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금남정맥 06차(양정고개~중장고개) 산 행 일 : 2012. 03. 24.(토) 산행코스 : 양정고개 ~ 향적산갈림길 ~ 관음봉 ~ 금잔디고개 ~ 만학골재 ~ 중장고개 (산행거리 17km, 10시간 소요) 산행참가 : 22명.
<산행지도>
금남정맥 최고의 난코스 산행을 앞두고 무척이나 심란하다. 17km 남짓 되는 산행 거리와 업다운에 따른 산행 강도는 사실 백두산우회원들의 실력에 견주어 일종의 널널이 산행이라 해야겠지만, 코스의 대부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산행불가 지역이고, 군데군데 위험한 암릉 구간이 있어서 상당한 주의가 필요해서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산행을 사랑해서 가는 사람들인 것을.., 제발 비만 오지 않기를 바라며, 일정을 공지하고 날짜가 되어 산행길에 나설 뿐이다.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산행 예정시각에 맞추느라 휴게소에서 2시간 넘게 머물며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에 맞추어 4시 40분쯤 계룡시 산행 들머리 앞에 도착한다.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 음절 산행 들머리 앞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지난 산행에서 양정고개부터 2km 정도의 계룡시 통과구간은 버스에 올라 이번 산행 들머리까지 이동하여, 들머리 능선 좌측 기슭에 있는 웰빙사우나에서 목감을 했었다. 물론 정맥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잠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였다기로서니 크게 문제 될 게 없고, 요즘 정치판에서 꼬투리 잡는 것처럼 누가 걸고넘어질 사람도 없을 듯하여.. 이로서 우리의 기준이 새로이 정립되었다고 본다. 시내구간은 자동차로!
도로 우측 들머리에 "경사가 급해 위험하니 좌측 가계 옆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하세요"라는 안내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들머리로 들어선다. 밧줄이 매어져 있지만 급경사의 절개지 흙길이 젖어 있어서 무척이나 미끄럽고 통과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안내판에 쓰인 대로 따를 것을..ㅉㅉ
엄사리 청송약수터 방향 갈림길이 있는 주능선에 도착하여, 좌측 국사봉 방향으로 꺾어져 오른다. 참고로 국사봉은 향적산 정상 봉우리를 이르는 이름인 듯하다.
갈림길 이정표.
다양한 금남정맥 지도를 뒤지다 보면 계룡시 구간을 통과하는 코스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금남정맥이 위의 지도 처럼 계룡시 북동쪽 능선으로 그려져 있는 지도와, 계룡시 가운데를 가로질러 계룡초교를 거쳐 음절 들머리 방향으로 그려진 지도가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들도 두가지 코스로 나누어지는데, 오늘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많은 선답자들이 갔던 일반적인 코스로, 두 가지의 코스가 이곳 갈림길 삼거리에서 만난다.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며, 조그만 봉우리들을 몇 개 넘어서 무상사 갈림길 쉼터에 도착한다.
무상사 갈림길 쉼터에서 잠시 쉼을 하고 조금 가팔라진 경사면을 따라 오르면, 좌측 향적산 방향 갈림길에서 금남정맥은 우측 513봉 방향으로 이어지고, 잠시 더 급경사를 오르면..
455봉 전망바위에 도착한다. 가야 할 금남길 방향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오늘 산행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킨다.
전망바위 좌측에 "산행금지" 표지판이 있어서 쉽게 들머리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판을 끼고 다시 향적산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이 있어서 불러 세운다. 뭔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건지..ㅉㅉ 좌측 상월면 방향으로 금강대학교의 모습이 어슴프레 내려다 보인다. 금강대학교는 천태종 종립학교로 불교 교육계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향적산 방향으로 가신분들을 기다리며 잠시 더..ㅋㅋ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부분이 금방 돌아오셨지만, 산행의 귀제로 불리시는 세분은 한참을 가시는 바람에 훨씬 뒤에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합류했다.
우측으로는 계룡대가 뿌연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계룡산은 한 때 토속신앙의 터전이었다. 조선 시대 계속되는 국난으로 국민들은 피난처를 찾았고,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정감록에 나오는 새 도읍지 신도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984년에는 100여 개의 종교단체들이 밀집하여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 삼군통합본부 이전계획에 따라 모두 해체 및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 지금은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펜타곤 같은 건물이 계룡대(鷄龍臺)인 모양이다.
