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F 오너가 "스판덱스(spandex, 고무같이 신축성 있는 섬유 - 옮긴이 주)로 만든 운동복을 입은 무서운 선수들 사이에는 실제로는 산타 클로스나 부활절 토끼, 그리고 요정 사이에보다도 위험이 없다"고 말했을 때, 이는 뉴욕 타임즈지의 제1면을 장식했다. 그로부터 2년 전, WWF 레슬매니아3에서 93,000명의 관중이 입장해 실내 행사 관객 동원의 최다 기록을 세웠을 때, 뉴욕 타임즈지는 이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1989년 WWF 오너가 뉴저지 의회에서 위와 같이 시인하기 이전에는, 과연 사람들은 레슬링이 진짜라고 믿었을까?
프로레슬링 경기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이후 각본 하에서 운영되어 왔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임을 숙지해 주시기 바란다. - 옮긴이 주)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이며, 단지 레슬링 프로모션에서 공식적으로 어떻다고 시인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1930년대 이후 각종 언론이 레슬링 경기가 각본 하에서 운영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밝혀 왔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타임즈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보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 소식에 놀라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몇몇 지식인과 몇몇 팬들만이 제기하던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프로레슬링이 스포츠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고는, 위의 기사를 수백만 달러 짜리 '비즈니스'를 경시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로 간주했다. 프로레슬링이 진짜인가 하는 문제는 초반부터 스포츠에 관한 주제 토론에 끼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모든 레슬링 팬은 바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프로레슬링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무엇하러 레슬링을 본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터무니없다. "언더테이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원래 죽은 사람이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이며, 매주 월요일 밤 케이블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믿는 팬이 과연 있을 것인가?
WWF의 모회사인 타이탄 스포츠(Titan Sports)에서는 10세 이상의 사람들이 WWF 경기를 진짜로 싸우는 경기로 믿기를 바라고 있을까? 오랫동안 레슬링 팬이었으며 현재 레슬링에 관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리키 지리(Ricky Giri)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짜고 한다는 사실을 들어 레슬링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곤 한다. 언젠 누가 뭐 짜고 하는 게 아니라고 우겼던가? 토크 쇼에 출연한 레슬러들은 한결같이 레슬링이 짜고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이는 정말로 한심한 일이다. 왜 제리 세인펠드(Jerry Seinfeld)에게는 '세인펠드'가 가짜냐고 묻지 않는가? 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이다.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사실, 프로레슬링의 재미는 짜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모든 사람은 레슬링이 진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최소한 진짜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은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레슬링은 매주 레슬링을 보는 수많은 골수팬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어떤 신비감을 안겨 주고 있다.
프랑스의 로랜드 바스(Roland Barthes)는 '레슬링의 세계'라는 에세이에서 레슬링을 '가짜 스포츠' 이상의 것으로 보고 논의를 전개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레슬링은 스포츠가 아니라 스펙터클이며, 레슬링을 보는 것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과도 흡사하다." 이 에세이는 기호학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있고 프로레슬링만의 독특한 요소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레슬링이 다른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은 무난한 접근이라 하겠다.
프로레슬링의 핵심은 '도덕극'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프로레슬링이 완전히 스포츠에서 배제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프로레슬링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를 만났을 때, 그 배우를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배역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슬링에서는, 만일 당신이 릭 플레어와 악수를 했다면 당신은 프로레슬링에 나오는 릭 플레어와 악수한 것이다. 즉, 레슬링에서는 배역이 곧 실제인물과 같다.
어쩌면 이것은 팬들이 레슬러들의 진짜 이름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에, 대부분의 레슬러들은 공적으로도 그들의 '연기'를 지속한다는 이유도 있다. 레슬러들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케이페이브'(kayfabe)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케이페이브'란 19세기의 카니발, 의약품 선전판매 쇼, 그리고 서커스 쇼에서 나온 말로, 간단히 '사기' 혹은 '기만'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즉 '케이페이비안'(kayfabian)이라고 하면 '사기 예술가'를 뜻한다. 대부분의 레슬러는 이렇게 '케이페이비안'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이 말이 나오면 자신이 여전히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이페이비안'들은 레슬링을 '진짜'라고 하는 것과 '가짜'라고 하는 것 사이의 애매모호한 자리에 서 있다. 예를 들어, 레슬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이 진짜냐 아니면 가짜냐고 묻는 게 이제는 지겹다. 나는 이 '가짜'(fake)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짜'(fake)라는 말은 '레슬러는 아주 쉬운 일을 하는 쇼꾼'이라는 인상을 준다. 레슬러로 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레슬링은 스포츠임과 동시에 연극인 것이다." 즉, 레슬링은 '진짜'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레슬링 경기 결과는 사전에 짜여지는가"라고 물었을 때, 레슬러들은 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그걸 모른다면 나도 안 가르쳐주지." 이것은 레슬러들이 잘 모르는 사람을 놀려주기 위해 '케이페이브'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대답은 바보같은 질문에 대한 바보같은 답변인 것이다. 위의 대답 속에는 이미 '정답'이 들어가 있으며, 만일 그러고도 진의를 몰라 다시 묻는다면 레슬링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너무 멍청해서 그랬을 것이다. 즉, 레슬링은 '가짜'이다.
