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이 죽던 날, 내 삶도 끝났다!
데뷔작 <살았더라면>으로 장 도르메송 문학상을 수상한 티에리 코엔의 두 번째 소설『널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들을 잃은 한 남자의 고뇌와 복수의 과정을 통해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과격 이슬람교도의 폭탄테러로 아들 제롬을 잃게 되면서 공황 상태에 빠진 다니엘. 죽은 아들에 대한 복수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 그에게 아내와 다른 아들은 안중에 없다. 한편, 파리 근교에서 알코올 중독 노숙자 장이 괴한에게 납치된다. 감금된 장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이 위협을 당할까봐 묵묵히 감수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다른 아들 피에르는 오래 전 집을 떠난 아버지를 찾다 마침내 재회의 기회를 포착하는데….
☞ 북소믈리에 한마디!
집을 떠나 복수의 길에 오른 다니엘과 노숙자로 지내다 광신도들에게 납치된 장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되며,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전작 <살았더라면>과 마찬가지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다른 가족들의 곁을 떠나 아들의 복수만을 생각한 다니엘의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지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랑과 우정, 복수, 인간의 가치 등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미스터리 기법과 치밀한 구성으로 긴장감을 더했다.
저자소개
저자 티에리 코엔 Thierry Cohen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으며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방송국에서 기획과 편집으로 경력을 쌓았고, 친형과 <아 카펠라> 라는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를 설립해 운영했다. 데뷔작인 《살았더라면》은 작가가 무명인 까닭에 출간(2007년 3월)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가 2008년 벽두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해 아마존 프랑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참신성과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에 수여하는 장 도르메송 문학상(Le Grand Prix Jean D'Ormesson) 을 수상한 작가의 데뷔작은 인터넷에서 마르크 레비가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을 만큼 신인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완숙한 역량을 과시했다. 단 한편의 소설로 티에리 코엔은 기욤 뮈소, 안나 가발다, 마르크 레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광받고 있다.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작가의 두 번째 작품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은 인생에서 사무치는 후회란 어떤 것인지,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테러로 아들을 잃은 한 남자의 복수 과정을 통해 진지하고 집요하게 탐구한다.
역자 이세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랭스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숲의 신비》, 《곰이 되고 싶어요》, 《회색 영혼》, 《유혹의 심리학》, 《나르시시즘의 심리학》,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다른 곳을 사유하자》,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반 고흐 효과》, 《욕망의 심리학》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 서평
내 아들의 몸이 버스에서 갈가리 찢겨지던 날 내 삶은 끝났다!
-《살았더라면》으로 장 도르메송 문학상을 수상한 티에리 코엔의 두 번째 장편소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 소설 《살았더라면》으로 전 세계 독자들과 평론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티에리 코엔의 두 번째 소설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이 출간되었다. 단 한 편의 소설로 프랑스 대중문학에서 인상 깊은 글쓰기 스타일을 보여준 티에리 코엔은 현재 프랑스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이다. 첫 소설 《살았더라면》은 참신성과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에 수여하는 장 도르메송 문학상을 수상하며 장장 2년간 아마존 프랑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살았더라면》이 출간된 직후 인터넷에서 유명작가 마르크 레비가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을 만큼 티에리 코엔은 막 데뷔한 작가답지 않게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펼치는 프랑스에서 처녀작으로 2년 동안이나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한 예는 흔치 않다. 단 한 권의 소설로 티에리 코엔은 기욤 뮈소, 마르크 레비, 안나 가발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이 이어지는 가운데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은 그의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입증하고도 남을 만큼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데뷔작을 뛰어넘는 수작’, ‘작가의 성장세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차기작 징크스’에 대한 우려를 단숨에 불식시켰다.