이제 어슴프레 밝아오며 어둠은 걷히기 시작했으나, 짙은 안개로 사방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이곳 전망바위에서 좌측으로 가면 향적산 가는 길이고, 출입금지 표지판 목책 뒤로 직진하는 길이 금남길이다. 2017년 2월 28일까지 다니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다. 오늘 걷게 되는 계룡산 구간의 금남정맥 중 대분분의 구간이 입산금지 구역이다. 이곳부터 천황봉, 쌀개봉을 지나 관음고개까지, 그리고 또다시 금잔디고개에서부터 만학골재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늘상 그렇듯이 금지 표지판이 정맥길 들머리인 경우가 많은데, 특히나 오늘은 더욱더 그렇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인지 새벽 운동 나온 사람도 없으니 특별히 눈치 볼 것도 없이 목책 옆으로 이어진 발자국 흔적을 따라 계룡산을 향한다.
이른 아침이라 기온이 내려가고, 산의 고도가 높아지니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415봉 전망바위에서 계룡산을 향해 출발하여 맨재를 지날 즈음에, 뒤에서 "앞에서부터 번호"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번호는 19번에서 끝나고, 없어진 세명이 누군지를 색출해 내고는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으나 모두 핸드폰이 꺼져있다. 다행히 사라진 세분 모두 향적산을 다녀와도 능히 될 정도의 능력을 보유한 분들이라 금방 따라잡으려니 짐작하고는 산행을 계속한다. <맨재> 충남 논산시 상월면과 계룡시 남선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싸리재라고도 한다. 향적산(574m)에 매달린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맨재 또는 현령(懸嶺)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으로 삼으려 할 때, 향적산 정상 국사봉에서 지형을 살폈다고 한다. 신도안(新都內)은 지금의 계룡대(우리나라 3군 통합기지) 자리다. 신도안(新都內)으로 도읍을 정하려던 이성계로 인하여 계룡산에는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로 신도안을 선택하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신은 계룡산의 연천봉에 올라 제단을 차려 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를 하던 곳은 기도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반년쯤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하얀 할머니가 나타나 공사를 계속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니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다. 계룡산 할머니는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정도령이라는 신인이 나타나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800년간 다스릴 것이니, 이성계는 500리 북쪽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공사를 중지시켰는데, 그때 일군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모여 신털봉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자욱한 안갯속에서 주변 경관을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래며 걷노라니, 오락가락하던 비가 눈으로 바뀌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고, 마침 향적산 방향으로 체력훈련 다녀오신 세분도 어느새 따라잡아 한시름을 놓게 한다.
507봉을 지나 갈림길이 얽혀 있는 곳에서, 바닥에 놓인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참호가 나타나고,
463봉 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날씨가 좋았으면 향적산과 계룡산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곳 주변 조망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ㅉㅉ.
주변을 가득 매운 안개를 탓하며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보이지 않는 계룡산을 찾아 나선다.
편안한 능선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암릉이 나타나고, 주변 소나무는 파란 솔잎에 하얀 눈이 내려앉아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바람이 좌측 서쪽에서 불어서 눈을 그런 모양으로 쌓아서 그런지, 등로 주변이 마치 서쪽에서 조명이 비추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463봉에서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성황당 안부를 지나게 된다. 지금은 성황당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새로 단장한듯한 묘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큰사문다리재(382m)> 용화사 갈림길 또는 용천재라고도 한다. 묘 1기가 있으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1km쯤 내려가면 용화사 연화굿당이 있고, 다시 1km 지점에 신원사와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성황당 안부를 지나면서 갈림길 사거리에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걸었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출입금지 표지판은 나타나지 않는다. 08:20쯤 뚜렷한 사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길에 표지기가 몇 개 걸려 있었으나, 있어야만 하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없다. 한참을 고민하며 좌측 갈림길의 표지기도 확인하였으나 정맥길에 대한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결정해야 한다. 결국 "여그가 거그일 것이다." 이제 정면 오솔길로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희미한 오솔길에 여러 갈래의 갈림길, 그리고 이제는 눈까지 쌓이고 주변은 안개로 몇십 미터 앞도 분간이 어렵다. "아니면 그냥 내려와서 좌측의 표지기를 따라 탈출하지 뭐!"라며 오름길을 오른다. <신원사(新元寺)>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계룡산의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신원사로 가는 길이지만,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라 등로가 희미하다. 국립공원인 계룡산의 연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신원사는 공주시에서 23km 떨어져 있으며, 백제 의자왕 12년(652년)에 보덕화상이 세운 것으로 동학사,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 3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편이어서 조용하며, 계곡의 맑은 물은 잠시나마 속세를 잊게 해 주고, 경내에는 대웅전, 중악단, 5층석탑과 부도들이 있다.
