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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앞서]
새해 인사하느라 분주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춘도 지나고 새해가 소처럼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다. 기축년의 시작이 이래저래 힘들고 어수선한 시국이다 보니 너도나도 상투적이고 포장된 이미지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내를 모르는 희망은 쉽게 무기력의 원천이 되고, 기다림을 모르는 선택은 쉽게 파괴의 에너지로 변질된다.
오늘 여행지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테마는 '오랜시간 인내와 기다림 끝에 진정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들에겐 소중한 추억과 정신적 자산의 寶庫이기 때문에 이 여행의 설레임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성냥갑 같은 빌딩과 아파트에서 온종일 일하거나 먹고 자면서, 속도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에 생을 그대로 내맡긴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자기 삶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행위들,감정들,관계들을 관조해보고 되새김질 해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한데 여행만큼 충실한 수단이 되어주는 것도 없다. 오늘은 그 관조와 되새김질을 할 수 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변치 않을 우리들 가슴 속에 씨줄과 날줄로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는 그 무엇을 찾아 가는 여행이므로 이 또한 의미가 있으리! 세간에서 흔히 BYC(봉화,영양,청송)라고 일컫는 경북 오지, 그 중 '육지속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최고 오지 우리의 고향... 백두대간 우뚝 선 봉우리 일월산에서 시작되는 물줄기들이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수 만년 동안 끊임없이 하천바닥을 깎고 물길을 바꾸면서 골짜기 사이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혜택을 남겨놓은 우리의 고향 땅 영양!
약삭빠르고 사악한 사람들의 손 때를 그나마 타지 않아서 오히려 지금은 더 자랑스럽고 정겹고 그립기까지 하다. 어줍잖은 도시보다 살 냄새와 흙 냄새가 어우러진 그 곳이 현실은 다소 힘들더라도 나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자랑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찾아가는 추억의 유적지도 세상에 크게 드러내지 않으며 유유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입암중 동창)이 공유했던 역사 유적지를 찾아 마음의 여행을 떠나 보자. [봉감 모전5층석탑]
'문인의 고장 영양'이라고 걸린 郡경계 초입지역의 이정표를 지나 발길이 우선적으로 닿는 곳은 봉감 모전5층석탑이다. 입암에서 흘러내려오는 반변천이 절벽을 타고 반달 모양으로 흘러가는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봉감모전석탑 ! 우리들의 소풍장소 추천 1순위이기도 하거니와 비록 대접이 허술하기는 하지만 영양군에서 유일한 국보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탑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43년 출판된 <조선의 석탑>에 소개되고서부터다. 1977년 국보 제187호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잊혔다 깨어났지만 여전히 세속 대중들 기억에서는 먼 탑이다.
우리의 봉감석탑은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절집 금당 앞에 당당하게 선 동류(同類)의 탑들과는 달리, 저 홀로 서 있어서 외롭기 그지 없어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쌍둥이 탑이라면 덜 외로워 보일 텐데 ... 불교에서 행해지는 탑돌이도 절집 안에 선 탑을 두고 행해질 뿐, 울타리를 잃고 저 혼자 우두커니 있는 봉감탑 주위를 도는 이들을 아직 나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고고하게 그 자리를 지켜오면서 신라시대의 얼과 향기를 우리들 추억과 함께 버물러 가슴속 깊이 전해주고 있는 봉감탑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과 소중한 마음을 울타리 삼아 탑돌이를 할 수 밖에 없는 봉감탑의 영원한 탑돌이, 탑순이들이다.... (문화재청 봉감모전5층석탑 소개 자료) 경북 영양군 산해동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 붙여졌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수 있다. 탑은 벽돌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층의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층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연당 서석지] 봉감석탑을 뒤로 한 채 우리의 3년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입암중학교를 지나고 선바위를 지나서 연당에 도착한 두 번째 여행지로 조선시대 민가연못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서석지(중요민속자료 제108호)를 빼놓을 수 없다. 