일습을 잘 구경 시켜드리기 바람니다. 매매 계약은 대개 오늘 안으로 성립될 것이 오며 계약 성립 즉시로 통지해 드리겠사오니 그때는 일주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 주시기 바람니다.
저는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새로이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드리고 싶었고 현재도 그러한 제 심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제 호의를 침 뱉아버리는 선생님의 인격 앞에 저는 헐 일 없이 물러서는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러한 본문 끝에「추백(追白)」이라고 하고「만일 제게 용건이 계시면 다음 번호로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 주시기 바람니다.」에 이어서 전화번호가 잔글씨로 적히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만기는 언제나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로 알맹이를 도로 접어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었다. 인숙이만이 재빨리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만기는 편지를 서랍 속에 간직하고 나서 그 편지를 갖고 온 남자에게 친절한 태도로 시설을 보여 주였다. 남자는 의료 기구상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기계에 대한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돌아간 뒤 만기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몹시 피로해 보였다. 얼굴색도 알아보게 창백해져 있었다. 인숙이가 조심히 다가와서,
『이제 그 분 뭐하러 왔어요?』
걱정스레 물었다.
『시설을 보러 왔소.』
『건 왜요?』
『어찌 되면 이 병원의 시설이 그 사람에게 팔릴지두 모르겠소.』
그 말에 놀란 것은 간호원 뿐이 아니었다. 대합실 소파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던 봉우가 별안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만기를 건너다보았다.
『정말인가?』
『그런가보이!』
『그럼 이 병원은 아주 문을 닫아버린단 말인가?』
『그렇게 되기 쉬울 거야!』
봉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만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대체 자네나 미스 홍은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 아직 막연하지!』
봉우는 거의 절망적인 눈으로 만기와 인숙을 번갈아 보았다.
『천 선생님, 이 병원이 팔지 말구 이대루 두라구 사모님께 잘 좀 부탁하세요. 네!』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했다.
『내가? 내가 부탁한다구 들어 줄까요?』
『선생님 사모님이신데 아무렴 선생님이 간곡히 부탁하면 안 들으실라구요.』
『그럼 뭐라구 하문 될까요?』
『어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이 잘 생각해서 말씀하셔야죠.』
봉우는 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에게는 아내를 움직이는 일은 하늘을 움직이는 일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는 유일한 휴식처요 보금자리인 이 대합실 소파를 뺏겨버리고 말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마음의 빛이요 보람인 미스 홍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봉우는 그만 처참할 정도로 푹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마침 환자가 있어서 치료해 보내고 만기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환자 카드를 정리하려는데 허줄한 소년이 대합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전 번에 왔던 익준의 아들이었다.
『넌 웬일이냐?』
만기는 직감적으로 어떤 불길한 예감에 쏠리며 물었다. 소년은 먼젓번처럼 가만히 문을 밀고 대합실 안에 들어섰다. 소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소년은 병원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만기를 보았다.
『울아버지 안 오셨어요?』
『안 오셨다. 이 삼일 전부터 통 보이질 않는구나.』
소년은 한 발에만 고무신을 신고 왜 그런지 한짝은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 집에두 안 돌아오셔요.』
『그래? 언제부터?』
만기는 이상해서 다구쳐 물었다.
『어저께두 그 전 날두 안 돌아오셨어요.』
『웬일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은 무슨 말을 할듯 할듯 하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만기는 얼른 소년을 도로 붙들어 세운 다음,
『어머닌 좀 어떠시냐?』
묻고서 그 대답이 무서웠다.
