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웅기공항이다. 가족과 만나고 미리 준비한 택시에 짐을 싣고 어디론가 향했다. 공항은 프리타운과 멀리 떨어져 있어 약 40여분 배를 타고 또 한 시간을 더 달려야‘Arirang guest house’에 도착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내리고 샤워를 한 뒤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긴장을 내려놓고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한국분이 운영하는 숙박시설을 갖춘 여관이다. 부인은 중국 연변 분으로 한국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주신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수요일 도착해 하루정도 프리타운을 여행하고 최종 종착지이며 선교센터가 있는 코노도 코이두시 스몰레바논에 도착해야 하나 많이 늦어진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내일도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비행기가 들어와야 짐을 찾고 출발할 수 있다. 덕분에 이틀정도 프리타운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우리의 일정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은 내가 도착해 쉬는 곳마다 그 지역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단은 나의 발목을 잡아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힘을 공급하여 충전케 하시고 최종목적지를 향해 진행케 하셨다.
7월23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밤새 내린 비는 아침에도 여전히 내리더니 오후쯤 되어서야 그친다. 귀하게 얻은 하루를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우리 가족은 해변으로 향했다. 약30분 걸으니 바닷가에 이르렀다. 시민들은 우리를 쳐다보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다.‘Hello Chinese’대부분은 우리가 중국인인줄 아는 모양이다.‘NO, Korea"라고 대답하고 걸었다. 중국인들이 시에라리온에 많이 살고 있어 대부분 중국 사람으로 인식한다. 길가에는 작고 초라한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자동차 정류장이 있어 택시, 오토바이가 많이 보였고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버스는 12인승처럼 작은데 짐과 함께 사람들을 가득 싣고 다닌다. 해변은 깨끗하고 모래는 예쁘며 바다는 아름답다. 그러나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고 축구를 하는 몇 명의 남자아이들과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줌마가 전부이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잦아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없는 듯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이 나라 과일인 망고를 먹었다. 망고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껍질이 하얀색, 노란색, 초록색 등 우린 초록색인 망고를 먹었다. 맛은 달고 수분이 많았다. 태국에서 먹는 맛보다는 못하다.
7월24일 화요일 시내구경을 위해 택시를 탔다. 코스는 시에라리온 유일한 국립대학인‘Sierra Leone University’-외국인이 많이 찾는다는‘Crown bakery’-노예를 사고파는 장소인‘큰 나무’-역사박물관 -Big Mart(민속시장)-이렇게 돌아보았다.
지금은 방학시즌이라 대학교에 학생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출발했다. 학교는 산꼭대기에 있어 걸어서 올라가기는 너무 힘든 곳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도 차가 힘이 약해 뒤로 밀릴 정도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은 프리타운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폭포가 있어 시원함을 더해주었으며 항구가 선명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다. 학교에 도착하니 많은 학생들이 보인다. 여기저기 모여 있는 학생들은 시내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뭔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최고 대학의 학생들답게 표정과 의복, 행동에서 분명 다름이 있다. 영국식민지 시절에 영국에서 세워준 대학으로 185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학교는 2~3층으로 지어진 여러 동의 건물과 역사를 증명하는 탑이 세워져 있고 초라한 식당, 커피숍,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장소는 예배처소인 chapel 건물이다. Sierra Leone은 식민지 역사가 대부분이고 독립 후에도 정치, 경제 등 어느 것 하나 안정되지 못한 불안한 상태에서 블루다이아몬드 영화에서처럼 다이아몬드 때문에 피바람을 불러 내전의 아픔을 겪고 폐허위에 다시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는 아픔이 있는 작은 나라이다. 이런 나라를 일으켜 세울 인재는 이웃나라도 아니고 선교사들도 아닌 자신들이다. 그렇기에 더욱 Sierra Leone university 학생들이 소망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린 대학교 주변의 전경이 아름다워 산책하는 기분으로 사진도 담으며 천천히 내려오는데 그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음은 레바논 사람이 운영하는 크라운 베이커리에 들어갔다. 이곳은 외국인과 부자들이 오는 장소로 가격이 매우 비싸다. 한국에서 먹는 값과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아들이 하는 말, 이곳에 온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피자 한판을 먹었다고 한다. 며칠 전 김성찬 장로님(꽃동산교회)이 사주셨던가 보다. 오늘도 피자와 치킨을 겸해서 시키면서 또 언제 먹을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껏 먹고 싶다고 한다. 마음이 좀 짠해진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먹은 음식 값이 한국 돈으로 약 5만원이다. 외국인 식당은 가격이 비싸 선교사들도 찾아오기 힘든 곳이다. 엄마가 여기까지 와서 아들에게 마음껏 먹이고 싶은 마음이 어찌 아니들겠는가!