티에리 코엔은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글쓰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이루는 주제는 진지하고 무겁고 교훈적이다.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은 사랑과 우정, 복수, 인간의 가치 같은 다소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중소설의 화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주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녹여낸 점, 치밀한 구성과 놀란 만한 반전으로 독자들에게 잠시도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 점은 작가가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 가늠하게 한다.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에는 첫 번째 소설 《살았더라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가정법이 깔려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에서 사무치는 후회란 어떤 것인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니엘은 어느 날 테러로 아들 제롬을 잃게 되면서 공황 상태에 휩싸인다. 테러를 사주한 이슬람 종교지도자 셰이크는 연일 신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자살테러범을 순교자로 지칭하며 미화한다. 직장에서는 촉망 받는 간부 사원이자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다니엘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분노를 느낀다. 다니엘에게 복수는 필연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종교계 거물인 상대를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은 매우 궁색하다. 이 소설은 복수의 길에 오른 다니엘의 심리와 행로를 집요하게 따라잡으면서 과연 복수만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를 묻는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우리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니엘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더없이 귀중한 아들을 잃었지만 다니엘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 남아 있다. 다니엘은 복수를 택하면서 사랑하는 아내 베티와 아들 피에르의 곁을 떠난다. 집을 떠나 흘려보낸 세월은 회한과 슬픔을 각인시킬 뿐이다. 과연 다니엘의 선택을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베티와 둘째 아들 피에르가 있다. 가장인 다니엘의 삶에는 그들을 돌볼 책임과 사랑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다니엘이 뒤늦은 후회와 함께 생을 포기해갈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에게는 아들 피에르가 있었던 것. 그들 부자는 1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재회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무게감에 짓눌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장과 짜릿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두 갈래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주인공을 내세워 이끌어가는 구성도 이색적이다. 이 소설의 역동적인 흐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는 미스터리 기법과 독특한 구성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 티에리 코엔은 이 소설을 통해 로맨스나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는 소설작법을 선보이고 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온 아버지와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는 아들의 재회!
-《널 떠나지 않았더라면》 줄거리 요약
다니엘은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유능한 사원이자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다. 어느 날 아들 제롬이 하교 버스를 탔다가 과격 이슬람교도에게 폭탄테러를 당해 죽는다. 다니엘의 눈에는 가끔 죽은 아들이 나타나고 대화도 함께 나눈다. 다니엘은 아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한다. 죽은 아들에 대한 복수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 다니엘에게 아내 베티와 둘째 아들 피에르는 안중에 없다.
다니엘은 가족을 사랑하지만 일에 더 치중하는 삶을 살아왔다. 아내 베티를 만나기 전까지 불량배였던 그는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결과 젊은 나이에 회사의 간부 사원이 된다. 다니엘은 지난 일기장을 들추며 자신이 걸어온 삶을 회고한다.
한편 파리 근교의 허름한 주택가에서 장이라는 알코올 중독 노숙자가 두 명의 괴한에게 납치된다. 장은 생에 대한 미련이 별로 남지 않은 듯 괴한들에게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한다. 괴한들이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면 남은 가족을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장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인질이 된다. 장에게 멀리 두고온 가족은 목숨보다 소중하다.
납치범들에 의해 감금된 장은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으며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이 해코지를 당할까봐 묵묵히 감수한다.
불량배 시절의 절친 살로몽이 다니엘의 복수를 돕기 위해 연락을 취한다. 어린 시절 그들은 가족 같은 친구였고, 아직 우정이 각별하다. 다니엘은 살로몽에게 무기를 구해달라고 청한다. 테러를 사주한 이슬람지도자 셰이크 파이살은 반성은커녕 연일 자살테러범을 ‘순교자’로 미화한다.
다니엘은 셰이크 파이살의 집 앞에 있는 호텔에 투숙하며 복수의 기회를 엿본다. 그런 가운데 셰이크 파이살이 영국 재계의 거물 모크타르 엘 파사위와 유착관계에 있음을 알아낸다. 다니엘은 엘 파사위에게 접근해 언론을 이용해 대중적 이미지를 쇄신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실제로 유력한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알선해준다. 엘 파사위는 다니엘의 뛰어난 수완에 깊은 관심을 표한다. 다니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엘 파사위를 이용해 셰이크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아낸다.
