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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장인에게 거금을 들여 특별히 제작한 은장도입니다. 이것을 아가씨께 선사하고 싶습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이루하가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이기창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별 것 아닙니다. 이건 결코 환심을 사기 위한 선물이나 혼인을 청하기 위한 예물이 아닙니다. 지난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저희 여관에 오셨을 때 잘 모시지 못하고 큰 욕을 당하시게 한 데 대한 사죄의 표시이니, 저를 용서하신다면 꼭 받아주십시오.”
이기창은 여미아를 보면서도 겸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가씨도 함께 고통을 입으셨으니, 거금을 들여 보상해 드려야 마땅하나, 그렇게 약소하기 짝이 없는 것을 드리니, 용서해주시기를 빕니다.”
일행은 이내 유쾌한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진귀한 과일들을 먹었다. 족히 두어 시간 이상의 오찬을 마친 후, 세 사람은 멀리까지 환송을 받았다. 시종일관 이기창의 태도는 겸손하고 진실했으며 극진했다. 이쯤 되고 보니, 이루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기창의 초청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여미아의 말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 같아, 한편으로 이기창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고조영이 자신을 배신하고 태평공주를 따라 가버린 것으로 짐작되어, 버림받고 홀로 남은 자의 외로움에 사무쳐 있던 그녀에게, 대당大唐에 귀화한 고려 명문가 이다조 장군의 막내아우가 지극정성으로 다가오니, 어찌 그녀의 심사가 바람 앞의 삼림처럼 요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기창은 미목이 수려한 미남인데다 사업경영수완이 탁월하고, 비록 형 이다조의 후광을 입었다고는 하나, 젊은 시절부터 사업의 성공으로 이름을 날릴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사람들과 교분이 두텁고 예의 바르며, 일견하기에 학식도 부족하지 않은 듯하여, 이루하의 내면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이루하의 마음은 이기창에게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고조영의 상황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이기창이 새롭게 내놓은 정공법은, 잘 먹혀들고 있었던 것이다.
무 태후의 시위장侍衛將으로 취임한 고조영은, 하루걸러 한 번씩 이해고와 교대로, 무 태후를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다녔다. 무 태후가 먼 여행길에 나설 경우에는 고조영과 이해고가 시위병들을 거느리고 무 태후와 동행했다.
조영이 궁 안에 드나들면서 태평공주 이영월과 만날 기회는 잦았다. 때로 비번일 경우에는 태평공주가, 궁 밖에 마련된 그의 집을 찾아와 그와의 만남을 즐기곤 했다. 조영은 한편으로 부담스러웠으나 떠나버린 이루하와 여미아의 뒷마당을 그녀가 채워주고 있어서, 그냥 묵인하고 지냈다.
어느 날 조영은 태후를 따라 북궁으로 들어섰다. 북궁에는 여인들이 많았으므로 조영은 되도록 곁눈질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하며 태후의 뒤를 바싹 좇았으며 그건 태후의 명이기도 했다.
북궁 안의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단연 으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황제의 처첩들이었다. 중국 황실의 전통적인 처첩 품계는 크게 다섯 등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상위의 존재를 황후라 한다. 임금의 정실로서 단 한 명이다.
그 아래 둘째 등급으로, 삼부인三夫人 혹은 삼비三妃가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부인이 하나 늘어 사四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라 지칭되는데, 지위는 모두 정일품正一品이다.
그 다음 셋째 품계는 구빈九嬪이라고 일컬어지는 바, 소의昭儀, 소용, 소원, 수의, 수용, 수원, 충의, 충용, 충원 등 모두 정이품이다.
이어서 넷째 위상에는 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가 있는데, 첩여 아홉 명, 미인 아홉 명, 재인才人 아홉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무 태후 즉 무후가 처음에 당 태종의 아내들 중, 이십칠세부 안의 한 지위인 재인才人이었다가, 태종이 죽은 후 관례대로 감업사라는 절에 강제 귀의했으나, 태종의 아들인 고종에게 발탁되어 일약 구빈의 등급 중 최선두인 소의昭儀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소의의 신분으로서, 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모략을 써서 자신보다 윗 품계인 소 숙비와 왕 황후를 몰아낸 후, 고종까지 붕어하자 결국 당나라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했다.
다섯 단계 후빈后嬪 층의 마지막은 팔십일어처八十一御妻다. 보림, 어녀, 수녀綏女가 각각 스물일곱 명씩이다.
