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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성찰의 문학- 『한국수필』 9월호를 읽고 -
이방주
최근의 문단은 수필문학이 대세인 것으로 보인다. 문인들은 수필을 지향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다른 문학에 비해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21세기 들어 수필문학은 양적인 팽창은 가져왔으나 문학성은 저하되었다고 한탄하는 평론가도 있다. 수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평론가들도 이런 말로 수필가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물론 최근에 발표되는 모든 수필 작품이 다 우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발표되는 시나 소설은 모두 우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의 질적 향상은 문인 모두의 과제라고 본다.
21세기 들어 대중이 수필문학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필이 다른 양식에 비해 삶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따뜻하고 겸손한 속삭임이다. 수필가는 자신의 삶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한 체험을 소환하여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미적으로 구조화한다. 작가는 이러한 미적 구조화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실존적 존재의 변환을 꾀한다. 수필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소환한 작가 자신의 기억과 체험을 공유한다. 그런 공유과정에서 역시 자신을 돌아보고 공감하고 울림을 받는다. 이것을 작가와 독자의 공명(共鳴)이라 한다. 공명을 통하여 독자도 존재의 성숙과 변환을 가져온다. 이러한 아픔의 치유는 태초에 철학을 바탕으로 한 문학연구자들이 말한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현대적으로 진화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가는 의원도 되고, 사제도 되고, 아픔을 함께 울어주는 곡비(哭婢)도 된다.
수필의 소재는 대부분 일상이기 때문에 삶이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은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사람이 남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언어를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 창작의 과정에 자아성찰이 필수이고, 자아를 성찰하고 대상에 비추어 자신의 모순을 찾아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수필 창작을 수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 작품은 수행과 성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잔잔한 언어일 때 아름다움으로 상대의 감성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수필 9월호는 특집 [9월의 마음]에 15편, [무등수필문학회]에 12편, [9월의 향기]에 15편, [사색의 뜰]에 17편을 실었다. 모두 59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꼼꼼하게 읽으면서 하나로 꿰뚫는 주제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수행(修行)과 성찰(省察)이라 생각되어 반가웠다. 수필은 붓을 따라 쓰는 글이라 수필(隨筆)이라하지만 삶의 과정에서 작가의 정신적 성숙을 고백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수필(修筆)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성보다도 수행과 성찰이라는 주제가 드러나는 작품 몇 편을 골라 보았다.
김상분의 「내 친구 호접란 이야기」는 ‘자연의 모든 존재가 상생하는 경이로움’을 바라보며 작가 역시 자연과 상생하며 성찰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는 측은지심으로 주워온 호접란을 정성으로 키운다. 추운 베란다 한구석에서 춘화처리를 하여 꽃대를 올린 한란에게서 장하고 기특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두툼한 잎으로 무더운 여름을 이겨낸 양란이 한 촉의 꽃대를 올리기 위해 제 스스로 떨어져 ‘희생’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한란이든 양란이든 이러한 난의 생리를 통해 한 생명이 살아가는 법도를 깨닫는다.
스스로 몸을 단련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꽃대를 올린 장하고 기특한 식물 생리, 춘화처리(春花處理) 앞에서 부끄러웠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며 기나긴 겨울잠만 잤는지…. 그렇게 동양란과 서양란은 서로 생리가 다르고 생태환경이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듯이 식물도 그러한 것을 늘 배우고 깨닫는다.
호접란을 보살피면서 그 생태를 통하여 자아를 돌아보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자연과 인간은 우주 안의 하나의 생명이다. 그 삶의 원형은 하나임을 깨달으며 자아는 성숙한다.
