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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규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5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 이령 편집장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同 대학원 상사법전공 석사.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제2회 한춘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이며 〈시in〉 동인, 〈시木〉 동인으로 활동 中.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6년 11월호(2015, December)
미학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고독과의 메타적 탐색
■ 이 령: 먼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벌써 10회째를 맞이하는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이 올해부터 <시인광장문학상>으로 바뀌었고 그 첫번째 수상작으로 송종규 시인님의 「죽은 새를 위한 메모」가 선정되었습니다. 선정과정에서 많은 동료시인들의 추천과 함께 최종 심사위원들에 의해 전원일치 선정으로 수상자가 되셨는데 제1회 김선우 시인, 제2회 박형준 시인, 제3회 이장욱 시인, 제4회 김명인 시인과 심보선 시인, 제5회 유지소 시인, 제6회 김신용 시인, 제7회 김이듬 시인, 제8회 김행숙 시인, 제9회 김중일 시인이 수상한 이 상은 무엇보다 동료들이 선정하는 우정상이라는 점에서 국내의 그 어느 문학상과도 차별화된 매우 소중하고 의미있는 상일 것입니다. 이번 수상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지와 더불어 근황을 여쭙겠습니다.
□ 송종규: 동료시인들께서 선정에 참여하신 상이니까 더 감사하고 의미 있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많은 양의 시를 쓰게 됐고 산문도 한꺼번에 몰려있어서 가을부터 좀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연히, 「슬픈 손가락처럼」이란 시를 쓰고 난 얼마 후 심하게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몇 달째 아직 제 기능을 다하지 못 하네요. 이 손가락의 불운 때문에 오래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귀한 상을 주셨습니다. 이 상은 저의 불운했던 날들에게 주시는 위안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이 령: 시인이 시를 썼다고 해서 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의 집중적 독서 후 감성적 감개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즉 재창조의 과정이 중요할 텐데요. 수상작인 「죽은 새를 위한 메모」가 나오게 된 배경, 시적발아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 송종규: 일상이 어긋나거나 삐끗거리는 틈새에서 제 시는 발화합니다. 그러니까 그 틈새란 어떤 경계이기도 하겠네요. 이를테면 일상과 비 일상의 경계,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같은 거요. 저는 늘 제 시가 이런 양극단의 경계에 놓이기를 바랐어요. 제가 차용해 온 언어들이 일상에만 머물러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결핍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요…… 시는 정신의 영역이고 시가 지향하는 궁극은 초월과 영원이니까, 그것이 비록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언저리를 서성일 수는 있죠. 죽은 새처럼 전 생애를 걸고. 그러나 새가 이르고자 했던 ‘당신’은 결국 꿈이나 허구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고해입니다. 이 시에서 ‘당신’이라는 초월적 대상과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새’라는 실존 사이에 있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을 비애라 해야 할까요. 거의 모든 제 시는 이런 결핍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 령: 시인은 광인과 연인과 닮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시인은 무형적 가치에 매몰되고 거짓 이면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진실 혹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거짓들마저 들춰내고 싶은 조금은 별난 사람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 시란 시인이란 무엇인지요?
