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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36.조선왕조-숭유정책
임광자 추천 0 조회 88 08.07.11 08: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 조선왕조의 유교주의 정책

 

(1)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

 

조선의 신분제도는 크게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으로 구분되고, 양인은 다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과 연계해서 세분(細分)하고있다. 사(士)는 독서인(讀書人)이라 하여 생산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글을 읽어 관직에 오름으로서 양반사회를 형성하고 지배층으로 군림하여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있었다.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조세와 공납, 역(役)을 담당하였고, 수공업자는 장인(匠人)이라 하여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상인(商人) 역시 제한적으로 허용되기는 하였으나 국가로부터 심한 통제와 차별을 받았다.

 

그리고 천민층으로는 공·사 노비가 있었고, 재인(才人)·백정(白丁)·무격(巫覡)·점복인(占卜人)을비롯하여 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인(中人)이라는 중간계급도 형성되어 지배층 말단에 자리잡았다.

 

직업과 신분이 연계된 사회에서 강조된 산업은 농업(農業),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팻말을 우뚝 세우고 이를 신앙처럼 받들게 된 진의(眞意)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지배층의 수탈을 합리화하는데 있었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많고 땅이 척박하며 기후 또한 농업에는 여러 가지로 불리하다. 농토라고 해야 몇 군데를 제외하면, 산간 자락에 자리잡은 선상지(扇狀地)와 사행(蛇行)하천 유역의 범람원(汎濫原)이 고작이고, 강수량도 7 ~ 8월에 집중되어 한발(旱魃)과 홍수(洪水)가 연중 행사처럼 되풀이되었다.

 

治山治水와 수리시설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비된 지금도, 90 몇 년만에 가뭄이 닥쳐 논바닥이 거북등 처럼 갈라지고 밭 작물이 타 다죽어 간다고, 야단부터 앞세우고 어디까지 가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화면과 함께,"농촌에 양수기를 보내자. 성금을 접수한다...무슨 회장 외 직원 일동  얼마...성금을 내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다가 비가 많이 내리면, 그 반대가 되어 수재민을도웁시다...앵무새 같은 이런 것들이 언제쯤이나 없어질까?

 

미디어를 동원에서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水防대책에 만전을 기하라, 논에 물은 물꼬를 낮추어 빼고, 쓰러진 벼는 몇 포기씩 묶어서 세우고...비닐이 날라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야 한다...." 농민이라면 누가 이런 것을 모를까? 모르는 것은 이런 말만 되풀이하는 그 사람들이 아닐까.....

 

타작도, 김홍도 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었고,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속출하였다.

 

왕조체제에서 지배층이 농민들에게 베푼 것이라고는 의창(義倉)이라는 것을 세우고 진휼(賑恤)하였다는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것 또한 환곡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하면서도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진과 일본에 많은 식량을 보냈다면 국가라는 틀을 한번쯤은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당시 사대부 층의 의례가운데 가장 중시하였던 것은 상장(喪葬)과 제례(祭禮), 이름 있는 유학자들의 졸기(卒記)에는 시묘(侍墓)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시묘가 무엇인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지키면서 애통(哀痛) 하므로써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지킨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여건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상민(常民)들과 신분의 장벽을 쌓았다.

 

(2) 양반 사회의 얼룩들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 지으며 사는 상민들이 바라는것은 우순 풍조하여 풍년을 마지하는 것, 그러나 풍년을 마지했다고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더 무서운 약탈자(?)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 갈 곳도 없는 순박한 이들에게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호패(號牌), 해금(海禁), 오가작통(五家作統) 등의 제도를 만들고, 삼강·오륜과 향약(鄕約) 덕목으로 꼼짝 못하게 다시 묶어 놓았다.

그러면서 고향과 조상과 임금과 양반을 모르면 금수(禽獸)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사정없이 매도(罵倒) 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고,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면서 이런 것들은 더욱 굳어진 것 같다.

