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멘토와 함께 하는 삼남길 역사여행
● 일시 : 2013년 9월 28일 09:00분~13: 00분
● 장소 : 삼남길 ‘진위고을길’ , 경주 이씨 유적, 진위관아 터 및 3.1운동유적, 진위향교
● 문화유산 소개
1.평택지역의 역사
평택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한성 백제의 영향아래 있다가 5세기 고구려가 안성천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안성천 이북지역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하류지역을 지배하면서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습니다. 신라 신문왕(685) 때에는 한산주에 편재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현, 영풍현, 광덕현, 거성현과 같은 행정구역이 설치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양광도의 변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해서 진위현, 평택현 외에도 종덕장, 신영장, 오타장, 포내미부곡, 감미부곡, 육내미부곡, 청호역과 같은 특수행정구역이 많았습니다. 수치적으로는 6개의 현(縣), 6개의 부곡(部曲), 3개의 장(莊), 1개 역(驛) 등 16개의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팽성읍 노양리에는 13조창의 하나였던 하양창이 설치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조운과 소금 확보를 위해 팽성읍 서쪽에 경양현이 설치되었습니다.
조선건국 후 평택지역은 조선건국 후 일시적으로 충청도에 속했지만, 태조 7년(1398) 진위현, 영신현을 비롯한 안성천 북부지역이 경기좌도로 옮기면서 안성천 이북지역은 경기도, 이남의 평택현과 경양폐현은 충청도가 되었습니다. 송장부곡, 천장부곡, 포내미부곡, 종덕장, 신영장을 비롯한 여러 특수행정구역이 일반행정구역으로 통폐합된 것도 이 때입니다. 세종14년(1432)에는 진위현이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지만 고을이 작다고 하여 영신현과 의신현의 일부, 부산과 청호역을 진위현으로 통합시켰습니다.
평택지역은 2차 갑오개혁(1895)과 이듬해의 13도제 실시로 진위군, 평택군, 수원군으로 통폐합되었습니다. 1914년에는 진위군, 수원군, 평택군을 진위군(振威郡)으로 통합하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었으며, 1938년 10월에는 경부선 평택역 일대에 근대도시가 발달하면서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송탄지역과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미군기지가 주둔하였습니다. 미군기지 주둔으로 신장동과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기지촌이 발달하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81년 송탄시가 승격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한국전쟁의 피해로 파괴되었던 평택읍이 도시의 중심으로 철도 동쪽으로 옮긴 뒤 발전을 거듭하여 시(市)로 승격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평택항, 포승국가공단 건설 등으로 서평택지역이 공업화되면서 배후도시로 안중읍이 성장하였습니다. 또 다시 세 개의 시․군으로 나눠졌던 평택지역은 1995년 정부의 통합정책에 따라 통합 평택시로 재결합되었습니다.
2.삼남길
조선시대 평택지역은 큰 길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평택지역을 지났던 큰 길로는 제6대로(삼남대로)와 제8대로(충청수영로)였습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공주, 전주, 남원을 거쳐 경남 통영까지 연결되었던 가장 큰 길이었습니다. 또 평택시 칠원1동 갈원과 평택시 소사동 소사원에서는 충청수영로가 갈려졌고, 전라도 삼례에서는 제주로(한양-제주)가 갈라졌습니다. 조선후기 한글소설 춘향전의 과거에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를 임명받고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갔던 길도 삼남대로였습니다. 그래서 평택지역 삼남대로에는 ‘춘향이길’이라는 애칭도 붙여졌습니다.
경기지역 삼남대로, 충청수영로는 정조 임금이 화성행궁으로 행차하던 길, 조선의 임금들이 온양행궁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길,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 자산 정약전이 전라도로 유배 가던 길입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길이기도 하며, 세종 때의 맹사성이 검은 소를 타고 온양의 부모님을 뵙고 한양으로 올라갔던 길이기도 합니다.
