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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사 속의 위대한 여인들---
3. 사라
복귀섭리사에는 수많은 섭리적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많은 여인들이 복귀섭리를 위해 수고하고 고생하셨던 이유는, 여인인 해와가 타락함으로 그것을 복귀해야 하는 섭리적 조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해와와 노아의 아내에 이어 섭리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여인이었던 사라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라가 위대한 여인이 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섭리적 사명을 수행해 가는 남편을 절대 사랑했다는 것과 그 혈통을 중시했다는 것, 이 두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섭리를 수행해 가는 남편에 대한 절대 사랑
사라는 아브라함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시아버지 데라와 남편 아브라함을 따라 묵묵히 순종하며 갈데아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갑니다.(창 11:31)
하란에서 소명을 받고 하란 땅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평범한 부부였습니다.
사라는 이렇게 한결같이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불평 하나 없이 남편이 어디를 가든 한결같이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는 여인으로서 쉽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이미 하나님은 미리 아브라함을 섭리적 중심인물로 세우실 작정을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게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창 15:7)
더구나 하란에서 하나님의 소명(창 12:1)을 받은 이후에는 아브라함은 단순한 남편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라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은 후에는 섭리적 입장에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증거는 사라의 이후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네겝에 살고 있을 때 기근이 들어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게 되었을 때 사라는 무능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상천외한 미인계를 써서 위기의 가정을 구하고 또한 아브라함에 대한 절대적 사랑으로 자신의 순결도 지켜냅니다.
(참고로 흥진님의 메시지를 빌어 그 때의 상황을 알아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사라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가정의 문제 때문에 바로 왕에게 빼앗긴 바 됩니다.
물론 성경에 잘 밝혀져 있는 바와 같이 부부였지만 남매라고 속이고 바로의 침실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브라함의 요구에 의해 사라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이 바로의 애첩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남편이지만 그녀는 절대적으로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왕의 애첩보다는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섭리적 사명을 짊어진 남편에 대한 절대적 사랑은 부귀영화를 안겨줄 바로 왕도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지혜를 짜내 자신의 온몸에 소, 대변을 발라두고서 바로를 맞았던 것입니다.
이에 깜짝 놀란 바로가 사라에게 물었을 때 비로소 사라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남편에 대한 절대적 사랑에 대해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이 물질을 축복해 준 것입니다.
결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바로야! 그 여자를 침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런 사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우리는 더욱더 그 사건의 내용이 원리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원리적으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노아의 믿음의 기대를 상속받을 수 있는 기대를 세우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라는 남편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사랑으로 가정을 위기에서 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간단히 3제물을 제사 드리는 것으로 섭리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협조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분명 아브라함은 경제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해 사라는 그의 무능을 타박하지 않고 자신이 지혜와 희생적인 노력으로 가정을 구하고 남편을 절대적으로 받들어 모심으로 섭리를 상속받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각도에서 사라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아브라함을 무시할 수 있는 내용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제물을 드릴 때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후손이 400년간 노예가 됨)를 받기에 까지 이릅니다.
노아처럼 120년 간이나 방주를 짓는 거대한 일을 놓고 실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하잘 것 없는 비둘기 하나 쪼개지 못해 그런 엄청난 징계를 받은 남편, 충분히 불평하고 타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불평불만없이 다시 묵묵히 탕감의 길을 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승리해서 복귀하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창 20장)
이런 사라의 희생과 아브라함에 대한 절대적 협조가 없었으면 아브라함은 섭리사에 위대한 중심인물로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라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남편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협조로 섭리의 중심 여인으로서 그 책임을 다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이 노아의 아내와 비교해 봤을 때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만약 노아가 이러한 사라같은 아내를 두었다면 섭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
다음으로 사라는 섭리적 사명을 부여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했습니다.
자신이 마흔이 지나도 자식을 못 낳게 되자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들이어 혈통을 이어가게 했습니다.(창 16장)
성경에 의하면 사라가 주동적으로 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여인으로서 남편의 품에 다른 여자를 안긴다는 것은 섭리적 결단과 희생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아닌가요!
하지만 사라는 자신의 사랑보다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더 중시하고 여자로서 사랑을 희생하는 섭리적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여자가 이러한 사랑을 희생하는 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단행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는 사랑의 십자가 길을 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섭리적 혈통을 중시한 위대한 희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인으로서 사랑을 양보한 것은 그 무엇보다 큰 것을 희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사라는 남편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섭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사랑까지 희생하면서 하늘의 혈통을 중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사랑까지 양보한 사라의 섭리적 희생에 하늘이 감동하여 사라에게도 아들을 축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무능한 아브라함은 이렇게 희생적이고 절대적으로 남편을 협조하는 아내 사라의 도움으로 섭리적 사명을 잘 수행해 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비둘기 쪼개는 제물에 실수하였지만 아들 이삭의 절대 믿음과 순종으로 섭리를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사라가 낳은 섭리 앞에 절대 순종하는 이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죽음 앞에 절대 순종하는 이삭의 피는 바로 사라의 피를 전수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라가 남긴 오점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위대한 사라도 잘못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미워하여 쫓아낸 사건입니다.(창 21장)
사라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하여 사랑을 양보하고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게 했습니다.