 

한편 인간의 본초적인 색정(色情)을 다스리기 위해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처첩(妻妾)제도, 태조도 두 사람의 정비(正妃) 외에 다수의 후궁을 두었고, 정종도 정비(正妃) 몸에서는 딸도 아들도 없었으나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태종은 29명의 자녀를 두었고, 영명하신 세종께서도 2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사대부가 첩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고 그것을 탓할 사람도 말릴 사람도 없었다.

 

부인이 잔소리하면 투기(妬忌)라 하여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묶어 버리고,....그러면서도 유희 삼아 뿌린 그들의 씨앗이 자라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는것은 반길 일이 못되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서얼(庶孼) 차대법, 종모법(從母法), 재가(再嫁) 금지법,...세상에 이런 법은 우리나라밖에 없었다.

 

신윤복 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런 와중에 반가(班家)의 아낙으로 이를 깨고 자유분망하게 성희(性戱)를 즐기다가 들통이 나 처형되기도 하였는데,

 

태종때 승지 윤수(尹脩)의 처가 盲人 河千慶과 간통하였다가 처형되었고,

 

세종 때 관찰사 李貴山의 처가 승지 趙瑞老와 간통하였다가 역시 처형되었다.

 

그 얼마 후 세종 10년 兪甘同은 한성윤 兪貴壽의 여식으로 판관 崔仲基의 아내가 되었으나 자신을 창기라 속이고, 고관대작들과 어울려 根脚을 즐기다가 들통이 나 초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녀와 관련된 인사가 너무 많아 고심끝에 그를 외방으로 내쫓고 유야무야 하기로 임금 세종은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외방에 쫓겨 나서도 牧使, 군자주부, 녹사등 벼슬아치들과 음행을 거듭하였고, 말썽이 있을 때 마다 양사(사간원, 사헌부)의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처벌을 주청 했지만 세종은 역시 불문에 부쳤다. 그리고 致身이라는 자는 그와 반나절만 자고 같다고 하자 세종은 반나절만 자고 갔으니큰 죄가 될 것은 없다 하여 치신에게는 더 묻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루종일과 하루의 半日.....

 

다시 세종 15년 재상의 딸이며, 朝士의 아내인 於里加(양영대군의세자 시절 그와 놀아난 어리가 와는 同名 異人)란 여인이 李義山, 許波回 등과 통간하였고, 鄭居孝의 아내로서 어리가의 동생은 이의산과 친척간인 文斯와 私通했다하여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연루된 인사가 너무 많아 임금 세종을불문이 붙였다.

 

그 후 성종 때 稀代의 섹스 스켄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것이 어을우동이 였는데, 그녀는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서, 왕실 종친인泰康守 李仝(효령대군의 손자)에게 출가하여 惠人이라는 외명부 첩지까지 받았으나, 남편 이동이 집에 은장이(銀匠)를 불러와 일을 시키자 계집종으로 가장하여 이와 노닥거리며 놀다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쫓겨 났다.

 

그 후 그의 행적은 같은 왕실 종친과 문인 협객을 비롯해서 당대의 내노라 하는 사람들과 통간 하기를 서슴치 않았고, 通姦 후에는사랑의 標識로 情夫의 팔뚝, 등줄기에 자기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게 하는 등 情艶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특히 그와 사통한 종친 중에는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 기(守山守 麒 : 정종대왕의 현손), 육촌 시아주버님인 방산수 난(方山守爛 : 세종대왕의 손자)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병조판서 어유소와 직제학 노공필의 이름도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고, 憲府의 都吏 오종년과 같은 衙前도 끼어 있다.

 

과거에 등과해서 유가 길에 올랐던 홍찬도 그녀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수로 출세에 큰 지장을 받았으며, 그녀가 낳은 단 하나의 혈육 번좌(番佐)라는 딸은 그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문제는 개인적인 사생활일 수도 있는데, 이를 두고 당시의 조정은 의견이 두 갈래로 갈리어 매우 분분하였다.

 

행실은 고약하지만 형률이 사형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실정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형으로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실정법 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결국그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특히 도승지 김계창의끈질긴 처벌 주장이 주효해서 그의 뜻은 관철했지만 당시의 사관들도 김계창에 대한비판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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