이상 다섯 등급으로 이루어진 당나라 황제의 정식 아내들은 황후를 포함해 총 일백이십이 명이었다(진순신 <중국의 역사> 참조).
황제의 비빈들만 일백 명이 훨씬 넘었으니, 그들의 시비들, 온갖 잡일꾼들까지 포함해 그 금궁 안에는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마치 동산 안에 갇힌 꽃들처럼 한우리 안에 모여서 모의와 암투, 질투와 시샘, 외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가.
실제로 훗날인 710년 정월 대보름 직전, 당시 당나라 황제 중종은 위 황후와 더불어 미복으로 저자에서 등불 구경을 하고, 수천 명의 궁녀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밖에 나가 놀게 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자치통감>. 궁궐 안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녀들 대부분이 귀궁하지 않았겠는가.
황제의 총애에 굶주리고 사람들 특히 남자의 애정에 목말라하며, 외로움에 지친 수천 명의 여인들이, 겉으로는 꽃같이 아름답고 또 온순한 양 같았으나 속으로는 마치 굶주린 사자와 이리떼처럼 으르렁거리던 곳이 황제의 금궁禁宮이었다.
하지만 비록 그곳이 남자들의 출입이 제한되고 여인들의 활동이 부자연스러운 금궁이었다고는 하나, 훗날 중종 때 위 황후가 무삼사 및 어떤 외간 남자와 정분을 맺고, 무삼사는 위 황후뿐만 아니라 임금의 후궁이자 여류 시인인 상관완아上官婉兒나 궁내의 어떤 여인과 통정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거해보건대, 그 안에서 변칙적인 남녀 애정행각이 발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도, 보기 드문 일도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영과 이해고의 그림자가 궁내 여인들의 시선 끝에 붙잡히기 시작한 날부터, 금궁 안에서는 일약 기이한 바람이 일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용맹의 기상이 가득 찬 젊은 남자들이 무 태후를 따라다닐 때, 일부는, 어떤 놈이 또 늙은 여우 무태후의 마수에 걸려들었다고 수군거렸을 터이나, 혹자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조영이 무 태후를 따라 금궁 안을 드나드는 날들이 길어질 때 무 태후는 다시 조영을 유혹했으나 조영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태도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조영을 무 태후는 더욱 깊이 신임했는지, 조영이 북성 안에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했다.
때로는 무 태후의 심부름으로, 실권 잃은 황제와 황후의 별전이나 비빈들의 전각을 드나들기도 했으니, 북궁 내에서 조영의 얼굴이 알려지기는 시간 문제였다.
그 날, 조영은 무 태후를 그녀의 침전까지 모셔다 드리고, 빠른 걸음으로 지름길을 통해 북궁의 북문인 현무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앞만을 쳐다보며 걷고 있을 때, 전각과 전각 사이로 사뿐사뿐 지나가는 어느 여인의 자태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황제의 여인들 가운데 최하 부류인 팔십일 어처 중의 한 사람인 듯했다. 그녀가 시비들을 거느리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조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조영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시선이 부딪혀 얼굴을 얼른 돌렸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얼굴이 매우 낯익었으므로 호기심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옆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얼굴이 곧장 전각 모퉁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영은 기이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왜 그녀의 낯이 설지 않을까 곰곰이 헤아려보았으나,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아마도 자신의 눈이 착시현상을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하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금궁 안에서 그녀의 얼굴이 다시 조영의 시선에 붙잡힌 것은, 며칠 후였다.
무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고 기승을 부리던 날, 그러나 초가을 꽃향기가 궁 안에 가득할 무렵, 조영은 무 태후를 따라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궁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무 태후는 일단 조영과 친밀해지자, 자기의 속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는가 하면, 정사政事에 관한 중대한 문제들까지 조영에게 발설하며 조영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해서도 조영과 의논하곤 했다.
“조영.”
무 태후는 늘 조영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네, 폐하.”
“이다조 장군이 둘째 아우의 혼사를 위해, 내 딸 태평공주의 입을 빌려,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어떡하는 게 좋을까?”
“둘째 아우의 혼사요? 어느 규수와 혼약이 이루어졌습니까?”
조영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인 차 물었다.
“아직 혼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 해. 혼약이 성사되도록 내게 부탁했네. 내 입김을 원하는 거지.”
“상대편 가문은 어느 고관집인가요?”
