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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 1993년 12월 5일
토박이 의술사 고문수 옹
제목: 구룡초와 놋동우 찧어 붙여 와사풍 고쳐
요점: 팔에 물집 잡히고 보름 있으면 입 돌아와
진주 의원 부인과 운수회사 사장 등 고쳐줘
충청도에서 온 노인이 병 고쳐주고 전수해줘
선조의 지혜가 스며 있는 독특한 향토의술
예로부터 이땅 곳곳에는 누군가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수
많은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이 있었다. 이 토속적인 의약과 의술은 저 산의 들풀처럼 민초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온 것인 만큼 뚜렷한 이론적 체계는 없었지만, 대대로 이 땅에 뿌리 내린 선인(先人)들을 지켜 준 생명의
파수꾼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병을 내리면 자연 저 어디엔가 약도 내린다고 했듯이, 우리 선조들
이 질병을 고치기 위해 생존본능을 발휘하여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의약과 의술을 찾아낸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
서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이 비록 엉성하고 하찮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는 자연 섭리가 담겨져 있고 선조
들의 수 천년 의료경험과 지혜가 스며있다.
그러나 이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은 근세 이후 서양의학이 밀려들면서, 서양의학자들에 의해 '미신이다' '비과
학적이다' '허무맹랑한 속설이다'라는 식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평가되고 무시되어 왔다. 그리고 저 들
판의 들풀이 산업화의 힘에 의해 갈아 엎어지듯이 풍비박산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제는 향토의약과 민간의술
이 뿌리내릴 풍토도, 그것을 전해 줄 사람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구나 편리하고 깨끗함만
을 추구하는 오늘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의약이요 병원이요 의사인 처지에서 번거롭고 지저분하게 느껴지
는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은 우리 일상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학약의 부작용과 인공적 시술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의 의료현실에서, 자연의 섭리가 밴
향토의학과 민간의술은 우리에게 다시 질병치료의 지혜를 일러주고 있다.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이야 말로 벽에
부닥친 오늘날의 인공화학의학이 다시 겸허히 돌아가 지혜를 구하고, 난치병 치료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의학의
고향인 것이다.
경남 진양군에 사는 고문수(高文守, 취재 당시 82세) 옹은 풍비박산 나버린 우리네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의
한 자락을 지키며, 또 자연의 방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오늘날 양방병원이 손들어 버린(?) 와사증 환자를 고치며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의 '토박이 의술사'이다. 평생 농토를 일구고 대목수장이로 뼈가 굵은 그가, 인근에서 눈과
입이 한쪽으로 돌아간 구안와사증 환자가 찾아오면 산과 논두렁에서 자생하는 들풀을 뜯어다 고쳐 주는 모습은
바로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행했던 질박한 의술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그가 와사증을 고칠 수 있는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을 우연히 배워 환자를 고쳐 준 게 스무 살 무렵이니, 따
지고 보면 그의 의술인생(?)은 어느덧 60년이 넘어 이제는 '와사증 전문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의사입네'하고 내세우는 것도 없는 소박한 이 땅의 농부요, 이웃집 할아버지일 뿐이다. 고 옹이 구술한 그의 향
토의술과 민간의술을 그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와사증 고치는 약을 배운 건 열 일곱 살 묵었을 무렵이지. 당시 요 인근 문산면 상희부락에 사는 숙부
아들이 와사증 병이 났어. 우리 아버지가 그 소릴 듣고 내캉(내가) 가 보니, 입이 무섭게 삐딱하게 돌아가 있네.
그라믄서 "여기저기 댕기믄서(다니면서) 침을 맞아도 영 안 되네요" 그라는 기라. 그래 우리 아버지가 "그라믄
우리 향권 금산면에 한 번 가보자, 그곳에 가믄 침 잘 놓는 노인이 있으니 그 어른한테 한 번 침을 맞아 보자"
이리 카고 사촌을 데려와 그 노인에게 비인기라.
