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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째 날(9월 4일)
(29)
아우 같고 친구 같은 L과 제수 같고 누이 같은 P
직장 때문기기는 했으나 부산생활을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부인의 병 간호에 매달리게
된 L은 아우같고 때로는 무난한 친구같은 존재다.
부인의 병세가 호전 중이라 했는데 근황이 궁금하여 어제 통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아침에 통화가 되어 늘 하던대로 아침식사를 함께 하려고 온천장 찜질방을 나섰다.
초양도에서 다친 손가락들이 계속 말성을 부리기 때문에 씻지도 못하는 찜질방이다.
그의 집이 있는 해운대의 해장국촌에 우리의 단골식당이 있다.
하나같이 원조할매집인데 '48년 전통'집이다.
그의 부인 P여사는 자기 집에서 자고 식사하는 것이 스스럼없도록 내게 각별하였으나
근래에는 장기 투병중이라 외식을 한다.
그러나, 호전 중이라던 P여사의 사거(死去) 소식은 내게 2개의 충격이었다.
투병에서 지고 만 것과 고부(告訃)받지 못한 것.
여의도사무실 생활 중에 맺은 그들 부부와의 인연이 동아줄 같다는 믿음이 깨지고 돌연
L이 생소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나 감정놀이나 하고 있을 충격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녀가 영면 중인 부산추모공원(기장군 정관면)으로 달렸다.
내 1월 제3주의 한라산 일정에 맞춰 L부부를 포함한 여의도의 몇 부부가 제주도 여행을
했을 때 해마다 예약을 해주는 고마운 아우 K의 콘도에 함께 투숙했다.
한라산에 오른 후 제주시에서 김상욱 시인과 날짜가 바뀌는 것도 아랑곳없이 술을 마시
다가 아무 데서나 잠들 뻔했다.
한데, P여사의 "잠은 집에 와서 주무셔야지요" 한마디가 소스라쳐 택시를 타게 했다.
자정이 넘은지 오래 된 시각에 제주시에서 중문단지까지.
제수(弟嫂) 같고 누이 같은 여인.
환한 웃음 띤 그녀의 영전에 작은 화분 하나 놓는다고 허전한 마음이 진정되겠는가.
군인(육군대령)남편 따라 낯선 곳들을 전전하며 군인문화에 피로가 쌓였던 그녀는 자기
남편 지근에 자유분방한 내가 있는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는지 내게 깍듯했건만.
내가 이러는데 해로를 못하고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이야 오죽하겠는가.
점심까지 함께 하고 부산을 떠나라는 L..
홀로 있는 그의 심정을 헤아려 약속하고 동백섬~해운대 길에 들어섰다.
동백사거리에서 숲길을 따라 누리마루 에이펙(APEC)하우스로 갔다.
순 우리말 누리(세계/world)와 마루(정상/ridge)의 합성어로 세계 정상들의 모임을 뜻
한다는데 굳이 순 우리말을 만들어야 했는가.
전 세계 정상의 모임도 아니고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
mic Cooperation)의 모임을 확대해서.
발음이 마치 일본의 어느 선박(ぬりまる/塗り丸) 이름 같아서 하는 말이다.
'부산선언문'이 발표된 2005년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 호스트(host)가 어떤 이유로 유명을 달리 했다는 것 뿐인 것 같다.
정상들의 모임이 얼마나 많으며 선언은 또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가.
그런데도 세계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선언문 대로 변했다면 다시는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미 지상에 천국이 실현되었을 것이니까.
'소'가 '중'으로 바뀌었을 뿐 두 축에 빌붙어서 눈치보고 아양이나 떠는 둘러리들이 무슨
정상이며 맨날 모여서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상설기구 UN이 표로 승부를 거는 것 같으나 해결되는 것 하나 있는가.
내 동포가 사무총장이지만 그가 과연 트러블 슈터(trouble shooter/분쟁해결사)인가.
그것(UN) 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더욱 이전투구의 형국일 것이라고?
미국의 무기가 이전투구를 만들고 장차 중국이 가세하는 물양공세에 박제에 불과할 UN.
뉴욕의 UN건물을 돌아보며 가진 느낌이었다.
고운(孤雲)이 들렀다가 지은 이름이라는 남일대 해안(삼천포)을 거쳐 왔는데 닷새만에
또 그 분이 지었다는 해운대(海雲臺/釜山)에 올라섰다.
남일대는 남유중이었고 해운대는 어지러운 정국을 떠나 가야산 입산 도중이었다니 혹,
남일대에서 해운대를 거쳐 간 것은 아닌지.