□ 송종규: 무형적 가치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꿈이나 허구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그러므로 결국 허황해서 손에 잡히지 않고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어떤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무용의 가치가 더 아름답다는 걸 아는 사람이 시인들이니까, 거기에 미쳐있는 것도 다행히 시인들이니까…… 시인은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니까, 세계를 아프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연인들에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그만큼 순수하다는 의미겠지요. 저에게 시란, 스쳐가는 시간의 한 찰나에 색깔을 입히는 것, 분절된 시간의 한 찰나를 내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 그러나 이런 정의로 시는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이 령: 그간 선생님의 시에 대한 언급에서 주목한 것이 있다면 ‘메타적 탐색과 깊이 있는 서정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독자로서 선생님의 시편들을 재독하며 작품의 기저에 깔린 눅진한 삶의 비애라고 할까요, 폐허나 연민이나 분노에 대한 기억의 인화라고 할까요,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천착이 깊은 시들이라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존재의 이유, 시를 빌어 표현하신 삶의 철학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송종규: 존재의 이유라면 너무 무겁고요…… 때로 진부하고 유치한 것들이 삶을 끌고 가는 거 같아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살아지는 거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그 지점에서 문득 문득 마주치는 실존의 한계, 거기에서 시적인 모든 사건이 발화되기도 하고요. 결국은 시간의 문제일 텐데 삶의 비의도 결국은 시간에서 출발하는 거 같아요. 시간만큼 슬프고 아름답고 불가사의 하고 긴 문장이 또 있을까요. 이 슬프고 아름답고 불가사의하고 거대한 시간 앞에서, 그 운명적인 화두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작업인 거 같아요. 또한 정의할 수 없는 세계를 의심하면서 그 세계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해요. 그러나 저는 비극론자는 아닙니다. 삶의 황홀과 아름다움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 이 령: 시의 정의 이전에 이미 시의 항구성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그간 선생님의 시적 변화가 궁금해집니다. 즉 그 시대의 시의 정의를 규정한다 한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의 정의는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제1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제2시집 『고요한 입술』, 제3시집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제4시집 『녹슨 방』, 제5시집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등을 출간하며 오랫동안 시작을 하시면서 시적 변화를 일으킨 사건, 혹은 생의 전환점이라고 할까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송종규: 첫 시집은 습작기의 시들이고, 두 번째 『고요한 입술』은 시간에 대한 집중과 젊은 날의 치기로 버무려진, 그래서 애착이 가는 시집이고요. 세 번째 시집은 표지 장정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스로 폐기 시킨 시집이고요, 네 번째 『녹슨 방』의 경우 제가 혼돈 속에 빠져 있었을 때, 너무나 일상적인 제 삶을 용납하지 못했을 때, 우울과 절망의 늪에서 쓴 시들인데 어둡고 무거워요. 시집 속의 저와 차용해 온 이미지들 모두가 가엽기도 하고요. 불안과 의심과 고뇌로 가득하던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늪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면서 쓴 시집이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큰 흐름에서 보면 시간성에 천착해서 삶의 근원에 집중한다는 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을 듯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시는 시인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세계에 감응하는 저의 압점이나 색깔도 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제 시도 변화해 온 것 같습니다.
■ 이 령: 자신의 생 앞에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 송종규: 살아온 생애인 기억들, 그 편편의 조각들. 이기적이지만, 저라는 실존.
■ 이 령: 선생님께서는 1989년 <<심상>>을 통해 등단하시고 오랫동안 문단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등단 즈음의 선생님의 정황과 시단의 분위기도 궁금합니다.
□ 송종규: 약학을 전공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그러면서 묻힌 듯했던 문학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날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주체할 수 없이…… 그야말로 문학은 꿈이었고 그리움이었지요. 문단의 선배도 정보도 하나 없고 심지어 문학잡지의 이름도 아는 게 없었어요. 불행하게도 ‘문청’이라는 낭만적 시기는 없었다고 봐야 해요. 지금도 그렇지만, 서로 기대거나 이끌어 줄 동료 하나 없이 외롭고 막막한 날들이었어요. 무모한 열정으로만 들끓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약사회 기관지에 실린 제 시를 보고 심상의 약사시인 한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그 선생님의 안내로 심상으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등단하던 1989년, 그리고 1990년대 초반, 문예지는 몇몇 계간지, 그러니까 『문학과 사회』, 폐간된 『세계의 문학』, 『창작과 비평』 그리고 『심상』, 『현대시학』, 『시문학』, 『현대시』 같은 월간지가 있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그 당시, 선배 시인들이 모인 장소에 더러 참석하면 낭만적으로! 술을 마셨어요.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투사처럼요. 시인의 감성으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를 그렇게 힘겹게 건널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지금의 시단을 강의 하류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때의 시단은 사철 폭포가 떨어져내리는 가파른 계곡처럼, 에너지가 넘쳤어요.