신원사 갈림길 고개를 지나, 만날지 못 만날지 모르는 천왕석문을 향해 오름길을 오른다.
고도가 높아지며 주변 나목에 맺힌 얼음꽃은 더욱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지금 오르고 있는 이 능선길이 천황봉을 향하는 금남정맥 길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혹시 길을 잃어서 돌아간다 한들 이런 상고대를 감상했으니..'라고 위안도 해 가며,
그려, 이로서 족할 듯도 했다.
작은 암릉에도 아이젠이 없으니 무척이나 힘이 든다.
아! 드디어 산행기에서 보았던 천황석문에 도착한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이제는 가야 할 암릉길이 걱정이 된다. 세상일이 다 그런가 보다. 작은 걱정이 사라지니, 그 자리에 큰 걱정이 또다시 자리한다.
계룡산 정상부로 갈수록 자꾸만 안개가 짙어진다. 거의 앞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천황석문이 나타나고, 석문에서 직진하여 사면으로 진행하면 천황봉과 쌀개봉 사이 참호로 연결되고, 석문 직전에서 우측 암봉을 우회하여 오르면 천황봉(천단)으로 직접 오를 수도 있는데 암릉이 위험하다고 하므로 피하는 게 좋다고들 했다. 지금의 상황은 암릉 쪽으로는 엄두도 내어 볼 수가 없다. 우회길로 접어들어 급경사의 비탈길을 조심스레 진행한다.
천왕석문에서 5분여 동안 쉼을 하며 인원체크를 하고는 위험한 비탈길로 접어든다.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스레 올라 천황봉을 좌회하니, 천황봉과 쌀개봉 사이 능선 참호에 도착한다.
참호의 돌에 피어난 얼음꽃이 신의 문양인 듯 기이하다.
본디 계획은 이곳에서 천황봉은 생략하고 쌀개봉으로 바로 진행하려 했으나, 짙은 안개로 우리의 모습도 국공파로 부터 감출 수 있을듯 하고, 혹시나 쌀개봉 지나 암봉들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그럴 바에는 천황봉이나 다녀오자 하는 심산으로 배낭을 벗어서 참호에 두고는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을 향한다.
참호에 도착하는 서여사님.
참호에 배낭을 두고 천황봉을 향해 사면길을 잠시 진행하니 군부대에서 만든 철재 계단이 나오고, 잠시 계단을 오르니 암릉 위에 설치된 군부대 건물 직전에 좌측으로 난간이 절단된 지점이 나온다. 혹여 부대원들에게 제지를 당할까 싶어서 신속하게 천황봉 정상을 향해 좌측의 돌계단길로 접어든다. 돌계단길을 따라 바위틈을 지나서 오르니 송신소가 코앞에 나타나고,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니 천황봉 정상에 설치된 천단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오한이 들 정도로 춥다. 계룡산 천황봉 정상 "천단" 우리나라에서 천단이 있는 산은 강화도 마니산과, 강원도의 태백산 정도인 듯하다.
