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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프쉬케) 또는 생명
2024 06 19 {젊다30011영혼23특이성}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동양 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주제들은 셋이라 한다. 하늘, 땅, 인간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인간이 화두의 첫째 일까? 내가 보기에 셋 중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한 주제로서 인간이 원래 첫째 화두였으며, 더 나아가 개인의 자아(영혼, 주체)의 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산다는 것이 문제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라고 물을 수 있는 인간은 왜 물을까? 단순하다. 잘 살기 위해서이다. 오랜 생명체의 과정을 겪어서 인간이 형성되었다는 진화론이 있기 이전에,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살다가 간다. 그럼에도 살다가 간 사람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줄까? 그렇다. 살아있는 자가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했을 때, 해결하고 해소하는 방식은 앞에서 살아간 자들의 방식과 해결책에서 찾으려 한다. 앞에서 즉 과거에 살았던 자들의 삶에서 찾는다. 사는 자는 살았던 자들의 방식을 기호 표시로 그리고 구전으로, 그 다음에는 문자로 전승하여, 해결책의 실마리 또는 체계를 만들어가고자 했을 것이다.
앞서 살았던 자들의 방식과 기록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방법과 체계를, 다음에도 전수하기 위한 노력이 아마도 지식과 자료들일 것이다. 하늘의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늘을 12단위로 나누고 중요한 별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림과 별자리보다 근본적인 것은 하늘을 12단위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기나긴 경험은 이를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하늘이 단위설정만큼이나, 지상의 생활에서 기후의 변화가 주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상에서 생활하는 인간들이 삶을 편리하고 안정되게 살기 위한 노력으로 12단위에 맞는 360도도 고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의 365일 하늘의 360도는 서로 사맛디 아니한다.
인간이 하늘을 나누는 것과 같이, 지상이 나누어지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달의 운행이 12단위에 맞게 30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달의 운행, 태양의 운행, 별들의 운행을 종합하여 통일성을 맞추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런 노력에서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즉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보자. 그 즈음에서야 인간은 옛 사람들의 전승에서 또는 신화나 전설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연의 운행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리라. 이로부터 철학이 도래했다고 할 때 탈레스는 신들 또는 전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라고 화두를 삼았을 것이다. 자연? 아니, 세계 또는 우주라고 하더라도, 그 당시 인간이 오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우주(코스모스) 즉 자연은 ‘뭣’으로 되어 있을까? 라고 물었을 것이다.
오관을 통해 아는 하늘 뚜껑아래 평평한 지구, 그 사이에 사는 사람들과 동식물들 정도를 생각했으리라. 그러면서 인간이 1년 그리고 평생(예를 들어 환갑, 60년) 등을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하늘의 운행의 계속에서, 시간의 길이를 정했으리라. 그리고 지상에서 하늘의 운행에 따른 지상의 삶에서 농사든 목축이든, 농작물이든 초목지든, 하늘의 운행을 모르면, 곡식도 목축도 한해를 잘 넘기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연의 순환과 과정에 대한 경험적 이해에서 한 달을 세는 서른을, 또는 일년을 세는 360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세고, 표시(작대기)로 기록하고, 그것들의 기록의 축적에 의해 달과 해의 운행에 맞지 않는 날들을 어떻게든 종합 또는 조화를 찾으려 하니, 이런 숫자를 다루는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아마도 신석기말기에서 청동기 시대에서는 동지를 기준으로 운행을 세고 계산하고 체계화하는 어떤 전문가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잠정적으로 샤먼(무)이라 부르자. 이 샤먼이 농사든 목축이든 곡식과 가축이 잘 자라서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해지고, 농업과 목축에서 잘 먹고 잘 자고 하려면 도구의 발달이 필수적인데, 청동기를 넘어서 철기를 알게 되었다고 해보자. 철기 이것은 농사나 목축에서 발견 또는 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동기를 다루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보다 단단하고 보다 매끈한 청동을 만들기에 제철소와 같은 대장간이 갖추어 졌다고 보고, 그 대장간이 청동보다 더 높은 온도의 불에 의해 철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깨닫기는 어려워서 또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장간의 대장장이가 하늘과 땅을 세고 재는 샤먼과 조심스런(비밀스런) 결합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구의 발달은 농업과 목축의 생산을 높이는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생산물을 약탈하는 무기로서 사용할 수도 있다. 도구/무기는 단순히 대장장이의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수렵과 채집시대에 돌로 만든 칼, 창, 도끼 화살촉 등도 깬돌에서 간돌로, 간돌에서 다듬는 돌로 발전할 때, 필수적인 것은 돌을 정교하게 가르는 바탕 돌로서 흑요석이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그처럼 석기에 구리와 청동기에 쇠를 녹이는 화덕의 불은 나무를 주로 사용했겠지만, 철기에서는 불타는 돌(석탄종류)의 효능을 알았을 것이다. 이 대장간이 이런 재료들을 얻기 위해서는 샤먼과 그의 집단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샤먼과 대장장이의 결합은 아마도 제도에서 상부와 군인을 만드는 제도로 나갔을 것이다. 이 상부제도는 하늘과 땅의 측정과 더불어 도구 생산으로 제도 속의 상부(왕과 군인들)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할 때가 있으리라(홍수, 가뭄, 대화재, 지진 등).