중학교 통학길에 매일 겉눈으로 스쳐 보곤 했지만 그 풍류와 정취에 흠뻑 빠져 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 때엔 대충 어느 살만한 대감이 지은 정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서석지는 보길도(전남 완도)의 부용원,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더불어 한국의 3대 정원으로 손꼽히며 ‘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지당’이라는 의미로 못 속에 많은 돌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서석의 이름은 하늘,땅,동물,꽃,신선 등 생물과 자연현상을 상징적으로 붙여 전체적으로 소우주를 형성한다. 조선 광해군 때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 선생이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든 대표적인 정원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1577(선조10年)에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성리학과 시(詩)에 능하였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1627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1636년(인조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 아들을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1동)에서 살았다 한다. 연못에는 90여개의 바위와 돌들을 놓았는데 이중 20여 개에는 ‘떨어진 별의 돌’이니, ‘나비와 희롱하는 바위’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여기서 돌 이름 다 맞추는 사람, 소원 한 가지를 내 능력범위 내에서 들어줄 수 있음)
석문 정영방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광해군의 서슬을 피해 영양에 은거하던 정영방은 정경세의 제자로 둘 다 퇴계의 학통을 이었다. 인조반정 뒤에 판서를 지내던 정경세가 정영방을 조정에 천거했다. 이에 정영방이 정경세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다. ‘편지에 화합하지 못하니 벼슬에 머물지 못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정경세가 선물 꾸러미를 풀었더니 바다 게 한 마리가 나왔다. 정경세는 얼른 알아차렸다. “비켜 걷는 생물을 보냈구나. 나마저 정치에서 물러나란 뜻이군.”
사연이 얄궂어서일까, 시절이 하수상한 탓일까. 요즘은 게 그림이 맘에 와 닿은 까닭이 있을 터인데 속없이 사는 게 나은지 시속을 거스르는 게 옳은지, 나는 모른다. 다만, 정영방처럼 게 한 마리 보낼 사람을 나도 찾고 있다. 나는 정영방의 정원 가득히 생물과 자연을 합일화하여 소우주를 형성한 그 인품의 깊이와 그의 삶을 관통하는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4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 오히려 긴요할 만큼 삶의 철학과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문화재청 서석지 瑞石池 소개 자료)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정자이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상청 검산성]
이제 연당을 지나 내 고향마을 바로 윗 동네인 상청에 도착하면 구한말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벽산 김도현선생이 개인재산을 들여 의병항쟁을 위해 쌓은 산성터인 검산성이 있다.
1853년 영양군에서 태어난 김도현의사는 천성이 총명 강직하여 일찍부터 춘추, 병서를 읽었다. 1895년 왜군에게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사재를 털어 군기를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켜 안동, 함창, 의성과 강원도 등에서 왜군과 싸우다 조정으로부터 의병 해산명령이 내리자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3년 후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자 했으나, 경술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한이 어린 땅에서는 묻힐 곳이 없다 하여 영해 대진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상복(喪服)을 벗어 바위 위에 접어놓고 옷깃을 여미고 신발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 바다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었다. 기꺼이 몸을 던져 외침(外侵)으로 더럽혀진 조국 강산을 등지고 푸른 바다의 품속에 안긴 것이다.
영남선비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뽑아버렸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1971년 박정희대통령이 비를 세우고 千秋大義(천추대의)라는 친필 휘호를 새겼으며 매년 음력 7월 14일 선생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남긴 글이 코 끝을 찡하게 만든다.
(한바다와 천지간 넓은 세상에, 나의 뒤를 좇는 자 한 사람도 없음이 한스럽구나!
구천(九天)에 돌아가서 갚으리라 나의 조국을, 동방에 무궁한 어진 나라 세우리...)
(문화재청 검산성 소개 자료)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도현(1852∼1914)이 개인재산을 털어서 항일운동을 위해 쌓은 산성(시도기념물
제65호)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의 검산은 동쪽에 하천이 흘러 절벽을 이루고, 북쪽과 서쪽은 경사가 심하며, 남쪽은 경사가 완만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산성은 이러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산 정상에서 남쪽을 향하여 서쪽과 남쪽에 성벽을 쌓아 올렸다.