그 노인이 당시 팔십 넘은 어른인데 원래 충청도 양반이라. 우째 해서 여기 금산면에 왔는지 어렸을 적이라
모르지만도 여기서 삼시로(살면서) 침도 잘 놓고 약 짓는 데도 능했는 기라. 그래 그 노인에게 가 비니까(보이니
까) 그 어른이 말씀 허시기를 "내가 침을 허지만도 침을 주면은 실패가 가는 수가 있다. 대신 풀로 조약을 해 가
지고 뿌쳐뿔면(붙이면) 낫는 기일이 많이 걸려도 실수가 없이 다 나스니(나으니), 기일이 더디드라도 낫는 율로
가는 게 안 좋것나" 이라는 기라. 그람시로(그러면서) 산에 가서 풀을 찾아야 카는데, 여기는 그런 게 있을랑가
없을랑가 모르것다 카고 나서는 기라. 그때 내가 그 노인을 따라가 명백히 풀로 보고 배운 긴데, 그 노인이 사방
을 찾더니 "요 풀로 가지고 카면 된다" 그람시로 "너희 젊은이들은 이런 것 잘 봐두면 나중에라도 써 먹을 수
있고 남겨 둘 수 있으니 혹여 이웃에라도 와사증 환자가 있으믄 한 번 해봐라" 카고 갈차(가르쳐)주는 기라.
그래 그 풀로 가지고 와서 당신 손으로 찧어 팔에다 맥을 찾아 붙이도만, 스물네 시간 하루 꼬박 지나믄 불
이켜(부풀어) 오른다고 카대. 실제 그 이튿날 그 어른한테 갖다 비니까, 약 붙인 데가 불에 데인 것처럼 불이켜
올라 물집이 잽혀 있는 기라. 그 어른이 그걸 따 삐리도만(버리더니) "이제 가만 놔두믄 지절로 입이 바라지니(바
르게 되니) 걱정 말라" 그라 카는 거라. 진짜 사촌은 그 노인 말대로 입이 서서히 돌아오도만 한 열흘만에 바라
졌는 기라. 그래 내가 그 어른이 하는 걸 보고 와사증약을 알게 된 기지. 그 노인은 그 후 여기서 이삼 년 더 살
다 일본에 있는 아들 따라 가 삐렸어.
내가 스무 살 무렵부터 와사증 환자를 봐 준 것은 내가 돈 벌어 먹을라꼬 의원입네 헌 것도 아니고, 고치러
다닌 것도 아니라. 다만 이웃이라든가 일가 간이라든가 와사증 환자가 있으믄 그 노인이 헌대로 풀을 뜯어다가
해본 기라. 나스믄 다행인 기고 안 되믄 헐 수 없는 기고, 한 번 해보니 다 되는 기라. 그래서 나슨 사람이 환자
가 있으믄 이웃에 소개해주고, 이래 캐서 오늘날까지 전파돼 나온 기지.
내가 와사증에 쓰는 약은 노인이 갈차(가르쳐) 준 대로 구룡초와 놋동우(개구리 자리) 두 가지 뿐인 기지. 놋
동우는 눈두렁에 가면 흔허게 있는 풀인 기고. 겨울철에도 양달 쪽에 가믄 잎이 올라오는 게 있어 찾기 수월치.
그러나 구룡초는 깊은 산에나 가야 있지 쪼매도 없어. 더욱이 겨울에는 이파리가 다 지부려(져버려) 억시게 찾기
힘든 경우가 많지. (취재할 당시는 12월초였다. 놋동우는 논두렁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
나, 구룡초는 확인할 수 없었다. 식물도감이나 사전 등에 구룡초가 나오지 않는 걸 모아 항간에서 쓰는 속명이라
짐작된다.)