『죽었어요!』
소년은 수치스러운 일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소리내어 대답했다. 예측했던 일이지만 만기는 가슴이 섬찍했다. 언제 돌아가셨느냐니까,
『좀 아까요!』
소년은 그리고 외면을 했다. 더 자세히 얘기를 듣고 보니 소년의 모친은 약 두시간 전에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집에는 두 동생과 주인집 할머니만이 시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도 아침에 생선 장사를 나간 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만기는 소년의 한쪽 손을 꼭 쥐어주며,
『대체 아버지는 어딜 가셨을까?』
다정하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년은 슬그머니 손을 빼고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가만 있거라, 나랑 같이 가자.』
만기는 흰 가운을 벗고 양복저고리를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오늘 들어온 돈을 죄다 긁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여보게 봉우, 자네두 같이 가지.』
『뭐? 나두?』
봉우는 자다 깬 사람처럼 얼떨결에 놀라 묻고 좀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간호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만기가 앞장서 막 병원을 나서려는 참인데 이십 살쯤 되었을 어떤 청년이 들어섰다. 청년은 원장 선생님을 찾더니 만기에게 한 장의 쪽지를 전하였다. 봉우 처에게서 온 통지였다.
「병원 시설은 매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이내에 병원을 비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언제든 용건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연락을 해달라고 하고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만기는 말없이 쪽지를 편대로 간호원에게 넘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익준의 아들은 밖에 나와서도 고무신을 손에 든 채 그쪽은 맨발로 걷고 있었다. 남 보기에도 덜 좋으니 그러지 말고 한쪽 고무신마저 신으라고 권해도.
『발에 땀이 나서 그래요.』
소년은 점직한 듯이 그러고 한쪽 손에 든 고무신을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러나 만기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소년이 들고 있는 고무신을 걸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달아서 뒷꿈치가 터지고 코뚜리가 쭉 찢어져서 도무지 발에 걸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만기는 가슴이 찌르르 했다. 전차를 타기 전에 그는 소년에게 고무신부터 한 켤레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고무신 가게가 눈에 뜨이지 않았고 때마침 전차가 눈앞에 와 멎어서 그대로 아내 차에 오르고 말았다.
소년의 가족이 들어 있는 집은 지붕을 기름종이로 덮은 토담집이었다. 소년의 어린 두 동생이 거지 아이꼴을 하고 문턱에 기운 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역한 냄새가 울컥 코를 찌르는 침침한 방안에는 옆방에 산다는 주인 노파가 역시 이웃 아낙네와 마주 앉아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방바닥에 착 달라붙은 듯한 시체 위에는 낡은 담요 조각이 덮여 있었다. 우선 집 주인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만기는 할 일을 생각했다. 주인이 없더라도 사망진단서와 사망신고 등의 절차는 밟아 두어야 했다. 요행 반장의 협력을 얻어서 그런 일들을 무난히 끝낼 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린 내 나는 광우리를 이고 돌아왔다. 딸이 죽은 것을 알고도 그리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파의 전신에는 보기에도 딱하리만큼 심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노파의 말에 의하면 익준은 이삼 일 전에 인천 방면의 어느 공사판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주사 몇 대라도 맞쳐주면 한이나 풀릴 것 같아서 벌이를 떠났다는 것이다. 부득이 만기가 주동이 되어서 장례식 일을 맡아보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비용이 문제였다. 만기는 자기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당장 사소한 비용을 썼다. 봉우는 그저 시무룩하니 앉아서 만기 눈치만 살피다가 어디를 나가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뿐이었다. 상가에서 밤을 새우고 나서 만기는 이튼날 아침 잠깐 병원에 들러 보았다. 물론 봉우도 함께 와서 대합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만기도 나른히 지쳐 있었다. 인숙이가 걱정스레 만기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 말았다. 만기는 한동안 묵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합실 소파로 가서 봉우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여보게, 같이 가서 자네 부인을 좀 만나 보고 올까!』
『아니, 건 또 무슨 소리야.』
『당장 장례비용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두 같이 가서 조언을 좀 해 줘야겠단 말이네.』
만기는 봉우 처에게서 장례비용을 좀 뜯어 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간소히 치른다 해도 관은 사야 할게고 세 어린것에게 상복을 입히고 영구차도 불러야 하겠는데 그 비용을 변통할 길이 달리는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찾아가려고 만기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봉우를 끌고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 잠깐만......』
무슨 각오를 지닌 듯한 표정으로 인숙이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우?』
인숙은 만기를 진찰실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 병원 결정적으루 팔리게 되었나요?』
캐어묻듯 했다.
