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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본의
마태복음 5장 38-42절 /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눅 6:29-30)
제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들어 온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합니다. 여기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히브리인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서 그들에게서 부득이 함으로 종(노예)이 되어 있을 경우에게 그 종(노예)의 권리와 보호에 관한 법령(출 21:1-11)과 살인한 자와 상해를 입힌 자의 법령(출 21:11-27)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의 일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들어 있는 말씀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제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들어 온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의도하고 있는 본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율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을 위함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의 뜻을 전해 받음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인 어떤 사건(사고)이 생겨 사람을 죽였거나 상해를 입히는 해를 끼칠 경우에 그 피해를 갚을 만한 여력이 없는 가난에 있는 약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에서 만일 사람의 목숨을 앗았으면 그는 자기 목숨으로 갚을 것이며,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으면 그 또한 자기 눈으로 갚아야 할 것이며, 남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자기 이로 갚아야 할 것이며, 그와 같이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이어서 사람을 때린 경우에 그에 상응하는 처벌로 배상하게 함으로 약한 자들이 억압과 억울함에 처하는 것을 막으며, 보호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에 근거하여서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와 반대되는 피해를 주고 상해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는 일을 합니다. 그러기에 법에 의한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시는 것에서 ‘배상의 법’을 세우셨습니다. 이 배상의 법 “〜는 〜로 갚아라”는 법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닌, 또한 상선벌악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돌봄에 있어야 하는 약한 자를 보호하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배상의 법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실례를 들어 언급해 주시는 것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계획적이며 고의적이 아닌 우발적인 사건(사고)의 발생으로 “이웃 간에 서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친 경우에 다행히 맞은 사람이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친 사람이 처형은 면한다. 그러나 그는 맞은 사람이 누워 있는 동안 생활비를 대주어야 하고 완전히 나을 때까지 모든 비용을 책임져야 한다. 노예가 죄를 짓거나 잘못을 했을 경우 주인이 진노하여 남자 노예든지 여자 노예든지 매로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매를 맞은 노예가 하루나 이틀이라도 더 목숨이 붙어 있으면 그 주인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1) 그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밀쳐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다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배상액은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결정한다. 하지만 다른 사고가 생겼을 경우,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눈을 때려서 멀게 하였을 경우 눈을 멀게 한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 또 그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이를 부러뜨린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출 21:18-27).
여기에서 보듯이 “다른 해 – 다른 사고(사건) - 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아야 한다.”는 피해에 상응하는 배상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2)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대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배상의 법을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따르는 것에 있지 않고 보복, 복수로 가져나갑니다. 도둑질하는 자를 잡으면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자르고 간음하는 자를 발견하면 돌로 때려서 죽입니다. 그런가 하면 종종 명예살인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집 안에 불명예를 끼쳤다고 보는 가족을 식구들이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누군가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피해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복하고 복수하는 그릇된 이념이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명예살인이 그러합니다. 이슬람에 모욕되는 일이라면 가족임에도 처벌하여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에 따라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를 “똑같이 복수한다”는 동일한 보복의 원칙인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으로 가져나갑니다. 이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또는 ‘동해동형법’(同害同刑法), 동형동벌법(同刑同罰法)이라고도 말해집니다. 어떤 용어로 말하든 피해를 입은 만큼 같이 보복하여 징벌하는 법입니다. 이는 “원수는 반드시 갚는다”는 응징으로 확대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이고, 눈을 뽑고, 이를 뽑고,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불로 지지고, 상처를 내고, 피멍이 들게 매질을 하게 하는 것에 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계획적이며 고의적인 것인지 우발적인 것인지를 가리게 하시며, 부당하고 억울하지 않게 하십니다. 피해를 입은 자가 가해자에게 자신이 입은 피해 그 이상으로 보복, 또는 복수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은 피해에는 배상을 하게 하여 피해자를 돕게 하였습니다. 이 모두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자비에 있으시는 것을 나타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말씀하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구약성경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듣고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듣지 못했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그러니 잘 들어보아라.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셨다”(마 5:38-4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해를 입힌 처벌에 따른 배상을 명령합니다만, 예수님은 해를 당하는 것에 처벌과 그 배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여 경멸하고 폭행하며 해를 가하는 원수들에게 오른 뺨만 아니라 왼 뺨도 내주며, 속옷을 탈취하는 자에게 타인의 겉옷을 취하지 못하도록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겉옷마저 내주며, 강제로 징발하여 오리를 짐을 지고 가게 하면 그 거리로 끝내지 않고 오리를 더 짐을 날라 주며,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외면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것에서 입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글로 전하는 것뿐이다. 주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 일로 내가 갇히고 고문을 당하여도 나는 거역하지 아니하며 무슨 사명을 받아도 두려워 피하지 않는다.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내 등을 내주며 턱수염을 뽑는 이들에게 내 두 뺨을 내주었다. 나를 고문하는 이들이 나에게 욕하고 침을 뱉어도 나는 얼굴을 가리며 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고문을 당하면 패배한 것으로 원수들은 생각하겠지만 나의 주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신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 모든 고난과 수모를 견뎌 내었다. 내게는 나의 무죄를 증명해 주실 분이 계신다. 그분이 이미 나를 변호하러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런데도 감히 나를 고발할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하고 함께 법정으로 가자. 나를 고소해서 이길 사람이 있으면, 어서 내 앞으로 나와 보아라! 똑똑히 보아라! 나의 주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러 가까이 오셨다! 그런데도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자가 누구냐? 똑똑히 두고 보아라! 나에게 죄를 씌우는 이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다”(사 50:5-9, 현대어성경). 하나님은 이 예언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두 뺨을 내주시며 속옷과 겉옷 모두를 내놓으셨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길의 마지막까지 가셔서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시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주셨는데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는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 27:54)는 증명이 되셨으니,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요 19:30).