신금철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에서 장례미사에 참여하는 체험을 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기 위한 삶을 준비할 각오를 한다. 죽음은 결국 삶으로 평가받는다. 성스러운 죽음은 성스럽게 살아온 사람의 죽음에 내리는 꽃이다. 작가는 두 아들을 사제(司祭)로 하느님께 바친 고인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체험을 소재로 하여 죽음과 인연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고인의 죽음이 성스럽기 때문에 장례식장은 더 성스러웠고, 사제인 두 아드님의 집전을 보면서 웰 다잉(well dying)의 본보기라 생각한다. 더구나 작가는 고인과 사돈 관계로 인연이 깊고 생전에 사랑을 받고 존경으로 대했던 분이다.
촛불 행렬을 끝으로 성가대의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침묵을 깼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에서) 천상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고인을 위해 부르는 마지막 성가처럼, 고인은 아름다운 삶을 사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세상은 아름다웠노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이었으니 신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으신 고인이 편안히 천상에 오르시도록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은 로마제국에서 전쟁 영웅들을 환영하는 자리의 황금마차에 노예를 동석시켜 외치게 한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은 전쟁에 승리했어도 결코 교만하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스티브잡스도 ‘내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오면서 선택한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고인은 많은 인연들에게 고귀한 씨앗을 심어온 분이고 작가도 영향을 받아 선을 행하면서 살 각오를 한다. 수필은 창작과정에서 사유와 상상 그리고 성찰을 통하여 자아를 가꾸는 예술이라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경선의 「40을 맞는 예의」는 삶의 굴곡은 당연한 하나의 과정이고 섭리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젊었을 때 바라본 나이 40은 절망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성숙과 안정감이 내포되어 있는 나이 40은 청년기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서울에서의 시속 40Km가 기어가는 속도라면 괌에서는 최고의 속도다. 숫자 40을 환경에 따라 생각하기 나름인 것처럼 나이 40도 자신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혼 40년을 맞는 지금,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보며 아옹다옹했던 지난날 역시 청년기였으니 만족한 삶이란 없음을 깨닫는다. 이는 나만 가진 것이 아닌, 누구나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주변인들을 통해 동지애를 느낀다.
40년 시공간을 달려만 온 느낌이다. 잠시 정차하지 못하고 고속열차에 태워져 당도한 현 지점이 최선인 것처럼 서성대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삶인 것을, 이제야 주어진 길임을 인정하고 안주하려 한다. 만족한 삶이란 없을 것이다. 부딪혀 넘어지고 일어서 눈물 섞인 땀을 흘리며 여기까지 왔다. 요즘 들어 주변인들에게 동지애를 느낀다. 근심이라곤 없는 줄 알았던 이들의 병풍처럼 가려진 결핍과 고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닮지 않은 듯 비슷비슷한 추상화다. 나와 별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머문다. 보듬어주고 싶다. 강산을 네 번이나 바꾸고도 꿋꿋하게 평행선을 유지하는 한 남자로 인해 난 결국 어설픈 도인이 돼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병풍처럼 가려진 결핍과 고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어설프게나마 자신을 도인으로 만들어준 남편을 생각하게 된다. 숫자 40에 대한 의미를 여러 가지 각도로 고찰하여 해석함으로써 자칫 불만일 수 있는 결혼 40년을 오히려 남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득주의 「맏물」은 방아다리 고추라는 맨 처음 열리는 고추에서 누군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개념화하였다. 처음 열리는 방아다리 고추는 크기 전에 미리 따주어야 더 많은 고추를 수확할 수 있다. 맏물은 작고 못 생겨서 빨갛게 익어보지도 못하고 다른 고추를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방아다리 고추를 보며 맏물 같은 여동생을 생각한다. 어려서 일본뇌염을 앓았던 후유증으로 평생 보호시설에서 지내야 하는 여동생이 집안에서는 맏물이다. 여동생은 몸이 불편함에도 특별 휴가를 받아 혼자 계신 어머니 수발을 도맡아 하면서도 당연한 듯 불평 한마디 없다. 다른 형제들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희생을 하는 것이다.
