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우리가 3학년때인 1961년엔 저학년은 2부제 학업을 해서 오전반, 오후반도 있었던 때였는데
새교사로 이전하면서 교실도 많이 확충을 하고 해서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오후반일때는 참으로 학교가는일 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 심심하고 해서 아침내 빈둥 빈둥거리다가
점심을 미리 땡겨먹고 학교로 가서 가게방 기웃거리기도 하고 딱지치기, 자치기나 하면서 시간
때우기도 했었구요
비가오고 나면 미쳐 다져지지 않은 운동장이 빗물에 쓸려서 군데 군데 패여나가고 모퉁이가 무너져내려
삽과 양동이를 가지고 가서 선배들과 함께 운동장에 흙퍼나르고 그런날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등교 할때면 너나없이 여학생은 양동이를 남학생은 삽자루 하나씩을 시골포수 꿩사냥 하러 가듯이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를 오고 가던 모습 참 가관이었을 겁니다
신축교사로 이사를 하니 요즘 살림살이 이사하면 한동안 이사짐정리 하느라 고생하듯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품삯을 졸업할 때 다 정산해서 받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장면#1 - 그해 봄소풍이었던가? 아님 다음해 이었던가 하여튼 3, 4학년쯤의 봄소풍때 한토막 기억입니다
시골농촌에서의 소풍과 운동회는 학교만의 행사가 아니라 취학자녀를둔 동네의 행사이기도 한 그때
우리에 학부형들도 될수록 이면 동참해서 동네분들끼리 모여서 솜씨있게 차려온 점심을 모두 둘러앉아
함께 먹고는 했습니다 고학년 학생들은 조금 예외로 하더라도(부모동행없이 혼자서다님)
단골장소인 용궁사앞 어느곳에서 학교 학생들 모두 모여 장기자랑겸 유흥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반 차례가 되어 최ㅇ진이가 앞으로 나가더니 음악시간에 배운듯한 무슨 노래를(기억안남)
또박 또박 기운차게 부르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개인정보보호법 거슬린다면 정정하겠슴다)
그친구가 다른것도 잘했지만 음악시간에 더 재능이 있었던 듯 합니다
저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무리에서 좀 떨어져 어머님과 가까이서 그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모친이 하신말씀 - “승일아(아명) 너는 저렇게 못하지?”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는듯합니다
아니 “너도 한번 나가 보지 않을래” 또는 “너도 저렇게 할수 있냐?” 라고 하시지는 못하고 말입니다
‘내자식은 내가 젤 잘안다’ 고 자신하신 듯 합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낮가림있고, 용기부족하고, 소심하고,그런 성격을 어머님은 꿰뚫어 보신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에효 낮가죽이 그렇게 얇아가지고 사내자식이 뭘하나 잘하는게 있을수 있을까 쯧쯧)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모양으로 지금껏 이렇게 뭉개고 지내고 있습니다 - 끌끌
말이 장기자랑이지 요즘애들로 치면 참 어설프고 썰렁한 모습일겁니다
지금 3,4학년 끼있는 학생들 성인 예능인들 저리가라 아닙니까?
