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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의 백마고지로 들어가는 비무장지대 초입의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4세기 로마 작가 푸블리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경구(Si vis pacem, para bellum.)다.
수많은 전쟁들 중에서도 가장 큰 전쟁은 역사전쟁이다. 역사는 한 민족, 한 국가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역사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그 민족이 이룬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의 파고에 휩쓸려가리라.’고 했다. 지금 한,중,일 동북아를 중심으로 영토를 빌미삼은 갈등과 충돌 역시 그 본질은 역사전쟁, 문화전쟁이다.”
역사전쟁이 치열한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어릴때부터 배우고 철석같이 믿어온 ‘우리 교과서 속의 역사’는 과연 우리의 진정한 역사인가?
중국은 2002년 공식적으로 한민족의 고대사를 그들의 역사 속에 편입시켜 중국을 동북아의 최고 국가이자 중심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중국사의 시원을 더 오랜 옛날로 끌어올리기 위해 중국은 소위 ‘중화고대문명 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2003년부터 진행했다. 이 공정은 중국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 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변조하려는 계책이었다.
이 탐원공정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의 북방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치밀한 정치 공작을 벌였다.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과거 2천여 년 동안 자행해 온 동북아 역사왜곡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만주와 요동의 역사는물론 한반도의 한강 이북까지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데 있다.
북한까지 중국땅으로 ,이제는 대한민국까지
남북통일?? 꿈 깨!!
코를 베어가도 모르고, 제대로 대응도 못하면서
우물안에서 밥그릇 싸움만 피터지게 하는 눈 뜬 봉사, 정치인들
중국 정부가 수 년 동안 꾸민 치밀한 전략
돈이면 적도, 아군도 없다.
동북공정에 깔린 중국의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해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 미리 만들어두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통일되더라도 한국의 역사 무대를 남한으로 한정시키겠다는 의도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중국의 영토
외부의 적도 무섭지만, 내부의 적은 더 무섭다.
일본은 일본대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독도와 중국 근해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계속 야기하고 있다. 급기야 일본은 과거의 침략행위를 전면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실제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동안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식민사관을 세웠다.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대한민국에 심어진 일제 식민사관은 청산되지 않고 지금까지 배우고있다.
중국과 일본 역사도발에 대해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제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한중일 역사전쟁의 의미와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놓고서 성姓씨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하였다. 정신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 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정신이 없는 민족이다.”
식민사학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역사학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직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자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지?
어떻게 그런 자들의 세력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밝혀 보자는 것이다. pp.15~16 [예스24 제공]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의 저자 이희진박사는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고대사 학계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가야를 일본 땅이라고 말하는 식민사학자들
https://www.cj-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0073
[기고 칼럼] 가야를 일본 땅이라고 말하는 식민사학자들 - 청주일보
【청주일보】 대한민국헌정지회장한효섭 =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면서 국정 100대 과제에 가야사 복원을 포함 시켰다. 정부는 가야사복원 공약 사업을 실천하고자 1조 2천억 원의 엄청난 예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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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복원 사업에 투입된 1조 2천억원 투입
가야사 복원 아닌, 고대 일본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복구 관련자들 사기죄로 처벌, 국고 환수 및 국정감사해야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51
혈세 1조 2천억 들여 가야사 일본에 바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가야사 복원 사업에 투입된 1조 2천억원은 눈먼돈식민사학과 식민고고학이 독점하는 가운데 돈 잔치가야사 복원 아닌,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복구남원이 식민지인 기문국이라고 대국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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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http://www.koreahiti.com)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자면서 만든 프로에 어떻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 이를 비판하자 진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인물로 몰고 가고
또 그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결국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결과를 자아냈던 경험담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태생부터 어떤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이 건국 8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를 쳐서 학계에서 큰소리를 치는 주류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것이 신진 학자에 불과한 저자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몸을 던져 불속에 뛰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예스24 제공]
독도나 정신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온나라가 뒤끓는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후손들에게,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은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역사학이 실증적인가?