<계룡산(鷄龍山) 천황봉(845m)> 충남 공주시와 계룡시, 논산시 그리고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1968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계룡산의 천황봉과 연천봉, 삼불봉을 잇는 능선이 닭의 볏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고봉인 천황봉의 높이는 해발 845m이고, 계룡산 기슭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으며, 국어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남매탑이 있다. 계룡산의 남쪽 지역인 신도안은 조선왕조 개국 직전 도읍 후보지로 꼽히기도 했다. 계룡산은 백제시대 때에도 중요한 산으로 중국의 문헌에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되는데, 신라에서 계람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계룡산이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의 하나로 중요시되었다. 신라는 국가의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분류하였는데, 계룡산에서 지내는 제사는 중사에 해당되었다. 이후 이 신앙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는데, 이 제사는 신원사의 중악단에서 지내져 왔다. 계룡산은 태백산맥에서 차령산맥이 서남쪽을 뻗어나가다가 금강에 의하여 침식되고 남은 잔구성 산으로, 주봉은 천왕봉이며, 연천봉, 삼불봉, 관음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는 동쪽으로 U자형으로 열린 침식분지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5악(五岳)의 하나인 중악으로 중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중사(中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中岳壇)이 남아 있다. 계룡산의 신도안이 신종교 및 각종 민간신앙의 터전이 된 것은 1920년대부터 인데, 이는 조선 건국 때 무학대사가 새로운 도읍을 여기에다 세우려 했던 일과, 그에 얽힌 많은 구전이나 풍수지리설 및 정감록에서 이 신도안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이자 새로운 정씨 왕조의 수도로 지목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태조가 계룡산 남쪽에 도읍을 세우기 위해 기초공사까지 마쳤으나 조운(漕運)이 멀어 중단했는데, 그 이후 이곳을 신도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실용적 이유를 댄 공식 기록일 뿐이고, 이후 계룡산 신도설은 조선왕조의 운명과 연관된 수많은 이설을 낳으며 민간의 반왕조적(反王朝的) 성향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까지도 신도안에 거주하던 풍수가들에 의하면 계룡산은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지기(地氣)가 멈춰 선 곳으로 이른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지세라고 한다. 그리고 계룡산의 산 이름은 무학대사가 말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에서, 두 주체인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계룡산은 오랜 역사 속에 숭배받아온 산으로, 예언적으로는 비결서에 만주 곤륜산과 같은 영산으로 여기고 있어서 향후 계룡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품어 왔던 산, 어쨌든 계룡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신비스런 곳으로 믿어 웬만한 도인들은 계룡산을 다녀와야 명함을 만들고 경력이 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도인들과 온갖 무속인들이 모여들어 이름도 생소한 간판을 걸고 골짜기 구석구석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그 수가 2백 곳도 넘었다고 한다. 이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종교정화운동을 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계룡산은 터가 센 수도처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계룡산에는 "계룡팔경"이 있는데, 1경 천왕봉의 일출, 2경 삼불봉의 설화(雪花), 3경 연천봉의 낙조(落照), 4경 관음봉의 한운(閑雲), 5경 동학사 계곡의 숲, 6경 갑사 계곡의 단풍, 7경 은선폭포, 8경 오누이탑의 명월(明月) 이 있다. <계룡산 천단(天壇)> 계룡산의 첫 기록은 백제시대다. 통일신라에서는 오악 중 서악이라 불리었고, 고려 이후 나라에서는 영산으로 받들었으며, 조선조 말기에는 신원사의 경내에 중악단이 세워져 오늘에 이른다. 계룡산의 제1봉인 천황봉에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국태민안을 기원코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로 보존되어왔으며, 민족의 운명이 암담했던 지난 시기에도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안겨주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러한 계룡산 천왕봉에 천단을 복원(2003.5.12)하고 도민 등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 행사를 가졌단다.
계룡산 중계소 방향.
쌀개봉 방향 조망.
서쪽 방향으로 천단으로 오르는 백두들이 보인다.
드디어 백두들이 도착하여,
계룡산 천황봉 정상 천단에서 국태민안과 백두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계룡산의 최고봉인 천황봉 천단에서 증명사진을 남기고, 서둘러 오던 길로 돌아 나오니, 아래쪽에서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철계단을 따라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제는 천황봉을 올라 인증도 하였으니, 나가라면 감사히 나가면 그뿐이라 생각하며 내려오니, 잘 생긴 군인아쟈씨가 정문을 개방하여 줄 터이니 그쪽으로 조심해서 나가란다. 그 말 들은 우리 회장님 왈 "우리는 가야 할 길이 따로이 있는 사람들, 연이 있으면 또 보세"하고는 조용히 왔던 길로 돌아 나와 배낭을 벗어둔 능선 위의 참호로 돌아왔다. 회장님께서는 그친구가 너무나 준수하게 생겼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과년한 따님을 생각하신 것인지, 아니면 출입금지구역에 들어와서 좀 캥기는 상황에서 의외의 친철에 무척이나 고마웠던게 아니었던지 알 길은 없다. 이름도 모르는 청년이지만 아무튼 "복 많이 받고 건강하게 군생활 마치시게..!" 참호로 돌아나와 돌아본 천황봉 가는 길에는 아직도 후미 몇 분이 오고 있다.
참호로 돌아와 벗어둔 배낭을 매고는,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쌀개봉을 향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분간이 안 되던 쌀개봉이 보이기 시작하며, 눈꽃 산행에 대한 기대로 새로이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천황봉 갈림길에서 쌀개봉을 향하는 능선은 온통 설화(雪花)로 장관을 이룬다.