평택지역 삼남대로는 오산신점에서 진위고을로 넘어와 진위현의 읍치(邑治) 봉남리-진위면 신리의 장호원-송북동 동막의 백현원-대백치-칠원1동 갈원-재빼기-비전2동 배다리방죽-소사1동 소사원을 거쳐 아교를 넘어 충청도 땅으로 넘어갔습니다. 충청수영로는 갈원에서 분기할 경우 갈원-통복동 통복점-군물포-팽성읍 석봉리 원봉나루-객사리-남산1리-대사리-석근2리를 거쳐 독천을 넘어 충청도 아산시로 넘어가거나, 가마나 말을 탔을 경우 갈원-소사원-충청도 성환읍 신가리-팽성읍 노와리-객사리-남산1리를 거쳤습니다. 역로는 보로(步路)와는 다르게 진위면 청호리 청호역-안성시 원곡면 가천역-평택시 소사동 소사원-성환역을 거쳐 남으로 또는 충청수영로로 달려습니다.
조선은 도로교통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곳곳에 역(驛)과 원(院)이라는 국영 여관을 운영하였고, 조선후기에는 사설 주막들도 들어섰습니다. 조선전기 평택지역에는 6개의 원(院)과 2개의 역(驛)이 있었습니다.
▶원(院) : 이방원(진위면 갈곶2리), 장호원(진위면 신리), 백현원(송북동 동막), 갈원(칠원1동), 소사원(소사1동), 상원(팽성읍 안정리)
▶역(驛) : 청호역(진위면 청호리, 오산시 원동 사이), 화천역(팽성읍 추팔1리)
조선전기의 역원(驛院)은 19세기 전후 대부분 폐원(閉院)되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교통로가 형성되고, 민간인들이 관영주막보다는 사설주막인 점막(店幕)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갈원, 소사원처럼 관영주막들도 점막(店幕)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평택지역 삼남대로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이방원-장호원-백현원 코스가 폐지되고, 오산신점-진위면 견산리 밖술막-봉남리 진위주막-봉남목교-마산리 신제점-소백치-우곡점-대백치-감주거리주막-갈원주막-가내주막-재빼기-배다리-소사주막-소사교-아교를 관통하는 새로운 교통망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봉남목교에서 신장1동 구거리장-적봉리- 장등리-황구지리-석교-화성시 양감면으로 건너가는 중로와, 봉남목교에서 신장1동-고덕면 해창3리 진위현 해창으로 가는 길도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2013년 5월 경기도에서는 삼남(三南) 지방으로 내려가는 옛길 복원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원도 옛길에 ‘삼남길’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삼남길’은 삼남대로보다는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옛길에 대한 통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남길 경기도 구간은 모두 90.1km입니다. 그 가운데 평택구간은 진위고을길(오산 맑음터 공원~원균장군 묘)과 소사원길(원균장군 묘~안성천교)까지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진위고을길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상징 경주 이씨 가문의 유적, 진위현 읍치였던 봉남리의 여러 유적, 19세기 전기8명창 가운데 하나였던 모흥갑의 유허와 진위패라는 걸립패를 운영하였던 유세기 부자의 유허가 어우러진 길입니다.
3.평택지역의 문화유산과 사람들
근대이전 평택지역은 경제기반이 취약하여 명문 사족이 자리 잡을만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인물들도 문인들보다는 무인들이 많고, 문인들 가운데도 오랫동안 세거한 가문보다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삼봉 정도전과 보한재 신숙주가 꼽힙니다. 그밖에도 세종, 성종 때 인물화로 이름을 떨친 최경,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최유림, 16세기 사림파 학자였던 조광조, 최수성, 최자반, 우남양이 있습니다. 양난(兩難)을 전후하여 공을 세운 한온, 이대원, 원균, 원연, 원전, 원사립, 이성부, 정담수, 그리고 조선후기 평택현감을 지낸 정제두와 이승훈,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 소사동대동법시행기념비와 관련된 김육도 높이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근대의 인물로는 언론인이고 독립운동가며 해방정국의 유력한 정치가였던 민세 안재홍, 천도교 부교령과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병헌, 국악인 모흥갑, 이동백, 지영희가 꼽히고 있습니다.