문제는 계속된다. 팬들은 레슬링이 사전에 짜여진다는 사실은 알지만, 누가 스토리라인에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팬들은 경기 결과가 사전에 결정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경기가 정교한 각본에 따라 그대로 진행되는지 아니면 선수들의 재량에 맡긴 즉흥적인 부분도 있는지는 알지 못하며, 레슬러들이 정교한 각본을 만드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주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또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된다. 팬들이 레슬링을 볼 때, 그들은 "저건 가짜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건 진짜군"이라고 생각할만한 순간을 기다리면서도 "저건 가짜군"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다. 즉, 팬들은 가짜를 보면서, 동시에 그 가짜를 통해 진짜를 보고 싶어한다. 또한 팬들은 각각의 펀치들의 강약을 살펴보고, 현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스토리라인과 갈등관계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그 '공연'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레슬링만이 가져오는 묘미는 청중들을 직접적으로 그 공연에 끌어들인다는 점에 있다. 팬들은 이를 통해 문화적인 규범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이를 깨부수기도 하고, 레슬링 경기를 진짜로 봄과 동시에 가짜로 보기도 한다.
프로레슬링과 같은 문화적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프로레슬링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순수한 경쟁'인 야구나 복싱 같은 '스포츠 카테고리'에는 속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 보울(Super Bowl)같은 것만 보더라도 현대 스포츠는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연극적인 이벤트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치어리더와 불꽃, 아나운서, 그리고 하프타임의 쇼 같은 것은 순수한 스포츠에서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현대 스포츠의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심지어 고등학교 풋볼 팀에도 치어리더가 있다. 이런 요소들은 현대 스포츠의 드라마적인 성격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시청률이나 입장료 수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극적인 요소들은 프로레슬링이나 다른 스포츠 모두에 들어 있지만, 이것은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레슬링은 다른 경쟁 스포츠가 변화된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스포츠는 단순한 게임에서 출발해 자기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소원'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언론과 대중들에 의해 멜로 드라마로 바뀐다. 반대로, 레슬링은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 출발해 게임으로 바뀐다.
아마도 이것이 스포츠와 관련한 프로레슬링의 가장 정확한 정의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은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스포츠 퍼포먼스로서 선수들끼리 '경쟁'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에 있으므로, 승패의 기록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인 것이다. 프로레슬링에 관한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프로레슬링이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윤리적 사조라는 것은, 일부 하층계층이 바라는 대로 도덕적인 규칙 같은 것이 없고 선(善)이 승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선(善)이 더 옳으며 더 많은 환호를 받게 된다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프로레슬링: 노동자 계층의 스포츠
스포츠나 레저 활동은 그 참여자의 경제적 지위 혹은 계층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스포츠에 참여함으로써 사회경제적인 위치가 결정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스포츠에 해당하는 특정한 경제적 계층에 대한 친근감을 확고히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장 주인은 노동자와의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거대트럭경주'에 참여하기도 하고, 선거로 선출된 관료는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야구 경기의 초구를 던지기도 한다. 카 레이싱은 노동자 계층의 스포츠로 간주되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어느 정도의 공통적인 선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 스포츠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1) 우아함이나 기교보다는 스피드와 힘, (2) 프롤레타리아 문화에서 드러나는 인공품들 (예를 들어 모토사이클), (3) 참여선수와의 동화(同化), (4) 가끔 관객이 참여자가 된다는 사실. 프로레슬링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레슬링과 노동자 계층과의 연결은 그 어떠한 프로레슬링 기구보다도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어떠한 형식의 레슬링이건, '달리기'를 빼고는 그 어느 스포츠보다도 인간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레슬링과 달리기는 별다른 기구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원시사회이건 현대사회이건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레슬링이 프롤레타리아 스포츠라는 한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레슬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언제나 '인민의 스포츠'였다.
첫째, 레슬링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축제에서 예정된 행사로 혹은 즉흥 행사로 열리곤 했다. 둘째, 레슬링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귀족 계층보다는 평민 계층들이었다. 셋째, 레슬링은 사회주도층에게만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민들 모두를 관객으로 끌어들였다. 레슬링에 관한 이들 세 가지 진술은 시초부터 사실이었으며, 현대 프로레슬링이 출현한 이후에도 여전히 사실이었다.
프로레슬링의 시초는 순수한 격투기 경기였다. 즉, 레슬링은 처음에는 '가짜 경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1680년경에 레슬링이 등장했다. 워싱턴이나 링컨도 레슬링에 참여했었다. 이미 링컨 시절에 다른 마을 출신의 도전자가 이 마을 출신의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시골 레슬링이 존재했었다.
