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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의 분노 "왜 복음을 싸구려로 만드는가"
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
나의 정체성은 장애인-주님의 일꾼-목사
여러분들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나는 한국인이라는 국적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것이고, 직업이 떠 오르는 분도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남녀나 싱글과 유부남등 결혼에 관련된 자신의 신분을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여러분의 삶을 주도하는 중요한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지금 누구냐고 만약에 묻는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목사'라는 단어이다. 직업적으로 목사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에 그렇다.
어릴적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가장 저를 주도하고 있던 정체성은 장애인이었다.(소아마비) 당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애인이라는 것이었고 제 삶을 주도했던 생각이었다. 저는 어디에 가던지 장애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했고, 어떤일을 하던지 장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컴플렉스와 불편함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그때 마음속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장애인이어서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떻게 하던지 강하지 않으면 이땅에서 정상적으로 대접을 받으면 살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에 공부도 열심히 해야하고 성격도 좋아야 하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운동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주님을 만나고도 장애인이므로 주님이 저를 특별히 보아주시기를 바랬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내가 장애가 있지만 목사가 될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큰일을 이루시고 저로 하여금 강하게 힘차게 사역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빼놓지 않고 했던 기도는 항상 강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약함때문에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 2학년때 기도하고 우연한 기회에 어떤 집회에서 주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이 나를 강하게 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 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강한것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 강함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갔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의 계획을 경험하고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때 장애인이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사안수를 받고난후 지금까지 삶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정체성은 목사이다. 개인적으로 그렇지만 여러분의 경우는 다를수 있을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것이다. 정체성은 무엇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전도의 문제점-죄인에 대한 오해
전도할 때 사영리에서 말하는 것 처럼 전도하면 안된다
성경에서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말할때 어김없이 나오는 정체성에 대한 답은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확실하고 강력한 자신을 보여주는 정체성이다. 문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면 여러분은 부인을 안하겠지만 그 죄인이라는 말은 오해가 있을수 있다.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하는 당신은 죄인임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이나 당신은 당신이 죄인임을 아는가 라고 시작하는 전도는 잘못됐다.
그렇게 전도해서는 안된다고 할만큼 죄인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보통 전도를 하면서도 당신은 죄인인것을 아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할 만큼 죄인이라는 단어가 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틀림없이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기위해 또 인생의 행복을 찾기위해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고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은 죄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누구를 전도하면서 당신은 당신이 죄인임을 아느냐고 묻고 그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그렇게 전도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도할때 사영리에서 말하는 것 처럼 전도하면 안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사영리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영리의 질문들이 좀 피상적이다. 질문하는 자가 너무 의로워보이거나 아니면 의로운 척하고 있기에 그렇고, 사람들은 질문을 받으면서 질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사실 이렇게 무례할수는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많이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이 죄인임을 아느냐는 질문을 해서 그 사람이 죄인임을 인정하도록 유도하고 이끌어가는 대화가 얼마나 무례한지 모른다.
주님을 영접하고 아버지에게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은밀히 복음을 전했다. 전도를 하면서 아버지도 교회를 가야지요 라고 말하니, 아버지는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가 교회에 갈 필요를 느끼도록 하기위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으냐고 말하며 너희들을 먹여살리느냐고 고생한 것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언잖아 했다. 당시 나는 아버지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사명을 느끼고 지난 아버지의 잘못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도하다 무지 혼났다. 지금 보니 세상에 이렇게 무례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은혜를 받고 예수믿는다는 자식이 아버지앞에 와서 아버지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옛날에 잘못했던 것을 꺼집어 내 이야기하고 죄인을 인정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죄와 죄인에 대한 접근
전도를 하다보면 죄인이라고 하면 질문을 하는 사람과 질문을 받는 사람과의 의도와 생각이 다른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니 설명을 안하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여서 맞다고 하는데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여도 아직 복음에 이를수 없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미와, 듣는 분들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할때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가끔 교인들이 요즘 바쁘냐고 묻는다. 저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그렇다 아니다 라고 선듯 대답한적이 없다. 바쁘냐고 질문을 받으면 왜 질문하는지 머리속으로 생각을 한다. 묻는 의도가 감이 안잡힌다. 그래서 바쁘냐고 물으면 다음 의도를 찾기위해 항상 하는 대답이 "바빴다 안바빴다 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왜 그것을 묻느냐고 다시 반문한다. 질문한 이유를 말해주면 그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의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대화법이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설명없이 하는것은 위험할수 있다.