①경주 이씨 가문과 독립운동
평택시 진위면 무봉산 일대는 경주 이시의 터전입니다. 무봉산 일대가 경주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조선 전기 이연손, 이성무 때지만 처음 입향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수종부터입니다. 그 뒤로 박문수의 외조부인 이세필이 입향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봉남리, 가곡리, 동천리, 마산리, 송북동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곡1리 신가곡은 만주 무장투쟁을 이끈 이회영 형제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습니다. 신가곡 일대가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의 터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석영은 양부에게서 상속받은 신가곡 일대의 땅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다섯 형제들은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을 아버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습니다.(직계 후손들에서만 문과 급제자 31명, 정승 6명, 대제학 2명) 그의 가계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손꼽히는 소론 명문가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에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일강제합병 이후에는 때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6형제 50여 가족이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만주 이주 후 서간도 삼원포 지역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고, 경학사와 부민단 등 자치조직을 건설하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축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며,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1920, 30년대 독립전쟁의 중심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경주 이씨 가문은 독립투쟁에 헌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이석영은 상해에서 굶어죽었고, 이회영, 이호영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만주 이주 초기 50여 명의 가족 가운데 해방 후 이시영이 임정요인으로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신가곡에는 경주 이씨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유원의 아버지 이계조의 묘와 위로 5대조인 이정좌의 묘, 경주 이씨 재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경주이씨천’ 표석뿐입니다.
●평택지역 경주 이씨 계보(系譜)
•시조 :이알평(李謁平) : 알천, 아찬
•17세 :이 과(李 薖) : 상서-상서공파의 파조
•20세 :이연손(李延孫) : 공조참판
•22세 :이성무(李成茂):안동판관, 아들-①인신(仁臣) ②의신(義臣) ③예신(禮臣) ④지신(智臣)
•23세 : 이성무의 3남 이예신(李禮臣)
•24세 :이예신의 2남 이몽량(李夢亮) - 우참찬, 정헌공
◉25세 :이몽량의 4남 이항복(李恒福) - 영의정, 문충공, 권율의 사위
•26세 :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李星男) -이조판서
•29세 : 이성남의 증손자 이광좌(李光佐) - 대제학, 영의정, 문충공
◉26세 :이항복의 2남 이정남(李井男) - 이조판서
•28세 :이정남의 손자 이세필(李世弼)-형조참판-①태좌(台佐) ②정좌(鼎佐) ③형좌(衡佐)
◉29세 : 이세필의 큰아들 이태좌(李台佐) - 좌의정, 충정공
•30세 : 이태좌의 큰아들 이종성(李宗城) - 영의정, 문충공
•34세 :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①건영(健榮) ②석영(石榮, 이유원에게 출계) ③철영(哲榮) ④회영(會榮) ⑤시영(始榮) ⑥호영(頀榮)
◉29세 :이세필의 2남 이정좌(李鼎佐) -증 영의정
•33세 : 이계조(李啓朝) - 이조판서, 문정공
•34세 :이유원(李裕元) - 영의정, 충문공
•35세 :이석영(李石榮) - 생부 이유승
②어사(御使) 박문수(1691∼1756)와 평택
천안시 병천이 고향으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기은(耆隱)입니다.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향한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입니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습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면서 다시 등용되었으며,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습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싑니다. 그 뒤로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지냈고,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습니다.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뒤 예조참판, 호조참판,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습니다. 사신의 일행으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도 다녀왔으며, 함경도관찰사, 어영대장(御營大將)도 지냈습니다.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갔을 때에는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饑民)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판의금부사, 세손사부, 예조판서와 같은 요직을 지냈으며, ≪각전각궁공상정례≫, ≪국혼정례≫ 등 다양한 편찬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입니다.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은 박문수의 외가이며 탄생지입니다. 박문수는 외조부 이세필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학문을 수련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③평택지역의 예인(藝人)들
평택지역에는 판소리, 무속음악, 노동요, 두레풍물 등 다양한 분야의 예인들이 활동하였습니다. 판소리의 대가로 평택과 관련 있는 인물은 모흥갑과 이동백입니다. 모흥갑은 19세기 전기 8명창 가운데서도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졌던 송홍록과 비견될 만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고동상성이라고 할 만큼 목청이 우렁차고 뛰어나서 판소리 적벽가와 춘향가에서는 당대에 적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흥갑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린 사건은 조선 헌종 때 평양 연광정에서 올린 판소리 한마당이었습니다. 평양감사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 오른 모흥갑은 예의 고동상성으로 춘항가를 불렀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을 정도로 장쾌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모흥갑은 태어난 곳은 진위고을이었지만 젊어서는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고 말년에는 전주 귀동에 은거하였습니다. 헌종 때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여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모동지라고 높여 불렀다고 합니다.