그런 희생의 기대 위에 하나님은 사라에게도 아들을 축복하여 이삭을 낳게 됩니다.
여기서 사라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물론 하갈이 아브라함의 자식(이스마엘)을 낳고 교만해져서 주인인 사라를 멸시한 면도 있습니다.
성경을 통한 그 표면적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21:9)
그러나 근본 이유는 아브라함의 상속권에 있었습니다.
사라는 장차 아브라함의 장자 상속권이 자신이 낳은 이삭에게 가도록 하기 위한 무리한 조처로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낸 것입니다(창21:10).
하지만 이스마엘은 쫓겨났어도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아래 죽지 않고 살아서 후일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 민족이 바로 아랍권 민족입니다.
이렇듯 사라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시하여 자신의 사랑까지 희생하여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게 하였으나, 자기도 아들(이삭)을 낳게 되자 생각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의 동기와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때 만약 사라가 이삭에게 하늘 뜻맞게 장자권을 상속받게 하고 싶었다면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내지 않고 끝까지 잘 돌보아야 했습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이삭에게 상속권을 스스로 양보하도록 하게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스스로 장자권을 이삭에게 상속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도록 했어야 가장 완벽한 섭리적 완성을 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자연굴복의 길을 가야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사랑을 양보하여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게 했던 그 과정을 하갈과 이스마엘로 하여금 가도록 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아브라함 가정에서 자연스레 가인 아벨의 문제가 해결되고 섭리적 장자권 복귀는 완성을 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은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지 않고 형제간 화목을 이루었더라면 아브라함이 비둘기 쪼개지 않는 헌제 실수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씀 참조)
결국 아브라함 가정은 아담가정처럼 가인이 아벨을 타살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함으로써 두고두고 이삭을 타살하는 섭리적 조건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후세에 아랍권과 이스라엘권(예수님 이후 기독교권)이 갈라져서 서로 투쟁하게 하는 발단이 되게 됩니다.
아랍권과 기독교권의 투쟁은 결국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스마엘과 이삭)끼리의 투쟁인 것입니다.
사라의 이러한 조치로 나중에 이스마엘과 이삭은 이복형제이면서도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가인권과 아벨권의 투쟁은 아브라함가정에서 다시 한 번 그 씨앗을 번식하여 증폭된 것입니다.
가인아벨의 투쟁이 아브라함 가정의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종식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심화되고 깊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섭리사에 가장 훌륭한 모자협조를 넘어서서 부부협조까지 잘 수행한 사라였지만 자식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수를 두어 섭리의 완벽을 기하지 못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사라는 가인아벨 투쟁을 종결시키지 못하는 섭리적 조건을 남겼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이슬람권을 중심한 악의 혈통은 사라가 양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양보는 섭리적 승리를, 질투는 섭리적 실패를 부르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섭리적으로 그토록 훌륭한 길을 갔던 사라는 마지막 자식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수를 써서 섭리적 오점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해 장자권 복귀섭리가 이루어졌더라면 에서와 야곱을 통한 장자권 복귀섭리는 복중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섭리적 중심에 있었던 사라는 엄청난 섭리적 진전과 발전을 가져 왔지만 마지막 장자권 복귀섭리에 완벽을 기하지 못하여 후일 후손이 막대한 탕감을 치러야 하는 섭리적 조건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슬람권 문제)
아브라함과 사라를 중심한 탕감복귀는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음을 깨우쳐 주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
그렇기 때문에 제일 비참한 저변에서부터 하늘은 복귀의 기반을 닦아 왔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랬는데,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이삭이 태어날 때 몇 살이었느냐 하면 열 세 살 때였어요, 열 세 살 때. 그러니 이것을 미워해 가지고, 사라가 미워해 가지고 쫓아내 버린 거예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형님과 형님의 아들딸로서 인정하고 하나됐더라면 어떻게 됐겠어요? 하나됐더라면 아브라함이 제물 드리는 데 실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거예요. 역사가 탕감복귀의 길을, 신앙 길을 개척하려면 그것을 그 현재의 입장에 서 가지고 타락하던 현상과 일치될 수 있는 기준에서부터 분별해 나오던 복귀역사라는 거예요, 탕감복귀. 알겠어요? (선집 490권 81-82쪽)
아브라함의 처가 누군가? 사라지요. 사라 앞에 첩이 누구인가?「하갈 입니다.」이스마엘 족속의 조상이 하갈이에요, 하갈. 하갈을 쫓아낼 때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어요? 아벨을 희생시켜 가인을 사랑하면 원수가 안 생겨나 사라가 하갈을 자기보다도…. 우리 통일교회식으로 아벨을 희생시켜 가지고 가인을 사랑한다는 사랑이 있었으면 하갈을 쫓아내겠어요, 갈라졌겠어요? 갈라지려고 하더라도 울고 문을 닫아 버리고 동네 사람을 동원해서 못 가게 길을 막을 수 있는 놀음을 했으면, 오늘날 이스마엘이라든가 회회교라든가 기독교가 싸울 수 있는 원수가 될 수 있느냐? 없어요. 알겠나? (선집 418권 1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