또 하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그러한 말들이 죄의 상태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전도해서 그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고 인정하도록 만드는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잔인한 분으로 만드는지 모른다. 당신이 장난으로 캔디를 장난으로 훔쳐먹은 적이 있느냐고 물을때 그렇다고 대답하면 캔디를 훔쳐 먹었기에 지옥간다고 한다. 마치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캔디를 훔쳐먹었기에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지은 몇가지 죄를 드러냄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악의가 없는 먹고 살기위해 변명같은 거짓말이었데 그 거짓말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수 있는가. 그냥 죄값대로만 처리하면 된다. 캔디를 훔쳐먹은 만큼 벌을 주시고, 남에게 거짓말 한 만큼만 벌을 주시면 되는데 그 작은죄때문에 소위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인간의 어떤 죄도 용납이 안되기에 바로 하나님이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공평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아니다. 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으로 우리를 누르려고 하는 그러한 독재, 아니면 억압자의 이미지로 나에게 더많이 다가온다.
저는 이런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말씀할때 그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런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의 결과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왔는가를 떠나서, 당신이 죄인이라는 말은 죄의 조건을 증명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은 결국 죽음과 절망과 그것으로 인한 멸망이다. 사람들이 스스로가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력을 찾고 공부를 하고 돈을 벌려고 하지만 성경이 죄인이라는 말은 무엇을 해도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때 두려웠다. 유대인들은 이만하면 안심하다고 생각했다. 택함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전혀 그런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나 혹은 너희들의 선행이나 열심으로는 안전하지 않다. 너희들은 죄인이다"라는 말이 그들을 두렵고 불안하게 했다. 결국은 바울을 죽이고 싶었고 예수를 죽이고 싶은 이유는 예수의 메세지가 본인들이 생각한 안정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것이기에 그렇다. 죄의 결과에 대한 질문을 주님은 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죄의 문제-무엇이 우리의 죄인가?
사실 인간의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무엇인가. 보통말하기를 '불손종'이라고 말한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범한 죄의 근본적인 근원이 불손종인가를 생각해보라. 그들이 범한 죄가 선악과를 따 먹은것인가. 어떤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기에 죄인이 되었다고 말해서 마치 선악과 자체가 영향을 주어서 인간의 몸속에 더러운 피가 흐르게 되었다고 스웨덴 보리나 문선명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선악과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데 먹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손종하고 말을 듣지 않아 영원히 저주를 받게되었다고 보통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을 안들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님이 정말로 "너 먹지말랬잖아. 그랬는데도 그것을 먹어. 정말 말은 안듣는구나. 말을 안들으니 자손대대로 지옥가라"고 말씀했을까. 나는 아닌것 같다. 불손종이 죄인데 불손종보다 더 뿌리깊은 죄가 있다. 사탄이 처음 하와를 찾아와 한 유혹은 무엇인가. 사단은 '하나님이 이 동산에 있는 아무것도 먹지말라고 하시는가'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먹지말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무엇이던지 먹어도 좋은데 선악과는 먹지말라고 하셨다. 사단이 물었을때 하와는 다 먹어도 좋은데 선악과만 먹지말라고 했다고 바르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수있다고 유혹했다. 그 말에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기위해 먹었다. 결국 사단의 교묘한 유혹은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말씀대로 먹지말아야 한다는 언약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단이 했던 질문은 '하나님때문에 자유롭지 않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언약은 인간이 인간되도록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피조물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것이다.
딸이 고등학생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다해도 되는데 12시 전에는 들어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듣다가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넘어가곤 했다. 어느날 한번 늦게와서 야단을 치니 딸은 나에게 아무것도 못하게 한다고 불평했다. 나는 다하라고 했다. 하지만 12시까지만 들어오라고 했다. 그 약속을 언약이 있기에 딸은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는 것이 그런 유혹이다. 결국은 불손종했지만 아담과 하와가 원한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피조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불손종이 죄인데 불손종을 가능하게 만든 심리는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이땅에 살아가면서 그 죄로 인해 빚어진 현상이다. 죄때문에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없이 내 인생의 안정을 찾으려 돈을 열심히 벌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인정할때 그렇게 이해할수 있을까. 인간은 비교적 안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인정을 하기 보다는 아직까지 불편하고 불안한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부당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주 선하지도 않지만 아주 악하지도 않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죄인된 저주받은 상태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를 만나기전에 행복했는데 느닺없이 친구가 찾아와 전도를 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며 믿기 싫다고 하니 지옥간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안믿으면 지옥가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보통사람은 듣지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불신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안믿어 지옥가는가. 예수안믿으면 지옥간다. 그런데 예수안믿어 지옥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지옥가는 것은 죄인이기에 가는 것이다. 멀쩡하게 잘지내는 사람을 찾아가 믿을래 안믿을래,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이 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죽어가고 있다. 어떤 치유도 안되어 불치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이번에 약이 하나 나왔는데 정말 기가 막힌 약으로 이 약을 먹으면 암을 고칠수 있으니 약을 먹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가 나는 그렇게 충분히 임상이 안된 약을 먹을수 없다고 거절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약을 먹지 않아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약을 먹지 않은 것이 그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다. 그는 약을 안먹어 누가 죽인것이 아니라 암으로 죽은것이다.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거절함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그를 죽게만든 주요원인은 아니다.
