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사자성어(四字成語)
⊙ 입전수수(立廛垂手) 중생을 찾아 속세로 들어가다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속세로 들어가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전(廛)'은 점포(店鋪), 시장(市場)을 뜻하는데 중생이 사는 이 사바세계를 가리키고, 수수(垂手)는 '손길을 내민다'는 뜻으로 교화, 중생 구제 를 뜻한다.
'십우도(十牛圖)'라고 하는 선화(禪畵)가 있다. 사찰에 가면 대웅전 벽에 많이 그려져 있는데, 소를 찾는 그림이라고 하여 '찾을 심(尋)'자를 써서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한다. 소(牛)는 중생의 우치(愚癡)한 마음, 곧 어리석은 마음을 가리킨다.
입전수수는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제10도의 화제(畵題)로, 깨달음을 이룬 후에는 사바세계 즉 현실 속 으로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해야 함을 뜻하는 사자성어다.
불교의 대명제는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고, 공적(公的)인 과제는 중생제도이다. 특히 불교 에는 사홍서원(四弘誓願), 즉 네 가지 큰 서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 願度)이다.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맹세코 모두 다 제도하겠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불교 일반에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네 가지 방법을 제 시하고 있다. 이것을 사무량심(四無心)이라고 하는데, 조건 없이 무한한 자 · 비 · 희 · 사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慈)는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것이고, 비(悲)는 슬픔이나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이고, 희(喜)는 보시 등 을 통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고, 사(捨)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커다란 목적, 가치관은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은 중생제도에 힘쓰면서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제도는 불교의 공적인 가치관으로 1순위이다. 순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 입전수수(立廛垂手)
入 들 입. 들어가다. 廛 가게 전. 시장. 저잣거리. 垂 드리울 수. 내밀다. 手 손 수.
출처 : 윤창화 <불교의 사자성어> ----------------------------------------------------------------------------------------------------------------
"불교의 대명제는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고, 공적(公的)인 과제는 중생제도이다."라는 말씀 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중생제도에 있을 보여 줍니다. 입전수수는 중생제도를 실천하는 공적인 가지 관으로 1순위라 하겠습니다.
입전수수에 대한 설명은 본문에 자세하니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화제(畵題)인 입전수수(立廛垂手)에 대한 곽암선사(廓庵禪師)의 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露胸跣足入廛來 노흉선족입전래 抹土塗灰笑滿顋 말토도회소만시 不用神仙眞秘訣 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 직교고목방화개
가슴 풀고 맨발로 저잣거리 들어가니 흙과 재를 덮어써도 얼굴에는 웃음 가득. 신선의 참된 비결 사용하지 않아도 곧바로 마른 나무 꽃을 피게 하누나.
십우도의 마지막 열 번째 선화(禪畵)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입전(入廛)이란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이고, 수수(垂手)는 손을 드리운다는 뜻이니 세속에 나아가, 중생들에게 손을 내밀어 구제한다는 이야깁니다.
'가슴을 풀고 맨발로 저잣거리로 들어가니[露胸跣足入廛來]'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와 어떤 대상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몰라도 어떤 선입견이나 차별상을 두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이제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이 되었으니 어떤 집착과 꺼릴 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입 니다. 가식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일체가 되었으니 가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眞理)란 '있는 그 대로'라는 뜻입니다. 무애자재한 모습으로 차별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찾아갑니다.
'흙과 재를 덮어써도 얼굴에는 웃음 가득[抹土塗灰笑滿顋]'이란 이렇게 세속으로 들어가 중생을 깨우치고 자 중생들과 동사섭(同事攝)하며 티끌 속에 뒹굴어도 본모습을 떠나지 않으니 미소가 피어납니다.
이것을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합니다. 이는 세속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입니다. 분별하고 차 별하는 마음없이 중생의 고통을 들어 주고 마음을 열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지혜를 갖추도록 일깨워 주 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도를 닦는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신선의 참된 비결 사용하지 않아도[不用神仙眞秘訣]'은 이렇게 화광동진(和光同塵)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데 무슨 신선의 비결이 따로 있겠냐는 것입니다.
신선이 되기 위하여 연단법(鍊丹法)을 쓰고 복기법(服氣法)을 쓰는 거와 같은 무슨 특출한 신통력을 보여 서 뾰웅~ 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심을 다하여 일깨워 줄 따름입니다.
'곧바로 마른 나무 꽃을 피게 하누나[直敎枯木放花開].' 이 마지막 구절은 교화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도를 깨달아 중생 곁으로 달려가 온갖 흙과 재를 덮어쓰며 함께 뒹구는 것은 영원히 티끌 속에만 뒹구르 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늘 고통 속에서 목타게 허덕이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청량한 감로수(甘露水) 부어 주어 고목 에서 꽃을 피울 것인가가 관건인 것입니다. 감로수는 생명수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교설은 감로수와 같습니다. 부처님의청량한 감로와 같은 법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도를 깨달은 이의 아름다운 회향인 것입니다.
내가 이룰 깨달음 내가 품은 사무량심(四無量心)
면면히 정진하고 부지런히 행한다면
나와 남 분멸 없는 속 입전수수(入廛垂手) 이 아닌가?
우리가 늘 염하는 사홍서원, 사무량심을 실천하면 이것이 입전수수(立廛垂手)요 자리이타(自利利他) 보살행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_()_ _(())_
향기로운 불교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