19세기에 활동했던 대금시나위의 명인 김부억쇠는 평택시 청북면 사람으로 경기도당굿의 마지막 선학습꾼이었던 이용우의 스승입니다. 방용현(1868~미상)은 경기도당굿 대금시나위의 명인이며 이충동 동령마을 시나위의 창시자입니다. 고향에서는 무업(巫業)으로 생계를 잇다가 일제강점기 서울로 이거하여 조선음률협회 등에 가입하여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제자로는 대금연주자 김광식과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이충선이 있습니다. 방돌근(1941~2001)은 방용현의 손자입니다. 경기도당굿 마지막 대금시나위 연주자로 화성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남양제의 대가였습니다.
호적과 꼭두각시놀음의 명인이었던 송창선(1911~1984)은 서정동 태생입니다. 어려서는 마을 두레패에서 농악을 익혔고, 30세에 방태진에게 호적을 배워 이름을 떨쳤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꼭두각시 예능보유자로 남사당에서는 호적을 불었습니다. 근대5명창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동백(1866~1950)은 은퇴 후 사망하기까지 10년 동안 평택시 칠원2동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최은창과 이돌천, 김용래는 평택농악의 명인입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예능보유자들인 이민조, 이종구, 박용철(작고)는 평택지역의 농요, 어로요와 장례요(상부소리)의 예능보유자들이며, 포승읍 만호리 지(池)씨 일문도 무업(巫業)으로 큰 계보를 형성하였던 집안입니다. 지용득과 부인 김기덕이 무속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고, 지용득의 동생 지갑득도 일세를 풍미하였습니다. 특히 지영희는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으로 악기연주, 소리, 춤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능해서,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교육자, 지휘자, 국악의 현대화를 이룩한 인물로 국악사에 길이 빛날 족적을 남겼습니다. 진위면 봉남리의 유씨 일가도 평택지역 예술을 발전시킨 가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해방 전후에 활동했던 유세기의 부친은 진위고을의 아전으로 ‘진위패’라는 걸립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축하연에 참여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④심순택 고택과 묘(墓)
▶위치 : 진위면 봉남리 동부마을
심순택(1824~1906)은 본관이 청송으로 한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송 심씨는 조선 후기의 노론 명문가의 하나로 증조부 심풍지(沈豊之)는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조부 심능악(沈能岳)은 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을 지냈습니다. 심순택은 26세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관직 진출 뒤에는 홍문관교리, 부제학, 예조판서, 충청도관찰사, 예조판서 겸 시강원 좌빈객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1880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880년 이후에는 영의정을 비롯하여 최고위직을 지내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이끌었고, 갑신정변 때에는 정변을 거부하고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으며, 동학농민전쟁에서도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등 친청, 친정부적인 입장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광무개혁(1897) 이후에는 친미․수구 연합정권의 대표로 박정양, 이완용, 민씨 세력 등과 함께 왕권의 입장에서 정치를 주도하며 독립협회운동을 반대했습니다. 독립협회로부터 윤용선․조병식 등과 함께 탐학한 대신으로 규탄받아 관직에서 삭직되었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복직되어 영돈녕원사에 올랐고 작위를 받았습니다.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무효상소를 올리고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광무 10) 2월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고택은 심순택의 며느리가 일찍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기사를 원찰로 삼고 근처에 지었던 것을, 나중에 관직에서 물러난 심순택과 부인이 내려오면서 가족모두가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묘는 북서쪽 산록에 있으며, 1908년에 세운 신도비, 묘비도 있습니다.