이 기간동안 레슬링에는 '칼라 앤드 엘보우'(collar and elbow), '그레코로만', 그리고 '캐취-애즈-캐취-캔'(catch-as-catch-can)이라는 세 가지 방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캐취-애즈-캐취-캔'이 가장 인기있는 방식이긴 했지만, '칼라 앤드 엘보우' 방식이 현재의 프로레슬링 혹은 아마추어 레슬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칼라 앤드 엘보우' 방식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 보급되었으며, 버몬트 지역에서 가장 유행했다. '칼라 앤드 엘보우'라는 말은 경기가 시작될 때 레슬러들이 서 있는 자세에서 유래되었다. 레슬러들은 한 손을 상대의 어깨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상대의 팔꿈치에 놓은 채 경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경기는 이 자세에서 레슬러들이 치고 달리고 하면서 진행된다. 처음의 이 자세는 어느 한 선수가 다른 선수를 매트 위로 누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이후 레슬러들은 어느 한 선수가 상대 선수의 어깨와 엉덩이를 매트에 닿게 한 채로 카운트 3을 얻을 때까지 계속 싸운다. 이러한 경기 방식은 한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칼라 앤드 엘보우' 방식은 남북전쟁 기간 중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장교들은 사병을 훈련시키기 위한 스포츠로 레슬링을 택했다. 레슬링은 별다른 장치가 필요 없기 때문에 군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버몬트 레슬러들의 실력은 대단했고, 그들의 '칼라 앤드 엘보우' 방식은 군대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까지 레슬링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레슬링은 지역 신문을 장식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레슬링의 '이상'은 프로페셔널이 아닌 아마추어였다.
격투기나 레슬링은 도박에 도입되고 관객을 흥분시키면서 점차 '직업적', 즉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단순한 주먹싸움을 보도하지 않듯이 프로페셔널한 레슬링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언론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은 갈수록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레슬링도 '직업적', 즉 프로페셔널하게 되기 위해서는 '기업가'들이 필요했다.
야구에서는 기업가가 팀을 소유하고, 어느 한 기업가의 팀은 다른 기업가의 팀과 경기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레슬링에서는, 기업가 자신이 프로모터가 되는 것이다. 프로모터의 직무는 장소를 제공하고 연봉을 지불하며 경기를 진행시키는 것이며, 그 대가로 이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초기 레슬링의 프로모터들은 살롱의 주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살롱에 스테이지 홀을 새로 만들어 살롱을 '스포츠 바'로 탈바꿈시켰다. 그들은 레슬링 경기와 격투기를 열었고, 그 대신 관객으로부터 입장료를 받았다. 레슬링 시합이 갈수록 인기를 끌게 되자, 1880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전신인 길모어 가든에서 처음으로 레슬링 이벤트가 열리게 되었다.
윌리엄 멀둔과 타이바드 파우어의 경기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3000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이 경기는 '칼라 앤드 엘보우' 방식이 아닌 그레코로만 방식으로 열렸기 때문인지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지는 않고 있으나,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멀둔은 이 경기에서 이겨 그레코로만 챔피언이 되어 경기장을 나갔다. 프로모터들은 어떤 레슬링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레코로만 방식으로 열린 이 경기의 커다란 인기는 이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프로레슬링의 '국제화'
18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프로레슬러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경기를 가지면서 레슬링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그리 '존경받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프로레슬링은 야구처럼 하나의 리그로 통합될 수 없었으며, 각각의 프로모터들은 스스로의 '세계 챔피언'을 소개하곤 했다. 그래서 레슬링은 여전히 고상한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 성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패자에게는 대전료가 지급되지 않는 방식에서 서서히 벗어나 상대 선수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싸우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프로레슬링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특히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제적인 스포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08년과 1911년에 열린 러시아인 조지 하켄슈미트(George Hackenschmidt)의 경기는 당시의 미국 프로레슬링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상대 선수는 아이오와 출신인 프랭크 카취(Frank Gotch)였는데, 그는 톰 젠킨스(Tom Jenkins)를 누른지 4년 뒤에야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된 바 있다. 당시의 세계 챔피언은 아직은 견고하게 조직화되지 않았던 NWA(National Wrestling Alliance)에 의해 인정되었는데, 프랭크 가취는 1908년까지 이 타이틀을 유지했다. 1908년의 이 경기는 조지 하켄슈미트가 "프랭크 가취가 기술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온몸에 기름을 발라댔다"면서 두 시간 동안이나 경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다. 1911년, 시카고에서 있었던 재경기는 4만명의 관객이 입장했으며 입장료 수입은 당시의 기록인 9만 달러였다. 그러나, 이 두번째 경기는 엄청난 재정 수입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실패'였다. 하켄슈미트는 연습 중 파트너 때문에 다리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이 파트너는 가취에 의해 매수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가취는 몇 분만에 손쉽게 승리를 따낼 수 있었고, 멋진 경기를 기대했던 관중은 실망에 싸였다. 1908년, 그리고 1911년의 이들 두 경기는 프로레슬링의 엄청난 인기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를 가져왔다.