천황봉에서 쌀개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돌아본 천황봉.
쌀개봉 정상 도착.
<쌀개봉(828m)> 디딜방아의 받침대를 쌀개라고 하는데, 산의 형상의 디딜방아의 쌀개를 닮았다고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다. 쌀개봉 정상부에는 금강홍수통제소에서 설치한 홍수예보시설이 있고,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쌀개봉 정상에서 바라본 연천봉과 문필봉 방향.
돌아본 천황봉 방향.
쌀개봉 정상에서 오던 길로 돌아나가 우측 사면의 너덜지대로 진행한다.
쌀개봉 앞의 또 다른 암봉 모습.
연천봉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짙은 안개로 주위 분간이 어렵다가 쌀개봉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안개에 가린 연천봉을 당겨보니, 연천봉 아래의 등운암이 선명히 드러난다. 하늘과 이어진다는 뜻의 연천봉은 그 기운이 계룡산 봉우리들 중 가장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천봉 아래 서쪽으로 무속인들이 많은 굿당을 만들어 두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성계가 계룡산 연천봉에 올라 제단을 차려 놓고, 왕도가 서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천지신명께 엄숙히 기도를 드린 곳이라고 한다. 연천봉 아래 등운암의 유래를 보면,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등운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예전에는 연천봉의 이름을 따서 연천사라고도 하였다. 조선조에는 정감록의 도참설을 누르고자 압정사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등운암이란 이름은 부설전에서 유래했다. 신라시대의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3대 거사로 유명한 분이다. 전북 부안 월명암에 소장된 부설전의 부설거사 일가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 진덕여왕 때 진광세라는 영리한 아이가 경주에 살았다. 불국사에 출가하여 일곱 살에 법문에 통달하여 법명을 부설이라 하였다. 지금의 변산에 묘적암을 짓고 수도를 하다가 도반과 함께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구도의 방랑길에서 유숙하게 된 주인집 딸 묘화의 목숨을 건 사랑의 구애에 부설은 자비보살의 마음으로 오대산행을 포기하고 묘화와 결혼하여 등운. 월명 남매를 두었다. 남매를 부인에게 맡기고 수도에 전념하여 5년 만에 득도를 하였다. 그 뒤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던 도반을 다시 만나 물병을 매달아 놓고 막대기로 쳐 물명만 깨트리고 물은 그대로 있게 하는 도력 시험을 하였는데, 부설거사의 물만 그대로 남았다. 도력으로 물을 얼려 버렸단다. 결국 부설거사의 깨달음이 더 컸던 것이다. 부설거사는 두 남매 중 오빠 등운이를 위해서는 등운암을, 누이 월명이를 위해서 월명암을 지었고, 부인을 위하여는 묘적암을 지었다. 그리고 각자 일생을 수도에 전념하여 부인을 비롯하여 두 자녀도 득도 열반하였다는 설화다. 앞뒤가 잘 맞지는 않지만..ㅋㅋ 살짝 당겨본 연천봉과 등운암 모습.
돌아본 쌀개봉과 천황봉 방향.
쌀개봉을 내려서서 눈 덮인 너덜지대를 조심스레 통과하니,
쌀개봉에서 우측 천왕봉 방향으로 이어지는 관암지맥 능선에 이르고,
<관암지맥> 계룡산 쌀개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대전과 공주 및 연기군을 지나며 연기군 금남면 부용리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2.2km의 산줄기다. (쌀개봉~천왕봉~항적봉~민목재~관암산~부용봉~금강)
앞쪽의 암봉을 우회하려 내려가 보았으나, 급경사의 내림길은 동쪽의 천왕봉 방향으로 이어지는 듯하여 다시 쌀개봉 바로 아래 능선으로 돌아 나온다.
하는 수 없이 좌측의 능선 위로 이어진 희미한 자취를 따라 쌀게릉으로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좋은 쌀개봉 다음 암봉에 오르게 되고, 잠시 전에 대형 알바를 할 뻔했던 관암지맥 능선도 보인다. 이 암봉에서는 동쪽 천왕봉으로 이어진 관암지맥 좌측 골짜기에 자리한 동학사도 내려다 보인다.
암봉에서 바라본 삼불봉 방향의 자연성릉도 뚜렷하게 조망되며,
안개가 걷히니 잠시 전에 올랐던 천황봉도 지척으로 보인다.
당겨본 천황봉 정상에 천단도 보인다.
동학사 방향 조망.
