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7월의 호밀밭
이운우
이글거리는 태양은 푸른들판 위로 줄기줄기 뙤약볕 신기루를 쏟아붓고 있었다. 얼굴이 따끔거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헐렁한 헌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삶은 자주감자 몇 개와 쓴 김치 한 보시기, 한쪽 손에는 농주 주전자를 들고 새참 심부름 가는 중이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강가에 도착하니 온몸은 땀에 젖었다. 도중에 목이 말라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몇 번이나 홀짝거렸으니 반은 햇볕에 타고 반은 독한 농주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멀리 강 한가운데 모래톱에는 키가 큰 은백색 호밀이 선들바람에 누웠다 일어나면서 파노라마처럼 일렁거렸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호밀을 베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부지요, 새 참 갖고 왔심니더 좀 데릴러 오세요!”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소리쳤다. 강물이 깊고 물살이 너무 세어 어린 나는 건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을 잠시 멈추고 강을 건너와서 나를 등에 업고 건너 주면서 반가운 듯 한마디 했다.
“야! 이눔아야, 니 얼굴이 와그래 빨간노, 여까지 오는데 힘들었제....”
늘 땀냄새와 담배 냄새가 짙게 배어나던 널찍한 아버지의 등에서는 오늘따리 짙은 호밀 냄새가 풍기었다.
강 한가운데라 쉴만한 곳이나 원두막이 없어 긴 호밀대를 가로세로 엇갈리게 세워서 모래를 파내어 임시로 만든 움막 그늘에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땀과 물에 젖은 홑적삼 등거리와 삼베 잠방이를 벗어 훌훌 짜내고 다시 입었다. 땀에 젖은 손을 호밀대에 쓱쓱 문지르고는 내게 굵은 감자 한 개를 집어 주고 농주를 한 잔 드셨다. 허연 소금기로 어룩진 검게 탄 얼굴, 툭 불거진 광대뼈 사이의 움푹 패인 큰 눈동자,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소작 농토를 경작하여 아홉 명의 대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늘 양식이 부족한 탓에 새벽녘부터 밤늦게까지 오직 농사일에만 천직으로 매달렸던 아버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지만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었다. 남들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정도로 순박한 참 농사꾼이었다. 집안 식구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이나 대소가 누구에게나 얼굴 한번 붉히거나 큰소리 한번 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동네 명절 때 농악놀이가 벌어지면 제일 신명 나게 쇠(꽹과리)를 잘 쳐서 뭇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차지하곤 했었다. 농사 외에는 배운 것 하나 없고 가난을 대물림받았지만 가난해서 오히려 맑은 청빈과 담박한 삶을 즐겼다. 세상 어디에 한 점 부끄럼 없이 꼿꼿하고 당당했다. 새참을 맛있게 드시고는 담배쌈지에서 꺼낸 풍년초로 천천히 곰방대에 쟁겨 넣는 손가락 뼈마디가 많이 닳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쏟아지는 무더운 날에 일을 하느라 기력이 소진된 모습이었지만 먼 산을 바라다보는 맑고 서늘한 눈빛은 강물을 닮은 듯 여유를 잃지 않으셨다.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고는 모래를 베개 삼아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너른 강줄기 한가운데 200여 평쯤 되는 이 호밀밭은 홍수로 인해 모래와 자갈이 퇴적되어 자생적으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모래톱 섬이었다. 땅 주인이 따로 없어 처음에는 동네 주민 서넛이 조금씩 나누어서 경작하다가 나중에는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부 도맡았다. 당신네 소유 밭이 별로 없으니 밤낮으로 매달려 억척같이 황무지 모래톱 밭을 일구어 옥토로 만들고 그 수확으로 소도 한 마리 쌌다. 호밀은 “청국밀” 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늦가을에 모래땅이나 메마른 땅에 흩뿌려 놓으면 저절로 자라 겨울을 나고, 초봄의 연초록 밀은 익어 갈수록 은백색으로 변하면서 줄기 끝에 하얀 꽃을 피워 이삭을 단다. 다 자라면 키가 2-3미터나 되어 웬만한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아 쓰러지지만 않으면 7월 초순 무렵에 길쭉하게 생긴 검은 호밀을 수확 할 수 있었다. 땅콩이나 다른 고소득의 작물을 심으면 좋겠지만 다른 농작물은 해마다 여름이며 몇 번의 홍수로 인해 다 쓸어 가곤 했는데 홍수에 강한 작물을 찾다 보니 호밀이었다. 우리 밀이나 보리보다 수확량이 떨어지고 수익성이 많이 낮았지만 칼국수로 만들어 먹거나 부슬부슬 비 오는 날 솥뚜껑을 엎어서 볶아 먹으면 맛이 고소해서 여름철 양식대용과 간식거리로 요긴하게 쓰였다. 남들은 무덥고 농한기라고 그늘에서 편히 쉬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여름 장마와 홍수가 오기 전에 얼른 베어 타작을 하고 수확을 해야만 했다.