나로서는 인류가 역사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 먹고 살기에 편하고 잠자고 일어나서 노동(노력) 하지 않고 사는 그런 시절은 없었다고 본다. 말하자면 천국 같은 또는 옥황상제의 나라나 용왕의 나라에서 사는 또는 신선들이 사는 나라의 시절은 없었다. 게다가 에덴동산이니 하는 것도 꼬마 애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지, 실재하는 사건들은 아니었다. 인간은 자연속에서 생활하면서 무기/도구를 생산고, 타동물이든, 타생물이든 잡아서 또는 채집하여 먹고 사는데 어마어마하게 힘든 과정을 거쳐 왔다. 그 과정의 노동(노력)은 지나와서 웃으며 이야기할지 몰라도, 피와 땀이 밴 노력의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무기/도구의 강도를 높여왔다. 지금도 원자회로/수소회로 등으로 전기를 생산한다고 하지만 무기를 만드는 과정과 같은 시기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무기/도구는 여전히 샤먼과 대장장이의 결탁에서 온다. 이런 이야기를 철학사에서 의식의 발달이라 한다. 의식은 생명 또는 영혼의 발달일까?
영혼(프쉬케) 이야기 하나.
철학사를 통시적으로 읽다가 보면, 동서양의 사유의 주제는 세 가지 하늘 사람 땅이다. 그중에서 체계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는 존재이다. 벩송이 사는 것이 먼저이고 사유하는 것은 다음이라 한다.
19세기의 후반의 최고의 화두는 영혼일 것이다. 칸트가 남긴 세가지 문제 중의 하나이며, 학문발달사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것이 심리(영혼)학이다. 그 영혼이 불어로 암(l’âme)이다. 그런데 학문발달사에서 고대의 상식의 학문들이, 르네상스 이래로 실증학문으로 하나하나 바뀌면서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성립하고 다음으로 심리학(psychologie)이 19세기 후반에 성립한다. 여기서 암((l’âme))이 다시 프쉬케로 바뀐다. 제대로 자리 잡은 것인가?
문제의 시발은 아마도 칸트가 세 가지 중 요문제를 변증법으로 풀 수 없다고 하였다는 데서 시작한다. 자아, 세계, 이상으로서 신이다. 세계와 신은 젖혀두자. 자아, 데카르트 이래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이 자아(ego)가 확실하게 있으며, 명석판명하게 현존한다고 여긴다. 이런 지식을 양식(bon sens)라 한다. 그런데 칸트가 세계와 신뿐만 아니라, 그 자아를 추론해서 정립하는 것이 오류라고 하였다. 철학자들은 화들짝 놀랬다. 불교에서는 보살을 정의하는 것이 불이(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이듯이 자아를 정립하는 것도 무상(無常, 항상 있지 않음)이라고 할 것이다.
자아 또는 ‘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비해, ‘나’를 화두로 끌어낸 것은 19세기 후반 이래로 20세기의 여러 문제 거리들을 만들었다. ‘나’가 있기는 한가? 생물학과 생리학의 발달로 인간이 안다는 것은 두뇌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두뇌가 아는 것이 인간의 아는 것이 전부라고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에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도 안다고 한다. 지성과 본능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온몸은 태생에서 아는 것인가? 온몸이 만들어지는 이전의 오랜 과정에서 아는가? 불교에서 인연연기에다 붙일 것이다. 안다는 단지 두뇌만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생물의 진화에서 다시 생각할 것이다. 1900년에 멘델의 유전법칙의 재발견에서, 생명은 기나긴 과정의 지속이라 한다. 그 생명은 무엇을 지속하는가? 영혼(pyche)인가, 유전물질인가? 용어상으로 당연히 유전물질이라고 하고, 20세기 중반에 DNA를 발견한다. DNA가 인간 삶과 영혼의 문제 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직은, 그리고 21세기 초에서 AI가 풀어줄 것이고 허풍을 떤다.
