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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45-46> 가상칠언(架上七言)-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사셀 염소, 회중의 속죄제, 속죄론, 대속죄일, 부활의 예수님
가상칠언 네 번째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사박다니(아람어, 셰박타니,과거형)
1. 서언
■ 오늘 말씀을 각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넣어서 한번 봉독해 보았으면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시고 죄인으로서 외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아니면 이런 외침을 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합니다. 마치 죽음 앞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으셔서 패배자가 하는 외침 같습니다.
아무리 인성을 가지셨다고 하나 그는 우리들의 구원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①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이 순간 만큼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셨기에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이니 엄청난 큰 죄인의 외침입니다. 그러면 이해가 가시죠?
그의 외침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죄도 대신지고, 우리들이 외쳐야 하는 것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반에 감정을 넣어서 각자 외쳐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 단절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에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지고 죽으셨다는 확실한 증거의 말씀인 것입니다.
② 그가 온 인류의 죄를 지셨기에 이제는 죽는 것만 남았습니다.
마치 속죄를 위하여 안수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전가받고 죽음 앞에 있는 어린양과 같습니다. 그 어린 양은 곧 피를 흘리며 죽게 될 것입니다.
■ 전통적인 속죄론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해소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지금 대신 예수님께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동일시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죄가 사해져, 하나님의 진노가 해소되어 하나님과 죄인들간에 화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이었습니다.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가 됩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속하기 위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초강력 하이타이도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잿물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정결한 그의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대속의 원리가 구약제사에서 잘 나와있습니다.
사람 대신에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것을 미리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제사는 자주 드려야 합니다. 완전한 제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신이 제물되어 피를 흘리심으로 다시는 동물제사가 필요없는 한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한번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원한 온전한 제사를 드려 다시는 불법을 기억하지도 않으신다고 하시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 동물제사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되고, 다시는 모형으로 보여주신 동물제사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동물 머리갖다 놓고 제사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 성경에서의 속죄방법은 명쾌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행위로 많은 선행과 노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게 연약한 우리들에게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과 함께한 아둘람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환란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고린도교회 공동체처럼 지혜도 많지 않고, 능한 것도 많지 않고, 문벌도 좋지 않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말입니다.
이게 진짜 복음입니다. 복된소식입니다.
→ 다른종교들은 주로 행위구원입니다. 뭔가를 해야합니다. 무슬림의 경우에도 선을 악보다 더 많이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저울에 달아 악이 많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 엎드려 절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하나님께 경배를 몇 번 드립니까? 이슬람교리라면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폭탄 테러로 죽으면 바로 천국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수많은 예쁜 여성들을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롬 10:10). 구원은 단순하고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알지 않습니까?, 거지가 무언가를 했습니까?
누가복음 23장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낙원에 간 한편 강도를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강도가 많은 선을 쌓았습니까?
그래서 그런 자와 같은 우리들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 구약제사는 모형이지만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속죄하는 대속의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은 대속죄일에서 회중을 위한 속죄제에서 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대속죄일 (욤 키푸르, Day of Atonement)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숫염소 두 마리의 모습은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루시는 속죄의 모습을 그대로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력 7.1은 나팔절, 7.10일은 대속죄일입니다, 그리고 7.15-21일은 초막절입니다. 모두 추수가 있는 가을절기들입니다.
나팔절은 주님의 재림을, 대속죄일은 주님 오시면 대대적인 회개와 속죄를, 초막절은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심판과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속죄와 관련이 있으므로 대속죄일에 행해지는 회중을 위한 속죄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 대속죄일이 되면 회중의 속죄를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를 준비합니다.
당연히 제물이므로 흠이 없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무죄한 것처럼 말입니다. → 대속죄일이 아닌 회중의 속죄 때에는 수송아지 준비 (레 4:14)
→ 왜, 숫염소일까요? 들이받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숫염소 특징이 뿔이 있어 잘 들이받습니다. 그런 뿔은 제거 되어져야 하고 예수님의 일곱 뿔의 권세를 받아야 합니다 (스가랴 1: 20-21)
두 염소를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속죄제물로 사용합니다.
[레위기 16: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위하여”는 원어는 전치사 “레”를 사용하고 있는데, 위하여 뜻도 있지만, 을 향하여 뜻으로 해석해도 무난합니다.
1) 먼저, 여호와를 위한 염소 한마리는 속죄제물로 피를 흘려 죽습니다.<사진>
대제사장은 속죄제 염소를 잡아서 대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유일하게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 대속죄일이 아닌 회중의 속죄 때에는 휘장 앞에 피를 뿌림 (레 4:17)
그가 나오기까지 회막에 아무도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와 제단 모퉁이 뿔에 그 피를 바르고 그 위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기름은 다 떼어서 제단에 불사르고, 나머지 가죽, 고기, 똥 등을 진영 밖으로 내다가 불사르게 됩니다 (레 16:16-27).
① 이 여호와를 위한 숫염소의 피로 회중의 죄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것을 정결하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 16: 14-20)
※ 참고로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는 속죄제는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의 경우에 한합니다.
그동안 회중의 죄로 인하여 더렵혀진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가는 곳마다 영적으로 더렵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나오기까지 회막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 한 마리는 이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염소인 것입니다.