맏물 고추는 빨간 가을을 만나지도 못한다. 욕심 없이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한다. 매운맛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첫 열매로 나와 자리만 펴놓고 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맏물이 되어야 크고, 두껍고, 매운 고추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평온한 세상은 맏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돌고 돌아간다. 이제껏 내 안에 삶만 붙잡고 연연하며 산 세월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내 안에 삶만 붙잡고 연연하며 산 세월이 부끄럽다며 작가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맏물 고추를 상관물로 형제들을 위해 맏물이 되어준 동생의 희생적인 삶을 덤덤하게 그렸다.
조은숙은 「시험 진행 중」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과정을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사고를 확장한다. 작가는 세 번째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하면서 또 떨어졌다는 실망감보다 떨어질수록 그동안 자신의 잘못된 운전 습관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의 기회로 삼는다. 우리는 날마다 삶이라는 운전대를 잡고 운행 중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도 분수 모르고 욕망의 과속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한눈을 팔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목표는 분명한지 이참에 스스로에게 엄정한 질문을 해본다. 자기 성찰을 통한 수행과 정신적 성장의 과정을 고백하였다.
채정숙은 「동행」에서 가족들에게 스며드는 제4의 물결에 대해 돌아본다. 언택트와 컨택트의 조화로운 동행이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사회에서 재사회화하는 수행이다. 코로나 비대면 시대에 일상에 스며든 새롭고 다양한 문화풍조를 쉽고 자연스러운 문체로 서술하여 공감을 얻었다
김선미는 「보이는 대로」에서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하는데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담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자신을 성찰한다. 어반스케치란 주변 공간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으로 실제로 본 장면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이다.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처럼 왜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연필이 길을 잃고 공중제비를 타며’ ‘헛손질’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니 고민하던 소실점이 저 높은 곳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복형제처럼 닮은 듯 다른 그림, 소실점을 가늠하며 다시 연필을 잡는다. 손을 대면 댈수록 둔탁해지는 그림,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데 자꾸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나는, 엉터리 화가다. 엉터리이면 어떤가, 보이는 대로 믿어주고, 보이는 대로 들어주고, 보이는 대로 사랑하며, 보이는 대로 그려내면 되는 일, 설사 그 과정에 왜곡이 있다 해도 믿음이면 될 일. 온전히 그려내지 못할지라도 설렘을 담아내는 일이니 그 얼마나 좋은가.
내 삶의 파편들이 빛나는 지점, 나를 설레게 하는 행복 눈높이는 소실점을 계산해야 하는 저 높은 곳이 아니라 내 곁에 내 눈앞에 있었다며 설사 그 과정에 왜곡이 있다 해도 믿음이 있으면 될 일. 온전히 그려내지 못할지라도 설렘을 담아내겠다며 보이는 대로 믿어주고 보이는 대로 들어주고 보이는 대로 사랑하며 보이는 대로 그리기로 마음을 다진다. 결국 나를 덜어내는 것이 삶의 열쇠임을 깨닫는다.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이자 성찰이다.
김지헌은 작품 「말, 강 건너 불빛」에서 말이 지닌 이중성 때문에 소통이 어려운 답답함을 토로한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대개의 불통은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는 병원에서 도수 치료를 받던 중 치료사는 열심히 설명하지만 작가는 그가 하는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주관적인 통증의 정도를 어떻게 숫자로 객관화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통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똑같은 언어로 표현하는데도 전혀 다른 의도로 해석하는 이가 있다. 언어의 감각 작용이 다르게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나온 대사 한 구절이 작가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남자가 그 산통을 느낄 수 없듯이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불통은 그저 강 건너 불빛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과 교통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믿음에 대한 의심이고, 그것은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임을 깨달음으로서 자기 수행과정으로 마무리한다.