영혼은 생명과 같은 궤를 걸어 온 것이라고 한다. 영혼 즉 생명은 단세포에서부터, 자기라는 세포와 외적 사물들(무기물이든 유기물이든) 사이에 어마어마한 투쟁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한다. 투쟁 또는 상보관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명체들 각각은 자기가 지구라는 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또는 상보)에서 이런 저런 잡다한 모습들을 스스로 만들었지만, 그 각각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스토아의 발상이 있었을 것이다. 영혼은 온우주의 영혼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했을 것인데, 실증과학 없는 시대에 상식에 기반한 사유였을 것이다.
실증과학의 발달로 생명들 중에서 그대로 인간이 가장 발달된 생명체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럴까? 여러 종들은 종들의 전략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생물학의 공통견해이다. 이 지구라는 터전이 유성의 충돌, 대지진, 대폭발 등의 우발사고가 생긴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 척추동물 중에서 자연에 가장 취약한 인간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아마도 타생명체를 정복하는데 또는 착취하는데 가장 우월한 존재일 것이다. 그 우월이 자연에서 생겨나는 방식에서도 우월한 것인가? 생물학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무기/도구의 발달로 자연의 일부를 전유(자기 것)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전수하는 능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소리에서 언어로 문자로 발전이고, 이제는 AI를 통한 쳇이라는 도구를 만들었다고 오만에 빠져있다.
영혼이 생명체의 오랜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있다. 어느 동물과도 다른 방식의 사유의 양식을 갖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럼에도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소리에서 목소리로 바뀌는 시절이, 약 200만년 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인간은 현생인류(1만년)에 비하면 매우 먼 시기인 것 같지만, 인연연기의 무량대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35억년전에 비하여 1만년도 눈깜짝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영혼(암이든 프쉬케든)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철떡 같이 믿는 신앙자들이 있다. 그 신앙자들이 믿는 것이 인간의 영혼일까? 아니면 정신과 같은 외계일까? 나로서는 그들은 외계 신앙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언어와 문자로 지구라는 터전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무기/도구의 발명과 발달로 자연에서 사유하지 않고, 언어와 문자로부터 사고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소리(le son)를 목소리(le voix)로 바꾸어 나름대로 온몸이 살기위해 소통하는 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불의 사용과 매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입말이 지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도구와 삶의 터전으로 남아있는 것은 50만년전에 다른 동물과 달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적어도 어떤 부호 또는 표시로서 남아있는 것은 구석기 시대에 남은 이미지(그림과 조각상)이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에 와서야 기호화 표시로 남아있고 5천년 전 쯤에 남은 단편 조각들로 보아 무엇을 썼는지를 알 수 없는 기호와 상징들이 있다. 입말과 상징(표시)들이 상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 삶의 필요에 의해 삶의 사실들과 사건들의 표시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4천년쯤에서 소통할 수 있는 그림과 문자들에 의해 유물과 유적들을 재구성하여 삶의 터전과 시대를 가름한다. 3천년전쯤의 문자들과 그림들을 통해 그 역사를 재구성하여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기도 한다.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이 유물과 생활도구의 파편들로서 삶의 터전과 그 자리의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입말에서 표시(상징과 그림), 그 다음으로 표시와 문자의 상응관계에서는 이미 영웅들의 이야기와 설화로 전개 되어, 입말의 전승과 문자의 표시 사이에 대응적인 관계가 있다. 세계사는 이런 이야기의 전승이 4천년쯤이고 이를 기억으로 전승되어 문자에 맞게 표시된 것이 3천년쯤이라 한다. 그러나 전승하는 언어와 문자의 표기 대응하는 방식은 등장하여, 그래서 구전과 전승의 문자를 서로 맞추어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기원전 1천년의 전후이라 한다. 그리고 1859년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로 전승과 문자를 맞추어서 표기하는 방식(어설프지만 문법적 일치)을 갖는 시기를 기원전 6세기경이라 한다. 들뢰즈는 흥미롭게 이 시기를 바빌론 유수(기원전 587년)를 끌어들였지만, 많은 전승 설화들의 문자화의 시기는 호머의 전승에 견주어서 기원전 8세기경으로 잡는다. - 물론 주역의 전승을 상징적 표현을 기원전 10세기로 문자의 전승을 기원전 8세기로, 불교의 전승을 6세기 등으로 잡을 수도 있다. 인도의 브라만이 그보다 더 일찍다고 하고, 페르샤의 전통도 그 시기일 것이라 한다.