■ 이 령: ‘시인이 되겠다’ 결심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선생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시적 방향이라고 할까요? 시적 의미화라고 할까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 송종규: 중학교 때였어요. 이호우 시인의 「낙동강」이라는 시를 외우는 숙제가 있었어요. 밤새도록 그 시를 외우면서 불행하게도(!)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낙동강 강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 속에 막연하게 문학을 동경하는 붉은 웅덩이 하나가 생겨 버린 셈이지요. 김소월, 한용운, 백석, 손에 잡히는 대로 탐독하면서 지상 최고의 가치가 문학에 있다는 생각을 해버렸어요. 그 때 그 생각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시적 방향, 의미라고 하셨는데 사실 제 시가 어디로 갈지 저도 잘 몰라요.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과 중복됩니다만, 저는 여전히 실존으로서의 근원적인 결핍을 시를 통해 표출할 것이고 운명의 불가항력과 모순을 끝없이 제기하고 의심하고 탐색하는 작업을 하게 될 거라고 짐작합니다. ■ 이 령: 대담을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당선작과 더불어 최근 시집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을 재독했습니다. 시집 속에 발현되는 일련의 풍경은 기억과 사랑의 목소리를 그리며 다양한 감각적 의미들이 채집, 재현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탐침과 표현을 자아내고 있으며 여러 방식의 모색에서 생경하기보다는 풍성한 사유의 폭포수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요즘 선생님의 시작詩作의 동력은 어디에 있으신지요?
□ 송종규: 저녁마다 집 부근에 있는 호숫가를 걷습니다. 걷는다는 게 자신과 세계를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가 된다는 걸 근래에 깨달았어요. 제게 와서 부딪히는 바람과 별빛들, 마치 우주와 교감하는 듯한 에너지를 받습니다. 걷는다는 이 하찮을 수 있는 행위가 온전히 제가 저 자신과 만날 수 있는 호젓한 시간을 만들어 주던데요. 이럴 때 문득 살아있다는,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제가 세계와 저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해요.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전략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시간과 공간의 넘나듬은 내연의 확장을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릴 때, 시 속에서 서식하는 작은 이미지들, 오브제들, 이들의 운신이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럴 때 언어는, 기호로서의 의미를 초월할 수 있거든요. 이건 시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에서 현실과 초현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제 시를 놓고 싶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보셨으면 합니다.
■ 이 령: 수상작인 「죽은 새를 위한 메모」를 읽으면 고급 독자는 먼저 명사인 ‘새’, ‘메모’의 의미보다는 ‘죽은’ 이라는 관형어에 대한 의미화를 눈여겨 볼 듯합니다. 특별한 의미를 풀어주시겠지요?
□ 송종규: 죽은 새는 과거의 영역입니다. 과거라는 말의 뒤쪽에는 늘 어떤 회한 같은 게 느껴집니다. 이 시는 어쩌면 제 시론일 수 있고 난해하고 불안한 실존으로서의 아픈 고해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시가 지상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었던 저는 아직도 시라는 고지에 닿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 노래보다 높은 곳에 있’ 어서 전 생애를 걸고 바람과 구름의 높이 에 닿고자 했지만 결국, 닿을 수 없는, ‘당신’은 제가 꿈꾸는 어떤 피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은 새는, 죽은 새가 아니라 어제의 새이고 죽은 새는 현재의 새가 아니고 지난 시간의 새입니다. 죽은 새는 다만 과거의 시제 속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죽은’이라는 관형어는 그냥 과거입니다. 매순간이 과거이고 매순간이 미래이므로, 어제의 저도 지금의 제가 아니니까요. 억지 같기도 하지만 시간에 의해 세계는 매순간 생성과 소멸을 쉼없이 반복하고 있잖아요. 제 시 속의 시간은 이렇게 지성체계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쓰여질 때가 많아요.
■ 이 령: 선생님의 시작에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예술분야가 있는지요? 선생님의 시에서 보여 지는 깊이 있는 존재론적 의미의 천착을 보노라면 특별한 철학적 고찰로 연관된 활동이 있으신지 혹은 영감을 주는 영역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문학적 자양분,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 있어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나 작가가 있으신지요?