<동학사(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에 있는 사찰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다. 724년(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암자를 지은 곳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절을 창건해 상원사(上願寺)라 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곳에 와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절을 지으니, 승려들이 모여들어 사찰이 커지면서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 길재(吉再)가 고려 태조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457년(세조 3)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다음 해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해 세조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 월인선사(月印禪師)가 예조에 상소하여 중건했고, 1864년(고종 1) 보선국사(普善國師)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는데 청도 운문사, 예산 수덕사(견성암)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유명하다. 사찰을 감싸고 있는 2개의 산줄기가 높고 험하여 하루에 볕이 드는 시간이 반나절도 안되며, 억울한 영혼을 천도해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삼불봉 방향을 배경으로.
길 찾은 기념으로 천황봉을 배경으로 증명사진도 남기고,
가야 할 관음봉 방향의 쌀개능선도 새겨두는 사이에,
몇몇 분이 먼저 위험한 암릉을 내려가서 통천문을 향했다.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연천봉도 다시 한번 조망하고,
살짝 당겨본 문필봉 방향 조망.
등로조차 희미한 위험한 암릉을 내려가고 있는 백두들.
10:40 위험한 암릉길로 갔던 분들은 통천문(通天門)을 지나고,
남겨진 후미들은 위험한 암릉길을 두고, 암봉 서쪽 사면길로 우회를 시작한다.
천황문을 지나 암릉길로 갔던 백두들은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암봉을 만나게 되지만,
쌀개봉 이후 암봉에서 좌측의 서쪽 사면으로 이어지는 우회길은 아름다운 상고대에 쌓여 편안히 진행된다.
우회길이 관음봉 고개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나목에 핀 상고대도 마음껏 감상한다.
암릉길로 앞서간 분들의 흔적을 찿기 위해 우측 능선에 올라서 바라본 삼불봉 방향.
연천봉과 문필봉 방향으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연천봉(좌측끝)과 관음봉(중앙) 삼불봉(우측끝) 조망.
돌아본 쌀개봉 뒤로 기상관측 통신탑들이 보인다.
이제 우측 계곡에 자리한 동학사도 지척으로 조망되고, 멀리 대전시가지도 어슴프레 가늠된다.
쉿, 암릉으로 가신 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좌측의 사면 우회길로 오시라 하고는 암릉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주변 풍광을 뇌리에 새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설화도 담으며 초봄의 상고대를 만끽하는 사이에,
앞서가셨던 암릉팀 분들이 도착한다. 우리만 암릉에서 헤매게 하고 먼저 도망가면 우찌 하냐고...ㅋㅋ
아무런 사고 없이 모든 분들이 다시 모였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며...ㅉㅉ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위험한 암릉지대를 벗아나 바로 관음고개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설화 만발한 오솔길을 따르면,
따르던 사면길은 어느새 능선 위로 이어져 있고,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고는 관음고개로 가 보았더니, 역시나 우리를 환영?하려고 기다리는 분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드디어 오늘 산행 중의 최대 난코스를 벗어나 떳떳한 등산객의 지위로 복귀한다.
이른 아침의 흐렸던 날씨 탓인지, 동학사에서 관음고개로 오르는 산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설경이 아니었더라도 맑은 주말이면, 이곳 관음고개는 발 디딜 틈도 없었을 텐데..ㅉㅉ
어엿한 산객으로 복귀한 백두들이 관음고개에서 잠시 쉼을 한다.
이제 꺼릴 것이 없어진 백두들이 힘찬 발걸음으로 관음봉을 향하는데,
어느새 바닥에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며, 관음봉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눈 녹은 물이 흥건하다.
관음봉 정상 전망바위에 올라,
지나온 천황봉 방향의 능선도 조망하고,
가야 할 삼불봉 방향도 카메라에 담는다.
좌측이 삼불봉, 가운데 계곡에 동학사가 자리하고, 우측의 봉우리가 쌀개봉과 천황봉이다.
쌀개봉과 천황봉 방향 조망.
천황봉을 배경으로.
