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은행동의 ‘창의 서점’은 신군부 집권 직후 충남대 운동권 출신들이 운영하는 ‘빵잽이과’ 서점이었다. 이제는 푸른
하늘이 된 故 오원진형을 비롯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한 선병열 그리고 지금은 오십대가 된 임일, 김필중 등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해직교사 시절 ‘나도 해볼까’ 하고 갸웃거리기도 했던 ‘진보 먹물들의 메카’였다. 대전의 문예일꾼이나 목회자 그리고 그림쟁이
소리꾼 풍물패들은 당연히 외상장부를 지닌 단골 고객이 되었다. 수시로 벌어지는 압수 수색을 비켜나면서, 김지하의 ‘오적’과 ‘열사
전태일’ ‘찢겨진 산하’ ‘김대중 옥중서신’ 등의 금서들은 책꽂이에서 빼지 않고 책상 밑이나 창고에서 슬그머니 꺼내줬다. 그리고
폐간 잡지 ‘대화’나 ‘뿌리 깊은 나무’에서 거쳐 간 것을 제본하여 신동엽 시집을 만들었고 옆구리 찌르며 끼리끼리 돌려보았다.
우리는 긴급조치 9호 위반 금서를 가슴에 품음으로써 스릴과 깨어있음을 공유했다.
7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대전의 동인지 ‘창과 벽’은 발간 후기에 사회과학적 지향점을 덧붙이면서 시국 진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지금은 초로에 접어든 이은봉, 유도혁, 이은식, 김흥수, 故윤중호, 전인순 등의 청년시절이다. 80년대 노란 껍데기
‘삶의 문학’으로 타이틀을 바꾸면서 소위 무크지 반향에 동참할 즈음이었다. 지하찻집 대성다방이나 두루치기 골목 청양식당을 아지트
삼아 ‘숨 쉬고 있음’을 서로 나누고 만날 때마다 감격해했다. 창의서점에서 구입한 ‘페다고지’나 ‘우상과 이성’도 독파한 다음
오정동 철둑길에서 막걸리와 노가리 구이를 씹었고 이따금 목척교 다리 아래에서 ‘무엇 먹었나’ 낱낱이 확인하며 노랗게 쓰러지기도
했다. 김소월이나 한용운 시집으로 겉장을 포장한 금서읽기에 몰입할 즈음 故 윤중호 시인의 ‘구두렛나루터에서’ 에서 ‘신동엽
시비’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독기를 다스릴 때마다 신동엽 시비에서 소주병을 땄고 금강 물푸레나무 그림자 보며 꺼이꺼이
한숨을 토했다나.
83년 논산 쌘뽈여고 총각 선생의 봄이다. 신동엽 추모제를 위해 부여에 있는 그니의 시비로 이재무 시인과 함께 향하는
마음은 울림과 서스펜스였다. 서울의 대절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고 대신 청주의 김희식, 대구의 배창환, 김용락 등이 먼저 나타나
상견례를 나누었다. 이제 각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무장한 문청들이 시퍼런 기를 세우며 쏟아질 차례다.
시비는 초라했다. 그 옆의 박정희 등의 정치인들 명렬표가 줄줄이 붙은 ‘반공애국비’나 일본에서 세운 ‘불교전래비’ 역시
전혀 웅장하지 않았으나 그니의 비석은 거기에서도 한참 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가슴은 씨앗처럼 바삭거렸다. 드디어 ‘한반도의
모든 진보적 문사들을 동시에 접하는구나’ 하는 설렘과 ‘험한 시국 참으로 조심스럽다’라는 소심증도 겹쳐있었다. 천승세, 이문구,
고은이나 신경림, 백낙청 등 중장년 문사들의 외양이 모두가 의연했다. 젊은 문청들은 이 사람 저 사람을 훑어보며 아, 하는
감탄사만 날렸다. 그렇게 신동엽시비를 매개로 많은 작가들을 한꺼번에 고구마 뿌리처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구순(九旬)의 부친과 미망인 인명선 님의 모습도 처음으로 본 날이다.
고은 시인이 시비 옆에 섰다.
“우리가 함께 죽자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음이 부끄러운 시국입니다.”