심순택의 부인은 능성 구씨(구택희)입니다. 심순택 사후 능성 구씨는 다양한 지역사회활동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흉년에는 빈민구제에 앞장섰고, 1912년에는 고택 아래에 구씨학원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나섰습니다. 구씨학원은 뒤에 금릉학원으로 바뀌어 운영되었고, 해방 후 진위중고등학교로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진위향교 앞 선정비각 안에는 능성 구씨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⑤진위향교
▶위치 : 진위면 봉남리 167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0호 진위향교(대성전)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으며, 최응수가 위패만 보존하였던 것을 1644년 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1660년 현령 송박이 대청을, 1839년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하면서 면모를 회복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동, 서재를 중수하였으며 2007년에 대성전을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위세를 갖췄습니다.
공간배치는 전학후묘에 따라 외삼문 안에 명륜당을 내삼문 안에 대성전을 두었습니다. 대성전)은 문성왕으로 높여 불렸던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을 모시는 사당으로, 5성위와 송나라 4현, 우리나라 18현 등 27위의 위패가 모셨습니다. 명륜당은 맹자(孟子)의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에서 빌려온 말로 향교의 강학공간입니다. 정원은 30명이었으며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명륜당이 소실되면서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매월 1일과 15일에 분향하고, 음력 8월에 석전제만 봉행합니다.
⑥진위지역 3.1운동
평택지역은 경기도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철도교통의 편리성, 천도교의 발달, 일제수탈에 대한 피해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됩니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 따르면 평택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기산리 옥녀봉에서 전개된 것이라고 합니다. 옥녀봉 시위는 천도교 접주였던 현덕면 권관리의 이민도와 천도교인 이승엽이 주도하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신왕리 고등산과 권관리 계두봉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3월 10일에는 오성면 숙성리 뒷산, 양교리 오봉산, 청북면 현곡리 신포장터 등 서평택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3월 11일 평택역전 시위는 초기 만세운동의 백미입니다. 이날의 시위는 평택장의 미곡상인 이도상, 목준상 등이 주도하였고 참여인원만도 1천 명에 가까웠습니다. 3월 21일에는 천도교인들이 거주하였던 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 주민 500여 명이 박창훈을 중심으로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3.1운동은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전후하여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평택지역에서도 3월 말로 접어들면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만세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조직화되었습니다. 3월 31일에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박성백, 최구홍이 주도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평택지역 3.1만세운동의 하이라이트는 4월 1일 밤에 발생하였습니다. 4월 1일 밤 평택역 광장에서 3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자, 사전에 밀약한 팽성읍, 고덕면, 오성면, 청북면 일대의 주민들이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화(횃불)를 올리며 연대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4월 2일 서탄면 사리의 만세운동은 매우 특이합니다. 만세를 주도한 인물은 조선말기 관료를 지냈으며 당시 서탄면장이었던 윤기선이었습니다. 윤기선은 면사무소 행정조직망을 활용하여 각 마을의 구장(이장)들에게 주민들을 대동하고 면사무소 앞으로 모이라고 연락한 뒤 주민 400여 명과 함께 사리교를 건너 봉남리로 진격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또 4월 9일에는 서평택지역의 고덕면, 진위면, 오성면, 현덕면 주민들이 연대하여 평택역으로 진출하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이튿날에는 서탄면 수월암리, 사리 주민들이 연대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1957년 신문기록에 따르면 3.1만세운동으로 평택지역에서 구속된 사람은 200여 명이 넘으며 사망자도 60여 명이나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삼남로에 남겨진 옛 시(詩)
①만의산에 올라 / 원정 최수성
옛 불전에 몇 중이 있고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소리 맑아라.