이런 전승의 주제는 전쟁에서 이겼다는 영웅설화이다. 영웅설화는 두 방향이다. 하나는 하늘에서 나온 천신 설화이고, 다른 하는 토지의 생산이라는 물에서 나온 난생 설화이다. 그런 이야기가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인데, 삶의 터전에 대한 전승으로 여긴다.
영웅은 터전에서 사는 백성들의 삶을 해결하거나,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동하여 또는 다른 곳을 정복해서 더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정복에 대한 피정복의 이야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흔적과 유적은 그렇지 않다. 무얼 먹었고 무슨 식물과 동물을 재배했는지는 유적의 흔적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터전에 고유한 삶을 산자들의 연속성은, 정복자들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는 제도의 불연속성과 달리, 꾸준하게 그리고 서서히 발전되고 확장되는 연속적 과정을 알게 해준다. 적어도 1859년 고고학회의 창설과 발전이 있었고, 지층의 연도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1900년대의 라듐의 발견이후에는 정복의 역사만큼이나 터전의 삶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다. 1953년 DNA구조 발견이후로는 다른 생명체들의 삶과 인간의 삶과 연관이 각각의 진화의 방향들 이상으로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 이오니아 지역에서, 기원전 6세기경에 2600여년전에 인간의 생명은 우주의 숨결이 인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으로 여겼다. 이 숨결을 프뉴마(pneuma)라고 불렀다. 어쩌면 들숨과 날숨이 있는 동안에 생명체는 살아있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생명과 영혼을 따로 연구한 문자 기록은 없다. 전승으로는 영웅은 올림푸스 산에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죽어서 묻히거나 화장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체에 머물던 숨결(프뉴마)이 어떻게 프쉬케로 용어의 전환이 있었을까? 고전 문헌학자들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의 출신인 고르기아스에게 한수 배웠을 것이다. 그것이 ‘뭣’인지 모른다고.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온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뭣’이 무얼 하는지, 무얼 아는지 등등을 물었다고 해보자. 그도 불교의 화두 같은 ‘뭣’이 궁금하고, 스스로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자기 속에 물어본다고 하여, ‘뭣’이 자기 신체 속에 머물고 있는 듯 한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을 때도, 그는 몸이 남고 영혼은 이곳을 떠난다고 했다고 한다. 이 몸과 다른 이 ‘뭣’이 프쉬케라고 한 것은 제자인 플라톤이 “파이돈”편에서라 한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달리 신화(이야기)를 빼버리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학문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래서 스승에서와 달리 신화를 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이 아마도 언어를 통한 논리의 전개라고 보았고, 그 언어 논리 위에 자연이든 영혼이든 여러 학문들을 각각 정립하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영혼론(페리 프쉬케)”을 썼다. 영혼은 무기물과 생물체가 다른 것 이상으로, 생명체와도 다른 영혼의 권능(역량)이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이 권능은 언어와 판단, 도식과 체계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사고는 그의 사후에 그리스에 전승되지 못했다. 아테네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배척하면서, 마케도니아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망명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전승은 로마 시대를 지나서 크리스트교가 종교를 정립시키는 교부 시대에(5세기) 신플라톤주의자들이 플라톤의 학설들을 체계로 세우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신학이 교회조직과 성직자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꾸준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체계를 받아들이면서,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는 논리적 사고가 크리스트교 사고체계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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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크리스트교에서 정신(l’esprit, the spirit)과 영혼(l’âme, the soul, the mind)을 따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였다. 물론 중국에서 영,혼,백,신,정,귀 등이 따로이지만, 서양사상사에서 중요한 영혼과 신체의 문제는 하늘과 땅의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프뉴마(πνεῦμα, 숨결)와 달리 프쉬케(ψυχή 영혼)라는 용어는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에피쿠로스에서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라틴어 번역어로는 루크레티우스(전68-전55)이래로, 그의 저술 “데 레룸 나투라(De rerum natura)”(사물들의 자연에 관하여)에서 프쉬케의 라틴어 번역이 아니마(anima)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나투라(자연)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언어였을 것이다. - 한 용어의 다의성은 판타지 계가 아닐까? .
