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 : 1 - 21절
“주 예수의 은혜”
얼마 전에 인천 송도에서 제4차 서울로잔대회가 열렸었습니다. 제 1차 대회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있었는데 빌리그래함 목사님과 존 스토트 목사님 같은 유명한 분들이 의장을 맡아서 성공적으로 잘 이끌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예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님도 한 분이신데 우리나라만 해도 이단을 제외한 기독교 관련 교단이 300개가 넘습니다. 서로 연합을 해도 어려운 상황인데 분열이 너무 심해지니까 하나 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대회입니다. 자주 있는 대회는 아니고 2차 대회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89년도에 있었고 3차 대회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이라는 곳에서 2010년도에 있었습니다. 그 후 14년 만에 하나 되자는 의미에서 서울에서 열리게 된 것인데 안에서는 하나 되자는 취지로 대회를 하고 있고 밖에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농성을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 되자는데 왜 반대하는 것이 이해 안 될 수도 있는데 반대하는 분들의 주장을 보면 3차 대회 때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를 초청했는데 그렇게 되면 종교 다원주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주장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만들어지고 지금은 약 2000년 동안 공격도 받고 서로 토론도 하면서 어느 정도 신학이 정리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베드로나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엄청난 논쟁과 갈등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고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하고 참 믿음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서 전혀 혼란스럽지가 않은데 베드로나 바울 시대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괴롭혔든지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의 서신들을 보면 대부분의 내용들이 그런 갈등의 내용이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참 민감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을 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일을 했던 이방인 지역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늘 말썽이었지만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예루살렘에서도 이 문제가 양분이 되어서 적지 않은 논란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는지에 대해서 지켜보게 되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두 사람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람이고 야고보는 이미 야고보 사도는 앞에서 사도 중 첫 번째로 순교자가 되었던 것을 봤었기 때문에 사도 야고보는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두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이 이 논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정리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주장을 보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가지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봤던 말씀인데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소문에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사마리아에 가서 안수를 하니까 성령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을 이방인의 땅처럼 생각을 했는데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두 눈으로 경험을 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가지고 할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신 것을 보면 할례는 구원을 받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우리가 저들에게 우리도 능히 멜 수 없는 멍에를 목에 걸려고 하느냐? 그것은 옳지 않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할례를 받든 안 받든, 직분이 있든 없든, 공로가 있든 없든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에 조금 모자라도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모자라지만 구원을 받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율법의 잣대나 행위의 잣대로 핀잔을 주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해서 모자라는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편견이 얼마나 위험하지 보세요.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로마의 통치자 시저가 사람들끼리 만날 때면 서로 오른손을 마주 잡은 채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악수를 오른 손으로 하게 만든 것인데 왜 하필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게 했냐면 그 시대는 칼로 싸움을 하던 때라 사람들은 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른손잡이들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오른손잡이들은 악수를 할 때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왼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면서도 왼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이 왼손잡이는 “믿을 수 없는 사람” 이렇게 낙인이 되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왼손잡이들이 예전에는 얼마나 서러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보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괴테, 피카소, 안데르센, 잔 다르크, 베토벤, 찰리 채플린, 뉴턴, 아인슈타인, 니체, 슈바이처, 간디,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버락 오바마. 이 사람들이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다 왼손잡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는데 예전에는 애들이 왼손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어른들이 얼마나 혼을 냈는지 모릅니다. 잘못된 편견이 사람들의 앞날을 망칠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할례의 편견처럼 우리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더 자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싹부터 자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르게 야고보는 어떤 주장을 하게 되냐면 아모스 9장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2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16절부터 보면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시지 않았느냐? 그런 예언대로 만국을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인데 그들을 괴롭게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 다만 가장 기본적인 “우상의 문제, 음행의 문제,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이 정도만 편지를 써서 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하고 나머지는 우리가 그들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자! 이렇게 주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영적인 체험을 봐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그렇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율법으로 정죄하고 멍에를 목에 거는 것보다는 사랑으로 품고 이해해 주고 그러는 가운데 훈련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잇도록 돕는 것이 맞다고 제1차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신학적인 결론을 내린 모습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베드로가 아주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11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방인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도 따지고 보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이기 때문에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저들을 용납하고 하나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빼면 우리는 사실 시체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를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이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일주일간 롤러코스터처럼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엄청난 은혜들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자기 기준으로 사람들을 예단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교만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혼자 손수레 호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신사가 보고는 안쓰러워 매일 돈 천 원을 건네주고 호떡은 그냥 됐다며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한 달을 넘게 늘 그렇게 돈을 주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역시 돈을 건네고 돌아가는데, 호떡집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하시는 말씀이 "아저씨, 호떡값 올랐어요. 천이백 원으로요." 이랬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우리에게 이런 모습은 없는지, 은혜를 모르는 이런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도 호떡집 아주머니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우리보다 더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불공평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여겨는 것을 잘못된 생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지도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도 못하는 삶의 습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공짜이고 조건 없는 사랑이고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주신 은혜인데 그 귀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오만하게 살아가게 되면 우리 스스로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다른 사람에 목에 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고 천국을 꿈꾸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우리가 받은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고 나누면서 기뻐하며 살다가 천국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서 다같이 만날 수 있는 같은 은혜를 꿈꾸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