불신앙은 우리를 지옥에 가게 만드는 주요원인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한 죄가 우리로 하여금 지옥에 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아들을 준비하셨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멸망의 길을 향해 가며 있으며, 그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믿지않는 사람은 지옥에 보내고 믿는 사람은 천국에 보내는, 가만히 있는 사람을 찾아가 전도해서 안믿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그런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안오셨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인간이 멸망가운데 있게 되어있다.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다.
진짜 복음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복음이 왜 싸구려 복음이 되었는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내가 괜찮다는 생각,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내 인생도 의미가 있는 인생일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조차도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 그 말의 의미는 누가 더 나쁘다고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결과가 인간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죄인이기에 얼마나 노력하든지 얼마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든지 아무것도 할수 없다.
무엇이 그것을 증명하는가. 죽음이다. 죽음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것이 마지막 형벌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죽음때문에 인간이 절망과 허망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의 죄를 증명하려면 죽음을 말하라. 죄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죽음을 말하라. 한번도 거짓말 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보다 당신은 죽는다고 말하라.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말하라. 그때 비로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인간의 상태를 아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그를 믿는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말할때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심각한데도 우리는 죄라는 말뿐만 아니라 믿음도 또한 '예수를 믿으세요' 말할때 그 믿음조차도 피상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너무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대학교때 신유의 은사가 있는 데니스 목사의 집회에 참가했다. 볼티모아에서 집회를 하는데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했다. 계시를 주셨는데 무슨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고쳐주기를 원하신다. 그 암을 가지고 지금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오늘 고쳐주기를 원하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두어사람이 나왔는데 한국사람이 한 분 있었다. 그 목사가 요구한 것은 먹고 있는 약을 빼앗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믿음으로 어떤 약도 먹지말라고 했다. 믿음이다. 당연히 안먹었는데 한달만에 죽었다. 거짓이다. 그가 대구에서 같은 집회를 하고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다. 엉터리 목사이니 그렇다.
만일 진짜라면 믿음은 이런것이라 생각한다. 약을 끓을 필요가 없고, 자신이 할수있는 노력은 다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고쳐달라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기도받는 받아 손해볼것이 없다. 하지만 기도받기위해 약을 끓어야 한다고 말하면 이때 진짜 믿음이 필요하다. 약을 먹던지 기도를 받던지.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는 그 말의 의미를 우리들의 인생관을 바꾸던지 삶의 가치를 바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믿어 손해볼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어 이땅에 사는 동안 복을 주시고 부자가 되게 하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형통하게 하실것이고 죽어도 천국간다는데 설령 천국이 없다고 하더라고 밑져야 본전이다. 이러면 믿겠는가. 손해볼것이 없어서 믿는다. 그런데 어떤 분이 믿으면 더 이상은 재물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되고 영원한 나라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 여러분의 삶을 주도해야 한다고 하면 믿겠는가.
오늘날 복음이 왜 싸구려 복음이 되었는가. 밑져야 본전이다. 믿어서 손해볼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더 좋다. 심심할때 교회나오고 가끔 잘생긴 목사의 설교도 듣고, 교인들끼리 교제도 하고 외로울때 친구가 되고 사업할때 도움도 된다. 가끔씩 교회에 나가 예수믿는다고 고백해서 천국들어가는 입장권을 하나받는다. 세례받고 입장권을 받으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을 받는다니 나는 믿는다는 고백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문제가 없다. 천국을 들어갈때 어떻게 왔느내고 물으면 주님을 믿어서 왔다고 세례증을 보여주면 되는가.
복음에 대한 오해
보통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하는데, 믿는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단순한 지적인 동의정도를 믿음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전도하면서 그 사람이 지적으로 동의해줄수록 쉽게 말한다.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모두가 죄인이다. 거짓말 한적이 있죠. 나도 있다. 잘못한적이 있죠.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 사랑하시고 당산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당신을 형통하게 만들것이고 당신의 문제를 다 해결하실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오늘 만나시겠습니까." 그리고 "저와 함께 기도하겠는가.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 형제가 오늘 하나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축하한다."
그런데도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냥 그렇게 동의한 것 뿐이다. 논쟁을 거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일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수 없어서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지적인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한분인것을 믿고 떤다. 하지만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에 인생을 안맡긴다.
