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
리히테르의 연주에서도 간혹 섬세함과 신경질적인 면이 내비치기는 한다. 만년에 이르러 그의 연주가 느려지고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면의 사유에 충실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를 들어 까다롭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벽한 기교와 강력한 연주력이 언뜻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작곡가와 청중들 사이의 영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음악의 구도자 같은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굴드는 ‘리스트’ 타입과 ‘리히테르’ 타입의 두 부류로 연주가를 분류한 적이 있다. 단순히 말해 이는 악마적인 기교파냐 진중한 사유파냐, 또는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분류였다. 다시 말해 리히테르는 중용과 절제를 통해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연주를 들려준 모범적인 연주가의 전형이라는 얘기다.
역시 리스트가 시작한 ‘암보로 연주하기’의 관행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던 이가 리히테르였다. 그래서 그의 연주회에는 피아노 악보대에 항상 악보가 놓여 있었고, 그의 옆자리에는 그것을 넘기는 보조자가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이 연주가의 모습에 현혹되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 위의 조명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피아노 바로 위에 작은 조명을 켜놓고 연주하던 리히테르였다. 이도 또한 리스트가 시작한 ‘왕자 연주가’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었다. 최근의 많은 연주가들은 그의 이러한 합리적인 태도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겪은 가족사의 질곡도 만만찮다. 그 질곡은 그의 아버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결투로써 법을 어기고 도망자의 몸으로 우크라이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제자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리히테르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계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리히테르가 불과 26세 되던 1941년의 일이었다. 리히테르는 이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은 리히테르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망명했던 것이고,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연락해 이들은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 리히테르가 철의 장막 밖으로 나온 1960년에야 20여년 만의 모자상봉이 이루어졌고, 3년 뒤 그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테르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테르를 소개했고, 리히테르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했다.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테르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가 늦게 시작했다는 시각은 첫째 서너 살만 되면 피아노 앞에 앉히는 20세기의 잘못된 음악교육관행 때문에, 둘째 그가 40이 넘도록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 숨은 공력을 쌓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순간부터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파장을 퍼뜨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말년에 필립스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리히테르 에디션과 최근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의 리히테르 에디션(12CD) 등이 그의 연주예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