사래 긴 호밀을 낫으로 서걱서걱 잘도 베어나가는 아버지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팔뚝 근육은 뼈만 남아 앙상한 것 같은데 어디서 저런 힘이 솟아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모래집을 짓거나 개구리를 잡아 밀대로 바람을 불어넣어 배를 빵빵하게 만들기도 하고 놀았지만 이내 시들했다. 아버지에게 심심하다고 졸랐다. 아버지는 알록달록한 물새알을 주워 주기도 하고, 갓 부화하여 털이 보송보송한 들꿩 새끼 꺼병이를 한 마리 잡아 주었다. 장난감처럼 갖고 노니 지루한 줄 몰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깜깜해졌다. 먹구름이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듯 두두둑!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번개불이 번쩍이고 천둥도 쳤다. 비를 피할 길이 없고 놀라서 겁에 질려 떨었다. 아버지가 가슴으로 감싸 안아 비를 막아 주었다. 구렛나루 수염이 얼굴에 닿아 따끔거렸다. 쿵쾅거리는 아버지의 숨결이 내 가슴까지 이어졌다.
일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는 소 등에 태워 강을 건너 주었다.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들판을 지나왔다. 아버지는 소풀을 잔뜩 채운 지게를 지고 나는 소를 몰고 앞서 걸었다. 동쪽 하늘의 허연 반달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뿌듯함으로 감쌌다. 동구밖 쯤에 오니 어머니가 마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하니까 소박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셔서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초에 몰락한 양반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의용군에 강제징집 되어 갔다가 다친 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72년 돌아 가셨다. 배운 것은 농삿일이라 농사짓고 땔감 나무하는데는 남들이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잘했다.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기에 집안 길흉사나 제사 등 사대부가 갖추어야 예절범절
도 빠짐없이 실천했다.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다가도 집에 손님이 오면 손을 씻고 의관(갓과 두루마기)를 갖춰입고 정중하게 맞절을 하면서 손님을 맞이했다. 어머니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농주를 걸러 소반에 반 주전자 쯤 담아 내었다. 안주라곤 김치 한두가지에 콩나물국이 고작이었다. 사랑방으로 들고가는 심부름은 종종 내가 했다. 지금의 손님 접대는 커피나 차를 대신하지만 당시엔 집집마다 필수품으로 농주를 담가놨다가 제사 때 쓰거나 손님 이 오면 접대용으로 내놨다.
평소 언행은 남의 눈에 띄게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타정신은 항상 몸에 배여 있었다. 집안일부터 문중 일은 물론 동네에 남들이 힘들고 껴려하는 궂은 일들은 앞장서서 솔선수범으로 해 나갔다. 1960〜70년대 당시 농촌에는 장정들이 20세 전후에 징집되어 군인으로 갔는데 군인 가기 전 미리 혼인을 하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혹시나 군대가서 다치거나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후사를 봐 놓는다는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 때문이었다. 동네에서 그런 생계가 곤란한 집이 있는 경우에는 아버지가 늘 남몰래 도우는 것을 몇 번이나 본적이 있었다. 산에가서 땔감도 해서 몰래 갖다주거나 곡식도 나누었다. 당시엔 우리 집안도 먹고 살기 어려운데 웬일 일까? 의아하게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타고난 아버지의 이타정신과 남을 배려하고 어렵고 힘든 이웃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타고난 가난을 비관이나 좌절 한 번 않고 묵묵히 일만하고 자연을 즐겼다. 어머니는 늘 그런 아버지를 보고 너무 오지랖이 넓어 가난하게 사는 팔자라는 얘기를 종종했다. 내가 그 DNA를 이어받았고 다시 대를 이어 교사로 재직 중인 딸내미가 더 오지랖이 넓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아내가 부전자전이라며 입을 삐죽인다.
정년퇴직 후 10여 년 째 산골에 귀촌하여 2000평의 밭에 농사를 짓고 있다. 고추와 콩 등 밭작물을 키우고 있는데 요즘와서 문득문득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돌아가셔서 부자지간의 끈끈한 혈연과 깊은 정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면서 어떠한 불의에 타협을 하거나 힘든 일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설 수 있는 당당한 기상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즉 어린 나에게 자연에 순응하는 법과 호연지기, 그리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게 항상 겸손해야 하는 방법을 전해 준 것 같았다. 지난 9월 우리 지방을 휩쓸고 간 태풍 힌남호에 봄여름 내내 가꿔 놓은 작물이 몇 시간 만에 흔적없이 파묻혀 황무지가 돼버렸다. 우리 두 내외가 꼬박 두 달이나 걸려 손으로 복구작업을 하면서 농사일과 노동의 신성함을 깊이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50여 년 만에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살다보니 옛날 고생하시던 부모님의 노고가 십분 이해가 된다. 아버지는 화랑의 후예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올곧은 참 농사꾼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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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우| 2008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경주시 산내면 내칠리에서 창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