청년들이 UFO를 믿느냐고 물어서 나는 거침없이 믿는다고 했다. 내 말의 의미는 사진에 나오기에 UFO가 있다고 믿는다. 외계에서 온 것이라고 안믿지만 UFO가 있으니가 사진이 찍혀서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동의해도 내인생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날밤부터 하늘에 쳐다보며 본다던지 UFO 기사 조차도 잘 안읽는다. 사실에 대한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지적인 동의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것이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 정도이다. 어딘가에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런 지적인 동의를 종종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르쳐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내가 신뢰할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확신을 믿음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분명히 된다는 확신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믿음일뿐이다. 예를 들어 창년이 하나님이 나에게 자매를 주실줄을 그리고 주신줄을 믿고 감사의 기도를 한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스토커라고 한다. 그냥 확신이 있을 뿐이다. 믿음으로사는교회에 일년내로 5백만불짜리 교회를 주실줄을 믿는다고 말하면 아멘이 나와야 한다. 주실것이라고 생각하는 확신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정신통일이다. 그런것은 믿음이 아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너희가 믿음으로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믿음의 반대말은 자꾸 사람들은 의심이라고 생각하고, 구할때 의심하시 않고 주님이 주실줄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야고보서에서 믿음으로 구하는 내용은 지혜이다. 고난중에 있으면서 지혜를 구할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구하는 것을 받을줄 의심말라는 것이 아니다. 고난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선하심이 의심될때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정신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은 모든것을 하나님께 맡길수 있겠는가. 이것이 믿음의 문제이다.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구했던 사람이 예수님이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듣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고백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 두가지는 다르다. 처음에 말하는 믿음이란 전적으로 믿는다는 말이다. 주님이 요구한 믿음이다.
어떤 변호사를 찾아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이 유능한 변호사임을 믿지만 제 케이스를 맡길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신을 믿을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은 믿지만 신뢰할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소위 교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을 믿는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생을 하나님에 맡기지 못한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니 내가 그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하심을 믿는다고 고백을 한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여 더이상 이땅에서 내가 추구하고 원하고 생각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그 고백이다. 그런데 복음이 마음대로 바꾸어 복음을 너무 쉽게 생각되거나 오해가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예화에서 발견하는 복음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누가복음 16장에 잘나와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살았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서 천국에 갔다.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지옥에 안가겠다고 안심한다. 우리에게 와닿지 않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쪽으로 끌고간다.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지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제가 이해하는 것은 비유에서 부자가 왜 지옥에 갔는가 이유가 안나온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교훈도 아니며 구원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제자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주 부유하게 산 사람이 있는데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산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갔다고 하자.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죽은 비참한 사람이 있는데 천국에 갔다고 하자. 너라면 누구할래"라고 묻는 것이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물었다면 '살아서는 부자, 죽어선 나사로'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 질문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결국은 부자가 지옥에 가고, 거지가 천국에 간다면 누구를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당연히 천국에 간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이 영생의 가치이고 복음의 가치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린다고 해도 도저히 바꿀수 없는 복음의 가치를 말한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거지 나사로도 행복했다고 말할수 있게 하는 것이 은혜이고 복음의 능력이다. 가장 풍요하게 살았던 부자를 가장 불행한자로 만드는 것이 영생의 가치이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가치이다. 이것이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말할때 그 말의 무게이다.
여러분들 인생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들 어찌 가볍다고 소흘히 할수 있겠는가. 아픔을 참으며 천국을 바라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그것을 감당하고 견디게 만드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땅에서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그를 믿는자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엄청난 은혜의 소식이다.
복음은 액세서리이나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완전히 인생을 바꾸어 놓을수 있는 것이다. 가진것을 다팔아 가난한 자를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요구는 제자가 되도록 하기위한 율법적인 요구가 아니라 은혜로의 초청이다. 복음이란 그런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진것을 다주어도 그래도 기쁠수있고, 고난중에도 그래도 여유를 가지고 감사할수 있고, 사업이 힘들어도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때문에 어렵게 사는 이웃 사람을 찾아가 위로를 할수있는 여유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가치이다. 그 복음의 은혜때문에 새로운 삶을 산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전하고 맏는 복음을 좋은 프로그램 하나를 얻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해 놓고 외롭고 힘들때 한번 클릭하고 사업이 안되고 고민이 생길때 두번 클릭하면 하나님이 문제를 다풀어주고 이땅에 사는 동안에 형통하게 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주님이 말씀한 복음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운영시스템(OS)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 되던 프로그램이 안된다. 그전에 즐기던 것들을 못즐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복음이란 완전한 변화를 말한다. 그것에 영생의 가치가 있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가난하고 고난가운데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기도 하지만 이것을 감당하고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여러분들의 생명이고 모든것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내가 믿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진실하기에 오직 그 고백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자유하기를 바란다.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영원한 나라를 소유함을 믿기에 시련을 딛고 일어설수 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2012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