이 소설은 다니엘과 장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두 갈래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집을 떠나 복수의 길에 오른 다니엘, 노숙자로 지내다 광신도들에게 납치된 장. 두 갈래의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마침내 독자들의 의문은 풀린다.
다니엘의 또 다른 아들 피에르는 오래 전 집을 떠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재회의 기회를 포착하는데…….
[ 책속으로 추가 ]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자 혼미했던 정신이 맑아지면서 죽음의 의미도 다 같지 않으며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지임을 새삼 깨달았다. 죽음에는 깨끗한 죽음, 더러운 죽음, 영혼이 저승 문턱을 넘기도 전에 지옥을 맛보아야 하는 야만적 죽음이 있다. 사고사,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는 죽음, 추락사는 비교적 깨끗한 죽음이다. 삶이 곧 끝나게 되리라는 걸 의식할 새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니까.
몸과 영혼이 미지의 공포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이 지난한 죽음의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장은 목구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다.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했다. 공포는 그 어디에서건 최악의 적이니까.
- 186p
언제부터 내가 복수의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제롬이 죽던 날부터인가? 그 아이의 장례식을 치른 날부터인가? 베티가 내게 축구연습을 마친 제롬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고 비난하던 날부터인가? 셰이크 파이살이 테러리스트를 순교자라 지칭하며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던 날부터인가? 제롬이 처음으로 정원에 홀연히 나타난 날부터인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내 정신착란을 그대로 수용했다. 미치는 것이 미치지 않는 것에 비해 못할 게 없지 않은가? 내가 미쳤다면 그 놈은 나보다 더 심하게 미치지 않았는가? 그 놈이 제멋대로 떠들게 내버려두는 사회의 맹목적인 관망에 비한다면 내 광기쯤은 잘못이나 죄가 아니었다. 불의를 단호하게 비판하고 대항하기보다는 살인자들에게 동정이나 보내는 미치광이들의 신경증에 비해 내 광기가 정당하지 못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 240~241p
떨리는 이빨 사이로 분노에 찬 말들이 튀어나온다. 내 아픔, 아니 피에르와 베티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그 말에 담겨 있다. 내 말이 황산이 되어 그의 얼굴과 영혼에 뿌려졌으면 좋겠다.
셰이크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상황쯤은 이골이 나도록 겪어봤다는 듯 간결하게 말한다.
“미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이 벌인 무력도발 때문에 죽어간 아이들도 부지기수라는 걸 기억하시오. 그 아이들의 부모 가슴에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한이 맺혔다는 걸 정녕 모르지 않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아랍이나 흑인 아이의 목숨과 백인 아이의 목숨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 들고 있소.”
나의 총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겨냥하고 있다. 보디가드들이 들이닥치면 즉시 방아쇠를 당길 태세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아직 보디가드들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당신이 규탄해 마지않는 사람들과 당신의 수법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오히려 그들보다 더 고약하지.”
나는 기꺼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269p
“난 아들을 잃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아빠로서 뭐든 해야만 했지.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어? 어느 날 누군가가 당신 아들을 이유도 없이 죽였다고 상상해 봐. 그 자가 일체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봐. 더 끔찍한 건 그 살인자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쉬쉬 해야 한다는 거야! 당신이라면 놈이 천벌을 받길 기다리며 잠자코 앉아 있을 수 있겠어? 나는 비겁자가 아니야! 폭력과 공포에 굴복하는 건 인간의 수치야! 이건 내 아들에 대한 신의의 문제이기도 해! 아니, 나아가 나와 우리 가족의 생존에 대한 문제이기도…….”
“당신 부인과 아들이 또 다른 절망에 빠져도?”
“그때만 해도 내게 삶이나 죽음 같은 문제는 별 의미가 없었어. 난 이미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사람 같았으니까. 아들을 잃고 나니 나는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섭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어.”
