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외면하는가?
[동아시아를 묻다] '중화'와 '진보'
진보의 역설
<역사비평> 2013년 여름호를 읽었다. 인화성이 강한 글이 한 편 실렸다. 김희교의 '<역사 비평>과 한국의 중국 담론의 진로'이다. 한국 학계는 근엄하다. 실명을 거론하여 비판하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영글지 않았다. 자칫 본인만 매장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기(士氣) 충만한 시도를 거들고 북돋고 싶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논쟁으로 확산되면 좋겠다.
김희교의 주장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진보 진영의 중국 담론은 주류 담론과 차별성이 없다. 미국에 대한 날선 입장 차이와는 달리 중국 인식과 비판은 좌우합작, 대동소이하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도 입을 맞춘다. 민주주의 결여를 비판하고, 대국주의 동향을 우려한다. 그 결과 보수 담론 강화에 일조하고 만다. 한미 동맹 체제를 고수하는 보수의 전략에 무기력하다. 어떻게 중국 담론을 진보적 실천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요체이다.
김희교는 중국의 실질적인 역할을 주목한다. 북한과 미국을 제어하며 동북아의 전쟁 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위협론과 실제 역할 사이의 간극에서 '진보적 중국 담론'의 활동 공간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즉 미국의 패권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 간에 존재하는 억압 강도의 차이를 간과하지 말고, 그 차이를 한층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틈새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다.
흥미가 한층 배가되는 지점은 진보 진영의 한 축, 아니 주축을 이루는 창비의 동아시아론도 겨냥하고 있음이다. 담론의 거듭된 진화에도 불구하고 '운동성'은 역부족이라는 진단이다. 20년이 지나도록(동아시아론 원년으로 간주되는 1993년은 북핵 위기 원년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구조는 여전하다.
김희교는 진보적 실천이 미흡한 까닭을 동아시아론의 논리 자체에서 찾는다. 중국을 협력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대국화의 가능성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특유의 '이중 과제론'적 발상이 병통이다. 중국과의 협조란 대저 지식인과의 교류에 그친다. 창비식 '균형 감각'이 도리어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는 구체적 실천을 낳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 담론 지형에서도, 한중 관계에서도 실효적 변화를 거두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머문다.
가타부타는 하지 않겠다. 고수들의 응전을 기다린다. 한반도 창공을 가로질러 주요 G2(주요 2개국)가 '신형 대국 관계'를 논하는 비상한 시기이다. 북벌론과 북학론에 버금가는 백가쟁명이 펼쳐지길 고대한다. 나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중국과 진보'의 문제를 숙고해보고 싶다. 중국의 진보적 활용 못지않게, 나는 20세기형 진보를 성찰하고 해독하는 방편으로 중국을 주시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한국의 진보는 왜 중국을 와면하는가. 그것은 한국에 진정한 진보가 없이 권력 투쟁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