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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23-27> 가상칠언(架上七言)-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약속 있는 첫 계명
오늘 가상칠언 세 번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은 최고의 사랑 사건입니다.
지난번에서는 최고의 용서의 사건이라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자가 마치 탕감을 받은 것같이 말입니다.
십가가 사건은 ① 하나님 사랑과 ② 인간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인데,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사건인 것입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입니다.
→ 죽어주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석가모니, 공자, 무함마드 중 누가 죽기까지 이웃을 사랑해서 죽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다른 종교들도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들은 있습니다. 악한 자들도 부모는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함경에는 “부모가 복전(福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석가모니는 부모, 자식, 아내를 떠나 출가했으므로 부모를 공경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함마드도 일찍 부모를 잃고 조부, 삼촌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므로 공경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살아 있어 가까이 있어도 죽기까지는 못합니다. 죽은 것은 신앙안에서 믿음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네스토리우스(경교, 신성과 인성을 철저히 분리), 카디자의 사촌 와라카 빈 나우팔(여성, 메카이 기독교종파의 지도자)는 이비오니교(율법주의 기독교) 영향
▶ 아무튼 성경을 압축하면 이 두 계명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마태복음 22: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막 12:29-31>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준이요, 규범이요, 지침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계명을 지키면 다른 계명들도 다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두 사랑을 동시에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언도 좋고 방언도 지식도 다 폐하여지고 결국 사랑 만 남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사랑으로 이룬 것들만 남습니다.
2) 그리고 이 두 계명을 열 계명으로 구분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 십계명을 요약하면, 1-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며, 5-10계명은 인간 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
이 길리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오늘 말씀은 크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요, 좁게는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2절에서 출 20:12, 신 5:16절 십계명 말씀을 근거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하면서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모두를 향해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부모 사랑, 공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 째라는 것은 순서가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주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부모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계명보다도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 간음과 마찬가지로 그 죄벌이 큽니다.
부모를 저주하면 돌로 죽임을 당합니다.
[출 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얼마나 중요했으면, 다른 이웃사랑 계명에서는 없는 약속을 붙여 놓았습니다.
▶ 부모를 공경하면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는 약속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명기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그래서 복 받고 싶고 오래 살고 싶으면 부모을 공경해야 합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를 실제로 공경하지 않고 말로만 공경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신랄하게 책망합니다.
[마가복음 7:10]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 고르반(헬, 선물,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
→ 기독교는, 그리고 성경은 그 어느 종교보다 부모공경,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많은 믿는 자들이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절두산)
제사드리면서 물 떠놓고 음식 차리면 그 영혼이 먹습니까?
그렇다면, 지난주 말씀드린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음부에 간 부자가 왜, 물 한방울이 필요하다고 했을까요? 제사음식으로 물도 먹고 음식도 먹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는 못 먹는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이 석가와 무함마드와 다른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들은 혈연관계에 의한 공경이요 사랑인 반면에, 예수님은 혈연관계를 초월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메시야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1)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 혈연에 의한 부모, 형제 자매가 아니라, 예수의 피, 영적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 형제, 자매의 가족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형집행장 아래에는 많은 로마 군병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많은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가 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인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이 있었습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야고보와 요셉(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 요 19:25, 마 27:55-56, 막 15:40-41,눅 24:49)
그런데 유일하게 제자 중에는 사도요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마 26:56, 막 14:50, 52)
[마태복음 26: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최소한 제자 중 한 명은 목격자가 되어야 하고, 오늘 말씀도 사도요한이 그 현장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가까이에 있을 수 있었으며,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대제사장 집 뜰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 18:15-16)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요한이 자기 어머니 곁에 있는 것 보고 오늘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사도요한을 가리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기서 여자는 마리아, 아들은 자기를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여”라고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자여”(헬 귀나이)는 “귀네”의 호격인데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호칭입니다.
처녀이든 과부이든, 기혼이든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 반대의 개념으로 부르는 여자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귀네는 여사와 같은 존칭어도 아니고 비속어도 아닙니다.