범부는 맨날 다녀도 흔적이 없는데 단한번 지나가도 불멸의 족적이 남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불세출의 거인임이 틀림 없다.
스리랑카는 진신사리 모조품 제조 수출국?
L은 누리마루 데크, 출렁다리, 황당한 황오공주 등 해안로 따라 도착한 해운대 해수욕장
에서 나를 태우고 송정동으로 갔다.
해운대의 변화를 상전벽해로 표현할까, 격세지감이라 할까.
이름에는 낭만이 가득찬 듯 하나 연탄배달 기피순위 0번 달동네였던 달맞이고개.
이 고개에 막혀 볕이 들지 않는 어촌 송정을 가려면 필히 넘어야 했던 고개를 원치 않는
다면 평생 접근하지 않아도 되지만 기피 영순위에서 인기 영순위로 바뀐 고개.
내가 해운대를 선호했던 60년대 말~70년대 중반, 해수욕장에 천막집을 지어놓고 고개
마루에 다녀오면 밥맛이 꿀맛이었다.(배가 꺼졌으니까)
백사장에서 천막이 천대받게 됨으로서 해운대도, 달맞이고개도 인연이 모두 끊겼지만.
전혀 딴 세상이 된 송정에서 점심식사(경호생오리돌솥밥)를 한 후에도 L은 내게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었는가 달린 곳은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기장군 기장읍 사랑리)
개신교의 극성에 역정나 가톨릭교회로 옮긴 그가 극성이 심한 불교 사찰로 안내하다니.
부산권의 관광명소로 알려졌나 대형버스를 비롯해 각종 차들이 범벅이고 관광객인가
불교 신도들인가 사람도 많은 용궁사.
해변에 형성된 거대한 절이 소속 종단이 없는가 밝히지 않는가.
해수관음대불, 약사여래불은 물론 득남불, 학업성취불, 황금돼지, 포대화상, 십이지상,
별난 이름의 불과 상들이 하나씩 조건을 걸고 돈 내노란다(복전함)
지극히 현실적인 희한한 절이다.
불교의 본질인 중생의 제도는 관심 없고 뭐든 한가지 소원만 성취하면 되는가.
이 절의 불(佛)들은 바쁘기는 해도 부담은 덜 하겠다.
시시콜콜한 요구들 때문에 바쁘지만 극락왕생의 무거운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이 절도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를 7과나 모셔와 봉안하고 있단다.
우리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은 통도사(영축산), 상원사(오대
산), 정암사(함백산), 법흥사(사자산), 봉정암(설악산) 등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셔와 위 다섯 절에 나누어 봉안하게 한, 소위 5대 적멸
보궁(寂滅寶宮) 사찰로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석가모니불이 계신다 하여 다른 부처를 상징하는 불상을 절에 두지 않는다는 것.
한데, 근자에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절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이 진신사리들을 모두 스리랑카에서 들여왔다고 하는데 믿어도 되는가.
석가의 탄생지도 열반지도 아닌 스리랑카는 진신사리를 얼마나 어떻게 확보했는가.
석가의 사리를 분배한 8부족국의 하나였나?
그렇다 해도 통일 인도가 모두 회수했다잖은가.
스리랑카 캔디(Srilanka Kandy)의 불치사(佛齒寺)는 석가모니 치아사리의 봉안 사찰로
유명하다지만 치아의 수는 뻔하지 않은가.
혹, 그 나라가 진신사리의 모조품 제조 수출로 재미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L은 대변항(大邊/機張郡機張邑)으로 차를 몰았다.
국가어항이며 기장미역과 멸치회로 이름난 항구.
60 ~70년대, 여기 대변항에 오는 길이 하도 험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오기만 하면
회에 치어 일어서지도 못한다던 곳이다.
그만큼 저렴하고 푸짐했던 인심이 차(車)라는 괴물에 모두 역살(轢殺)당하고 말았다.
달맞이고개를 넘어 청사포와 송정, 대변이 모두 그랬다.
바닷가는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돈만 있으면 필요한 만큼 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유지 매입 때문에 옥신각신 할 일도 없다.
대변항도 그래서 넓혔으며 공원도 길도 조성했고 지금도 그 터에 공사가 진행중이다.
두모포에서 이도재와 윤선도를 생각하다
우리는 오후 3시가 넘은 시각에 대변항에서 헤어졌다.
이즘의 60대라면 아직 한창 나이인데 그 연령대의 L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잃지 않기
바라며 나도 본업으로 돌아갔다.