골리앗 시인의 절규, 곧바로 젊은 문청들의 눈자위가 진달래빛으로 물들었다. ‘산에 언덕에’ ‘껍데기는 가라’ ‘진달래
산천’으로 차례가 이어졌다. 연세대 성래운 교수는 그대로 외운 채 글자를 한 자씩 끊어서 풀밭에 던졌고 혹자는 쩌렁쩌렁한 낭송으로
몸의 티끌들을 털어내었다. 창작과 비평사의 신작시선집 ‘마침내 시인이여’가 반향을 일으키면서 ‘잠수함의 토끼’로 나설 즈음이다.
‘껍데기는 가라’ 그 남성적 문장이 오래도록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진달래 꽃망울이 봄하늘에 빨갛게 번지는 사월, 울울청년들은
몸이 달아 어디론가 뛰어내리고 싶었다. 우금치와 기미 만세 사일구와 금남로의 스크린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게 아닌가.
취했다. 봄날 그리고 낮술, 구두레 제방둑이 화사한 햇살로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녕 우리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은 기껏 서울행 관광버스로 ‘부여에서 공주’까지 50분이었다. 촌놈 문청들은 대선배들과
살비비기에 나름대로 노력도 기울였다. 내 친구 전무용과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을 얼굴이 닮았다며 너스레 떨었고 젊은 시인 김흥수는
소설가 천승세에게 “중광스님인 줄 알었슈.” 고백해서 비난과 박장대소를 받았다. 그리고 버스는 재빨리 떠났고 마침내 애초의
우리끼리 남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아무도 없네.”
그 소리가 ‘껍데기만 남았네’로 둔갑하여 목을 죄는 것이다. 그 후 지역 문청들이 중앙문사들과 교류를 트기도 했고 나는 솔로가 되었다.
그니는 잘 생겼다. 이른바 수컷 문사들을 꽃미남 스타일과 양산박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가 전자이고 나는 후자이다.
그렇다. 글을 씀으로써 위대하게 자리매김되는 시인이 있고 글의 존재 때문에 고독한 작가가 있다. ‘굵고 짧은’ 시인이 있고
‘가물게 오래 크려는’ 작가도 있다.
그런데.
‘껍데기는 가라.’
그의 울림에 나는 왜 떨림을 느껴야 하는가. 누가 과연 껍데기이고 누가 알맹이인가에 대한 정체성 때문이다. 용역깡패와
철거민과 개발업체와 정치인 중에서 껍데기와 알맹이의 구별이 정말 확실한가. 촛불을 바람막이 해주는 종이컵은 과연 어떤 성향의
껍데기인가? 고갱이를 보호하다가 밭두렁에 처박힌 채 썩어가는 배추껍데기도 마찬가지다. 알맹이는 인간의 창자 속에서 분해되고
껍데기는 밭두렁에서 거름으로 숙성된다. 문학도 만찬가지다.
잠입하듯 모사를 꾸미던 옛 시인의 추모제는 어느 덧 공인된 소도시 연례 행사가 되었다. 이제는 도청과 군청의 재정 지원으로
추모제 때마다 관료와 정치인들이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시인과 관료가 ‘하하하 껍데기는 사라져야 합니다.’ 술잔을 부딪친다.
시인의 ‘금강’을 도마에 올려놓고 ‘4대강 개발’을 논하거나 ‘누가 하늘을 보았다고 하는가 그댁 본 건 쇠항아리’에서
‘쇠항아리’는 뚝 떼내어 ‘맑고 푸른 무공해 하늘’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벗들, 지금 행복한가. 나는 주둥이 묶인 풍선으로 주름 세우며 칼을 가는 중이다.
공자는 천재성을 20대로 보았다. 간혹 30대도 있으나 40 이후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두려움 없음’의
행간은 포기다. 불혹(不惑)이나 지천명(知天命)이나 이순(耳順)의 해석도 마찬가지로 결국 포기의 숫자다. 그렇다. 그게 천재들의
주특기며 ‘짧고 굵은’에서 쌀푸대처럼 쏟아지는 카리스마다. 어쨌든 시인은 나이 40에 문학관을 남긴 채 떠났고 나는 지천명
중반에도 생산에 기를 쓰는 중이다. 이제 그들의 반경을 비켜났으므로 두려움이 없이 글을 쓰리라. 어쩔 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