자연, 어쩌면 도가의 무위자연과 닮을 수 있고, 불교에서 만물이 불성이라고 할 때 불성과 같을 수 있고, 유교에서 이와 기를 나누기 전에 성(性)일 수도 있으며, 유일 신앙에서 스스로 그대로 이루어짐과 같은 은총에 닮을 수 있고, 벩송이 말하는 흐름 또는 지속일 수도 있다. 자연, 그대로 흘러가는 것? 그와 같은 것이 사물의 자연이고, 달리 표현하여 의식, 영혼(프쉬케, 아니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쉬케를 전승 설화(신화) 속에 끌어들인 것은 그리스의 설화가 아니라 로마의 설화라고 한다. 아플레이오스(125-170)의 시에서 등장한다고 하니, 로마시대에는 프쉬케와 아니마가 공통어로 쓰였을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리스어 프쉬케도 여성이고 아니마도 여성이다. 이 여성형의 남성형의 대구가 그리스 전승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니마(여성형)에 나니무스(남성형)가 등장한다. 남성우위, 로마의 황제(참주체제)의 시대는 참주(외디푸스)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고, 케사르(시저)에 이어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는 자연스럽게 또는 제도상 교묘하게 신격화로 이르렀고, 상위 존엄자로서 절대자에 대한 표시 또는 상징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를 넘어서려고, 또는 문화적 우위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그 표본이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46-119)일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문화의 변질은 로마의 제도와 사고의 변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기에 식민지 땅에서 성립하는 예수에 대한 존경이 황제(참주)와 견주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대등하게 절대자의 지위에 올리는 사고를 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예수를 크리스토스와 동격으로 올렸다.
황제가 신격화되듯이, 새로운 종교의 창안자를 크리스토스로 승격화되는 과정과 비슷한 시기에, 사물들의 자연화 하는 사유에 비추어서, 참주의 신격화는 신앙의 사고 사이에 상반된 방향을 갔을 것으로 생각해보자. 이쯤에서 자연에서 사물들 속의 아니마와 제도 속에서 최고권자의 신격화로서 아니무스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사고를 상상 또는 환타지라고 할 것이다.
제도 속의 최고권자의 방향과 종교 속의 신격화 방향은 같은 방향으로 나갔다. 이들 두 방향은 상부를 형성할 것이다. [나중에] 이 둘에서 하나를 더 보태어 언어(논리)와 결합하면 삼자의 도식이 생기고, 이런 삼자 결탁문화(패거리 문화)는 서양사상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무의식이 자연의 발생인지, 무의식이 패거리들이 만든 관습과 설화(신화)인지 하는 문제는, 철학사의 대립구도를 만들었으며,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상식과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문제거리로 남아, 일반 상식과 일방향의 양식에서 배회하고 있다.
에밀 브레이어로서는 로마 시대에 이런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여성형과 남성형이, 중세 철학사에서 논리의 위계라는 측면에서 상위와 하위를 결정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암시했다. 신격화와 참주화의 상위에는 아니무스를, 인민과 노예들에게는 짐승의 성질을 포함하는 동물적 영혼을 지시하는 것으로 구별하였을 것이다. 나중에 데카르트도 그리고 18세기의 소박한 유물론자도 이런 구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동물에게는 영혼(아니마)을, 인간에게는 상부로부터 (인간이기에) 태생적으로 받은 정신을, 소유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중세의 유일신앙에 몰입된 학자들은 아니무스에 정신(또는 성령)을 그리고 아니마에게 노예나 동물과 같은 자동장치로 살아가는 기계처럼 여겼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구별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것이 자연의 두 산물처럼 여겨졌다. 이로써 인간에게서는 하늘에서 부여한 심정(mens)을 따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 근세 철학에서 영혼과 신체라고 할 때, ‘암 에 꼬르’(âme et corps, 영혼과 신체)라고 한다. 그럼에도 영어권에서 ‘마인드 엔 바디(mind and body, 마음과 육신)’라고 한다. 암(l’âme)과 마인드(the mind)는 동이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같은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다. 암은 동물에 가깝고, 마인드는 정신(spirit)에 가깝다. 영미철학에서 영혼은 정신 또는 하늘의 성령에 가깝고, 프랑스 철학에 암(âme)은 자연, 동물생명에 가깝다.