→ 지성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필요합니다.
대제사장도 피 없이는 지성소에 못들어갑니다. 그냥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이 자리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피의 공로입니다.
피 없는 예배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기도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이유입니다. 이 강단에, 성전에, 그리고 성전되는 여러분들 마음에 예수의 피가 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 1:2). 피범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룩한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성막이나, 성전뜰에서 짐승이 잡혀지고 그 피가 여기 저기 뿌려지는데 사실 피비린내 나는 장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거룩하냐 하면, 대제사장 속죄소에 피를 뿌리기 전에 향을 피워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먼저 가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레 16:13).
죄인의 더러운 눈으로 거룩한 속죄소를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그 피가 대제사장을 통해서 지성소에 들어가 뿌려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하늘 성전으로 인도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님의 장막이 마음의 성전이 있는 우리 위에 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 21:3, 7:14-16). 그리고 기도로, 예배로 인도하는 것이 예수의 피입니다.
③ 이 여호와를 위한 속죄 염소의 기름은 제단에 불태워지고, 똥 등은 진영 밖에서 불태워집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온전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와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아사셀을 위한 염소 한 마리가 남았습니다.
이것도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① 어떤 학자들은 이 아사셀의 모형이 예수님 때문에 풀려난 바라바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명절에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가 놓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회중을 위한 속죄제 두 염소 중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예수님처럼 죽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바라바처럼 광야로 내보내지기 때문입니다.
바라바가 풀려나서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는 숫염소와 같이 뿔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들이 받는 인생이 광야 같은 곳에서 살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죽는 인생은 보여줍니다.
② 아사셀(히, 아자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에즈(z[e, 염소)와 아잘(lz'a, 떠나다)에서 유래하였다고 간주하여 “떠나는 염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경인 에녹서에서는 아사셀이 “악령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③ 아사셀 염소에게 대제사장은 두손을 얹고 안수하여 회중의 죄를 전가합니다.
회중의 모든 죄, 불의가 그 염소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죄의 인파테이션입니다.
[레위기 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 이것은 우리들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기도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전가시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떠났습니다.
④ 그리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서 접근하기 어려운 땅 (무인지경)에 이르러 광야에 놓아보냅니다.
그 염소는 산채로 보내지지만 광야로 가서 짐승에게 잡혀 죽거나 굶거나 결국 죽게 됩니다. 죄를 지고 내보내졌기 때문에 그 염소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죄인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회중의 모든 죄가 떠나고 멀어졌다는 보여줍니다.
[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오늘날 우리들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멀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죄가 사탄이 있는 사망으로 보내어 진 것입니다.
→ 죄를 지고간 아사셀 염소가 사망이 있는 악령에게 보내어진 것으로 해석하면, 아사셀 염소가 회중의 모든 죄를 지고가 죽음으로 회중의 죄 값이 다 치루어졌다는 사탄을 향한 선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④ 그러면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이 해석대로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악령이 있는 음부, 사망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죄인이 죽으면 사탄의 권세가 있는 음부, 사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음부, 사망은 사탄의 권세, 스올의 권세 아래 있는 곳입니다 (계 6:8, 시 49:15, 89:48, 호 13:14)
▶ 예수님께서 음부(옥)에 가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한 곳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옥에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정통교리에서는 지옥에 가 있는 자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 1:8)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하실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옥에 가서 전파한 죽은 자들은 베드로전서 3:20장을 보면 노아의 홍수때 복종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옥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 “옥”으로 번역한 헬라어 “퓔라케”는 그냥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감옥(행 26:10, 퓔라케))에도 사용되지만 계시록 20: 7절에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곳인 옥(퓔라케)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0: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사도행전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예수님께서 옥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죽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벧전 4:6절에서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부활하시기 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기까지도 하나님께 가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우리들이 받아들인다면, 사흘동안 죽음에 있는 기간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죄인들이 가는 옥에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죄인은 반드시 옥에 가야하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정통 교리에는 죽은 자의 구원을 거부합니다.
→ 예수님께서 옥에 간 것을 받아들이면, 아사셀 염소는 죽음, 사망이 있는 옥에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사망과 음부도 우리 주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도 그들의 합법적인 권세가 주님의 허락하에 활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스올의 권세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옥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호세아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그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아직까지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3. 그러므로 예수님은 속죄의 죽음으로 끝이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고 음부, 옥에 내려갔지만 ① 그에게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닌 것과 ②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유로 죽음, 스올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에베소서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니라
죽으시기 전까지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를 우리 대신에 외쳤지만 결국 영광 가운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고 전혀 응답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예레미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찌하여”의 탄식이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입니까?
[예레미야애가 5: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이사야 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기도가 잘 응답이 될 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면 계속 죄를 회개하시고 인내하며 기다리셔야 합니다. 자아가, 고집이 내 뜻이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죄로 인하여 내 자아가 죽는 과정입니다.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곧 끝이 날 것입니다.
곧 부활의 영광과 같이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죽은 자가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롬 6:5)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대속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달으시고, 믿음의 여정 가운데서 다소 힘든 시간이 다가올찌라도 이내하셔서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