며칠전 어떤예정된 자리에서 반가운 몇몇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 그친구도 있었구요
지금도 예전처럼 용기있는 모습에 달변까지 여전합니다
나름대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이 무엇인지 아는사람, 그래서 자기생활에 만족함과 여유로움을
가지고 주위에서 인정하는 가치있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장면#2 - 어느날 등굣길에 중앙청에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서울이 난리가 났다는 얘기들을 하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를 교환하던 기억이 납니다 소풍시즌이 지나고 한참 늦은봄을 보내면서
여름흉내를 내던 1961.5.17.쯤 이겠지요
그날 5.16일에는 어른들이야 라디오에서 전하는 소식으로 우리보다 일찍 알았겠지만
멀리 교통사각지대인 섬에서 꼬맹이들이야 알수도 없고 전날 저녁때 들은 정보로 대충 눈치로 알았던
5.16 혁명말입니다 중앙청이야 머 종로에 있던 동인천 어디에 있건 또 누가 대빵이 되던 그건
내알바아니고, 이거 학교 때려치우고 6.25때처럼 가마솥메고 피난가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도 이파릇파릇한 아까운 인생 채피어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종치는거 아닌가 하는 근심 걱정으로
그좁디좁은 어깨가 천근만근 그랬다니까요 글쎄 - -
그런 다음날 육사생도가 어쩌고 하더니 그만 잠잠해지기는 했지만요
그이후는 우리가 자라오면서 동행을 한셈이니 뭐 잘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정치적인 판단은 각자의 가치관이므로 여기서 O,X 보수,진보는 무의미 합니다. 여러명이 공유하는 공개적인
영역이라는 것, 여기서는 그런 정치적인게 없어서 좋습니다
요새 한참 광장붐이(광화문,서울역) 달아올라서 좀 그렇긴 합니다
5.17.그때 생각했던 것 처럼 배를 접어서(사공이 많으니) 둘러메고 산으로 피난을 가야하나 아님
흘러내리려는 바지춤을 단단히 부여잡고 뜀박질을 준비해야 할까요?(요즘 자동차로는 어림없슴다)
오늘은 경칩을 며칠앞두고 봄비가 추적추적 예전 추억이 더욱더 목울대를 간지럽게 하네요
주모! 여기 탁배기 한잔 주쇼 푹삭힌 홍어한점 얹어서 - 카페지기님 즐겨찾는 레퍼토리
그동안 실내에 가둬 놓았던 화분들을 베란다로 쫒아내도 좋을 듯 합니다
김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고 그랬지만, 우리는 이제 ’너 자신을 알았다‘ 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경로우대권까지 챙겨주면서 지하철을 무료탑승 해주지 않습니까?
그만큼 연륜이 쌓여 제법 자신만의 경지를 이루어 이제는 조금씩 베풀며 살아가라고 다독여
주는것이라 생각합니다
횐님들 여기에다 많이 나눠 주세요, 종류불문글로 , 한줄이라도, 댓글이라도-썰렁하네요 지기님만 바쁘구 ^^
바2, 바2
첫댓글 이런 좋은 글은 우리 몇사람 만 보기가 너무 아깝습니다.
단행본이라도 만들면 좋겠네요.
엊그제는 친구의 글을 읽고 내 소학교적을 추억하느라 잠을 늦게 잤답니다.
6학년 6반이 되어서 그 시절을 생생하게 다시 그려볼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저 고맙고요...
계속 연재 부탁합니다.!!!!!
단행본이라? 무신 씰데없는말씀. 그져 재밌게 봐주신것으로 끝.
신문에뜰이라구 하나요 송산길에서 버스신작로와 만나는 학교 동산앞에 좀길게 생긴 논길로 등교하는
슨상님과 글구 친구들 모습이 있습니다-그때 스마트폰이 있었어야 하는데, 쩝
우리 성일이 늦게나마 천재적 글꾼 소질발견 아주좋아요
뛰어난 기억력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냅니다. 지금이야 인천공항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름도 알지 못하던 섬 영종도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인해서 추억을 공감해 봅니다. 좋은 탈렌트를 발휘하여 계속 좋은 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한번도 같은반에서 부대끼지 않은듯 합니다. 함께 묻어가는신세-잘 봐주셈
신문에 둑으로 기억을 하면서 그 이름이 정확지 않아서 고민했었음.
학교앞 작은 저수지.
아니 영종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생각됨. 더 큰곳이 있는지 몰라도 그때는 그곳 밖에 몰랐으니까...
겨울방학에는 그곳에서 썰매타기 대회가 있었고...
봄에는 개구리가 알을 낳고 올챙이가 무리지어다니고
개구리가 헤엄쳐 다니던 논.
노*일 선생님과 황*영 선생님과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한 그곳.
그립습니다.
그게 정식명칭이 십문에 둑이랍니다 애초에 조그만 수문10개를 만들어서 그렇답니다 럴수가 ^^
어떻게 그런것까지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하여튼 반갑고...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