그들이 말하는 실증성을 대변한 인물이 쓰다 소키치이고, 쓰다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학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의 한일 고대사 체계는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의 일부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보통 야비한 인간들이 아니다.
이러한 그림 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 국가의 건립 연대는 수 백년이나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토대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입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현재 약 80년)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발해)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발해)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중국,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음양오행 문화는 역사성으로 보면 2, 3천 년이나 4,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니다. 흔히 음양론의 원 뿌리, 연원을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말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서 들어가 보면, 최소 1만 년 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음양론이 정리된 첫 작품이 『천부경天符經』이다.
선사시대 때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 터, 동굴 벽화를 분석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음양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천부경』이 음양론의 출발점이며, 실제 그것을 문명화한 진리의 원본이 5,600년 전, 태호 복희씨가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받아 내린 하도河圖다. 그 하도河圖에서 팔괘 문화, 주역 문화가 나온 것이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이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아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지금의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E 3528 ~ BCE 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이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이다.
『낙서(洛書)』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온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 『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洛書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다.
서양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數)에 의해 규정된다(All things are ruled by numbers).”는 유명한 얘기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바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라는 얘기다.
낙서洛書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된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의미한다.
낙서(洛書)는 4,300년 전, 중국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洛書를 그리게 되었다. 당시 단군 성조의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가 아버지 단군 성조의 명을 받고 우(禹)에게 치수 비법을 전해주었다. 그 사실이 중국 역사책 『오월춘추』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책을 보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옵니다. 창수(蒼水)는 지금의 황해 바다 북쪽에 있는 대진국,발해(渤海)다. 그런데 꿈에 받았다고 왜곡시킨 것이다.
사자使者가 대진국,발해를 건너가서 금간옥첩(金簡玉牒), 금옥과 같이 아주 잘 만들어진 함에다가 치수비법을 넣어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행원리로 되어 있어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禹)가 9년 홍수를 다스리고 요순시대를 이어 하(夏)나라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호복희씨가 받아 내린 하도(河圖)와 우(禹)임금이 받아 내린 낙서(洛書)가 중동과 그리스 지역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서양에서 2,500년 전에 수(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오늘날 컴퓨터 문명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周易)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다. 그는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고대 동양의 태호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다.” 라고 말한다.
결론은, 음양론은 인류 문화의 원형인 신교(神敎, 以神說敎)의 우주론이다. 다시 말하면 음양오행법칙은 신교神敎의 우주관이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 88쪽을 보면 ‘『천부경(天符經)』’ 의 유래가 나와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구전지서야(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한 글이라는 것이다.
환웅천왕의 배달국 때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신지(神誌)가 남긴 전고비문(篆古碑文)을 보고 작첩(作帖)을 복원해서 전어세자야(傳於世者也)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 전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의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중에서 -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 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 공격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보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 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 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 교수인데 필자를 강단 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 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 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 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 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차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 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 윤내현,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中 -
운초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李沂,1848~1909)선생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와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 상』과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 다섯 종의 책을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분의 자금 지원으로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크래머Kramer 박사는 현 서양문화의 뿌리요, 기독교 문명의 모체인 수메르 문명(BCE 3500~BCE 1950)을 건설한 사람들은 '동방에서 왔다' 고 주장하였다.
일본 학자 우에노上野景福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楔形 문자가 태호 복희의 팔괘 부호와 흡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대영大英 백과사전]에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같은 교착어로서 그 어근語根을 같이한다고 하였다. 고든 Gordon 박사는 수메르인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서기 전에 고대의 문자 기호를 가지고 온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수메르 문명과 기독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시원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단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바벨탑(수메르의 지구랏)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에 끼친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에덴동산과 노아의 홍수 신화도 수메르 신화에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신교神敎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신관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혼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하다.
수메르 문명이 기독교 문화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기독교(유대교) 문화의 뿌리가 되는 유대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래 수메르의 갈데아 우르Ur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수메르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2환국桓國의 열두 나라 가운데 우르(虞婁, Ur)국과 수밀이(須密爾, Sumer)국이 있다. 이 두 나라가 환국 말기에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세운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인은 스스로 ‘검은머리' 사람이라 했다.
