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2
김승후
아침에 교복 치마 길이로 엄마랑 한바탕 말다툼을 했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는 것까진 봐주겠지만 똥꼬가 다 보일 치마 길이는 절대 안 된다고 난리였다. 자기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린지. 나 혼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쪽팔리게 입으란 말인지. 그런 꽉 막힌 엄마를 서주는 괴롭히고 싶었다. 납치당했다고 하면 분명히 경찰에 신고하고 휴대폰 발신지를 추적하려 할 것이다. 돈 얼마를 가져오라고 하려다가 돈은 아무래도 납치범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라 포기했다. 납치범 대역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친절한 뒷자리 오타쿠(일본만화에 미쳐 있는)는 어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 목소리도 아닌, 변성 초기에 접어들어 여전히 목감기 걸린 아이 목소리에 가까웠다. 때문에, 납치범 역할을 부탁할 수 없었다.
이참에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받고 싶었다. 엄마는 애를 태우겠지. 서주는 생각만으로 통쾌함을 느꼈다. 거짓말인 것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집에 들어가기 전 신발과 교복에 흙을 묻히기로 했다. 납치범에게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경찰이 만약 거짓 제보로 추궁하더라도 철없는 중학생의 헤프닝 정도로 끝날 것이니 후환은 걱정할 게 없었다. 뒷자리, 오타쿠가 서주의 모든 계획을 듣고 미친 것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순간, 괜한 부탁을 했나 후회했다. 엄마와의 갈등을 몰라주는 오타쿠에 대한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전화벨이 수없이 울렸다. 받지 않았다. 이모의 전화나 모르는 일반 전화도 계속 들어왔지만 무시했다. 편의점에 들러 라면을 먹고 콜라도 마셨다. 학원엔 당연히 가지 않았다. 학원이 끝나는 늦은 저녁 시간에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놀이터에서 흙을 묻혀 납치된 연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경비 아저씨가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아! 학생! 어디 갔다 이제와? 빨리 병원에 가봐! 이모가 사거리 종합병원으로 오래!”
“예? 병원에요? 왜요?”
“부모님이…. 아이, 글쎄 얼른 가 봐. 얼른!”
*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빈털터리로 옥탑방에 사는 것도. 이모 부부에게 사기당한 것도. 더 한 고통이 자기에게 닥쳐온다 해도 부당하다고 항변할 수 있을까? ‘납치’라는 단어가 엄마의 귀에 전해졌을 때 엄마는 어떤 이성적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 경찰서를 가든 아빠 회사를 찾아가든 그녀는 자동차에 떨리는 손으로 키를 꽂고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을 거였다. 하지만 그땐 어렸잖아. 한창 사춘기 때 무슨 판단인들 제대로 했겠어. 자신을 위한 변명과 자책이 서로 다투었다.
아침 햇살은 어느새 창을 통해 낡은 침대 모서리를 비췄다. 3개월 전 집에 들인 길고양이 우유가 침대에 걸터앉은 서주에게 다가와 나른하게 얼굴을 비볐다. 너무 잘 먹였나. 우유는 요즘 몰라보게 뚱뚱해 보였다. 우유처럼 흰 털은 새어들어 온 햇볕에 포슬거리며 떠다녔다.
퇴근 후 한숨 자고 난 뒤 눈을 뜨자 커튼을 내린 방안은 어둑했다. 가림막 커튼을 거두자 사위는 금세 밝아졌다. 곧 저녁이 될 시간이었다. 가을볕은 강렬하면서 점점 짧아졌다. 여전히 무거운 머리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방안 풍경. 의자에 걸쳐 놓은 카디건이나 청바지, 트레이닝복. 우유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는지 확실치가 않았다. 두통이 유독 심한 오늘 아침엔 우유가 침대 밑에 웅크리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잠들기 전 부어 놓은 참치도 그대로였다.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침대 밑으로 얼굴을 디밀고 우유를 불러 보았지만 잠잠했다. 그러다 전화기를 켰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차례나 찍혀 있었다.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밖에 나가 우유를 찾아볼까, 익명의 전화를 걸어볼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전화기에 부재중 번호와 같은 숫자가 다시 떴다.
“서...서주니?....오랜만이네.... 나야...이모...”
“....”
“여보세요? 듣고... 있는 거지?”
“그런데요.”
“지금 좀... 만날 수 있겠니?”
DNA를 공유한 여자는 보풀이 핀 갈색의 라운드넥 니트를 입고 있었다. 애초에 없던 쌍꺼풀이 어설프게 잡혀 있는 눈을 서주는 쏘아 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여자가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그때 다 같이 잘살아 보려고 하다 그만...”
“다 같이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저한테 한 행동을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어쩜 그래요! 네!”
침묵이 흘렀다. 만나면 마구 퍼부리라던 말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만 평소보다 크게 뛰고 있었고 숨소리만 씩씩대며 언어를 대신했다. 과거를 들먹인다는 것은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고질화된 두통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미간을 찡그리며 서주는 습관처럼 양손을 머리에 갖다 댔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은 루이비통의 표식을 하고 있지만 박음질과 지퍼가 조악한 것으로 보아 이미테이션처럼 보였다. ‘이거’하며 푸른 빛깔의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차갑지 않은 바람이 서주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났다. 사람답게 사는 것. 이모와 헤어져 오는 길을 걸으며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사람처럼 살고 싶었어. 그 인간과 헤어지고 나니 그게 되더라’ 모든 불편한 상항들이 돈 때문인 줄 알았다고. 네 엄마에게만 허락된 복이 분하고 질투 났다고. 이모의 눈물을 보며 그녀가 조금은 달라졌다고 믿고 싶었다. 전해 받은 현금카드 속 2000만 원이 아니더라도. 아니, 그 돈일 수도 있었다. 전 재산이라고 했으니까. 앞으로 벌면서 갚아 나갈게. 라고도. 카페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앞서 나가는 서주를 향해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참, 너 그거 모르지? 그날 사고 나던 날, 네 엄마가 나한테 전화로 그랬어. 네가 납치됐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했다고. 중2병이 진짜 있긴 있나보다면서. 너 그때 왜 그랬니? 가끔 널 떠올리면 꼭 묻고 싶었는데.”
한결 가볍게 들리는 그녀의 말에 놀라 돌아보았다. 물론, 목소리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때문은 아니었다. 무언가 되묻고 싶었지만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또 만나자며 총총히 사라졌다.
왜 이제야 그 중요한 말을 뱉어 놓은 것일까. 이모는 진짜...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동안 먹어 왔던 타이레놀 값만 해도....순간,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웃을 때 움직이는 얼굴 근육이 낯설어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옥탑방을 향해 오르며 저무는 태양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어김없이 다시 떠오를 태양.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도 사라졌다. 서주의 거짓말을 믿지 않은 엄마는 역시 현명했다. 이모가 질투하기에 충분했다. 이모의 목이 늘어난 니트가, 이미테이션 가방이,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잔상이 되었다. 막 현관 번호 키를 누르려고 했을 때 어디선가 ‘니야앙’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서주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물탱크 밑에 쌓아 둔 벽돌 더미 앞에 섰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우유는 어린 얼룩무늬 우유들을 품고 서주를 올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