이 두 가지 풀로다 같은 비율로 해서 찧어 사용허는데, 놋동우는 겨울철에도 이파리를 약으로 써도 되나 구
룡초는 한로·상강 지나믄 뿌리를 파 가지고 써야 카지 아파리는 약기운이 하나도 없어 몬 쓰는 기라. 대개 풀
은 여름철에 태양 광선을 받아 가지고 영양분은 이파리에 저장해 두는데, 서리가 내리고 나믄 뿌리가 안 썩고
월동을 할라꼬 이파리에 있던 약력을 싹 거둬 뿌리에다 저장해 두는 기라. 그러다 봄에 우수·경칩이 지나 이파
리가 올라오고 나뿔면, 뿌리는 수분만 올려 줄 뿐이고 약력은 태양 광선 받는 이파리에 가 있게 되는 기지. 약력
은 태양 광선에서 오는 기라. 그때는 이파리를 뜯어다 써야 카지 뿌리는 아무 소용이 없는 기라. 내가 한 번은
시험 삼아 여름에 뿌리를 파서 해보니 안 되는 기라. 이게 부차 (붙여) 놔도 독이 없음께 밀가루 부차 놓은 것
맨냥(마냥)으로 생전 가도 안 불이켜 올라오는 기라.
약을 붙이는 자리는 오른쪽으로 입이 돌아간 사람은 왼쪽 팔에다가 카고, 왼쪽으로 입이 돌아간 사람은 오
른쪽 팔에다가 카는 기지. 그런데 폴뚝(팔뚝)이나 다리나 사람이 폴꿈치와 무릎 위는 크고 아래는 작으나 뼈는
위쪽으로는 하나고 아래쪽으로는 두 가닥이거든. 그라믄 다른 손구락(손가락)은 가만 뇌두고 가운데 손구락만 까
닥거리믄 두 가닥으로 난 팔뼈 사이에 있는 힘줄맥이 꼼짝꼼짝 카거든. 그럴 때 가만히 손목에서부터 그 맥줄을
짚어 올라가다 보믄 와사증 난 사람은 이상허게 기가 큰 상 싶은 데가 있어. 그라믄 거기에 열이 났다는 증거라.
그래 그곳을 표시해 놓고 술병 딱가리(뚜껑)에 약을 홈빡 담아 붙이는 기라. (고문수 옹이 말하는 약을 붙이는 자
리는 대개 극문혈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술병 딱가리가 없음께 조개 깝데기에다 담아 붙이기도 하고 도토리
깝데기에 담아 붙이기도 했지. 그리 카다가 요새는 술병 딱가리가 흔헌께 그길로(그것으로) 카믄 아무래도 수월
치.
그리고 내가 경험해 쌋는데(보니) 왼쪽에 약을 붙이믄 오른쪽 폴뚝 같은 자리에다도 약을 사분의 일 정도로
쪼매헌 걸 부차 놓아야 허는 기라. 한쪽만 홈빡 약을 부차 놔뿔면 입이 돌아올 때 오히려 더 돌아오는 수가 있
거든. 다른 쪽에도 콩알만큼만 허게 부차 불이키게 해 뿐지믄 나술 때 그런 염려 없이 바라지거든.
팔에 약을 부차 와사증이 낫는 이유는 기계로 치믄 폴이나 다리는 부속인데 그게 다 엔진 격인 장부와 연결
돼 있거든. 장부에서 풍이 나 와사증이 왔어도, 폴에 있는 맥줄로라도 장부에 있는 풍을 다스릴 수 있는 기라.
약을 붙이고 나믄 약이 독한께 폴로 파고 들어가믄서 불이키게 해 물집을 잽히게 카는데, 그걸 따 삐리믄 인체
에 맥혀 있던 풍이 터져 나와삐려 기혈이 순조롭게 되지. 스물네 시간 정도 지나 물집이 잽히믄 물은 따서 빼내
삐리고, 폴이 조금 아프다 캐도 고약 붙이지 말고, 빨리 아물게 칸다고 연고나 항생제 흩치지 말고, 지절로 낫게
놔두믄 상처가 나스믄서 그곳으로 나쁜 기운도 빠져 나오고 어느 시한에 입에 돌아오는지 모르지만 낫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자연적으로 입이 돌아오는 기라.