특히 수메르의 종교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 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은 제천단 유적으로서, 신교神敎의 삼신신앙과 제천 문화가 여전히 환국의 후예인 수메르인의 삶과 신앙 의식 속에서 제1의 중핵 자리를 점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이미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사실도 여러 곳에서 밝혀졌다.
[화엄경]에서 “해중(海中)에 금강산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이 그 산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종주국이 바다 건너 금강산에 있는 나라’ 라는 말이다.
[삼국유사] [아도기라] 등 여러 서적에 전불(前佛)시대 절터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3000여 년 전에 이미 한국에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말이다.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인간과 신명이 소통하였고, 수행을 통해 인간을 완성시키는 가르침을 역사상 처음 열었던 것이다. 제사는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행해왔던 신교 문화의 예식인 것이다.
한민족의 시원 역사의 핵심은 제천문화다. 하느님을 받드는 문화다. 이문화의 일반적 정의는 하늘 땅, 천지부모와 인간이 하나되는 의식이다. 제천문화는 동서양의 종교와 하나님 문화의 원형, 원조가 한민족의 제천행사다.
제천문화의 유적지가 마리산에 있다. 고대 한민족은 1년에 두 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3월 16일 대영절은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린 민족 대축제의 날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잃어 버렸다. 문화의 근원이 말살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고대(古代)에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왕은 72명이었다. 제왕이 창업을 하고 상제님께 신고식을 올리는 것이 인생 일대에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했다. 소위 봉선제(封禪祭)이다.
배달국의 건국일인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로 왜곡이 되었다. 해마다 대영절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이것이 왜곡되고 뿌리 문화가 단절되어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도교의 시조를 황제헌원과 노자[黃老]라 한다. 중국 한漢족의 시조인 4,700년 전 황제헌원은 신농씨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에서 갈라져 나온 유웅씨(웅족) 계열의 동방족이다.[삼한관경본기]
번한의 역대 부단군 이름과 통치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 [번한세가番韓世家] 하편을 보면 노자에 관한 놀랄 만한 내용이 한 구절 보인다.
■ (번한의 60대 왕인) 도을道乙이 즉위하였다. 계미癸未(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 태호복희씨와 같은 풍이족)이다. (道乙立. 癸未, 魯人孔丘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 名乾, 其先風人)
노자는 단군조선 말기의 인물로 본래 성은 한韓씨이고, 동이 구족 중 풍이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자의 사상적 근원은 배달의 동방사상(신교 삼신문화)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노자는 왜 자신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로 바꾸었을까?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은 자하선인은 [신교총화(神敎叢話)]에서, 노자는 비록 서쪽 땅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본래 동방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후세에 남기려고 성을 '동방[木]의 아들[子]' 이라는 뜻으로 이李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헌원과 노자는 배달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동방족 출신이며 동방의 신교神敎를 서방에 전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와 [관자]에는 황제헌원이 배달국에서 선도仙道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역대신선통감]에서는 "황제가 홀로 동북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아래에서 도를 닦아 날이 오랜 뒤에 성공했다” 라고 하였다.
고대부터 신선 사상의 중심지로 숭앙되었던 삼신산三神山은 바로 동방의 백두산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인들조차 신교神敎 삼신 사상에 따라 이름 붙여진 삼신산(三神山,삼신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선 사상이나 신선의 성지로 인식하였다.
[사기]를 보면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과 연燕의 소왕昭王을 비롯하여 진시황, 한 무제 등이 모두 장생불사를 갈망하여 동방[海東]에 사람을 보내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신선 사상이 만주 ·한반도와 근접한 연燕·제齊나라 지역(하북 · 산동성)에서 비롯되고 널리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시선을 끈다. 이들 지역은 배달 · 조선에 속한 강역이고, 중국 내에서도 신교의 삼신 사상이 가장 먼저 보급되고 뿌리 내린 곳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도교문화는 동방 한민족 신교神敎의 삼신상제) 사상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으며, 신교神敎가 점점 쇠퇴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이라 해도 결코 빈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4대 종교를 탄생시킨 뿌리가 바로 인류 문화의 시원인 신교神敎이며, 이 4대 종교는 모두 환국과 환국의 정통 장자족인 한민족의 신교에서 흘러 갔다가 다시 한민족의 현 근거지인 이땅으로 흘러들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1만 년 전부터 꽃핀 동방 문화는 5천여 년 전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송호수 교수의 다음 지적과 같이, 지구를 두루두루 돌고 돌아 제 뿌리를 향해 찾아든 모습은 다양하다.