관음봉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삼불봉 방향으로 이어진 자연성릉 조망.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을 거느린 해발 845m의 계룡산을 동학사 지역에서 바라보면, 천황봉 정수리에서 북쪽으로 내리 뻗은 쌀개능선은 닭비슬처럼 생겼다. 그 아래의 길다란 자연성릉은 용의 등줄기와도 같아서 마치 닭비슬을 쓴 용처럼 생겼다 하여 계룡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흔히들 계룡산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극치라고도 한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의 영취산 마이산으로 휘돌아 주줄산에서 운장산, 대둔산으로 휘어지면서 계룡산까지 굽이치니 산태극이다. 또한, 금남정맥을 따라 흐르는 금강은 계룡산의 북쪽으로 휘감아 돌며 서해 바다로 태극형상으로 돌아 들어가니 이를 수태극이라 부른다. 이렇듯 강물과 산맥이 태극형상으로 굽이치는 계룡산을 천하명산이라고 한다.
삼불봉 방향의 파노라마.
관음봉 관음정 앞에 있는 '관음봉 한운(閑雲)' 안내판.
다시 한번 삼불봉과 쌀개봉의 파노라마를 감상한다.
쌀개봉 서쪽 능선과 논산 방향 조망.
서쪽 논산시 방향 조망.
관음봉에서 바라본 연천봉 방향 조망.
삼불봉 방향.
관음봉에서 바라본 쌀개봉과 연천봉 사이의 서쪽 방향 파노라마.
관음봉 정상에서.
<관음봉(觀音峰, 816m)> 산의 모습이 후덕하고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을 닮았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부르며, 정상 아래에는 관음정이란 정자가 있다. 관음정 모습.
갈길 급한 백두들이 삼불봉을 향해 떠난 관음봉 정상을 뒤로하고,
삼불봉을 향해 자연성릉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돌아본 관음봉과 쌀개봉 방향.
가야 할 삼불봉 방향으로 이어진 자연성능이 전설처럼 용의 비늘과 닭비슬을 닮았다.
삼불봉 방향의 자연성릉이 흰 망토를 걸친 용의 모습!
<자연성릉> 능선이 자연스런 성곽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계룡산 일대를 도읍지로 여겨온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자연성릉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은 천혜의 요새이고 뒤는 물 좋은 평야,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이 능선은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으로 늘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남쪽 기점인 관음고개에서 동학사, 신원사, 갑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있고, 북쪽 기점인 삼불봉 역시 동학사, 갑사, 천장골, 삼신리계곡, 신선봉 코스가 만나는 지점으로 자연성능을 찾는 등산객이 붐비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남으로 쌀개봉을 거쳐 천황봉 또는 황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북으로 수정봉~말재능선, 그리고 북동으로 신선봉~장군봉 능선 등, 사방팔방으로 뻗은 능선뿐만 아니라 동학사계곡과 갑사계곡을 모두 볼 수 있어 산행 묘미 또한 멋진 곳이다. 마치 설악산의 용아장성의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자연성릉은 동학사 계곡 쪽은 자연성곽을 이루고 있어 가슴 서늘한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험한 산세이나, 갑사계곡의 부드러운 산세는 가슴을 포근하게 해 주어 강약의 산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삼불봉 방향의 자연성릉을 배경으로.
지나온 쌀개봉에서 동쪽 천왕봉 방향으로 이어진 관암지맥 능선 모습.
동쪽 멀리로 커다란 산이 희미하게 드러나는데, 혹시 속리산쯤이 아닌지..?
용의 비늘을 닮았다는 자연성릉 모습.
쌀개봉 동쪽의 지능선들 조망.
자연성릉 곳곳에서 산객들의 눈길을 유혹하는 봄날의 상고대!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자연성릉을 조심조심 가다 보면,
산객들의 발길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는 풍광들이 지천이고,
지나온 금남정맥 능선의 암봉들이 두려움의 대상에서 친근감으로 바뀌는 사이에,
삼불봉이 성큼 다가선다.
멀리 동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산도 당겨보고,
좀 더 당겨 보아도 그 정체를 가늠키 어려운데, 속리산쯤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이른 아침에 지났던 쌀개봉 뒤로 천황봉도 보인다.
금남정맥이 우측 수정봉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불봉 전위봉이 코앞으로 다가선다.
지나온 천황봉 방향으로 이어진 계룡산의 주능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설화 핀 소나무 아래로 쌀개봉을 훔쳐보기도 하며,
정맥길의 끝은 대개 바다가 되는데, 금남정맥이 금만봉에서 군산을 향하여 서쪽으로 가지 않고 북쪽으로 향하여 강(부여 백마강)에서 끝나는 것은 계룡산을 제외할 수 없어서 그랬다는 설도 있는데, 참으로 잘했다 동감하는 바이다.