『그런 모양이요!』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었다. 잠시 말을 못하고 서있었다. 밀린 급료 문제나 실직될 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줄로 만기는 알았다.
『미스 홍이 삼 년 이상이나 마치 자기 일처럼 성의껏 거들어준 데 대해서는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겠소. 그런만큼 헤어지게 될 때는 충분히 물질적 사례를 취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미스 홍도 아다시피 현재의 내 경제적 사정으로는 그건 어렵겠으나 밀린 급료만은 어떻게 해서든 책임지고 청산하도록 할 테니 그리 알아요, 그리구 미스 홍의 취직 문젠데 나도 딴 병원을 극력 알아 볼테니 미스 홍도 오늘부터라두 아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 두어요.』
만기는 한편으로는 사과하듯 한편으로는 위로하듯 했다. 그러자 불시에 고개를 바짝 들고 정면으로 쳐다보는 인숙의 시선에 부딪친 만기는 가슴에 뭉클하는 충동을 받았다. 원망스러이 쳐다보는 인숙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고여있었기 때문이다.
『절 그렇게만 보셨어요!』
인숙은 외면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뭉개고 나서,
『건 가혹한 오해세요!』
입술을 깨물었다.
『미스 홍, 내가 피로해 있었기 때문에 실언을 했나보오. 너무 노골적인 말이어서 노엽거든 용서해요.』
『선생님, 저보다두 실상 선생님이 더 큰 일 아니예요. 그 숱한 식구의 생활비며 학비며.... 개업 중에두 늘 곤란을 받으셨는데 병원을 내 놓게 되면 당장 어떡허세요!』
『고맙소. 그러나 스스로 애쓰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지 않소. 우선 채 선생네 장례식이나 끝내고 나서 나도 백방으로 살길을 찾아볼 테니 과히 걱정 말아요!』
인숙은 이상히 빛나는 눈으로 만기를 쳐다보다가,
『선생님, 새로 병원을 차릴려면 최소한도 얼마나 자금이 필요해요?』
주저하며 물었다.
『아마, 팔십 만환은 가져야 불충분한대로 개업할 수 있을게요.』
인숙은 잠깐 동안 입술을 깨물고 섰다가 불시에 고개를 들고 호소하듯 한 눈으로 만기를 쳐다보며,
『선생님, 제게 오십 만환이 있어요. 그걸 선생님께 드리겠어요. 그리구 오빠에게 부탁해서 삼십 만환은 어디서 싼 이자루 빌려오도록 하겠어요. 선생님 병원을 내세요!』
말을 마치자 인숙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인숙은 그것을 씻을 생각도 않고 젖은 눈으로 열심히 만기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만기가 움직이기만 하면 인숙은 쓰러지듯 그대로 만기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어달릴 것 같았다.
『미스 홍이 어떻게 그런 대금을 자유로 할 수 있겠소!』
만기는 그럴수록 냉정한 언동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동안 제가 받은 급료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구 제 몫으루 고스란히 모아 왔어요. 어른들은 제 결혼비용으로 생각하고 계셨지만 저는 선생님께 병원을 채려드릴 일념으로 모아온 돈이에요!』
동일한 자세로 만기의 얼굴을 지켜보고 섰던 인숙의 눈에서 새로운 눈물이 계속해 흘렀다. 그 눈물 저쪽에 타오르고 있는 인숙의 눈에는 만기는 아내의 애정을 보았고 은주의 열정을 느끼었다. 영롱하게 젖은 그 눈 속에는 모든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보여주는 마음의 비밀이 빛나고 말았다. 만기도 가슴속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참고 눌렀다.