그럼에도 영미나 프랑스에서 인간의 본성(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오해이다)은 인간의 자연(the humane nature, la nature humaine)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여전히 철학에서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거나, 자연과 연관 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번역어에서 본성이란 용어는 도덕적이고 제도적으로 유가적 입장에서 번역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자연에서 왔을까? 성령과 같은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당연히 고대에서는 하늘에서, 중세 1500년 동안에는 성령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사유와 운동으로 이원화 시키면서 사유 쪽에 정신을 운동 쪽에 물체를 대입시켰다. 이 묘한 구별에서 영혼은 정신에, 몸은 물체에, 대입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인식적 방식에서 보면, 정신의 논리에서는 정신이 사물 또는 물체를 다루는 것이고, 정신에서 영혼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생성적 관심에서는 동물 영혼은 몸에서, 그리고 사유는 정신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되고, 19세기의 실증에서는 자연에서 영혼이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정신과 영혼이, 물체와 몸이 같은 방식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사유와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혼합된 사유 방식은 스피노자에게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수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물체들의 구별로부터 생각해 보니, 모든 물체들(먼지에서 가장 고고한 천사까지) 각각은 각각에 맞는 영혼을 지니고 있고 각 모나드이고, 이 모든 영혼은 온영혼(Ame)로서 있는 것이 신이며, 그 신은 정신이다. 이런 생각은 온영혼을 누스로 단순히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온영혼을 모든 사유와 운동을 함께 다루는 권능으로 생각한 것이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온영혼과 각 영혼들의 자연(본성)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온영혼, 즉 온자연(Natura)은 세계의 기원이고, 신의 능력도 온자연의 방식이며, 온자연이 세계 속에 서로 비추고 있는 국면들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이다. 그 모습들은 온자연의 스스로 되는 모습으로(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라이프니츠는 플로티노스에 닮았고, 게다가 그 기원에는 퀴니코스-스토아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생각했지 않을까?
철학은 자연의 탐구를 개별학문으로 따로 내놓았다. 자연으로부터 나온 천문학, 물리학, 화학을 따로 만들었다. 다음에 생물학이 도래하면서 정신이 영혼과 관계를 생물학과 생리학적으로 이원화시키기 위해 두뇌와 신체로 바꾸어 해석하기 시작했으나, 두뇌는 논리만큼이나 영혼(프쉬케)을 설명하지도 해석하지 못한다. 그제서야(19세기 후반에서야) 심리학(프쉬콜로지) 즉 영혼(프쉬케)의 학문이 도래한다.
아니마/아니무스, 동물정기/정신, 몸/영혼, 생명/성령으로 대치되면서, 도대체 인간의 지성(오성, 이성)이 무엇을 다루고 있었지를 반성하게 된다. 이런 쌍들이 프쉬케를 다루는 방식이 맞는가? 19세기 후반에 심리학에서 의식의 내재성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의식의 내재성은, 생명체가 지구역사의 지속을 가지고 있다고 20세기 초에 벩송이 말한다.
정신이 영혼에 우월성을 갖는다는 생각, 참주-크리스토스-언어논리의 삼자의 패거리 문화는 여전히 지배논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와 정치경제학에서도 암묵적이고 음모론적으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삼자논리는 자연의 것이 아니라고, 프시케 학문(심리학)이 이의제기를 하였다. 나는 이들이 삼자논이가 자신들의 허상과 착각을 감추기 위해, 정치경제학에서는 카르텔을 제국화하기 위해, 레닌은 식민지 전쟁이라고 하지만, 20세기의 두 전쟁들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쟁은 오랜 과정에서 무기/도구의 지배(정치경제학에서 생산도구의 지배)에서 나왔고, 전쟁에서 패거리들은 또는 참주제는 약탈과 정복이 부를 비약적으로 전유(확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자(종교, 자본, 학문의 패거리)의 정신(영혼이 아니라)의 승리이다. 영혼은 여전히 자연 속에서 나서 자연 속에서 자라고, 자연 속으로 돌아간다.
저 삼자들은 하늘로, 극락으로, 천국으로 간다고, 근대에 와서는 그들로 절대로 믿지 않으면서, 현재 여기에 착취와 폭력, 위협과 공포를 심으며 인민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다음에는 사이보그가 에너지를 먹고 살까). 왜냐하면 그들이 천국에 간다고 진실로 안다면, 현재 도적질과 축적을 할 수 없다는 것도 그들이 더 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믿지 않으면서도 인민에게 저세상에 천국이 있다고 선전하고 강제하고, 똘마니와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또한 전쟁의 위협으로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한다. 그래도 예수가 새로 살기, 달리 생각하기를 이야기했다던가?
싯달다는 이미 오래 전에 새로 살아 봤자 그 나물에 그 밥, 즉 그 세상 그 제도이니, 오랜 관습에 젖은 인연연기를 끊고 출가하여 또는 다른 세상을 만들며 달리 살아가라고 한다. 그는 다른 세상이란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어서 노력하여 정진하면, 살고 죽고, 있고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살기, 살기가 먼저이고, 그 행동을 실행하여 살면 세상은 다르다. 삶이 먼저이다.