두 경기의 실패로 프로레슬링은 1920년대 후반까지 일시적인 쇠퇴기를 맞게 된다. 가취와 하켄슈미트의 경기는 프로레슬링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두시간이나 지연된 1908년의 경기는 너무 길고 지루했다. 1911년의 경기는 프로레슬링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을 뿐 아무런 만족감도 관객에게 안겨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경기는 너무 짧게 끝났기 때문에, 레슬링 경기의 진행 시간이 조정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에 프로레슬링은 콘테스트(contest)에서 쇼(show)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만회되지 않았다. 1920년대 중반까지 많은 프로모션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대신 소규모 프로모션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사전에 경기 결과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팬들이 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1929년 뉴욕에서, 술취한 신문기자는 그 다음 날에 열릴 경기 결과를 실수로 신문에 싣기도 했다.
프로레슬링은 두 가지 극단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관객들은 한 쪽에서는 정형화된 '의식'에 지루해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프로모터들의 '속임수'에 분개해 했다. 1930년대까지 프로레슬링은 웃음거리에 불과했으며, 관객들은 하층 계층의 사람들로 간주되었고 더 나아가 바보로 여겨졌다.
결국 1930년대 말, 프로레슬링은 완전히 주류 스포츠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존립 자체가 문제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소규모 지역 프로모션의 경기들을 관람하는 노동자 계층의 팬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33년에는 6명의 '세계 챔피언'이 존재했다. 1934년에는 2명이 존재하더니, 1943년에는 15명으로 늘어났다. 각 지역 프로모터들은 미국 내에서의 자신의 '영토'를 유지한 채 다른 프로모터와의 경계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지역 프로모터들은 과거의 거대한 프로모션이 챙길 수 있었던 엄청난 돈은 벌 수 없었지만, 레슬링 경기를 여는 데 별로 커다란 비용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영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당시의 프로모터들은 각 레슬러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장기간 계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레슬링은 지역 스포츠였으며, 아무나 등장해서 싸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이 출전하게 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었다. 레슬링 비즈니스는 아주 열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주류 스포츠에서는 벗어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은 레슬링에 대한 보도를 없앴으며, 스포츠 페이지에 '레슬링'이라고 언급하기만 해도 '진짜 운동선수'들은 모욕이라고 떠들어댔다. 프로레슬링팬들은 노동자 계층이자 바보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텔레비전의 영향
1940년대까지 프로레슬링은 미국 문화에서 인기를 얻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50년대, 텔레비전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방송국 임원들은 제작비가 싸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게 되었다. 방송국 임원들이 어떻게 프로레슬링을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50년대 중반, 프로레슬링은 텔레비전에 등장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는 지역 방송국이 아닌,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방송국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프로레슬링 쇼는 지역 방송국에 의해 방송되었다. 그리고 프로모션의 '지역 협정'은 프로레슬링이 다시 인기를 끌게
된 이때에도 관찰되기 어려웠다.
레슬링이 인기를 끌게 되자 '생방송 이벤트'가 생기게 되었다. 유료 입장객은 1952년의 1천5백만 명에서 1959년에는 2천4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계층이 관객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로써 신문과 방송도 변화의 일로를 겪어야 했다. 레슬링은 더 이상 노동자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신문도 레슬링 기사를 보도하지 않다가는 독자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중매체들은 프로레슬링을 '엔터테인먼트'로 재정의하면서, 레슬러들도 다른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어떤 '실력'을 보유한 선수들임을 숙지시키게 되었다.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당시의 프로레슬링이 변한 것은 중산층 팬들이 새로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이 텔레비전을 타기 시작한 뒤에도 여전히 레슬링팬의 다수는 노동자 계층이었다. 프로레슬링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 스포츠였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던 것은 하층계층이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텔레비전이 레슬링 팬의 '계층'을 약간 늘려 놓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레슬링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면서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된다. 텔레비전은 점차 레슬러들을 과장, 쇼맨쉽, 사건의 진행, 그리고 곡예 쪽으로 몰았다. 인터뷰가 새로 생겼고, 심판이 손을 댈 때마다 하인이 그 부분의 먼지를 털어주는 고져스 죠지(Gorgeous George)같은 선수도 출현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프로레슬링은 텔레비전을 타면서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 냈고, 그 스토리라인은 - 하층민 계층의 팬 비율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주로 하층민 백인을 겨냥해서 만들어졌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의 인기는 짧게 끝나긴 했지만, 레슬링은 이 때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입지를 만들게 되었다.