조영이 다시 물었다.
“자네도 잘 알겠구먼. 저, 송막도독 이진충의 딸 이루하라는 아가씨 있잖은가? 이다조 장군의 둘째 아우 이기창이 그녀에게 푹 빠졌으나, 그녀와의 혼약을 성사시키지 못해 요즘 상사병에 걸렸다나 어쨌다나?”
“네?!”
조영은 많이 놀랐다.
“그러면 그들이 아직 혼약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글쎄, 그러니까 내게 부탁하지 않았겠는가?”
“저는 한 달 전쯤에 두 분이 혼약했다는 소리를 누군가에게서 들었었습니다.”
“아마 와전이었겠지. 근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는다면 딱 어울리지 않겠는가? 사주팔자에 의한 궁합도 아주 잘 맞는다고 들었네.”
“이건 인륜지대사라,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딱 어울릴지 어울리지 않을지는 사람이 속단하기 어렵고, 양 가문의 내력, 두 사람의 성장 배경, 인생관과 가치관, 섬기는 종교 등등 여러 요소를 종합해서 궁합을 따져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단순한 사주팔자만 가지고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그건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군. 내가 이 나라 실권을 잡고 있지만, 이 나라에서 여인들이 기를 펴고 살고 있는가? 남정네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게 보통 아낙네들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 고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들의 발언권이 매우 세고, 여인들의 의견이 대단히 존중된다고 들었습니다. 양가 가운데 하나는 거란인 가문이고, 하나는 말갈계 고려인 가문인데, 서로 잘 어울릴지 저는 정말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두 가문이 모두 동이북적의 명문가임에는 틀림없으나, 거란과 고려는 중국인들이 보기에 관습이 서로 비슷한 것 같아도 많이 다릅니다.”
“자네 의견도 일리가 있네.”
조영은 이루하가 아직 이기창과 혼약을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일단 가슴 속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밑으로 내려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그 때 무 태후의 말이 다시 들렸다.
“그러면, 내가 두 사람의 혼약을 적극 추진하지 말아야 할까?”
“그건 제가 뭐라 말씀 드리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이루하가 자네에게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일전에 들은 것 같은데, 자네는 이루하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조영은 일순 당황했다. 이루하도 이루하이지만, 그녀의 시비侍婢인 여미아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미아의 해맑고 고운 자태, 신비롭고 성스런 기품, 고고하고 청아한 아름다움은, 그녀가 비록 비천한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조영의 마음을 바람결에 흔들리는 보리이삭 마냥 뒤흔들기에 넉넉했다.
조영이 이루하보다 여미아의 고혹적인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보라!
그의 시야에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잡혔는데, 그들은 멀찍이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조영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앞장 선 여인은 가녀린 몸매에 황제의 아내들 중 마지막 품계인 어처의 의복을 입고 하늘하늘 걸어오는데, 그 자태가 자못 아름다웠다. 그러나 조영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여미아와 매우 흡사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조영은 자신이 여미아를 생각하다보니, 다른 여인을 그녀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얼른 두 눈을 비비고 남몰래 심호흡을 하며 딴청을 부리다가, 다시 슬며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여인들의 거리가 이쪽에서 더욱 가까웠으므로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때 그녀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가 조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영과 눈길이 조우하는 순간, 깜짝 놀란 듯 신속히 외면하며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정면만을 주시했다.
그 여인은 다시 보아도 분명히 여미아를 닮아 있었다. 여미아가 풍기는 고고하고 성스런 기품은 보이지 않았으나 여미아와 매우 닮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무 태후의 시선도 그녀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들은 무 태후 가까이 이르러, 그녀에게 공손히 절한 후 지나갔다. 그녀들이 스쳐간 자리에서 짙은 향냄새가 쉬이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맴돌았다.
조영이 넋이 나가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무 태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영!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하게 빠져 있나?”
조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난 자네의 지조를 굳게 믿지만, 조심해야 하네. 이곳에는 엉큼한 여우들이 꽤 있지. 그 여우들의 꼬리에 미혹을 당했다가는 곧바로 황천행이야. 황궁의 여인들에게 절대로 시선을 던져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조영은 가슴이 서늘해져 얼른 대답했다.
“네,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기이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미아의 자매인가? 설마! 여미아에게 자매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리고 하나는 비천한 여종인데, 어떻게 한 여인은 황제의 고귀한 아내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우연히 얼굴을 닮은 거겠지.’