우리 사회에서 달리 말하기 방식이, 즉 정신과 영혼의 구별이 사실상 서구에서 들어왔지만, 이 상위에 세 패거리들이 장악하고 있다. 세 패거리는 상상을 넘어서 망상을 이야기 한다. 이 패거리를 벗어나는 것은 삶에서 입말로부터 우리가 상부상조해야 할 때이다. 즉 자연에서 우러난 영혼의 이야기를 우리 입말로, 비로서 그 때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싯달다가 새로이 ‘뭣’을 화두로 삼는 시기가, 무기/도구의 철기시대이다. 상층이 그 철기를 누리던 시기이다. 2천여 년이 지나서 그 철기를 인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1953년 이래로 규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것은 삼자들의 사용과 인민들의 사용이 다르다는 것을 아직도 잘 구별되지 않는다. 이 디지털의 도구가, 철기시대에 정복과 착취에서 삼자의 결속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삼자의 균열을 일으키고 있을 것 같다.
디지털의 시대에 학문(지자)의 그룹이 신학의 그룹에게 봉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쩌면 지자들의 도구가 되면, 종교가 갖는 권세를 학문의 권위로서 대체하여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철기시대의 마지막에 생산도구의 발달은 생산력을 높이는 만큼이나 인간들을 파편화하고 있었다. 이 파편화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개체만이 남는다는 것을 학문은 논리적으로 안다. 이 파편화의 개체가 종교의 권세와 결별하여 다른 방식으로 제도와 체제를 만든다면 어떤 사회일 것인가? 학문은 고민하고 있다.
게다가 종교의 권세는 자본이라는 제국과 결탁도 철기시대와 같지 않다. 종교가 제국주의 또는 제국과 패거리를 만들 때는, 서로의 이익이 시너지 효과로서 상승할 때이다. 그런데 자본 제국은 종교 없이도 부의 무한정한 축적을 할 수 있는 투기판(투자가 아니라)을 만들었다. 투기에는 권세보다 권력이 우세하다는 것을 알기도 하지만, 권력과 가까이에서 부(잉여와 갈취)를 마음껏 소유할 수 있지 종교의 권세에는 마음이 찔리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 규소의 시대는 종교의 권세는 신 보다 돈을 상위에 놓은 제국에게 아부하고 있다.
자연의 생성과 변역에서 아미무스-성령-정신으로 이끌어가며, 권력, 권세, 권위를 누리는 이들이 있어왔다. 이들의 패거리는 아니마-만백성-영혼으로 상부상조하고 연대하는 길을 따로 떼어내어, 요즘 표현으로 개돼지 취급을 한다. 이들이 프쉬콜로지(심리학)의 등장으로 삼원성이 착각 또는 상징계임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이들이 계속 지배하고 있을까? 게다가 이 착각이 인민들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다시 등장하였던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은 내재의식의 발생과 노력, 그리고 삶에서 강도를 높이는 내공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유럽은 20세기 초에, 철기시대의 마지막에 착취방식을 확장하기 위해 패거리들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일으키면서, 인민보다 삼자(권력, 권세, 권위)의 강화로 나아갔다. 여전히 지구상에는 위협과 공포로서 잉여와 거의 무한 착취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세력들이 패거리를 존속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전쟁의 공포, 이를 죽음의 충동이라 포장한 것도 학문하는 이들이었다.
규소의 시대에 전쟁의 공포는 효능이 줄어들고 있다. 겉보기에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전쟁을 패거리들은 주도하고 있다. 이런 철지난 주도를 실행하면서도 은폐하기 위해 음모론이라는 용어를 퍼뜨린다. 음모가 아니라, 실재하는 패거리 문화이다. 시대의 변역에서 철기시대의 생산도구와 달리, 인공지능의 생산도구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산도구의 세분화된 개인에게까지 지배하기 위한 방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빅데이터와 AI지식이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들의 방식은 지금은 삼자의 방식을 모방하고 있으며, 여전히 권력, 권세, 권위의 그 위에 통합된 단일 방식이 있을 것이라고들 한다.
데이터의 사용에서 인민들의 소통 방식은 우선 매듭이론을 닮았다. 한 사람에서 전 세계에 알려지는 되는 방식은 5.6명을 거쳐가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트럼프와 연결방식을 찾는다면 5.6명을 거치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패거리는 이들의 통로를 막고 또는 습관적으로 연결하는 통로를 비슷한 관심을 부수적으로 제시하면서 통로 연결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개별화된 특이성의 개인은 항상 다른 통로를 가지고 연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자연과 소통이기 때문이고, 자기의 본래 성격과 권능은 자연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도 인민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기본심금,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한번 하기로 하고.