■ 불교는 삭발 · 장삼에 불경을 끼고 되돌아 왔고, 유교는 유건儒巾 · 도포道袍에 사서삼경을 싸서 되돌아 왔다. 도교는 오두미五斗米를 갖고 무위자연하면서 구름을 타고 들어 왔고, 기독교는 노란 곱슬머리와 파란 눈에 붉은 신·구약을 끼고 들어왔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과거급제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위풍威風으로 보아 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이 가문家門[조국]에 대한 공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최인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다음 유훈遺訓을 깊이깊이 새겨 보아야 하리라.
■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새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발견])
전국戰國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 BCE 722~ BCE 403,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면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지금은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역사를 왜곡시켜 주몽이 동명성왕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북부여가 고조선(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환단고기』 「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지금의 식민사학자들이 북부여 180년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북부여사는 온데간데 없고, 한고조漢高祖의 숙청으로 인해 도망나온 중국 연燕나라 사람 위만 같은 자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식민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부인데, 고주몽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즉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고 해모수와 주몽을 부자지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왜곡은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저런 터무니없는 왜곡과 날조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역사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예전에 방영하였던 드라마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고조선(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첫째,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부여(夫餘)다.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BCE 2,240~BCE 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짐), 막내인 넷째가 부여(夫餘)이다.
단군성조는 막내왕자 부여를 도읍인 아사달의 서쪽인 녹산(鹿山 :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한다. 이것이 원시부여, 부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다.
둘째, 그런데 그 부여의 문화, 부여의 정신,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줬는지, 44대 구물 단군 때 우화충의 반역사건(BCE 426)을 진압하고 나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나라이름을 바꾸게 된다. 나라를 운영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극적으로 모든 걸 일신하기 위해서 나라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조선의 고종임금이 그랬고, 그 때 고조선도 그랬다. 그래서 진조선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다.
셋째, 해모수(解慕漱)가 그 대부여의 중심지인 만주 땅에 세운 나라가 북부여(北夫餘)다. 즉 삼조선(三朝鮮)의 중앙 북쪽만 차지하여 국통을 계승을 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에서 대(大)자를 빼고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넷째, 고주몽이 어릴 때 자라던 나라, 동부여(가섭원부여)가 있다. 사실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는 4대 단군의 차이가 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북부여 4대 단군의 계승자였던 해부루가 피난을 가서 세운 나라가 동부여다. 그 역사만 해도 벌써 한 5, 60년 두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
이 밖에도 고두막한이 졸본 땅에 세운 동명부여(졸본부여)가 있고, 또 동부여 멸망 후 마지막 3대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건국한 갈사(曷思)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왕으로 봉해진 연나부(椽那部)부여가 있다. 또 백제 26대 성왕(CE 253~554)이 538년에 도읍을 웅진(곰나루)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역사 인식이 전혀 안 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예일, 펜실베니아, 프린스톤, 스텐포드 등의 미국 주요대학을 중심으로 영국의 캠브리지대, 카나다 토론토대, 호주 멜본대, 프랑스, 독일, 기타 국가들에서 아시아 역사학, 국제관계, 동서 비교문명 분야에서 교재 및 연구도서로 채택돼 활용되고 있는 이홍범박사의 저서 ‘아시아의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책입니다.