정체 시기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레슬링의 인기는 1950년대에 비해 쇠퇴했다. 그러나 지역 방송국은 계속해서 레슬링을 방송했고, 프로모터들은 유료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텔레비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50대의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은 이 때에도 여전히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지역에서 레슬링이 인기가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레슬링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또 각 지역에서는 레슬링 경기를 언제 방송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레슬링 기구끼리 싸우는 경기도 생겨났다. '세계 챔피언'의 경기보다도, 녹화된 레슬링 경기를 자신의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보내 방송시키는 것이 더 커다란 '전쟁'이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 레슬링은 시골로 옮겨갔으며, 팬은 주로 노동자 계층의 성인이었다.
레슬링의 두 전성기인 1900년대와 1950년대, 이들 사이의 기간 동안 기존 레슬링 팬들에 중산층이 들어오긴 했으나, 장기적으로 이것이 별로 특별한 변화는 아니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레슬링은 지역방송국으로 방영되었으나 여전히 주류는 아니었으며, 1980년까지 레슬링 팬은 주로 하층민 계층이었다.
WWF의 성장
전술한 바와 같이 프로레슬링은 더 이상 중산층 관객들을 동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적인 기구'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 규모가 큰 지역 프로모션들이 레슬링 잡지를 통해 레슬링 팬들에게 알려졌지만, 나라 전체에 방영되는 텔레비전 쇼로는 방송되지 못했다. '국가적인 기구'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NWA인데, 이것도 지역 프로모터들의 단순한 연합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빈스 맥마한 Jr.(현재 우리가 빈스 맥마한이라고 부르는 WWF 오너는 원래 빈스 맥마한 Jr.로서, 아버지 빈스 맥마한 Sr.과의 혼돈이 없는 한 여기에서는 그냥 빈스 맥마한이라 칭한다 - 옮긴이 주)과 그의 프로모션인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가 이 추세를 바꾸면서 프로레슬링 자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979년까지는 WWWF(World Wide Wrestling Federation)로 알려졌던 WWF는 본래 레슬링 계에서 비교적 규모가 컸던 프로모션이었을 뿐이었다. 1970년대까지 이들은 4대 레슬링 프로모션의 하나였으나, 역시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영역 내에서 운영되는 지역 프로모션에 불과했었다.
이 프로모션의 오너였던 빈스 맥마한 Sr.(즉 빈스 맥마한 Jr.의 아버지를 말한다 - 옮긴이 주)은 자신의 프로모션이 지역 프로모션으로서 비교적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1982년, WWF를 아들 빈스 맥마한 Jr.에게 넘겼을 때에도, 빈스 맥마한 Sr.은 향후 2년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빈스 맥마한 Jr.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만일 아버지가 내가 WWF를 어떻게 이끌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내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빈스 맥마한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즉시 실행시켰다. 다른 지역 프로모션의 레슬러들과 계약해 WWF에서 뛰게 했으며, 지역 방송국과 케이블 회사와 계약해서 자기 영역 밖으로도 WWF 프로그램을 내보내게 했다. 결국 1984년 7월, 아틀란타의 슈퍼스테이션 WTBS라는 회사에서 NWA를 방영하던 시간대를 WWF가 빼앗아 냈다. NWA의 레슬링쇼인 '월드 챔피언쉽 레슬링'(World Championship Wrestling)은 과거 몇 년동안 이 시간대에 방영되었는데, 아틀란타를 WWF가 빼앗은 것이다. 처음에는 NWA의 오랜 팬들이 WWF가 방영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NWA는 대신 토요일 아침에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WWF는 계속해서 미국 전체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결국 NWA는 아틀란타의 그 시간대를 다시 빼앗는데 성공했으나, 그 때에는 이미 WWF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WWF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팬들은 WWF가 보여주는 액션에 반기를 들기도 했으며, 많은 레슬러들은 WWF가 레슬링 비즈니스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WWF로부터 거액의 연봉을 받은 선수들은 즉시로 목소리를 바꾸어 내기 시작했다. 테드 디비아스(Ted DiBiase)는 '에브리 맨 해즈 히스 프라이스'(Every Man Has His Price)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WWF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대부분의 레슬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처음에는 빈스 맥마한이 레슬링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서 맥마한의 이 시도는 레슬링을 '희극'으로 축소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케팅에 있어서 빈스 맥마한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뒤 WWF는 최고의 인기 기구로 부상했던 것이다."
1985년, 인기있는 케이블 채널 MTV를 통해서 '더 워 투 세틀 더 스코어'(The War to Settle the Score)라는 생방송 레슬링 프로그램이 중계되었을 때, WWF는 실질적으로 지역 프로모션이 아닌 국가 프로모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레슬링을 시청한 팬들은 WWF의 운영 방식이나 스토리 라인에 불만을 나타냈지만, WWF는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프로레슬링 사상 최고로 끌어올렸다. WWF는 기존의 노동자 계층 팬에 중산층 팬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자 계층 팬을 없애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레슬링 팬을 창조해냈다.
