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The Crack Up, 1936)」 (tr. fr. 1936)」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
-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잃어버린 세대(1920년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미국 작가
이 작품의 번역이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 같다. 즉 아직 못 찾았다. (51QLC) / 국내의 번역으로는 “붕괴”로 되어 있구나. 평론에는 나오는 모양인데, 어느 번역본인지 찾지 못했다. (51QLD)
[[『The Crack-up』 무너져 내리다 / 스콧 피츠제럴드
프로필 / 와신상담맨 / 2018. 1. 15. 16:27 ]]
[** 이 글이 붕괴의 전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읽었다. 붕괴: 인간의 삶 자체가 무너져 내림이다. 그 무너져 내림의 두 종류가 있다. 순식간에 왕창, 그리고 서서히 무너내리지만 느낌의 순간은 왕창이다. 그런데 이 앤트로피의 역행은 생명활동인데 그것은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무너져 내렸음에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 있다(들뢰즈의 아리아드네처럼 말이다). 그녀는 무너져 내린 것은 당신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살아온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작자는 스피노자 강의라고 여긴다.
이런 무너져 내림의 대립적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글을 쓰는 1935년이라고 한다. <년보: 1935 피츠제럴드가 병에 걸려, 휴양을 위해 트라이턴과 애슈빌에 머뭄. '붕괴'라는 에세이집에 실리게 되는 글을 이때 집필. 1935년 3월 《기상나팔 소리(Taps at Reveille)》, 네 번째 단편집 // 사후 5년이 지나 1945년 《붕괴(The Crack-Up)》, 유작 에세이집이 나온다>
들뢰즈/가타리의 글로 보아, 이들이 제시한 단편소설 「파열(The Crack Up, 1936)」과 1945년 에세이 유작집 「붕괴/ 파열(The Crack Up, 1936)」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주제는 같을 수 있다. 붕괴란 물체성으로 무너져 내림인데 비해, 삶의 노력까지는 아니라도 어려운 시기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생성이며 변용태일 것이다.
붕괴되는 나의 몸이 마치 찬장 위에 놓인 유리사발과 같다. 평소에는 마치 장식물로 있지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때, 남은 음식물을 보관하는 그릇 정도이고, 때로는 사용 중에 지나치다 실수하는 사람들에 의해 손에 미끄러져 모서리가 부서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찬장에 부딪쳐 흔들리면서 내려앉을 때 완전히 수정(크리스탈)조각처럼 깨어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붕괴는 “컷 글라스 그릇(The Cut-Glass Bowl)”에는 나오는 헤럴드 파이퍼 부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컷 글라스 그릇(The Cut-Glass Bowl, 1920)」에서 파이퍼 부인은 즐거웠던 시절이 지나 10여년 무미건조하고 위태로운 부부의 생활에서 찬장 위에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쳐다 볼 수 있는 아들이 군대를 들어가 파병을 나갔다. 전사 통지서를 받은 부인은 그 큰 유리그릇을 안고 넘어져 유리그릇처럼 수정 조각들로 산화한다. - 이 단편에는 쓴 연도가 붙어 있지 않는데, 같은 시기가 아닐까? (The Cut-Glass Bowl, 1920(1919년 썼다고 한다)
(51Q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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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편소설: 피츠제럴드의 「파열(The Crack Up)」, 1936, tr.fr. (378-382)
-8장.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Ch. 8. 1874: Trois nouvelles ou Qu’est-ce qui s’est passé? pp. 235-252).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
§8.022. Deuxième nouvelle 242
둘째 단편소설: 피츠제럴드의 「파열(The Crack Up)」, 1936, tr.fr. (378)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피츠제럴드가 “물론 모든 삶은 파괴의 과정이다”라고 말한 다음에 끝에 가서 끊임없이 문제 삼는 물음이다. 이 “물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삶은 점점 더 견고하고 메말라가는 절편성 안으로 끊임없이 참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작가 피츠제럴드에게는 여행의 잘 재단된 절편들과 더불어 여행의 마모가 있다. 각 절편마다 경제 위기, 부의 상실, 피로와 노쇠, 알콜 중독, 결혼 생활의 파국, 영화의 대두,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도래, 성공과 재능의 상실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에 피츠제럴드는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또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갑작스런 커다란 타격들(Des grandes poussées soudaines)” 그리고 매우 의미심장한 절단들에 의해 진행되는 갑작스런 커다란 타격들이 있다. (242, 378-379) [바깥으로부터 오는 타격, 숙명 같은 밀려남이 있다. 경제적 공황, 지불 유예(支拂猶豫: 지급 연기 支給延期, 모라토리엄, moratorium), 개인이 할 수 없는 밀려남... (51NMI)]