하버드 유니버셜 라이브러리 Millenarianis 분야에 9년동안 한권도 하버드대학에서 채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한국 사람이 쓴 책으로서 채택 된 것은 처음입니다. 하버드대학이 포문이 되어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스탠포드 그리고 캐나다의 맥길 대학, 이태리 국립대학등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홍범박사의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역사 교재 일부 요약
한국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행위는 대부분 학자들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Japanese activities to destroy Korean history are beyond most scholars’ imaginations.
Even afier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in 1945, Yi Pyong-do and the colonial legacy remained the most powerful influence on Korean historians. Many Korean scholars who havc been influenced by him have been working as history professors at universities in Korea and in many other countries. His influence on Korean historians and Korean experts is still considerable.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되었지만 이병도와 식민지 유산은 한국 역사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 학자들이 한국과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역사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가와 한국 전문가들에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하다.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등 다른 나라에 있는 한국 전문가들의 대다수는 식민 유산의 덫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The majority of Korean experts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countries have not overcome the trappings of colonial legacy.
There are two main reasons why we have not overcome this legacy yet. One is because many Korean historians studied under Professor Yi Pyong-do, who worked with Imanishi Ryu, a former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for Japan on the Korean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Chosonsa P’yonch'an Wiwonhoe). This committee was established in 1910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oversee the production of Korean history.
우리가 아직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데에는 2가지 주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을 위해 전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마니시 류와 함께 일했던 이병도 교수 밑에서 많은 한국 사학자들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사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정책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문서를 읽을 수 있는 학자가 많지 않습니다.
Furthermore, since the Korean government adopted the policy to use mainly the Korean language, or Han’gul, there are not many scholars who have the proficiency to read ancient Korean, Chinese, and Japanese documents.
Therefore, few scholarly publications in English introduce ancient Korean sources. A colonial legacy on Asian studies still rules over scholarly circles. As suggested by the African work of Professor Lee V. Cassanelli, some misconceptions on Asian history, which have been caused by a colonial legacy, have influenced not only American scholarship but also world scholarship.
따라서 영어로 된 학술 출판물은 고대 한국 출처를 소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아시아 연구에 대한 식민지 유산은 여전히 학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Lee V. Cassanelli 교수의 아프리카 연구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식민 유산으로 인한 아시아 역사에 대한 일부 오해는 미국 학문뿐만 아니라 세계 학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Lee V. Cassanelli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 관한 대부분의 역사 저술은 “식민지 관리나 식민 정부에 고용된 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의 부산물”이기도 합니다.
Most historical writings on Korea were also “the by-product of research conducted by colonial officials or by scholars in the employ of colonial governments,” as Lee V. Cassanelli points out.
Colonial governments destroyed not only traditional social and political institutions and imposed their own, but also destroyed its history and spirit. It is important to overcome a colonial legacy in studying millenarianism related to ancient history.
식민 정부는 전통적인 사회, 정치 제도를 파괴하고 그들의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정신까지 파괴했습니다. 고대사와 관련된 이상주의(理想主義)를 연구함에 있어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족주의적인 일본인들은 한국의 역사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The nationalistic Japanese did not want Korean history to be known as older than the Chinese and Japanese histories.
ln this way both the Japanese and Chinese continued to distort real history. In 2003, under a Chinese government policy, Dongbei Gongcheng (North-East Project), and with a huge budget (probably more than $600 billion), the Chinese started to destroy ancient Korean historical and cultural relics and to distort the history of the Koguryo Dynasty. The purpose was to make false history, as if Koguryo were founded and ruled over not by the Koreans but by the Chinese. Even today, the Chinese government does not allow people to take a picture of the Koguryo relics without a permit.
이런 식으로 일본과 중국은 계속해서 실제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2003년 중국 정부의 정책인 동북공정에 따라 막대한 예산(6천억 달러 이상)으로 중국은 고대 한국의 역사 문화 유물을 파괴하고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고구려를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이 건국하고 다스린 것처럼 거짓 역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는 허가 없이 고구려 유물을 촬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구려를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이 건국하고 다스린 것처럼 거짓 역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는 허가 없이 고구려 유물을 촬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역사서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팔다리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제와 함께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 섰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 『환단고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밀정 감영극에 대한 기사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자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팔다리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 환단고기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양종현 선생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 『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씨는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한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가 있다.