※ 히브리어 “잇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귀네”를 사용하고 있는데 “잇샤”도 단지 여자입니다.
자기의 어머니에게 왜, 여자여라고 했는지는 조금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 그리고 사도요한을 보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
제자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의 모친을 “네 어머니”(헬,메테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실제 어머니, 살로메가 그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순식간에 어머니가 두명이 된 것입니다.
한 명은 육신의 어머니인 살로메, 한명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이 우리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된 자들을 가족으로 보는 것입니다. 혈연에 묶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종, 나이, 혈통, 국경에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신앙공동체로서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의 어머니도, 사도들도 보고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온 인류를 생각하는 메시야적 가족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모친과 그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말하려고 밖에 서 있다고 전합니다. 그때 대답하신 말씀을 보면 그의 가족관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마태복음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동생들 (형제들)
“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부모,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혈연에 따라 가족을 분류하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사역을 잠시 미루어 놓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기 위하여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는 무리들과 똑 같이 자기의 혈족을 대하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부모,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5)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무리 중에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눅 11:27)
그러니까 마리아가 복이 있다고 소리치는 것이죠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여기서도 예수님은 철저하게 혈육에 따라 가족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잠깐 생각하고 넘어갈 것은 마리아는 우리들이 존경할 자로 여겨야 하지만 육신을 낳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낳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어머니”로 섬기면 안된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따르는 교파들은 이단입니다.
▶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같은 신앙안에서,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집사, 장로, 목사라는 호칭 다 내려놓고 모두 형제, 자매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한 세례, 한 주, 한 하나님, 한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형제 자매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천국에서도 이 땅의 혈육관계처럼 살지 않습니다. 혈연관계로 살지 않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부부사이가 없다니까 다행입니까?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 중심으로 천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됩니다. 엄마, 아빠, 형제 자매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 아버지만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천국의 모습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기 친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요한에게는 이모가 되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비록 이모이지만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가 아닌데도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에베소에서 살게됩니다. 마리아는 거기서 101세까지 살다가 죽습니다.
▶▶▶▶ 이것이 예수안에서의 가족입니다. 다른이들과는 가족관계가 다릅니다.
메시야로서 부모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보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사도바울도 이런 신앙안에서 가족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고수들은 대부분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영적 가족관계를 가지고 사역을 합니다.
[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그는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의 남편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시몬의 부인이 루포의 어머니인데, 그를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흑인일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도, 바울은 늙은이를 아버지로, 어머니로, 젊은이를 형제, 자매로 대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문안인사하는 것을 보면 전부 신앙안에서 가족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안에서, 믿음 안에서 한 가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도 이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육신의 모친 마리아 공경하고 사랑하고 있지만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도 부모님을 잘 공경했습니다.
“순종하며 받드시더라” (눅 2:51)
3. 사랑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만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이웃을 미워하고 있다. 아닙니다. 그렇수 없습니다. 참으로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는 분명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도 사랑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으신 분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17:5, 벧후 1:17)
→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데 죽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간도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좁게는 부모의 사랑을 받은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역기능 가정은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혈연을 초월한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가까이는 신앙안에 있는 영적 부모와 같은 사람, 형제 자매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들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들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늙으셨다고 등한시 해서는 안됩니다.
[잠언 23: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는 요양원에 내팽겨치면 안됩니다. 부득이하게 그렇게 하더라도 자주 찾아뵈어야 합니다. 자식이 찾아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낙입니다. 다른 분들에 대한 자랑입니다.
가장 큰 부모공경, 효도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옥가는 자녀는 어미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명만 낳고 마는 시대에 너무 버릇없게 길러서 아이들이 부모, 어른 공경함을 모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이 땅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내가 선택하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셨습니다. 영적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잘났던 못났던 돈이 있던 없던 가족관계 속에서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미리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릴 형제. 자매의 관계를 미리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붙여주신 육신의 가족과 영적 가족, 특히 부모되시는 분들을 잘 공경하고 사랑하여 이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의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