앞에 다가서는 암봉을 좌회하기도 하며,
금남정맥이 계룡산 자연성릉에서 분기하는 봉우리로 오르는 백두들의 모습을,
당겨 보기도 하며,
설화 만발한 풍광을 담느라 여념이 없는 김작가님도 담는 사이에,
따사로운 햇살에 사라져 가는 설화가 나뭇가지 끝으로 쫓기고 있다.
암봉을 우회하여 오르는 돌계단을 올라서,
계룡산 주능선을 돌아보고,
설화 만발한 암릉을 철계단을 따라 오르면,
서쪽으로 계룡저수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관음봉을 중심으로 남쪽 방향의 천왕봉 쪽 능선과 서쪽 방향의 연천봉 쪽 능선, 그리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삼불봉 방향의 자연성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불봉 방향.
남쪽 관암지맥 능선 너머로 계룡시가 가늠된다.
잠시 또 이런 철계단을 오르면,
계룡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삼불봉 직전의 암봉에 오르게 된다.
계룡산 주능선 방향의 파노라마.
서쪽 계룡면 방향 파노라마.
남쪽 계룡시 방향 파노라마
천황봉 남동쪽 방향의 계룡시가 연무에 아른거린다. 분명 오늘 아침 저곳에서 출발했는데, 사람의 발걸음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당겨본 계룡시 뒤편으로 대둔산의 설화도 눈에 서~어~언 하다!
앞쪽의 삼불봉(775m)은 멋진 설화(雪花)로 계룡팔경 중 제2경으로 올라 있는 봉우리이지만, 금남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고 오늘은 갈길이 많이 남은 관계로, 후일을 기약하며 카메라에 갈무리해 둔다.
돌아본 천황봉 방향.
삼불봉 갈림길 삼거리에 도착하여,
힘들여지고 온 과일과 떡을 나누며 아름다운 경치에 행복감을 더하고,
삼불봉 방향의 능선을 두고, 좌측 금잔디고개로 이어진 금남길로 들어선다.
갑시다. 금남길을 따라 금잔디 고개로 ~~!
급경사의 내림길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이내 금잔디고개에 닿는다.
<금잔디고개(649m)>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수정봉과 삼불봉 사이에 있다. 금잔디고개는 예전에 금잔디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고 금잔디의 흔적은 눈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갑사 방향도 살펴보고.
남매탑과 동학사 방향으로도 감시의 눈초리가 있는지를 살피고는,
출입금지 표지판 너머의 수정봉으로 향하는 금남정맥 능선길로 들어선다.
수정봉 오름길에 돌아본 금잔디 고개.
수정봉(773m) 정상부를 지나는데, 앞서 올랐던 날렵한 산객 한분은 길이 없다며 돌아 나오고, 우리는 수정봉을 넘어 만학골재로 향한다.
수정봉 내림길 능선 분기점에 도착하니, 눈에 묻혀 있으면 어쩌나 우려되던 돌 세 개가 선명하니 길을 안내한다.
능선 분기점에서 금남길은 우측 사면 내림길로 이어진다.
내림길의 금남정맥은 안부를 지나 612봉을 향해 오름길로 바뀌고,
612봉 오름길에서 우회길을 따르니, 다시 봉우리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게 되고,
금남길은 다시 평탄한 오솔길로 이어진다.
612봉쯤에서 단속의 눈길을 거의 다 피했다는 안도감에 느긋한 쉼을 한다.
좌측 소나무 사이로 계룡산 주능선을 간간이 조망하며,
한적한 능선길을 여유롭게 진행한다.
지나온 수정봉도 돌아보며,
어떻게 왔을까 싶은 계룡산 쌀개릉과 자연성릉을 가슴 깊이 갈무리해 놓는다.
이제 좌측으로 갑사계곡과 계룡저수지가 가까이 내려다 보인다.
금남길은 잘 자란 소나무 사이로 이어지고,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를 닮은 소나무도 감상하는 사이에,
좌측으로 시야가 탁 트인 조망처에 도착하니,
관음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문필봉과 연천봉 아래로 갑사도 조망되고,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 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정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써, 백제 구이신왕원년(久爾辛王元年,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 후의 통일신라 시기의 일이다.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왜군에 대항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어 당시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시던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800여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선생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고,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에 임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갑사는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사승(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 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 갑사의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鍾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 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 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 대형의 이동은 임난후(壬亂後)의 중건 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主要文化財)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 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象), 배살입상(菩薩立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