□ 송종규: 지금 스쳐가는 것들, 그리고 언젠가 스쳤거나 머물렀던 기억 속의 티끌까지, 이 모든 개인사적인 것들에서부터 우주의 영역까지 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감성의 흡반이나 표출하는 방법은 늘 변화하겠지만요. 오늘의 저는 죽은 새에서처럼, 어제의 저와 똑같은 제가 아닐 것이고요. 무수히 반복되는 생성과 소멸은 결국, 우주적인 것이고 운명적인 것입니다. 제가 시를 쓰는 것은 이 운명적인, 그리하여 세계의 티끌인 실존의 비애와 황홀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작업이었다고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순간의 떨림을, 그 순간의 황홀을, 그 순간의 절망을, 기록하려고 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작가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 밀룬 쿤데라, 그리고 마르셀 푸르스트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밀룬 쿤데라와 베르나르 베르베르 문장의 치밀하고 집요함은 언제나 저를 긴장시킵니다. 그리고 마르셀 푸르스트의 첨예하고 순수한 감수성의 문장과 그의 반문명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편입니다. 영감을 주는 분야가 있다면…… 음악입니다. 지금 음악에 대한 저의 상식은 미천하지만 어릴 때 집에서 놀이하듯이 피아노를 자주 만졌어요. 그 때 제가 짚어나가던 서툰 음정의 높 낮은 소리들은 아직도 저를 따라다니는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리에 민감하게 감응하는 거 같아요.
■ 이 령: 저는 일명 새벽자시형, 귀뚜라미 소리도 허용하지 못하는 습관성 고요형 글쟁이입니다. 시를 쓰실 때 특별한 습관이 있으신지, 집필을 주로 하시는 시간, 공간이 따로 있으신지요?
□ 송종규: 시를 쓴다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장소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낯가림도 있고 아무데서나 잠도 잘 못자고 별난 편인데 다행히 시는 아무데서나 쓰곤 합니다. 집에서나 약국의 한 귀퉁이에서나 해외에서나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TV 가 틀어져 있어도 괜찮아요. 집에 작은 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노트북이 있는 곳이면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 이 령: 시와 무관한 선생님의 일상은 어떠하신지요? 시인으로써의 현재의 삶이 시만큼 극적인지 궁금합니다.
□ 송종규: 작은 약국을 하고 있어요. 주말을 제외한 오후 몇 시간은 주로 거기서 보낼 때가 많아요. 나머지 시간은 관리약사가 근무하고요. 제 삶이 극적이면 좋겠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네요. 집과 약국을 오가면서 호숫가를 산책하는 정도의 따분한 일상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그 견딤을 견딜 수 없을 때, 노트북만 들고 해운대 쪽으로 달려가요. 거기서 며칠 푹 박혀있는 호사를 더러 누리기도 합니다.
■ 이 령: 요즘 일부에서 우스개로 ‘대한민국은 시인공화국’이라고들 합니다. 문학외적인 권력에 편향된 문단의 현실을 비꼬는 시각일 텐데요. 이런 점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송종규: 일종의 오만과 편식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이라는 가면을 쓴 무지와 무식의 다른 얼굴이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문인 개개인의 자존심과 양심과 식견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이 령: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불명확한 이 시대에 문학의 소명이 있을까요? 후배시인, 동료시인들과 공유하고 싶은 소신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지요?
□ 송종규: 연민입니다. 문학은 끝까지 연민이었으면 좋겠어요. 세계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모두 가엽고 외로운 존재들이니까.
■ 이 령: 시편들에서 보여지는 미학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고독과의 사투(시인의 기억)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드디어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어쩌면 원천 불능의 사투(문학적 성취)가 계속되리라는 예감을 하며, 시인으로서 앞으로의 다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지요?
□ 송종규: 저에게는 전략도 없고 특별한 다짐도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저 자신을 믿을 뿐입니다. 지금처럼요. 매순간 거대한 세계가 저라는 실존에 부딪쳐올 때 그 순간에 반응하는 제 직관을 믿겠습니다. 직관은 가장 정직한 세계인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직관을 믿으므로, 세월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순간 변화하는 그 변화를 후퇴가 아니라 진화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성의 훈련은 꼭 필요하겠네요. 광범위한 세계와 직간접으로 부딪치고 사색하고 전진하고 조절하는 훈련이겠지요. 그렇다면, 불가해한 시간이 소멸과 퇴화를 향해 달려가더라도 소멸 또한 진화의 한 과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이 령: 여전히 기억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존에 대한 사투를 진행 중이신 그러나 미학적 의미로움을 독자에게 전하며 시적 정취의 탑을 쌓고 계신 선생님의 깨어있는 시인정신을 계속해서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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