여기에 분할선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유연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거대 덩어리들을 작동시키는 견고한 분할선이. (243, 379)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완전히 다른 절편성을 따라 일어나는 다른 유형의 파열(un autre type de craquements)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더 이상 거대한 절단들이 아니라 접시 위의 금과 같은 미시적 균열들(des micro-fêlures) 이다. 그것들은 보다 미세하고 보다 유연하며, 달리 보자면 오히려 일이 더 좋아질 때 생산된다. (243, 379)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실은 지정 가능한 어떤 것도, 지각 가능한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이 도래할 때 그것을 기다렸던 자아가 이미 죽거나 아니면 그것을 기다리던 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거나 하게끔 하는, 욕망의 분자적 변화와 욕망의 재분배가 있을 뿐이다. 이 경우에는 나무의 초월성에 의해 규정된 거대한 운동들과 거대한 절단들 대신에 리좀의 내재성 안에 있는 격동들과 파열들(poussées et craquements)이 있다. “균열은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생기지만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 (243, 379-380)
이 선은 모든 사물들을 작동시키지만 다른 단계와 다른 형식을 통해, 다른 본성을 가진 분할과 더불어, 나무의 방식이 아니라 리좀의 방식으로 분할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미시정치. (243, 380)
게다가 셋째 선이 존재한다. 이 선은 단절의 선과 같은 선이며 다른 두 선의 폭발과 충돌 등을 표시한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나는 살아남은 자들은 뭔가 진정한 단절(clean break)을 이뤄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며, 탈옥과는 상관이 없다. 탈옥의 경우 우리는 대개 새로운 감옥으로 가게 되든지 옛 감옥으로 강제 송환될 것이다.” 여기서 피츠제럴드는 이른바 기표작용 사슬 안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가짜-절단과 단절을 대립시킨다. (243, 380)
“저 유명한 <탈주> 또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망>은 덫 안에서의 소풍이다. 그 덫이 남태평양을 포함한다 해도 말이다. 남태평양은 그림을 그리거나 항해하길 원하는 자들만을 위한 곳이다. 진정한 절단은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243-244, 380)
그리고 멜빌(Melville)처럼 남녘 바다에서까지도 그럴까? 견고한 근육일까? 유연한 절편성 자체는 그것이 피해갔다고 주장하는 커다란 형태들을 현미경 아래 축소시켜서 재형성한다고 믿어야 할까? 베케트(Becket, 1906-1989)의 잊을 수 없는 문장이 모든 여행을 짓누르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우리는 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여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멍청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244, 380-381) [그래도 여행하지만 모르고 여행하는 머저리, 멍청이는 아니다.]
단절(la rupture) 속에서 과거의 물질은 휘발될(se volatiliser) 뿐만 아니라 지나간 것의 형식, 휘발성 물질 안에서 일어난 지각할 수 없는 무언가의 형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조차도 않는다. 사람들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여행 속에서 지각할 수 없고 은밀하게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났을 수도 없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나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할 게 없다. 나의 영토는 잡을 수 있는 곳 바깥에 있다. 영토가 상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영토를 그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전쟁들은 끝났다. 항상 무언가를 뒤따르는 여행들도 끝났다. 더 이상 나는 아무런 비밀들을 갖고 있지 않다. 얼굴, 그 형식과 질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하나의 선일 뿐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추상적인 보편적 사랑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할 사랑을, 맹목적으로, 자아를 갖는 동시에 갖지 않는 나의 분신을. (244, 381)
사람은 자기 위에 세상을 그렸지 세상 위에 자리를 그리지 않았다. 천재는 특별한 사람이라든지 모든 사람이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천재는 모든 사람들을 생성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아마도 율리시즈, 이것은 조이스에게는 실패한 야망이지만, 파운드에게는 반쯤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람은 동물-되기, 분자-되기, 마침내 지각 불가능하게-되기에 들어갔다. “나는 항상 바리케이드 다른 쪽에 있었다. 넌더리나는 무거운 느낌이 계속되었다. (‥…) 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동물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적당히 고기가 붙은 뼈를 던져준다면 당신의 손을 핥아줄지도 모른다.” (244, 381-382)
모든 경우에 피츠제럴드는 우리에게 우리를 가로지르며(traverser) “하나의 삶”(모파상의 책 제목)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절단선, 파열선, 단절선. 견고한 분할선 또는 그램분자적 절단선. 유연한 분할선 또는 분자적인 파열선. 추상적이고, 죽어있고 살아있는, 비절편적인 도주선 또는 단절선. .(MP 244-245, 382)
설1896피츠제럴1936파열.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