세 번째로 찾은 곳이 영국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사고팔았던 장소로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기념하고 있는‘큰 나무’가 있다. 시에라리온 사람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을 때 내일이 찾아올 것이다. 그 현장 바로 건너편에‘역사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 작은 역사관보다도 더 작다. 민속신앙을 섬기던 사진부터 민속악기, 노예사진, 현재의 사진 등으로 전시되어 있다. 영어로 기록되어 있고 안내해 주신 분이 없어 사진을 보고 추측할 뿐이다. 역사관을 나와‘Big Mart(민속 물건 파는 시장)’으로 향했다. 어디가나 민속 물건들은 한계가 있나보다. 우리나라도 마땅한 상품이 없다고 하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옷이나 손에 끼는 팔찌, 나무로 만든 목판 등 별로 볼 것도 살 것도 없다. 귀국할 때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가고 싶은데 살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딸이 팔찌를 마음에 들어 해서 가격을 물어보니 하나에 15000레온 즉 한국 돈으로 4000원을 달라고 한다. 애게~ 우리나라에서도 천원이면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몇 바퀴 돌다 그냥 나왔다. 딸은 못내 아쉬워하면서 사달라고 졸라댄다. 귀국 전에 다시 들려야 할 것 같다.
7월25일 드디어 코노(Kono) 선교관이 있는 코이두(Coido)로 출발하는 날이다. 아침에 항공사측에서 전화가 왔다. 화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식이다. 약 오전10시30분에 택시를 대여해 Arirang guest house 사장님과 도움을 주실 현지인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다행히 내용물은 원래상태로 돌아왔으나 한국에서 빌려왔던 케리어 손잡이가 박살이 나고 가방이 여기저기 찢어져 있다.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가끔은 짐이 1주 이상 늦게 도착하고 내용물이 없어지는 경우가 흔한 일이라 한다. 지금부터 코이두까지 8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짐을 차에 실으니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이 비좁아 걱정이 된다. 한국에서의 거리를 예상해본다면 서울에서 해남, 나의 고향까지 갖다가 돌아오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자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가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목적지는 코이두이기 때문이다. 대여한 택시는 카렌스와 비슷하며 8명이 탈수 있다. 먼 길을 갈 때는 운전기사와 조수가 함께 동행하는가 보다. 그들까지 사람은 6명에다 짐은 좌석까지 가득, 사람이 아닌 짐이 주인자리를 차지하는 모양새이다. 차는 낡을 대로 낡아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염려된다. 그래도 이곳 택시 중에 좀 나은 편이라 하니 믿어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출발한 자동차는 아니나 다를까 엉금엉금 기어간다. 조금가다 자동차를 살피고, 또 조금가다 바퀴를 교체하고 또 조금가다 핸들을 손보고.. 이래서 언제간단 말인가. 불편한 좌석에 먹을 음식은 없고 화장실도 없고, 이렇게 점심도 저녁도 굶고 간다. 도로가에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머리에 이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많다. 물건은 빵, 오이, 땅콩, 옥수수, 얼음물(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이 대부분이다.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이 없어 오이와 옥수수를 샀다. 오이는 우리나라와 같은 맛이고 옥수수는 불로 구워서 맛이 있다. 화장실은 사람이 없는 곳에 노상방뇨를 해야 한다. 어두운 밤이라면 모를까 환한 대낮에 어디다 볼일을 보란말인가. 난감했다.