산굽이는 천리나 아스라한데
담장은 우뚝하여 뭇 산들이 낮아 뵈네.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
*최수성 / 강릉출생. 8세에 진위현으로 이거하여 신장1동 남산터에 원정을 짓고 살았다.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벗으로 시, 서, 화에 능하고 학문이 출중하여 주목을 받음. 기묘사회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신사무옥에서 사형을 당함. 사후 이이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됨.
②진위객관(振威客館) / 김창협
縣小館宇古。床簟亦自具。解鞍景未昳。伏檻風稍度。四山赴牖戶。流目領野趣。墻東兩銀杏。鬱鬱百年樹。布陰接靑槐。嚶鳴鳥羣聚。忽謂坐林藪。未信在行路。啓笈發古書。濡翰寫新句。造適誠忘言。息蔭斯善喩。安得從此去。永謝要津步。
*농암 김창협 : 본관은 안동.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고, 영의정 김창집은 아우이다. 김수항이 사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대제학, 예조판서를 내렸지만 거부하고 향촌에 은거하였다. 시, 글, 글씨에 능하여 칭송을 받았다.
③갈원으로 가는 도중에[葛院途中] / 장유 / 계곡선생집 제28권
황량한 객점(客店) 들러 말에게 먹이 주고 / 秣馬投荒店
수레 치달려서 끊어진 언덕 지나가네 / 驅車過斷坡
저 멀리 하늘 가엔 짝 잃은 외기러기 / 天邊孤雁遠
연하(煙霞) 밖으론 저녁나절 산 그림자 / 煙外暮山多
나라 은혜 갚을 마음 항상 붉게 타오르고 / 報國心長赤
지방에 노니는 몸 머리가 벌써 세었어라 / 遊方鬢已皤
아득히 서북쪽 떠 있는 구름 / 浮雲杳西北
지금 상황 어떤지 감히 묻지 못하겠네 / 不敢問如何
*계곡 장유 : 조선중기의 문신. 김장생의 문인으로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이며, 효종의 장인이다. 이정귀, 신흠, 이식과 함께 조선문학 4대가로 칭송되며, 글과 글씨에 능하고 천문, 지리, 병학, 의술에도 능통하였다. 벼슬은 대제학, 이조, 예조판서, 우의정에 이르렀다.
④소사원의 모정에서[素沙院茅亭] / 김종직 / 점필제집 시집 제1권
이른 새벽에 진창길을 건너가니 / 凌晨渡泥潦
띠집이 평평한 들을 눌러 있는데 / 茅宇壓平原
기러기 오리는 하늘 멀리 날고 / 雁鶩兼天遠
물쑥들은 땅을 파랗게 덮고 있네 / 蔞蒿蓋地繁
분분히 달리는 건 삼도의 역말이요 / 紛紛三道馹
띄엄띄엄 있는 건 두어 집 마을일세 / 點點數家村
남주의 나그네 머리 돌려 생각하니 / 回首南州客
그 회포를 쉽게 논하지 못하겠네 / 情懷未易論
*김종직 :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로 사림파의 거두.
⑤(백현원에서) 지팡이에 기대어 / 이행 / 용재집 제7권 해도록
사립 밖에서 지팡이 기대노니 / 倚杖荊扉外
비낀 석양은 만고의 정일레라 / 斜陽萬古情
누렇게 새 벼가 익었단 말 듣고 / 黃聞新稻熟
하얗게 먼 연기 이는 것을 본다 / 白見遠煙生
달은 지난 밤보다 둥글게 찼고 / 月較前宵滿
시냇물이 남아 작은 골짝 맑아라 / 溪殘小壑淸
근체시 읊다가 그마저 그만두고 / 近詩吟更罷
묵묵히 돌아갈 길을 헤어 보노라 / 默默數歸程
*용재 이행 :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중종 때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게 배척받았지만, 기묘사회 후 승승장구하였다. 문장,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