‘뭣’의 화두로서 20세기에 자연에서 나온 영혼이었는데,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죽음 충동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면서, ‘뭣’의 원래 문제였던 ‘산다’는 것이 죽음에 밀려난 듯이 보인다. 죽음의 주제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듯이 사기이거나 미신이다. 즉 신화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라깡이래로 죽음 충동을 사기와 미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외디푸스의 상징계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이야기는 신화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신화의 상식으로 넘어갈 수 없다. 이 외디푸스 참주(황제, 크리스토스)가 다시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9세기 말까지 생물학과 심리학이 실증적으로 발전했는데도, 20세기 1차 대전에서 죽음이 주제로서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쟁의 패허에서 삶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우리나라도 남북전쟁이후 절박함이 70년대까지 20여년을 지배해오면서, 지식인들 조차 허무주의를 말하지 않았던가? 허무를 지배하는 것이 참주(크리스토스)이라며, 생성에서는 죽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니체이다. 먹고 산다는 문제에서 주거의 문제로 이동하면서, 생활도구의 소유를 부추기면서 생산도구를 지배하는 패거리들에게서, 돈의 위력이 삼자 패거리를 공고히 하였다. 너무 멀리 갔다. 먹고 살기도 어렵고 집을 가지고 살기도 어렵다. ‘뭣’이 문제인가? 돈, 제국, 패거리? 천만에 역시 산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산다는 생명은 영혼의 활동이다.
현재 삶의 활동 터전이 철기의 기계 산업과 다르다. 디지털이 인민을 먹여 살린다고 선전하는 이들이 전쟁패거리의 후예들이다. 경제전쟁에서 디지털 전쟁은 보병 같은 무리들의 방식이 아니다. 이 인민들은 전지구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보병처럼 전선의 배치라는 것이 없어졌다. 무기/도구에서 전도되어 도구/무기의 시대이다. 규소의 시대에 개돼지인 인민에게 무기가 아니라 생산 또는 유통의 도구를 -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 쥐어 주었다. 이 도구/무기는 지배체계의 방식과는 달리, 새로운 흐름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인민에게 도구를 쥐어주지 않고서 착취와 공포를 심을 수 없는데, 도구만을 인민화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인민은 도구만을 지닐 때 일하는 지배구조에 있을 것 같지 않다. 인민이 스스로 도구를 무기/도구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민의 무기/도구를 버리게 할 수 없다.
그것은 패거리의 잉여착취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민들에게 도구/무기를 무한정으로 확대하는 것은 패거리의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영혼의 흐름은 도구/무기보다 훨씬 깊이 그리고 넓게 흐르고 있다. 이 흐름이 도구/무기의 사용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패거리의 지배는 인민에게 도구/무기를 주지 않았을 경우이고, 식민지와 지배방식에서 도구/무기를 사용했을 경우이다. 그런데 생활도구로서 도구/무기를 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철기시대처럼 생산과정 속에 인간들을 배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배열이 없으면 위계가 없어질 것이다. 어째거나 디지털은 배열이 아니라 병열도 아니고, 그물망과 같은데, 이를 들뢰즈가 리좀이라 불렀을 뿐이다. 어쩌면 영혼들 각각은 스피노자가 아니라 라이프니츠처럼 각각일 것이다.
영혼은 위계와 배치에 의해서 정돈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흐른다. 그 흐름에서 연결과 연대는 배열과 병열도 아니다. 영혼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면서 연관을 맺고 교향곡처럼 혼성을 이루며 흘러간다. 이 흐름이 확장되고 있다고, 그리고 생명은 패거리들도 흐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변역(變易)은 당연하다. 혁명, 그것은 조직을 필요하지만, 흐름을 조직을 혼성처럼 이룰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박근혜를 끌어내린 촛불이었고, 윤석열을 끌어내리게 될 권능은 리좀일 것이다. 혹자는 십알단과 일베, 그리고 일본의 조직적 침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규소시대에 입말은 이들의 권력 권세 권위의 지시와 배치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입말은 매듭이론처럼 소통하는 자들 사이에 사방팔방으로 리좀처럼 퍼져 나간다. 그렇게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과 삼자 패거리들만이 배치와 지시를 따를 검사들을 자리에 앉힌다. 왜냐하면 그 위계적 사고와 배치로서 인민을 공정과 상식이란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지만, 인민은 어렵게 살면서도 위계 속에 있지 않으며, 규소의 시대이기 때문에, 흐름의 속도와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말은 그렇게 흐르고, 혁명은 리좀의 연대와 소통에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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