그런데 이걸 해본께 하루만 약을 붙여도 잘 불이키는 사람이 있고 두 번 세 번 붙여야 불이키는 사람이 있
어. 사람은 다 풍을 가지고 있는데 체질에 따라 풍 성분이 강헌 사람이 있고, 약헌 사람이 있어. 만약 사람이 풍
이 없으믄 바보밖에는 안 되는 기라. 약간 풍을 가져야 오기가 있고, 절기(절개)가 있고, 기억력도 있고 그렇지.
풍이 센 사람은 어디 다쳐 상처가 나든 뾰두락지가 나든 잘 낫거든. 그래서 잘 안 불이키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틀림없이 자기는 어디 다쳐도 잘 낫는다고 그래. 그런 사람은 약을 부차 불이키게 하려 캐도 자꾸 낫는 율이 온
께 여러 번 갈아 붙일 수밖에 없는 기라.
이걸 붙이고 와사증이 낫는 시한은 열흘 걸리는 사람도 있고, 보름 걸리는 사람도 있고 한 달까지 걸리는
사람도 있어. 병이 난 지 오래인 사람은 힘이 드는데, 남자는 삼 개월이 지나믄 나스기가 쉽지 않아. 그런데 여
자는 일 년 정도 돼도 나슬 수 있는데, 생리 끝나는 날을 이용해 이걸 부차 폭발시키면 되는 기라.
그리고 와사증은 명치 끝이 아프면서 오는 게 있고, 토사곽란 후에 오는 게 있고, 뼈골이 쑤시고 머리가 패
면서 오는 게 있고, 중풍이나 산후풍을 끼고 오는 게 있는데 뼈골이 아프믄서 오는 게 낫기가 가장 어라바(어려
워).
이런 모든 걸 안 건 내가 의학박사도 아니고, 풀박사도 아니고, 글로 배운 것도 아니거든. 나는 국문 '가갸거
겨'도 모르는 무식헌 사람이라. 다만 옛날에 나에게 약을 갈차 준 노인이 그리 말해서 알고, 경험으로 쌓아 알고
있는 것 뿐이지. 내가 무식캐도 한 가지 기억력은 남보다 좋아 그걸 다 알고 있지.
지금껏 내가 고차(고쳐) 준 환자수는 일백 명, 이백 명도 넘고 수백명은 될 기라. 쪼매헌 아이서부터 나이
묵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부지기수인 기라. 물론 내가 손 봐 준 사람 중에서 실패 가는 사람이 있는가도 모르지.
그러나 나에게 왔다 간 사람은 처음엔 이런 풀을 부차 뭐 낫것나 싶어 반신반의허다 카도 나중에 낫게 해주믄
고맙다꼬 억시로 전화도 오고, 술이나 담배 사가지고 찾아 오기도 카지. 그걸 보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패를
많이 주었다꼬 생각치는 않아.
한 번은 진주에서 병원하는 원장이 찾아왔는데, 자기 마누라가 와사증에 걸렸으니 집에 한 번 같이 가자는
기라. 그래 내가 "당신은 의학박사이고 나는 무식쟁이인데, 나헌테 와서 그란 소리 카느냐" 카고 안 간다꼬 그랬
지. 그래도 자기가 의학박사지만 와사증은 몬 고치니 한 번 봐달라카는 기라. 할 수 없이 약 해가지고 찾아가서
부차 줬어. 처음엔 부인네가 폴이 불이켜 물이 찔찔 흐르고 아프다꼬 원망도 많이 카도만, 한 보름 있음께 다 나
았다꼬 고맙다꼬 전화 오드라고.