바다에 밀착하여 인가도 차도 뜸한 기장해안로를 걸으며 드디어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맘껏 대접한 L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내 일과에서만은 낭비다.
내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해돋는 파래지'(음식점)를 지나고 월전포(竹城里月田마을)도
지나 두모포(豆毛浦/죽성리두호마을) 까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해수 담수화시설 신축공사장, 임란공신 의병장 김산수(德溪金
山壽), 김득복(東虎金得福) 장군 부자묘, 불편한 바다 바위지대를 통과해서.
대변~죽성간 도로개설 기념비, 하얀 등대는 왜 높은 철망으로 보호(?)하고 있을까.
무슨 보호?, 군부대 철조망이란다.
도착한 두모포는 신라시대부터 수군영이 설치되었으며 이조에는 임진왜란 때까지 수군
만호영이 있었단다.
군영을 부산성으로 가져갈 때 마을이름 두모포까지 가져가서 별칭이었던 '두호'가 마을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나.
이조말엽 고종때(1883년), 이곳 두모포 앞바다에서 해난사고가 발생했단다.
일광(기장현)에서 다량의 대동미를 싣고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선이 좌초되어 대동미가
전량 수장된 사고다.
조정에서 특파한 진상조사단장(암행어사)은 이도재(李道宰/1848~1909)
사고 난 해가 1883년이 맞다면 그는 늦깎이 신출내기였다(고종19년, 34세인 1882년에
고시패스하여 관계에 진출했으니까)
신참 이도재를 시험대에 올린 문제는 떠내려가는 곡식 일부를 건져서 가족을 부양하다
절도죄로 잡혀온 어부들의 처결.
3년 가뭄에 초근목피도 어려운 실정인 것을 잘 아는 현감은 어부들을 차마 처벌하지 못
하고 있다가 차제에 어사에게 일임한 것.
어사의 선처를 이끌어내기 위해 민의를 모으고 미모의 관기를 내세워(성접대?) 향응도
베풀었는데 그 효과인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신참의 기개인가.
"수장되어 바다 속에 흩어진 곡식을 주워먹은 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
어사의 이 한마디에 어부들이 방면되고 이도제는 기장현의 영웅(賢官)이 되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쉬던 재마루에서 무료했던가 나무 하나를 옮겨 심었단다.
그가 이식한 나무는 '이도재나무'가 되고 기장현민들은 '이도재 생사'를 세워 오랫동안
축원 제사를 올렸단다.
생사(生祠)란 감사나 수령 등 지방관의 선정을 기리어 그의 생시부터 그 지방 백성들이
제사지내는 사당을 말하는데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3년 뒤, 1886년~94년, 8년간 고금도(완도군)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기장현민들의 축원 제사가 없었다면 유배의 고초(加棘安置)가 더 길어졌을까.
후에 여러 부처의 대신을 역임했지만.
두호항은 고산 윤선도(孤山尹善道/1587~1671)가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조 중기.후기의 시인, 문신이며 음악과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달한 고산.
출사와 유배와 은둔, 재출사와 파면과 복직, 논쟁과 상소와 탄핵으로 비바람 잘 날 없던
그의 일생은 사후에도 추증과 추탈이 반복되었다.
모가 심한 돌이 정도 많이 맞을 수 밖에 없는데 그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상소로 시작해서 탄핵으로 끝났으며 유배지로 가는 일이 안방에서 건넌방 가듯 다반사
였는데도 수(壽)를 다한 것도 이조500년사에 희귀한 일일 것이다.
1612년에 성균관 유생이 된 그는 1616년(광해군8년)의 상소가 되레 화가 되어 경원(慶
源/함경북도)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여기 죽성리 두호로 이배되었다.
유배자들이 여진족과 내통한다는 첩보에 따라.
두호항의 황학대는 유배중인 고산이 지은 이름이란다.
이두(李杜/이백, 두보)를 비롯해 중국의 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다는 양자강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에 비견된다 해서 였다지만 그가 황학루를 보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에게는 왜 적이 많았을까.
자기만 선이고 남들은 모두 악이라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리고는 유배지에서 고독을 씹으며 우울함을 달랠 길 없어 자연을 벗삼은 것일까.
그의 시들이 자연을 소재로 지어진 것은 현실 정치에서의 우울함을 자연으로 승화시킨
것이라는 해석에 나는 수긍한다.
송순(俛仰亭宋純), 정철(訟江鄭澈), 박인로(盧溪朴仁老)와 함께 이조 시조시가를 대표
하는 인물이라지만 고백하건대 내게 윤고산은 별로다.
