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영국 런던에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라는 대학에 로버트 우스퍼 박사가 54개국을 상대로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도를 조사해서 국가별로 그 순위를 매겨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1위에 방글라데시, 2위가 아제르바이잔, 3위가 나이지리아, 4위가 필리핀, 5위가 인도였고, 경제대국인 미국은 46위, 일본은 44위, 우리나라는 23위였다고 합니다. 이 결과는 국가경제나, 혹은 정치적 안정과 같은 조건과 국민이 가지는 행복지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히려 돈과 행복은 반비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세기 스콜라 철학자이면서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관적인 복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복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관적인 복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복’을 말하며, 이 복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객관적인 행복이란 ‘주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복’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두 복 가운데서 인간이 생각하는 복은 불행을 가져오지만, 주님이 주는 복은 깨닫는 만큼 행복해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흔히 '산상수(보)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5장에는 여덟가지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이’인데 이 복의 개념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수단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복’으로서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는 복입니다.
이 여덟 개의 복의 특성은 각각의 복을 말하는 동시에 서로 연관된 복이라는데 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은 가장 기초적인 복인 동시에 다른 복을 여는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가 메튜헨리는 예수님이 팔복을 가르친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을 초래하는 오해들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적을 오해하고 있고 행복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품고 있어 길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복 있는 자란 세상에서 부유하고 위대하며 환락과 즐거움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기름진 것과 달콤한 것을 먹고 마시며, 거만한 자세로 시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팔복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올바른 복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본론
헬라어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페네스’(Penes)인데 이는 ‘자작노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유하지는 못해도 극빈자는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프토코스’(Ptochos)인데 ‘무릎을 꿇지 않고는 굶주림을 해결할 수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극빈한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은 ‘프토코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심령의 가난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은혜들 중에서 제일 앞에 오는 것으로서, 철학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제일 앞에 두셨다. 이는 심려이 가난함이 다른 모든 은혜들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석가 왓슨도 말하기를 "가난은 신앙의 근본이며 천국 문전에 설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에노스 때부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4장 25절까지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불렀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이 에노스 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보통 명사로 쓰이는 히브리말이기도 합니다. 히브리 사전에서 '에노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적혀 있습니다. 에노스는 자신들에게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를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비워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워짐은 비워짐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곧 이어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기 위한 비워짐이라는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4장 1-7절에 보면 이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엘리사는 여인에게 빈 그릇을 빌릴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름으로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빈그릇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 빈그릇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성경에서는 ‘가난’이라는 말에 가난한 빈(貧)자를 쓰지 않고 빌 허(虛)자를 사용해 ‘허심’(마음이 비었다)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다면 그 속에는 이제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비워질 때 비로소 다른 어떤 것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음에 우상이나 탐욕, 음란함, 추악함, 시기, 미움, 그 외 온갖 죄악들이 들어차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모셔들 일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심령은 비워져야 합니다.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둘째, 영적인 파산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둘째로 자신이 영적인 파산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는 자신의 영적 파산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있으며, 초라하고 추악한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감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추면 감출수록 해결 받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실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낼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 앞에서만 정체가 폭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가득찬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가난'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산되어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은 자임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영적 파산자라는 의식에서부터 비로소 참되게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왜 행복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다스림으로 마음에 천국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지옥과 천국은 다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천국은 내 마음에서부터 영원한 천국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이사야의 반응을 아십니까? 이사야 6장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상태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사야가 특별히 죄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이사야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잘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자 그는 영적파산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4-8절에 이르기를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있어서도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분명 처음 믿을 때보다도 믿음이 자랐습니다. 말씀도 더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생활도 더 깊어졌습니다. 생활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다는 부끄러움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의 영적 파산상태를 더욱 확실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채워주지 아니하시고는 내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상태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 의미하는 세 번째 내용이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 세 번째 의미를 드러냈지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원이라고 할 때 그 구원을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영적 파산상태를 깨닫기에 더 이상 구원에 있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대신 지심으로서 내가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내게 입혀주신 예수님만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덧입혀진 의를 보시고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한다고 주님께서 팔복의 첫 번째 내용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위이든, 고행이든, 종교생활이든, 자선이든 말입니다. 오직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깨닫고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결론
성경 2000년사를 연구해 보면 어디를 보던지 가난과 질병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진 역사가 없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나라건 마찬가집니다. 이게 나타나지 아니하고는 복음이 전파된 바가 없습니다.
랍비 셈 토프라고 하는 분이 제자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진리는 아무데나 있다면서요?" "그렇지,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거지." "선생님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돌처럼 있는 겁니까?" "아, 그럼 자갈돌처럼 널려진 게 진리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아 그거 간단하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서.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바로 가난해 질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진리를 영접 할 수 없는 거란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마음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복음이 복음 될 수가 없습니다. 진리가 진리 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고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중한 겸손의 복을 주시고, 믿음의 복을 주시고, 순종의 복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복을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 사람이 바로 복이 있습니다. 왜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