나중에 혹시 여미아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리라 작심하고 그녀에 대한 판단은 일단 뒷날로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인간의 일이란 것이 참으로 신묘막측하고 때로는 엉뚱하기까지 하다. 조영은, 얼굴이 여미아와 흡사한 궁내의 그 어처御妻를 잊어갈 무렵, 무 태후에 대한 시위를 마치고 태후를 그녀의 침전인 장생전長生殿까지 모셔다 드린 후, 다소 붉게 타오르는 서쪽의 노을에 우울하고 착잡한 심사를 적시며, 북궁의 북쪽 문인 현무문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향긋한 내음이 진동하더니, 한 무리의 여인들이 그의 대각선 방향으로부터 그가 가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 걷는다면 도중에 양측이 조우할 것 같았다. 조영은 그녀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발걸음에 좀 더 속도를 가해 부지런히 걸었다.
하지만 그가 발걸음에 속력을 내자 그쪽도 더욱 빨리 걷는 것 같았다. 마침내 조영은 금궁 안에서 그 여인들과 맞닥뜨렸다. 조영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여인이 다름 아닌, 여미아를 닮은 어처였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조영과 조우하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조영을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혹시, 태후 마마를 호위하시는 고조영 장군님이 아니신지요?”
“네, 맞습니다.”
“장군님에 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고려인이시라는 게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조영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한어漢語로 이야기하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여미아와 상당히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안녕히.”
그녀가 짧게 인사하고 가려 했다. 조영은 마침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말했다.
“저, 잠깐만요. 저, 여미아······.”
조영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조영을 바라보다가 조영의 입에서 “여미아”라는 소리가 나오자 움찔 놀라는 것이었다.
“아니, 장군님께서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나요?”
그녀가 이번에는 놀랍게도 고려어로 묻는 것이었다. 조영은 더욱 놀랐다. 조영도 고려어로 말했다.
“고려어로 얘기하시면······.”
“괜찮아요. 나의 이 시녀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내가 밖에서 데려온 내 사람들이에요.”
그녀는 조영의 염려를 알아챘다는 듯 그를 안심시켰다.
“마마는 여미아를 잘 알고 계십니까?”
조영이 다시 고려어로 물었다.
“그건 제가 여쭙고 싶은 질문이에요.”
“저는 그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과 만난 적도 여러 차례고.”
조영의 대답에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급하게 말했다.
“오, 그렇군요. 지금은 시간이 급박하니, 나중에 제가 장군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 때 제게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그럼.”
어처는 조영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사라졌다.
조영은 한 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종종 걸음으로 금궁의 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영은 까마득히 몰랐다.
날이 갈수록 이다조 장군의 둘째 아우 이기창은 더욱 진귀한 보물들로 이루하에게 선물 공세를 가했는데, 선물을 줄 때 변명하는 말은 한결 같았다.
“이건, 지난번 저희 여관에 들렀을 때, 자칫했더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게 만든데 대한 보상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목숨의 위험에 대한 보상도 한두 번이지 매번 이런 식으로 선물을 주니, 이루하는 언젠가부터 선물을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이기창의 구혼은 날로 간곡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승려 회의를 통해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몇몇 고관들과 무태후의 입까지 빌려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루하는 이기창의 집요한 구혼에 점점 염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마음이 더욱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궁내로부터는 태평공주와 고조영의 혼담이 오간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태평공주가 본부本夫인 설소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셋이나 낳았지만, 은밀히 이혼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고조영이 태평공주와 맺어진다면,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것의 진실 여부를 떠나 이루하는 한여름인데도 외로움과 허전함,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이기창에게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이루하는 자신의 종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지인, 여미아를 불러 자신의 심사를 털어놓았다.
“여미아, 난 어쩜 좋으냐?”
이루하가 슬픈 눈빛으로 여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씨?”
여미아는 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 물었다.
“고조영이 태평공주와 결혼한다는 풍문이 사실일까?”
“글쎄요.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인지라, 어디까지고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이기창 공자와 혼인해 버릴까 보다.”
“이기창 공자를 사랑하시나요?”
“아니, 전혀. 그 분은 멋진 미남이고 풍류를 아는 분이지만, 마음이 그를 사랑할 정도로 끌리진 않아.”
“그럼 왜 그와 혼인할 생각을 하시죠?”
“조영 공자가 가버렸잖아.”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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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 26.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