새로운 팬을 끌어들인 것에는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케이블 방송국을 통해 WWF가 방송된 것도 유효했으나, WWF의 성공에는 스토리라인과 선수들의 '포장'이 주효했다. 테드 디비아스는 위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빈스 맥마한의 방향에 의해 운영되는 WWF 때문에 프로레슬링은 급속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프로레슬링의 폭력성을 줄이고, 선수가 피를 흘리는 끔찍한 장면을 잘 보여주지 않고, 더 거칠고 만화같은 캐릭터를 선보이고, 레슬러 운동복을 더 빛나는 칼러로 색칠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어린이' 팬들에게 적합하게끔 각색함으로써, 프로레슬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팬들
WWF의 새로운 타겟은 어린이들이었고, 이에 따라 가족들이 새로운 '팬'을 구성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해서 티셔츠나 포스터같은 상품을 구입하는 성향이 높았을 뿐 아니라, 어린이다운 순진성으로 프로레슬링에 보다 친숙해질 수 있었다. 어린이들 혼자서 레슬링 경기장에 올 수는 없으므로 부모가 함께 해야 하는데, 이것은 수익을 증가시키고 가족 모두를 팬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레슬링 팬들을 중산층의 어린애들로 바꾸는 과정에서 WWF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WWF가 폭력적인 요소들을 많이 없앤 것이 사실이지만, 프로레슬링 경기는 기본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뉴욕 주에서는 프로레슬링을 방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1985년 10월, '레슬매니아 1'이 40만 가구에 방영된 지 5개월만에, 뉴욕에서는 특별 조사단이 결성되었다. 이 조사단은 뉴욕 주에서 프로레슬링을 방영할 수 없게 하는 법률안의 통과 여부를 놓고 '프로레슬링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와 '프로레슬링은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두 가지 주제에 관해 조사했다. 대부분의 레슬러들은 프로레슬링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의 문제에 대해 이토록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는 사실을 신통치 않게 여겼다. 맨프레드 더 매니악(Manfred the Maniac)이라는 한 레슬러는 이 조사에서 "나는 답변대에 서지 않겠다. 그 이유는 질문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의원들에게 바디 슬램과 더블 암 바, 그리고 피겨 포 레그 락을 구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레슬링 경기는 짜고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의원들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 법안을 상정한 번스타인은 레슬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번스타인은 "레슬링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호텔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을 향해 군중들이 '뛰어라, 뛰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라고 물었다.
결국 이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고, 빈스 맥마한은 사업을 계속 확장시켰다. 1986년, 언론은 '프로레슬링의 새로운 팬'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고 WWF가 국가 프로모션으로의 변신을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블루칼라 팬들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대부분 WWF 대신 지역 프로모션을 시청했다.
중산층이 프로레슬링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층민 출신의 바보 팬'과 '중산층 출신의 교육받은 팬' 사이의 구분이 있어야 했다. 이전에는 전과 기록이 있는, 문신을 새긴 무서운 남자들이나, 이빨이 몇 개 빠진, 머리를 금발로 표백한 여자들이 주요 관중이었지만, 이젠 그런 '하층민 이미지'는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레슬링은 그 사회적인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
1986년까지 프로레슬링은 '패밀리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였으며, 부모에게는 '가짜 싸움'이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진짜 싸움'이었다. 프로레슬링의 관객이 주로 하층민이었을 때에는, 진짜 싸우지 않는 레슬링이란 정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중산층의 성인들, 즉 부모들은 레슬링이 짜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오히려 레슬링의 매력이 되곤 했다.
열기가 식다
WWF는 1987년, '레슬매니아 3'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1980년대말까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후 인기가 식어가자 언론들은 다시 레슬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블루 칼라 팬'과 '중산층 팬'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이렇게 되자 언론은 '블루 칼라 팬'이 현재의 레슬링 팬이 아니라는 시각을 재검토하게 되었고, 프로레슬링의 이미지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WWF의 만화같은 캐릭터들은 언론과 팬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은퇴한 레슬러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레슬링은 완전히 만화였다. 레슬링을 하는데 개뼈다귀나 안전핀 같은 것이 무엇에 필요하며, 또 레슬러들은 왜 얼굴에 색칠을 해야 하는가? 완전히 서커스였다. 한심하게도, 이제 레슬러들은 링 안에서보다 집 안에서 다칠 위험이 더 많게 되었다."
프로레슬링은 운동경기의 성격에서 벗어났고, 선수들은 진짜 운동선수로 간주될 수도 없었고 관객들을 즐겁게 하지도 못했다. '프로레슬링은 짜고 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너무 짜고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들은 언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1990년대 초를 거치며 WWF의 많은 팬들이 떨어져 나갔다.