『미스 홍, 입이 있어도 내게는 당장 대답할 말이 없소. 인제 그만 눈물을 닦아요. 어제오늘은 내 머리도 몹시 복잡합니다. 훗날 머리가 좀 식은 다음에 천천해 얘기합시다.』
겨우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만기는 문간에서 기다리고 섰는 봉우를 따라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봉우 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딴 사람이 전화를 받았지만 이내 만날 수 있게 연락을 취해 주었다. 지정한 다방으로 가 보니 봉우 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장 서 들어서는 만기를 보고 반색을 하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자기 남편을 보더니 여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마주 앉기가 바쁘게 만기는 용건부터 얘기했다. 익준이와 봉우와 자기는 중학시절 이래 막연한 친구임을 말하고 나서 익준이네 비참한 가정 형편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장례비용을 희사하거나 빌려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정말이야. 이 친구 말대루야. 나두 보구 가만 있을 수가 없어. 몇 달 동안 내 용돈을 안 타 써두 좋으니까 사정을 봐 줘.』
봉우는 제법 용기를 내서 아이가 어머니에게 조르듯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사이 봉우 처는 몇 번이나 낯색이 변하였다.
『선생님에게두 저 같은 여자가 소용에 닿을 때가 있군요. 좋아요. 저는 점잖은 선생님의 청을 거절할 용기가 없어요!』
여자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표정으로 나타내고 나서 일어서 저쪽으로 가려다가,
『오만 환 정도라면 당장 되겠어요. 물론 현금이 좋으시겠죠.』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 뒤로 사라져 버리더니 좀 뒤에 현찰을 신문지에 꾸려 가지고 돌아왔다. 만기가 치하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이 돈 그냥 드리는 건 아니예요.』
여자가 그래서,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일 약속은 할 수 없지만 반드시 책임지고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봉우 처는 문간까지 따라나오며 애교 띤 농담조로,
『고지식한 양반. 그렇다면 원금만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적당한 이자까지 듬뿍, 아시겠어요?』
거의 아양에 가까운 교태였다. 봉우의 눈치를 곁눈질로 살피며 당황히 줄달음을 치듯 나오는 만기의 등뒤에다 대고,
『일간 다시 들러 주세요. 선생님 일루 꼭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요!』
여자는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돈으로 간소하나만 격식을 갖추어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관을 사오고 과목을 떠다 아이들에게 상복을 지어 입히고 고무신도 사다 신겼다. 의논해서 화장을 않고 망우리에 무덤을 남기기로 했다. 장지로 향하는 차안에서 익준이가 없는 것을 만기가 탄식했더니,
『살아서두 남편 구실 못할 위인, 죽은 댐에야 있으나 마나지!』
익준의 장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좀 늦게나마 남편 구실을 못한 익준은 그 날로 집에 돌아오기는 한 것이다. 거의 황혼 무렵이 되어서 산에서 돌아온 일행이 익준네 집 골목 어귀에서 차를 내렸을 때였다. 저쪽에서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이리로 걸어오는 허줄한 사내가 있었다. 아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 아버지다!』
소릴 질렀다. 아 그러자 익준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고 이쪽에서들도 일제히 그리로 시선을 보냈다.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들 고무신 코숭아가 비죽이 내보이는 종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석상(石像)처럼 전연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이구, 차라리 쓸모 없는 저 따위나 잡아가지 않구 염라대왕두 망발이시지!』
익준의 장모는 사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대고 인제야 눈물을 질금거리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제일 반가워했다. 입곱 살 먹은 끝의 놈은,
『아부지!』
하구 부르며 쫓아가서 매어달렸다.
『아부지, 나, 새 옷 입구 자동차 타구 산에 갔다 왔다!』
어린것이 자랑스레 상복 자락을 쳐들어 보여도 익준은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