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 미국 부통령 엘고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며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 기여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5월 19일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
- 도기 141년 7월 1일, 안경전 종도사님 말씀
원전강독 말씀정리
고려 공민왕 때 지금의 국무총리 자리에 있었던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한민족에게 전하는 역사의 유언 내용과 같은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우리 한민족의 정신문화 역사관의 모든 게 다 들어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은 천고의 대명문이다. 팔만대장경 경문보다, 사서삼경 경문보다, 주역의 경문보다도 단군세기 서문이 더 놀라운 이 우주 정상의 진리의 근본 틀을 선언하고 있다.
그 서문을 보면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위국지도爲國之道가 막선어사기莫先於士氣하고,
나라를 위한 길이 선비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보다 우선이 없다는 것이다.
선비들의 사기士氣를 높이려면, 막급어사학莫急於史學은 하야何也요.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史學이 불명즉不明則
역사학이 명료하지 못하면 즉, 역사가 왜곡되어 전해지면
사기士氣가 부진즉국본不振則國本이 요의搖矣오.
선비들의 기개, 사기士氣가 진작이 되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정법政法이 기의岐矣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혼탁해진다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역사교육의 중요성>
개사학지법盖史學之法이
역사를 배우는 정법이라는 것은
가폄자폄可貶者貶하고 가포자포可褒者褒하야.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찬양할 것은 찬양하여,
형량인물衡量人物하고
인물의 됨됨이를 평가하고,
논진시상論診時像하니.
시대의 상황을 논하고 진단하는 것이,
막비표준만세자야莫非標準萬世者也라.
만세의 표준이 아닐 수가 없다.
역사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역사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역사의 시대상황에 처해있나?
앞으로 어떤 역사의 변혁이 오고 있나를 한 소식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사민지생斯民之生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궐유구의厥惟久矣요.
참으로 오래 되었도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가 왜곡되어서 2100년 역사를 지금 주장하고 있다.
창세조서創世條序가.
우리의 창세 역사의 조서條序, 조서라는 것은 그 역사가 누구누구를 통해서, 어떤 역사를 거쳐서 이렇게 순서가 전해 내려왔다라는 것을, 환국,배달국,고조선,북부여,고구려 등의 역사의 맥을 전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역가정증亦加訂證하야.
정증訂證의 정訂이라는 것은 바로 잡을 정訂 자다. 우리 옛 조상들의 역사 대인(大人)들이 그것을 다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정증訂證!
국여사國與史가 병존竝存하고.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고,
인여정人與政이 구거俱擧하니
사람은 정치와 더불어서 거론되어 왔다는 것이다.
皆自我所先所重者也라
개皆 이 모든 것은, 나라와 역사와 인간과 정치라는 이 4가지는
자아소선소중자야自我所先所重者也라.
자아自我가 소선所先, 이 세상 돈 버는 것보다, 출세하는 것보다, 명예보다, 신앙보다 소선所先, 더 우선시하고
소중자야所重者也라.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와 역사와 인간과 정치 이 4가지에 눈을 떠야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철인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런 얘기를 했는데. 여기서는 국가와 역사와 인간과 정치 4대 요소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사람 노릇을 할려면 이 4대 요소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아 인식의 중요성>
오호嗚呼라 정유기政猶器하고.
정치는 그릇과 같고,
인유도人猶道하니
사람은 도와 같은 것이니,
기가리도이존호器可離道而存乎며,
어찌 정치라는 그릇이 사람의 도를 떠나서 존립할 수 있으며,
국유형國有形하고
나라는 형체와 같고,
사유혼史有魂하니,
역사는 정신과 같으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아.
나라가 역사를 잃고서 어떻게 보존될 수가 있겠는가!
병수도기자竝修道器者도 아야我也며.
이 사람의 도리와 정치라는 그릇을 함께 닦는 자도 나며.
구연형혼자俱衍形魂者도 역아야亦我也니.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 나가는 것 또한 나니,
고故로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선재지아야先在知我也라.