[여행 후기] 우리는 오늘 문화역사 유적지 공유여행을 통해 추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적 이동(봉감,연당,상청)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세사회(조선시대 서석지),근대사회(구한말 검산성)를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이동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물리적 공간은 우리의 여행지 공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탑(철학,종교)에서는 이데아를 지향하고 정원(가정,학교)에서는 공부와 재충전을 하고 성터(직장 등)는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화/역사 유적지와 우리 친구들의 공통점은 너무나 서로 닮아 있다.
그 내면의 존재 의미는 모두 다 각별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자기를 내세우고 추켜세우는 법이 없다. 남들이 크게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존재하여 왔다. 있는 그대로 세월 속에서 영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국보급 탑, 국내 3대 민간정원, 구국충절의 의병장, 모두가 소중하듯이 친구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각별한 小우주이지만 우리 모두 드러내는 법도 없고 세상 앞에서 휘황찬란한 인생을 살지도 않는다.
봉감탑은 5층짜리 나즈막한 탑으로 남대문처럼 요란법석을 떨 정도로 요란하지도 않고 누가 친절히 탑돌이를 할 정도로 울타리 쳐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국보급 대우를 해 달라고 칭얼대지도 않고 그저 세상을 달관한 듯 굽이쳐 흐르는 반변천의 물결을 바라보며 영겁의 세월과 우리들 마음속에서만 살아 생동할 뿐이다.
연당 서석지는 부잣집 대궐도 아니고 오히려 아담한 정원 형태여서 더욱 친밀감이 감돈다.
연꽃에 살포시 앉아있는 노랑 은행잎의 교태가 정겨울 정도로 자연과 생물의 합일을 강조하는 아늑함이 풍겨올 뿐이다. 일본의 정원처럼 인공적으로 자연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마치 자연에 둘러싸인 듯한 건축법에 놀라울 따름이다.
상청의 검산성은 지금은 일부분만이 있어 그 흔적도 찾기 쉽지 않다.
항일투쟁을 했다고 목소리 높여 자기 주장을 하지도 않았고 그 후손들 역시 평범한 주민으로 그 동네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갈구한 국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자기 희생을 했으면서도 구천으로 돌아가 어진 동방국가를 세우겠다고 한 유작 글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울러 우리의 석탑은 오랜 세월의 풍상과 외로움을 인내하며 달관과 초연의 자세로 기다리며 오랜 시대와 소통하는 最古의 가치를 희망으로 노래하며 오늘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의 정원은 벼슬아치의 명예와 권력의 본능을 인내하며 부단한 진리를 탐구하여 세상이치의 진실이 도래할 날을 희망하며 아직도 자연과 더불어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성터는 목숨을 담보로 현실의 궁핍함을 인내하고 현실과 처절히 투쟁하며 기다린 결과 내세에서 독립된 나라의 주권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고향 문화적,역사적 보물들의 이러한 속성들은 우리가 살아온 땅의 터전 위에, 우리 가슴속에 너무나 닮아 있는 인자들을 심어 놓았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론적 원형질을 타고 났을 지도 모른다.
석탑에서는 역사의 유구한 향기를, 고택에서는 자연인간합일과 더불어 고귀한 선비정신을, 성터에서는 비분강개하는 애국의 절개와 기개를 배워 품고 사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 유적지는 내면적으로 더욱 빛나고 있다.
기축년은 소의 해라고 했다.
‘나’는 무엇에 묶여있는 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지, 무엇을 견뎌야 하고 어디서 무엇을 풀어주어야 하는 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삶을 반추해보고 되새김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우리들 마음 속 추억의 여행지들은 삶의 이상과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조용하면서도 나즈막히 그 해법의 실마리를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 들리지 않는가!!!