허석은 「느리게 가는 달력」에서 달력을 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통시적으로 통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친구의 집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제각기 다른 날짜의 달력을 발견하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우리 역시 작가처럼 시간의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가 되어 하루를 시간과 분 단위로 쪼개서 살아가는 이가 많다.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알려줄 뿐이지만 달력은 과거와 미래, 보이지 않는 시간의 거리를 느끼게 한다. 시계보다 여유가 있다. 달력의 시간은 주관적이라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초조와 설렘, 기대와 불안, 행복과 아픈 기억이 공존한다. 얇은 습자지의 일력을 매일 아침 떼어낼 때마다, 달력을 넘기기 전에 해야 했던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의 말, 아픔을 나눌 위로도 모두 되돌릴 수 없는 어제의 일이 되고 말았음을 되짚어보던 시절을 떠올린다.
이제 나도 느리게 가는 달력을 갖고 싶다. 남과 비교하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이제 지쳤다.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직선보다 훨씬 먼 곡선의 길일지라도 내가 즐겁고 마음이 편해지는 일, 본연의 나 자신과 함께하는 삶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시간을 주물럭거려 느리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노년의 행복이고 미학이 아닐까 한다.
인생은 왕복이 없는 편도승차권이다. 과거보다는 남은 시간이나마 아쉬움과 후회 없는 날이 될 것을 작가는 소망한다. 제날짜를 어기고 느리게 가는 달력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찰하여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감 글이다.
이번 호는 좋은 작품이 많았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다 언급하기 어려워서 수행과 성찰이라는 주제로 엮을 수 있는 몇 작품만 뽑았다. 수필은 치유의 문학이라는 문학적 효용성을 잘 드러내어 반가웠다. 특히 눈에 보이듯 인상적인 묘사로 표현된 작품이 많았고, 감춤 없는 고백은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본다.
첫댓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하시니 궁금합니다. 수행과 성찰은 평생을 함께할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밖으로 향하는 눈을 감고 내 안의 낮은 울림에 귀기울이는 법을 수필을 통해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수필교실 합평때 접한 신금철 선생님의 '메멘토 모리'도 9월호에 실렸다 하시니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아직 8월호도 다 못 떼었는데...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9월호는 pdf파일로 읽었습니다.
월평을 쓰기 위해서 편집중인 작품을 보내줘서 미리 읽었죠
추석이 지나면 인쇄 들어갈 겁니다.
수필은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수행의 문학이라는 것이 몇몇 작품만으로도 확실히 보였습니다.
충북수필의 신금철선생님 작품도 있어 반갑네요.
이방주선생님 월평으로 많은 분들이 힘을 얻으실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년에 월평을 6개월이나 쓰느라 힘들었는데
평론가로서 이미지를 조금은 심어준 것 같아 보람있었습니다.
한국수필 독자들이 월평을 읽는 분이 많아졌다고 하니 기분 좋습니다.
수행과 성찰, 인상적인 묘사, 감춤없는 고백이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킨다고 하시는 말씀에 쪽집게 과외를 받은 느낌입니다.
선생님 월평은 늘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재미 없는 월평을 이렇게 꼼꼼하게 읽는 모습이 창작의 뿌리를 튼튼하게 다지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월평을 읽고
진정한 성찰을 합니다.
과연 죽음의 목전에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왔는지....
더 잘 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의 계기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이 작품이 정말 감명 깊었고 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 설화집에서 읽었는데
죽어 저승에 명경이 있어 삶의 여정이 반영으로 나타난다 하더군요.
지금 순간에 "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명경을 그려보면 후회도 많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명작이었습니다.
수필 창작의 과정에 자아성찰이 필수이고 대상에 비추어 자신믜 모습을 찾아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수필 참작을 수행과정이라고 하는군요. 저는 수행과 성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 어렵나 봅니다. 상대의 감섬을 울리지 못하거든요. 더욱 노력해야겠습니다.
수행과 성찰에 대해 더 생각하여 창작메 임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작과정도 수용과정도 사실은 모두 수행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