천하만사가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
天下萬事 先在知我也는 좌우명으로 써놓을 만한 명문이다. 이 천하만사는 선재지아先在知我,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는 것이다.
천하만사가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
天下萬事 先在知我也는 좌우명으로 써놓을 만한 명문이다.
이 천하만사는 선재지아先在知我,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의 근본, 이 세상 성공의 출발점은 뭐냐?
우선 나를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연즉然則,
그러한즉,
기욕지아其欲知我인댄.
나를 알려고 하면, 내가 누구냐? 인간이란 무엇이냐?
연즉기욕지아然則其欲知我인데.
그 나를 알려고 할진데
자하이시호自何而始乎아.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고是故로 기욕입교자其欲立敎者는
가르침(敎)을 세우려는 자는
수선입자아須先立自我하고
반드시 먼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하고,
혁형자革形者는
형체(몸)를 개혁하려는 자는
수선혁무형須先革無形하나니
반드시 무형의 정신을 먼저 뜯어고쳐야 하나니,
차내지아구독지일도야此乃知我求獨之一道也니라.
이것이 나를 알고 독립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知我求獨之一道)이기 때문이로다.
신선 자하(紫霞)선생의 『신교총화(神敎叢話)』
『신교총화 (神敎叢話) 』란, 책이름 그대로 인류 문명의 모체인 신교(神敎)에 얽혀있는 여러 가지 중요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자하선인과 팔공진인 이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나와 있다. 스승인 자하는 이름이 이고(李고), 자는 덕화(德和)이며 자하(紫霞)는 그의 호로서 광동(廣東)인이다. 태백산 구화동(九花洞)에서 살았고 『신교총화』 저작 당시인 계사(1893)이다.
神敎之爲衆敎之爲祖, 爲母之理… 人情多私 忘本源 … 不究神市敎之本源如何也, 亦自失其源
신교는 뭇 종교의 조상이며 모체가 되는 뿌리진리이다. 말세가 되면 인정이 사욕으로 들끓어 본원을 망각하리라. 장차 신시(배달) 시대의 가르침(神市敎)인 신교의 본원을 연구하지도 않으리니 어쩌리요. 제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상실하리라.
從今以後, 世路尤險, 千私萬魔, 以亂天理矣
종금 이후로 세로(世路)가 험난하여 천사만마(千私萬魔)가 천리를 어지럽히리라.
人皆滔滔, 自欺欺人, 天地光明失矣
사람이 모두 도도해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하늘과 땅이 광명을 상실하리라.
人不知其祖先之道, 而只從他, 便是風麻漢
사람들이 자기 선조의 도를 알지 못한 채 다만 다른 것에 매달려 있으리라.
後世人心多邪曲, 故逕入邪道, 不知眞爲, 奈何! 三鮮九壬後, 人多鬼魔所使而如狂也
사람의 마음이 삿(邪)된 것에 구부러져서(曲) 사도(邪道)에 잘 빠져들고 진실과 허위를구분하지 못하리니 어찌하리요! 또 귀신과 마귀에 홀려서 미친 것 같으리라.
[神市]眞理將明於天下, 長男運更壯, 而小女從之理 自然的?
동방신시(배달)의 신교 진리가 장차 천하에 밝혀지리라. 동방 장남[震長男]의 운이 다시 용솟음치게 되며, 미국[兌小女]이 이를 순종하게 되는 이치는 우주 자연의 변화원리이다.
後天井有萬二千道, 有萬二千人 人能日行萬里, 飛揚天地如鳶飛, 處處生不夜城, 然後眞正大敎主出矣.
후천 벽두에 1만 2천 명의 도인이 출세한다. 이 때에는 사람마다 하루에 만리를 가는데 천지를 날아다니는 것이 솔개가 하늘을 나는 모양 같다. 곳곳에 사람 사는 모습은 밤이 없는 성[不夜城]과 같다. 이러한 대문명이 열린 후에 참되고 올바른[眞正] 세계통일의 대교주(大敎主)가 출세하리라. (신교총화』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