또 한 번은 진주에 사는 한 할배가 와서 부산에 사는 네 살 묵은 자기 외손자가 입이 돌아가 한 일주일째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안 낫고 카니 가자꼬 카는 기라. 그래 가서 약을 부차 주고 다음날 가 보니 제대로 팔이
불이켜 있어. 그걸 따 주면서 이제 집에 가 있으믄, 자연 나스니 자꾸 차가운 링겔 맞추지 말고 아이를 퇴원시키
라꼬 캤어. 그리 캐도 안 나슬까 모른다꼬 그냥 있겠다는 기여. 그라믄 맘대로 해라 카고 내는 올라와 삐렸지.
물론 내가 약 해주고 돈을 받지만도, 그렇다꼬 내 카는 걸 하찮게 볼 땐 속상허기도 카지. 그라꼬 나서 한 열흘
지났는데 그 할배한테 전화가 왔대. 외손자를 잘 낫게 해주어 고맙다꼬.
서울에는 환자가 있다꼬 사람이 데리러 와서 1981년 1월에 간 적이 있는데, 환자가 육군 장군으로 별 세
개 달고 제대허고는 운수회사 사장을 허고 있는 사람이라. 그래 약을 해가지꼬 부차 주고 나서, 날은 춥고 옷은
추접고 있고 몬허고 카니 나는 갈란다꼬 카니 안된다꼬 카는 기라. 촌놈이 서울 지리를 알 수 있나 참 곤란허
대. 그래 그 집에서 꼼짝없이 나흘을 안 있었나. 나중에 자꾸 갈란다 카니, 내 주민등록증을 적도니만 차를 갖다
대놓고 타라고 카대. 그럼시로 따라나오도만 "내가 돈을 많이 못 줘 미안허다" 카면서 봉투를 하나 주곤 들어가
삐려. 우짼 일인가 싶어 보니 이십만 원이 들었어. 그래 잘 있으시오 카고 집에 돌아왔는데, 한 열흘 있으니 그
때는 우리 집에 전화가 없을 때인데 우체국에서 전화 받으라꼬 데리러 왔어. 전화 받어 보니 그 사람이 이제 완
전히 나았다꼬 고맙다는 기라. 그라믄서 한 번 서울에 올라 오라꼬 했싸. "나섰으면 다행이고 나는 서울 지리 몰
라 몬 올라간다" 카고 끊었지. 그라곤 한 사흘 있으니 소액환으로 십만 원을 부차 왔더라꼬. 그때 와사증 고쳐
주고 결국 삼십만 원 받은 셈인데, 그때 돈으로는 큰 돈이였꼬만. 내가 지금껏 받은 돈 중에서도 질로(제일로)
많은 액수였꼬만.
이걸 한 번 해주면 예전에는 환자들이 나섰다꼬, 인사치레로 술이나 담배 사 가지고 온 게 전부였어. 그때는
무료 봉사라. 지금은 대개 오만 원 받는데, 비싸다꼬 칼란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고만. 그 전엔 환자가
오면 안차(않혀) 놓고, 내가 논두렁으로다 산으로다 가서 풀을 뜯어다가 부차 주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기
라. 이 금산면 전체로다 군부대가 들어와 삼분의 일은 차지해 삐렸거든. 그라곤 산과 들과 골짝을 뺑뺑 돌아가면
서 철조망을 쳐 삐렸어.
그라니 요 앞산 한 군데서 구룡초가 나는 데가 있어 그간은 거기 가서 뜯어다 썼는데, 이제는 거기 갈 수가
있나. 지금은 여기서 멀리 있는 월악산 중턱에나 가야 구헐 수 있어. 사람시켜 어디 가서 이러이러헌 풀 뜯어 오
라 카면, 그 사람이 뜯어 오고 나서 하루 품삯으로 사오만 원을 달라꼬 그래. 이러니 어쩌것나. 그 삯을 주고 나
면 내 수중엔 돈 만 원도 남을 둥 말 둥 카지. 그게 싫어 한 번은 내가 택시 타고 가서 세워 놓고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가서 풀 속을 댕기면서 풀을 찾아 가지고 왔단 말여. 그란께 이번엔 택시를 오래 세워 놨다꼬 돈을
몇만 원 달라꼬 카는 기라. 그라니 택시비로 다 깎아 먹어 삐리고 마찬가지여.