친구들이여! 기축년에는 소가 자연의 풀을 자유롭게 뜯듯이 마음 속에 맺힌 것을 풀고 자연처럼 풀어지며 살기를 !!! |
첫댓글 우리 환이가 모처럼 시간을 내 고향을 한바퀴 돌아보고 왔구나. 애들한테 우리 고향에도 독립 의지를 불태우다 생전에 그 희망조차 보지 못한 채 동해에 묻고 천상에서 살고 계시는 의사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도 풍진의 세월을 인고로 견뎌온 모전탑의 속살을 보여주며 뿌듯했겠구나. 마음이 그럴(?) 때 고향을 다녀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누가 말리는 것도 아닌데 고향에 왜 자주 못가나!
아공 다리 아파. 봉감 갔다가 연당 갔다가 상청까지 댕겨 올려니 힘들다. 태환이 친구야 다음에는 일정을 넉넉히 잡아서 댕겨오자. 봉감 석탑 이야기만 가지고도 두편이 되겠네. 누구처럼 (현식) 한 소절 쓰고 다음으로 넘길라치면 이 글은 장장 24회 분량이겠는걸.그라고 떠나기 앞서 쓴 글 글자 모양 좀 바꿔주라. 여행후기 에 쓴 글 꼴도 괜찮은데.같은꼴로 하면 안될까 . 먼저 주문하고
봉감탑, 서석지, 검산성이 이렇게 멋있게 표현된 글은 처음이다. 거기다 잘 생긴 모습의 사진까지 있으니 이보다 훌륭한 문화 알림글도 없으렸다. 부끄러운데 봉감탑은 중학교 소풍 이후에 더 본 적이 없고 연당 서석지는 말만 들었고 검산성은 처음 접해본다. 하니 나는 멋진 태환친구의 멋진 글로 고향의 문화유산을 공유하게 되는 행복한 수혜자.
멋진태환친구의 멋진글이란 말에 의의 달 사람 없겠지. 긴 글 쓴 그 정성에 감사하고 고향사랑에 감동받고 이 많은 걸 물 흐르듯 옮겨 놓은 글 솜씨에 감탄하고
참되다 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해 고개 숙여지네. 눈시울이 젖어오는 이 건 뭘까..<.떠나기 앞서>, <여행후기> 란 소제목의 글 따로 따로 옮겨 놓아도 감동 백배. /나’는 무엇에 묶여있는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을 견뎌야 하고 어디서 무엇을 풀어주어야 하는 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삶을 반추해보고 되새김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너무 멋있다 너무 멋져
소중하고 자랑스럽다.고향이. 아니, 태환친구가.
내가 오히려 고맙다. 너무 칭찬일색이여서 글쓴 내가 심히 부끄럽네... 향후에는 찬반토론 할 수 있는 글을 써야되나? 하여간 말주의 동기부여 방법이 탁월하여 댓글만으로 내가 오히려 큰 행복, 따뜻한 감동 먹었다. (아 참 주문한 거 글꼴 수정했습니다)
태환이는 아덜 기죽이는 데는 재주가 기가 막히다 오늘은 제목만 일고 간다 낼모레 쯤 두어줄 읽을 수 있을 라나??에이 #####디게 마이썼네
재영이 다들 걱정하고 있던디 어디갔다 왔노...재영이 댓글 보는 재미 없어지는 줄 알았네...
태환아 올만이다.글 참잘쓰는구나.대학갈때 논술 있었나?ㅋㅋ .모모씨는 글솜씨 더 닦아라.요즘 똥팔이 잘있나 몰따. 기태 말따나 한번 보자.
장동수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KTX타고 부산도 많이 갔다 왔는 데...언제 연락하면 니가 모는 KTX타고 부산가노? 동수 기타반주에 맞추어 노래부고 싶은디 욕심인가?
역시 태환이다.......말주 말마따나 그동안 모르고 있던 우리고향 문화유산......고마우이~~~
남조사 언제 한번 모이노? 낚시터 아니면 힘들제? 희야! 그래도 댓글 달아주는 친구들 대부분이 사래방면친구들이네. 사래쪽 애들 한번 모이라. 나도 끼워주고...
그래....한번 모이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