시에라리온은 지금 우기이다. 밤이면 거의 매일 비가 내리고 낮이면 잠깐 맑았다가 보슬비가 내리다 소낙비가 내린다. 올해가 유난히 비가 많고 날씨가 춥다고 한다. 기후변화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길은 장난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할 정도로 시골길+비포장+국도+움푹패임+물웅덩이=코노로 향한 도로이다. 지도를 살펴보니 프리타운은 서쪽 끝이고 코노는 동쪽 끝이다. 그렇기에 택시비가 굉장히 비싸다. 자동차에 무리가 따르더라도 충분한 보상이 되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가려고 한다. 이렇게 출발한 택시는 황혼이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다. 어두움이 짙어지더니 마을은 온통 캄캄하고 불빛은 가끔 새어나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자다 일어나 시간을 보니 10시를 훨씬 넘은 시간이다. 도착 예상시간을 훨씬 초과했음에도 코이두까지는 아직이다. 기사와 보조자는 자동차에 이상이 있는지 차를 세우고 한참을 살펴보더니 마을로 들어선다. 그곳이 자동차들이 쉬기도 하고 정비도 하는 곳이다. 오일냄새가 나고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잠시 후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 하룻밤을 자야함을 알려준다. 8시간 갈 길을 하루도 아닌 이틀을 가야한다고... 허탈하고 기가 막힌다. 방을 얻어서 자든 자동차 안에서 자든 선택해야 한다. 우린 자동차 안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길을 선택했다. 잠을 잔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앉아 좁은 공간에서 옆으로 누워보기도 하고 앞으로 엎드려보기도 하면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시에라리리온 초행길이 멀고 먼 고난의 행군과 같다. 남들은 10년에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일을 우린 한꺼번에 모두 경험하고 있다. 사단의 훼방이고 방해임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이었다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하나씩 방해물을 벗어버리고 새 힘을 공급받아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으며, 나아가도록 돕는 손길들이 곳곳에서 우리 길을 인도해 주고 있다. 오늘밤이 지나면 내일은 선교관에 도착한다. 이것으로 사탄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할렐루야!
7월26일 새벽잠에서 눈을 뜨니 밖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직 해가 밝지 않는 상태에서 옆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트럭이 움직이고 있다. 오일냄새가 진동하여 불쾌했으나 차안의 냄새보다 바깥공기가 더 나을 것 같아 문을 열었다. 닭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사람들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는 밖으로 나와 몸을 움직여 본다. 얼굴은 초췌하고 머리모양이나 표정은 힘든 기색이 역력했겠지만 그래도 상쾌한 아침바람이 미소를 짓도록 만들어 준다. 조금 있으니 오리와 닭이 새끼들을 이끌고 먹이를 찾아 나섰다. 우리가 탔던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 정비사가 온 것 같다. 정비사가 바퀴를 빼고 살피기 시작한다. 젊은 청년들이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정비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아침에 할 일이 없어 나온 젊은이들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이면 연기가 피어오르고 식사준비가 한창이어야 하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몇 몇 집에서 나무불을 지피는 모습이 보이긴 해도 아침밥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차가 세워져 있는 바로 옆에 작은 집이 있다. 3살 정도 보이는 남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온다. 지금 잠에서 깨어난 듯싶다. 우리를 보더니 엄마치마폭 뒤에 숨어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 엄마가 괜찮다고 하는 듯 보이나 여전히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우릴 바라다보기만 한다. 우리가 무서운가보다. 어린아이들은 처음 만난 낯선 화이트맨을 대부분 무서워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도 있다. 이제 내가 가까이 다가서야 할 차례이다. 그냥 다가서면 울 것 같아 먹던 과자 두 쪽을 가지고 누나와 아이에게 주었더니 맛있게 먹고 난 뒤 아끼며 먹지 않고 가지고 있던 누가 것까지 빼앗아 먹어버린다. 누나는 빼앗기지 않으려 싫다고 해도 억지로 빼앗는 모습이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결국 누나 과자까지 다 먹어버린다. 자동차 수리는 힘들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옮겨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택시에 옮겨 타고 한 시간을 더 달리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머물 곳, 코이두시 Small Lebanon 선교관에 도착했다. 꼬박 하루를 굶었으니 배가 고프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삼양라면으로 식사를 하고 깊이 잠이 들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선교센터까지 9일이라는 긴 여행을 했다. 하나님 무사히 도착하게 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