- 362p
책속으로
내 인생은 내 아들의 몸이 버스에서 갈가리 찢겨지던 날 모두 끝났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흩어져 날아간 아이의 살점 하나하나에 내 삶의 순간순간들도 함께 흩어져 날아갔다. 승객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수많은 살점들이 버스 차체와 아스팔트를 향해 날아가 스러질 때 내 존재의 의미도 함께 스러졌다.
나는 내 아이의 살점들을 그러모으지 못했다. 설령 그러모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러진 살점들을 찾아내고 이어 붙여 이야기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내 아이를 위해, 우리가 죽은 후에도 남아 그 빈자리와 타협해야 할 이들을 위해.
난 그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내 아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파국을 맞이하기도 전에 광기가 내 정신을 집어삼켜서는 안 된다. 머리가 조금이나마 맑을 때 산산이 흩어져 버린 아들과의 추억을 마주하고, 내 인생과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련다.
- 10~11p
신문을 넘기다가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목이 꽉 잠긴다. 신문에 그 괴물 같은 살인마의 사진이 눈썹을 찌푸린 채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와 있다. 지금까지 봤던 사진들보다 더욱 선명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고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진다. 내 시선은 팽팽하다 못해 신문지를 뚫고 들어가 어느새 놈에게 바짝 다가가 있다. 놈이 내 앞에 있다. 놈의 이목구비가 낯익다. 사진을 몇 장 봤을 뿐이지만 놈의 얼굴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 완강하게 박혀 있다. 나는 놈에게 갖가지 표정, 즉 걸음걸이, 몸동작, 목소리, 분노 따위를 부여했다. 실제와도 별 차이 없으리라. 나는 사진에 대고 그를 모욕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내 분노를 단 한 방울도 허투루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안으로 짓누르고 조여 고스란히 담아두어야만 한다.
- 29p
문득 멀리서 제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각각의 이미지와 말이 일치되지 않고 따로 놀며 열에 들뜬 채 꿈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때서야 난 이 기묘한 상황을 깨달았다. 어째서 제롬이 내 앞에 있는가? 제롬은 왜 밤이 이슥해지면 이따금 나를 찾아와 말을 거는가? 왜 난 제롬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가?
제롬의 죽음이 나를 불가사의한 생의 저편으로 밀어낸 게 분명했다. 난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며 내 삶을 지탱하던 골조를 심각하게 망가뜨려 버렸다. 다양한 이미지와 말들이 허공에서 둥둥 떠다녔다. 때가 되면 의미구조가 뒤틀린 이미지와 말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리라.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처음 내가 그 말들에 정해두었던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리라.
- 43~44p
사실상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내 정신이다. 내 머릿속은 섬뜩한 이미지, 제롬과의 추억, 삶의 광채와 죽음,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금세 잦아드는 온갖 감정들로 뒤죽박죽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마다 나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나를 맡기고 이제 나를 해방시킬 행동을 짜기 위해 한 조각 명철한 정신을 붙잡고 버틴다. 이마저도 없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 한 조각 명철한 정신이 내 이성을 무너뜨린 게 아닐까? 난 ‘이미’ 미친 게 아닐까?
- 63~64p
제롬을 살해교사한 놈이 여전히 무고한 사람들을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는 세상에서 더는 살 수 없다. 내 본심을 감추지는 않겠다. 내 복수는 전쟁 혹은 테러로 피 흘리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끔찍한 얘기지만 테러를 사주한 놈이 죽은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다른 놈이 그 자리를 대신할 테니까. 테러조직의 지도자를 꿈꾸는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민주주의의 약점을 악용하고, 테러 지원금으로 과격 종교단체에 돈을 대고, 어린아이들을 세뇌해 자살폭탄테러범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천지사방에 널렸다. 폭력적인 이미지에 목마른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놈들의 테러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도록 방치하는 게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분명 테러는 옳지 않다. 나는 놈에게 공포를 알려주고 싶다. 테러를 저지르면 똑같이 보복 당한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다.
- 83~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