1980년대에 WWF를 시청하던 어린이들은 1990년대에 접어들자 틴에이저로 성장해 이전에 좋아했던 만화같은 캐릭터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레슬매니악스 홈페이지(http://www.wrestlemaniacs.com)의 공동주인인 릭 스카이아는 1997년에 있었던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2년 전만 해도 WWF의 관객은 스카이돔을 꽉 채웠지만, 이제는 후지어 돔도 절반도 채우기 어려워졌다. 5년 전만 해도 프로레슬링의 현실성은 별로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부두교 교주도 나왔으니까. 그러나 이후, WWF는 어린이 시장이 이제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어린이들도 이전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뭔가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인기 만회
약 5년간 WWF는 팬들이 과거에 늘어났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처참한 상황에 있었는데, 그 뒤 프로레슬링은 극적으로 인기를 만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WWF는 WCW(World Championship Wrestling)와 시장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
1988년 11월, 테드 터너(Ted Turner)가 사들인 NWA는 1991년 WCW로 다시 포장되어 WWF와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WCW는 팬을 끌어들이기가 어려웠다. 1989년 11월 26일, 뉴욕 타임즈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테드 터너는 어린이들을 겨냥한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지만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올해 초, 딩동즈(Ding Dons)라는 태그 팀이 새로 생겼는데, 그들은 종을 갖고 나와서 어린이들에게 흔들어주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나이든 팬들에게 야유를 받게 되었고, 결국은 사라져 버렸다." 어린이들 사이에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WCW 팬들은 아직도 나이든 '블루 칼라 팬'들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WCW와 WWF는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새로 찾아낸 팬들이란 다름 아닌 1980년대의 팬들이었다. 1996년까지 프로레슬링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중산층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려 했으며 여전히 케이블 방송국을 통해 프로그램을 내보냈으나, 어린이팬들은 더 이상 그들이 목표로 삼은 대상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팬들
그들의 새로운 타겟은 대학생이었다. 이들 대학생이 바로 1980년대에 프로레슬링을 보던 어린애들이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제 레슬러들은 과거의 캐릭터에서 벗어났고 보다 정교한 스토리라인을 연기하게 되었다.
1980년대 내내 프로레슬러로 뛰었던 헐크 호간(Hulk Hogan)은 그 때 어린애들에게 항상 기도를 하며 비타민을 먹으라고 했었다. 호간은 "열심히 공부하고 일찍 자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헉스터(Hulkster)들이 겪은 바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호간의 어린 팬들은 그가 말하는 대로 따라 했다. 헐크 호간은 1980년대의 프로레슬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가장 인기있는 레슬러였고, 언제나 메인 이벤트에서 뛰었다.
1996년 7월, WCW는 온통 시커먼 옷을 입고 관객들을 조롱하는 새로운 팀인 '신세계질서', 즉 nWo(New World Order)에 헐크 호간이 가입하게 함으로써 1980년대 레슬링에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인터넷에 있는 프로레슬링 웹사이트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은 대학생 내에서의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이다. 프로레슬링 웹사이트가 매달 10만명의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 프로레슬링 웹사이트들은 교육받은 청년들에게 프로레슬링의 무대 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 조교이면서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릭 스카이아는 1990년대 초 프로레슬링을 그만 보게 되었으나, 이후 인터넷에서 레슬링에 대한 정보가 많이 오가는 것을 알고는 다시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내가 다시 레슬링을 보게 된 것은 인터넷 때문이었다. 내 룸메이트가 컴퓨터와 모뎀을 갖고 있었는데, 나 역시 얼마 뒤에는 유즈넷 뉴스그룹인 RSPW(rec.sport.pro-wrestling)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웹사이트는 뉴스와 루머를 제공했고, 뉴스그룹에서는 대학생들이 프로레슬링에 관해 토론했다.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의 시청률과 마찬가지로 웹사이트와 뉴스그룹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갔다.
오늘날 프로레슬링은 1987년 전성기때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WCW의 프로그램인 나이트로(Nitro)와 WWF의 프로그램인 러(Raw)는 케이블 프로그램 주간 시청률 순위에서 거의 항상 최고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1998년 4월 6일에 발표된 순위에 따르면, 상위 7위 중에서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이 여섯 개나 포진해 있을 정도이다.
1998년 4월 28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광고주들은 주목하고 있다. 10대와 20대의 시청률에서 프로레슬링은 '매드 어바웃 유'(Mad About You)나 '엔터테인먼트 투나잇'(Entertainment Tonight)을 눌렀다. WCW에 따르면 지난 2년간 광고는 70퍼센트나 증가했다고 한다."
레슬링의 이 높은 시청률은 특히 WWF와 WCW가 같은 시간대에 방영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WCW 회장인 에릭 비쇼프(Eric Bischoff)는 프로레슬링의 성공 비결은 1980년대의 만화 캐릭터들을 없애버렸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보다 현실적인 스토리라인을 제공함으로써 지난 2년간 레슬링 산업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빈스 맥마한과 WWF 레슬러인 숀 왈트만(Sean Waltman)도 프로레슬링이 청년들을 겨냥한 것임을 시인하고 있다.