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에 있는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보이실 것을 가지고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옛사람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자신에게서 성취될 선지자의 예언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하신 것이었습니다.3)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언한 자신에게서 일어날 일을 가지고서 제자들 또한 따름에 있게 하시는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마 26-27장).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으로 때리며 손바닥으로 뺌을 때리면서 “네가 그리스도이냐? 그렇다면 선지자 노릇 해보아라!”라고 하였고, 군병도 예수님의 얼굴에 가시관을 씌우고 예수님에게 침 뱉고 갈대로 머리를 때리며 조롱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가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당하며 살아갑니다.”(시 44:22). 그리고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라고 자신과 자신의 일행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에게 있을 각오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에 따라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구속주의 길을 가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악을 악으로 갚는 식으로 하지 않고 긍휼히 대하심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세상 끝 날까지 해 나가시니 자신이 함께 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해 나가십니다. 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해 나가실 일을 가지고 자신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대로 하는 것은 “종은 그의 주인과 함께 한다”는 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자비로운 교회
이 원리는 예수께서 제자인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 삼음에 있는 교회에 계속해서 적용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이 행하여 나타내 보인 동포들에게도 원수들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자비로울 것”에 자신이 내줄 수 있는 모두를 내놓음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르신 뜻과 그 목적을 잘 알기에 예수께서 하셨듯이 교회 또한 그 뒤를 따름에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참으로 ‘신앙적’입니다. 마음에 품은 바가, 생각하는 바가, 행동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가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적’이지 않습니다. 곧 세상이 전부가 되어 살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으며,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고,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습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얻음에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모두는 내줌에 있으니 목숨까지도 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도 주의 것이며, 죽음에 처해도 주의 것에서 빼앗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환난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곤고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도, 생명을 앗아가는 칼이나 어떤 위험도,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그래서 도살당할 양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두를 넉넉히 이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본뜻인 큰 자비의 은총을 아는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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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예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죽을 정도로 매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이다.
2) (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고대 근동 국가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 문구를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비문은 B.C. 1755-1750년도에 세워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이곳 196-214조항은 상해 및 치사에 대한 처벌의 법을 다루고 있는데 “(196조)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으면, 그의 눈을 뺀다. (197조)평민이 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으면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에서 보게 되듯이, 이 법이 있기 전에는 귀족에게 피해를 끼친 평민은 죽거나 노예가 되었을 것을 이 법전에서는 아무리 귀족인 주인일지라도 자신이 입은 피해 그 이상으로 벌을 가하지 않게 하여 평민의 목숨과 몸을 보호하는데 의도를 두고 있다. 더욱이 (207조)무심코 친 것이 귀족을 죽게 하였으면 은 1/2 미나를 물어준다. (208조)평민을 죽게 하였으면 은 3분의1 미나를 물어준다.“에서 보듯이 심지어 귀족을 죽인 경우에도 고의가 아니었으면 처벌을 감하여 배상으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다. (2) 따라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보복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피해를 입힌 그 이상으로 지나치고 가혹한 처벌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가 배상할 여력이 없으므로 신체에 피해를 입힌 것에 동일하게 신체로 피해를 당함으로 보상하게 하는 배려가 있는 것이다.
3) (1)대제사장의 충동에 의해 분노한 무리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렸다. 유대인 사회에서 뺨을 때리는 것은 심한 모욕을 주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그 모욕을 배로 하는 것인데, 오른 뺨을 때리는 것은 정면에서 손등으로 치는 것에 해당되어 모욕을 크게 하는 것이 된다. 이는 심한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고 고통과 모역을 견디며 상대방이 해를 가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서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해 보아라.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아라!” 하고 조롱하기까지 하였다(마 26:67-68).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막아 매다는 병사들은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갈대 하나를 홀처럼 오른손에 들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고함을 치며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며 조롱하였다(마 27:29-30). 예수께서는 그 모두를 온유함과 참음으로 당하셨다. 왜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심에 있기 때문이다. (2)이는 예수님이 입으신 옷에서도 있었다. 유대인이 입는 옷은 속옷과 겉옷으로 구분되는데, 속옷은 값이 싸고 보잘 것 없는 반면에 겉옷은 속옷보다 값비싼데다가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역의 특성상 밤에는 덮고 자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겉옷의 경우는 설사 부득이 담보로 잡았을 때에도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돌려주어서 밤에 덮고 잘 수 있게 하였다(출 22:26; 신 24:16). 그런데 겉옷보다 값이 싸고 보잘 것 없는 속옷을 빼앗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하신 것은 모두를 내주는 것인데다가 추위까지 떠는 고통에 처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때 병사들에 의해 옷(옷과 함께 부속품인 허리띠, 신발 등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다 빼앗기셨다. 병사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이 또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8)라고 하신 말씀에서 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심에 있는 것이었다. (3)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페르시아에서는 국왕이 조서를 전달할 때 사람을 징발하여 짐을 지게 하거나 문서를 전달하게 하였는데, 로마에서도 양민 징발 규례가 적용됨으로(참조. 27:32),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는 유대인에게도 시행되어 오리를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오리를 동행해야만 했다. 그러한 규례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인 십리도 동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징발 당한 자들이 억지로 짐을 지고 오리 가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길을 다 가셨다. (4)예수님은 또한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또한 예수께서는 다 행하셨으니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목숨을 주셨는데,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는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다.
*2022년 3월 20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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