그의 오우가(水石松竹月)만 해도 자연을 예찬했다기 보다 가엾다는 생각이 앞선다.
오죽이나 맘 붙일 데 없었으면 그랬을까.
상습적일 정도로 무수한 상소는 예외 없이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로 반응했고
자의적 판단에 따른 일거수 일투족이 안타깝게도 본의와 달리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내가 병신이었을 때도 그랬다.
모든 사람이 기피인물로 보였고, 그래서 지팡이에 '無常'(덧없다)이라고 새겼는데 고산
역시 세상사가 덧없다 생각되어 자연과 짝한 것이 아닐까.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부각되었으니까.
이 늙은이만 기인으로 몰렸다
두호에서 해안 따라 북상하면 곧 신천천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38선이다.
아무도 법접할 수 없는 신앙촌이라는 성지(聖地?)다.
사유지(私有地)라는 이유로 우회하도록 철조망으로 막은 지역이 종종 있으나 여기처럼
광범하게 통금(通禁)을 하는 곳은 남북이 대치중인 민통선(民通線) 외에는 없을 것이다.
소위 신앙집단을 표방하면서도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
불교 사찰인 천은사(전남 구례군)는 지리산 성삼재에 오르는 도로가 사유지라는 이유로
차량의 통행료를 받으나 행인은 자유롭다.
예수원(기독교 성공회)이 매봉산(강원도 태백)의 백두대간을 막았으나 우회로가 있다.
여의도의 몇배가 되는 광대한 목장이지만 통행에 지장 없도록 길을 내주는 도량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있는데 한국인에게는 왜 없을까.
'신앙촌(信仰村)'은 박태선이라는 기독교 장로(?)가 세운 천부교(天父敎)의 성지다.
6.25민족동란이라는 혼미(昏迷)의 산물이다.
종교사를 보면 국란 또는 사회적 혼란의 시기에는 기성 종교형태를 빙자한 온갖 사이비
신앙집단이 발호하기 마련인데 신앙촌도 그 중 하나다.
경기도 소사(부천)에서 발원해 덕소(경기 남양주)와 여기 기장을 근거지로 확보했지만
이미 기가 빠져 미구에 정리될 것이다.
일종의 신앙공동체인 그들의 변천사와 공과는 논외로 하고 한 집단에 의해 국민의 통행
권이 박탈되어도 속수무책, 수수방관하고 있는 한심한 지방정부.
이 무기력한 정부의 주민이야 말로 가련하지 않은가.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대한민국 정부가 왜 무력해졌으며 지극히 사소한 이해에도 발끈
하여 실력 행사하는 민심이 왜 양순한 양(羊)이 되었는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웃을 1시간 이상 멀리 우회해서 일광해변에 가는 동안에 해본 생각이다.
기장8경의 제3경이라는 일광해수욕장.
반원(半圓)을 그리고 있는 백사장, 여광의 바다가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졌다.
일광천 다리(강송교) 옆 시멘트 가드레일에 앉아 담소중인 두 노파에게 정자를 물었다.
비슷한 물음을 자주 받았는지 천막치려 하느냐고 되물어온 노파.
다리 건너 강따라 조금 가면 있다며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다른 노파.
바삐 돌아간 하루를 이 평화로운 해변에서 마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늙은 길손은 정자 찾아가는 일을 미루고 노파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신앙촌의 처사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넌지시 신앙촌을 비판했다.
공감은 하면서도 의아스럽게도 별무반응인 노파들을 자극해 봤다.
길을 막아서 불편할텐데 괘씸하지 않으냐고.
그러나 이 늙은이만 기인으로 몰리고 말았다.
"넓은 길, 좋은 길 두고 왜 그리 갑니꺼"
게다가 요새 걸어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노파들.
할아버지 외에는 그 길을 걸으려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냔다.
그렇다, 불편하다면 잠잫고 있을 리 없다.
진즉, 박 터지게 싸우고 송사가 잇따르고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참패하고 찾아간 정자는 일광천(이천강)변 강송정공원(江松亭) 안에 있다.
우거진 해송숲이 강가에 있다 해서 강송이라 했으리라.
한아름 되는 우람한 나무기둥의 직사각 정자에서 홀로 무료를 달래는 중이었던가.
어스름해가는 시각에 촌로가 길손을 반겼으나 이가 많이 빠졌는지 발음이 분명치 않은
물음이라 동문서답이 되었으리라.
이 촌로라도 내 편으로 만들어 둬야겠기에 그에게 허락(?)을 구했고 그의 흔쾌한 동의
아래 집을 지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