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루가 24,50-53)
가톨릭교회 교리 강좌 (27)
27과 : 그 밖의 전례 거행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667-1690항)
“교회가 제정한 준성사(準聖事)는 어느 정도 성사들을 모방한 것이며, 교회의 전구로 영적 효력을 얻는 거룩한 표징들이다. 준성사를 통하여 성사들 고유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되고, 삶의 여러 환경이 거룩하게 된다.”(전례 헌장, 60항)
1. 성사 (마무리)
성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성사들은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표징으로 나타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은총을 이루어 주는 거룩한 일(聖事),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성사에 관한 교리를 마무리하며, 다음 두 가지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 성사 집전자의 마음가짐
집전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제 직무를 수행하므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성사를 거행하여야 한다.
성사의 효과는 집전자의 성덕과는 상관없이, “성사 거행 그 자체로”(성사의 사효성, 事效性)이루어진다. 성사를 주시는 분도,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사는 그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하지만 성사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거행할 때, 신자들 편에서도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성사를 받게 될 것이다.
2) 성사를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마음가짐
성사를 받는 신자들이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면 합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 하며, 정성된 마음으로 성사를 받아야 한다. 성사가 ‘온 그리스도’의 행위임을 생각하며 신자들이 의식적으로 정성을 다하여 참석할 때, 성사는 은총을 새롭게 체험하는 자리가 될 것이며, 그저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는 행사처럼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2. 준성사
교회에는 일곱 성사 외에 준성사들이 있다. 준성사(準聖事)는 성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준성사는 특히 영적 효과를 교회의 간청으로 얻고 이를 표시하는 거룩한 표징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축복하고 계심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준성사는 축복과 축성이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것을 축복이라 하며, 특히 하느님께 바쳐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축성이라 한다. 하느님께 봉헌되는 사람(수도자, 동정녀)들도 축성하는데, 이로써 그들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는 ‘하느님의 것’이 된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驅魔) 역시 준성사이다. 사제는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며, 악마의 세력에서 보호하여 주시도록 청한다.
3. 대중 신심
일반 신자들은 성인 유해 공경, 성당 방문, 성지 순례, 행렬,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성패 착용 등과 같은 신심 행위들을 좋아한다. 이런 신심행위들은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의 예배인 전례로 인도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대중 신심이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애덕 실천에 중요한 원동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신심 행위는 신앙의 내용이 각 시대의 문화적 조건 아래 표현되는 점을 인식하여 그 신학적 문화적 표현이 신앙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계속 검토 반성하고, 또 적극적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힘써야 한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신심운동”의안, 64항).
4. 그리스도인의 장례
예수께서는 당신 죽음을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요한 16,28)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죽음 역시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은 작별의 슬픔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희망의 표현이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으며, 죽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은 미사성제로 충만하게 거행되며, 그 전후에 베풀어지는 축복들(고별식 등)은 준성사이다.
우리가 현세의 문턱을 넘어서면 이 세상 여정 동안 우리와 동행하던 성사의 표징은 사라지고, 하느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사랑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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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김> 다시 만날 때까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 그와 헤어짐을,
그리고 친교와 재회가 있음을 노래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어서도 서로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가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카의 성 시메온
첫댓글 카톨릭교회강좌를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는 서로 죽어서도 서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곳에서 언젠가 서로 만나는 기쁨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베드로신부님! 저희 정릉4동 성당에서는 무자년에는 외부의 행사는 일체 없이 전교우 신자들들 한달에 한번씩 아침반과 저녁반으로 나누어서 의무적으로 교리공부며 새롭게 공부를 한다는군요 신자들이 요즈음은 냉담자도 많고 교리 상식도 부족한데 다시금 카톨릭에 대해서 성사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한마디로 외실에 충실하기 보단 전 신자들을 하느님말씀 제데로 선포 할줄 알게 재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다행인것 같아요
베드로 신부님! 준성사에 축복, 축성, 구마가 있는데 하느님께 봉헌되는 사람에게도 축성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구~ 마리아님, 정확히 찝어내셨네요! 그래서 수도생활을 요즘은 '봉헌생활'이라고 하지만 그전에는 '축성생활'이라고 했답니다.
동정녀는 수도회에 소속이 되어서만 축성합니까?
마리아님, 수도생활의 형태가 다양한데요, 대체로 회수도자들은 공동생활(공동기도와 공동노동 등)을 하는데, 본격적인 수도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 초기부터 동정녀들과 과부들이 있었고요 좀 지나서는 은수자(독수자)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있지요. 현대에 이르러서는 재속회(재속3회와 다름, 동반자회는 예수고난회의 재속3회 임)의 형태도 있구요. 이런 것들은, 이제 수련들어가시면 "수도생활의 역사"에서 아마 자세히 다루어질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신부님!가정에서의 휴강 명강의 실천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은인자중'이라는 말을 화두로 삼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것이 의외로 많은 '마음 속 대화'를 하게 하는 군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