약을 한 번에 많이 해 놓으려 캐도 환자가 많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약이 금방 빈해 삐리니 소용이 없는
거지. 약이 쉬어 삐리면 약력이 없어 쓸 수가 없어. 약이 하루만 지나도 나물 쉬듯이 빈해 삐리니, 풀을 그때그
때 뜯어다가 해 줄 수밖에 없는 기라. 요즘은 냉장고가 있어 잘만 보관하믄 며칠은 갈 수 있는데, 그것도 열흘은
몬 넘겨. 이거 안 할라꼬 캐도 환자가 찾아와서 해달라꼬 카는데 괄시를 몬허것드라고. 그래서 남는 것 없이 여
지껏 이걸 붙잡고 있는 거지.
내가 와사증 약을 갈차 준 사람이 많아. 혹여 경상대학교 한의과 학상들이 와서 물어 쌌기도 카지. 그라몬
내가 배운대로 갈차 주는데, 전파가 잘 되었는가 모르것어. 이제 올해 내 나이 여든둘이라. 오늘 죽을랑카 내일
죽을랑카 모르것는데, 이걸 내캉 똑같이 헐 수 있는 사람은 막내 아들이라. 공부도 제대로 몬 시켜 중학교만 마
치고 지금 진주서 공장 댕기는데, 고거는 내가 카는 기나 틀림없어. 그런데 잘 안 헐라꼬 카지.
와사증은 12경풍 중의 하나인데, <사암침법>이란 책을 보면 간허증(肝虛症)이니 연곡(然谷)혈을 사(瀉)하고
소해(小海)혈을 보(補)하라 했다. 또 약은 <방약합편>을 보면 백부자·백강잠·전갈을 각각 2전씩 분말하여 뜨거
운 술에 타서 마시라고 했다. 그러나 고 옹과 같은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은 항간에만 존재할 뿐, 어느 의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 옹의 향토의술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취재기간 중에 환자가 찾아오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고 옹이 사는 부락의 이장 이재호 씨와 인근의 사람들로부터 고 옹이 이제껏 많은 와사증 환자를 낫게 했
다는 말은 들을 수 있었다. 고 옹에게 치료 받은 사람을 직접 만나지 못했던 게 아쉬웠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세
속적인 잣대로 고 옹의 의술을 재려는 필자의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 옹이나 동네 사람들이 어떤 계산
속이 있어 고 옹의 의술을 과장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그들의 순박한 태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요즘과
같이 의술을 독점하고 비방(秘方) ·비술(秘術)이라면 하나라도 감추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오늘의 의료현실, 또
상업성에 밝은 사람이 그의 향토의술을 이용하여 상술을 부릴지도 모르는 세태에서, 그는 그저 자신이 물려받은
이 땅의 의술을 아무 사심 없이 그대로 아픈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소박한
자세뿐이었다.
이 땅의 투박한 향토의술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는 고문수옹. 고 옹과 같은 의술은 서양의학이 밀려들고 일
제의 민족의학 말살정책이 있기 전에는 이 땅에 널리 전해져 오던 의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민족의 의학
적 뿌리가 흔들리고, 향토의약과 민간의술은 천연기념물을 찾듯이 저 깊은 산중에서나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되
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외래종'에 밀려 '토종'이 사라지듯, 이 땅의 토박이 의술이 사라질 것이란 느낌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우리의 향토의술 중 하나가 고 옹의 투박한 손에 의해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서울행 버
스에 몸을 실었다. 멀리 진주 남강이 저녁 노을이 비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