빈스 맥마한은 이렇게 말했다. "레슬링 팬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우리의 운영 방식과 스토리라인을 좋아한다. 아마 프로레슬링은 '스포츠 드라마'에 가장 가깝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엑스-팍(X-Pac)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고 있는 숀 왈트만도 이렇게 말한다. "패밀리 엔터테인먼트도 좋지만, 현재의 방향은 어린이들보다는 성인쪽에 기울어져 있다. 나와 케빈 내쉬, 스캇 홀은 2년 전 WCW로 옮기면서 프로레슬링이 좀 더 날카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비쇼프에게 말한 바 있다."
대학교에서도 프로레슬링 팬클럽이 결성되고 있으며, WCW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레슬러들이 사진에 사인을 해 주는 순회 이벤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대학생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스토리라인은 갈수록 '내부적'으로 변하고 있다. 스토리라인의 상당수는 무대 뒤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예를 들어, 숀 왈트만은 무릎 부상이 낫지 않아서 WCW에서 해고되었는데, 이후 WWF와 계약을 맺고는 첫 인터뷰에서 자신을 해고했다며 WCW를 조롱했다. 이런 스토리라인은 프로레슬링의 픽션적인 측면 뿐 아니라 내부에서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팬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1998년 4월 28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보도한다. "하바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니콜라스 스톨라(22)는 '레슬링에서는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싸움의 '정치학'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요소이다'라고 말한다."
결론
레슬링과 프로레슬링은 역사상 프롤레타리아와 강한 유대관계를 맺어 왔다. 본래 프로레슬링은 노동자 계층에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레슬링 경기의 결과를 사전에 정하게 되면서 이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레슬링 팬은 '블루 칼라'이자 '잘 속는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1950년까지는 이들 '블루 칼라'와 '잘 속는 사람' 사이의 구분이 어려웠다. 프로레슬링 팬의 계층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으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증거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1980년에 이르러 레슬링 팬의 계층은 하층민 계층에서 중산층으로 바뀌었는데, 이를 실증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어도 증거는 선명하다. 텔레비전 만화에서 레슬러들이 나온다거나, 자신의 팬들을 '작은 헐카매니악스'라고 부르는 헐크 호간이 인기를 끈 것 등은 WWF의 상품이 어린이를 주대상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은 과거의 하층민 계층 레슬링 팬들을 내몰았다. 비싼 입장료와 케이블 텔레비전 역시 이들을 WWF에서 내쫓았다. 노동자 계층의 팬들은 이에 WWF 대신 다른 지역 프로모션의 레슬링을 즐기게 되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 블루 칼라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프로레슬링은 WWF가 '패밀리 엔터테인먼트'로 바뀌면서 어린이로 그 대상을 바꾸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이 대상이 대학생 및 그 이상의 연령층으로 또다시 바뀌게 되었다.
프로레슬링 팬이 과거의 어린이들에서 성인으로 바뀐 것은 1980년대처럼 빈스 맥마한의 계획인 것은 아니었다. 만화 캐릭터가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되자, WWF와 WCW는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해야 했다. 청년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은 이에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과거의 노동자 계층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서 가능했다. 이제 대학생과 중산층 젊은이들이 프로레슬링 팬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노동자 계층의 레슬링 팬은 1980년대보다는 더 많이 WWF와 WCW를 시청하고 있으나, 이들은 주로 보다 싼, 텔레비전에 방영되지 않는 쇼를 보러 오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이들 노동자 계층을 겨냥한 지역 프로모션이 있지만, 텔레비전에 방영되지 않는 WWF와 WCW 프로그램에는 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매체로 한 레슬링의 위력도 청년층을 감안하면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1980년대 초와 1998년의 프로레슬링 팬의 변화에 관한 글들은 '바보 레슬링 팬'과 '노동자 계층 레슬링 팬'이 구분되어 있다고 보고 있고, 언론들은 WWF가 '바보 노동자 계층 팬'이 아닌, '똑똑한 중산층 팬'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글들은 프로레슬링이 블루 칼라 팬을 잃은 대신 중산층으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즉 중산층 및 상류층 사람들이 이 '정신적' 엔터테인먼트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레슬링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경험적인 연구는 미국 내에서의 '계층 차별'을 연구하는 데 좋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프로레슬링 팬의 계층에 대해 적절히 연구하려면, 경험적인 자료가 축적될 뿐 아니라 이를 지지하는 사건적인 증거도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하바드에 다니는 팬이건 공장에서 일하는 팬이건 프로레슬링의 매력은 그 드라마적인 특성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
프로레슬링 팬의 계층이 바뀐 이유는 그 드라마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1980년대 중산층 가정들은 WWF의 캐릭터 및 스토리와 관련이 있었고, 그 때문에 프로레슬링을 즐길 수 있었다. 크리스 뉴만(Chris Newman)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있어서 레슬링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이나 '적법적'이며,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누구나 자기와 가장 비슷한 캐릭터를 찾아 대입할 수 있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현실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프로레슬링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교훈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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