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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테크는 브로드 피크에 온 정신을 쏟았다.
그는 북쪽에서 가로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남쪽에서 시작하여 브로드 피크의 봉우리들을 연결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 루트는 확실히 어렵지만 해볼 만한 곳인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보이테크가 말했을 때,
그가 북쪽에서 시작해도 "이것이 마지막 기회"로 보고 나는 따르기로 했다.
보이테크는 언제나 깊이 생각해서 산행계획을 세웠으며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공률을 계산했다.
그런데 나는 그와는 달리 언제나 본능적인 직감에 따르는 편이어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적었다.
나는 지나치게 세밀한 계획은 믿지 않는 편인데 이런 것은 그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이테크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마음도 그쪽으로 기울었지만
남쪽에서 시작겠다던 내 계획을 단념하는 것이 속으로 섭섭했다.
그래도 나는 좋은 분위기에서 같이 일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4년 전부터 함께 어울렸으며,
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우정이 여러 번 시련에 놓이곤 했다.
우리는 같이 긴장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위기에 부딪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또다시 원기를 회복하려고 서로를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아 헤어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신은-결국 그 일을 해냈지만- 팔찬 캉리의 세 봉우리를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면서 종주하려고 했다.
그것은 정말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1984년 남 티롤 출신의 위대한 히말라야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가
14개의 8,000미터급 고봉을 전부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상에 먼저 발표했다.
당시 그는 벌써 아홉 개의 고봉을 올랐고, 당신은 다섯을 올랐다.
메스너의 발표는 등산계를 온통 떠들썩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세상에 알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메스너와 겨룰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무엇때문에 1982년에 오른 브로드 피크로 또 다시 갔는가?
메스너의 발표에 대해 알피니스트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8,000미터급 고봉을 완등한다는 것은 분명 실현 가능한 일로 여겨지나 과연 언제쯤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이 경쟁이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경쟁이라는 말도 우리는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언론계에서 8,000미터급 고봉에 대한 경쟁을 북돋아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론계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더라도 경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이 계획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나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보이테크와 함께 등반중이었고 그의 명령을 듣는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 계획은 주로 보이테크가 밀고나가던 터라 나로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세계 최고봉급 열네 봉을 목표로 삼고 경쟁한다는 것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고산을 도전해 온 길이 달랐다.
등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의견이 무척 달랐다.
이토록 큰 성격차가 있었지만 오랜 세월 같이 활동하면서도 우리는 갈라서지 않았다.
도리어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보충해줄 정도였다.
그렇지만 경쟁의 양상이 나에게 날로 확실한 의미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미 메스너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는 바로 시작하지 않았는가?
카라코룸으로 가는 목적은 저 유명한 '빛나는 벽'을 정복하는 데 있었는데,
이 벽은 가셔브룸 Ⅳ봉의 서쪽 측면에 있는 높이 3킬로미터가 넘는 바위 절벽이었다.
이 벽을 오르는 일은 보이테크가 수년 전부터 가져온 고정 관념이었다.
이 벽에 대해 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테크와의 끝없는 논쟁,
그의 열정과 열광 특히 그의 확신이 나의 의심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나는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야누즈 마이에르, 발레크 피우트, 리시에크 포로브스키 그리고 크르지츠토프 비엘리키가 합류하겠다고 해서
우리는 함께 브로드 피크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보이테크와 나는 현지에서 고소순응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당국에 브로드피크도 오르겠다고 허가를 신청해야 했다.
이때의 '고소순응' 덕분으로 이 해의 히말라야에서의 가장 훌륭한 업적 가운데 하나를 이루게 됐다.
그렇다고 이것이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크르지츠토프 비엘리키도 브로드 피크를 하루에 오르내리는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세웠으니까!
앞에서 말했지만 보이테크와 나는 팔찬 캉리 세 봉의 종주를 어느 쪽에서 시작할 것인지 서로 생각이 달랐는데,
그때 보이테크가 자기 뜻을 밀고 나가 끝내 북쪽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7월 11일 우리는 베이스캠프를 떠나 그날 암벽 밑에 다다랐는데,
유감스럽게도 바람이 강해서 온종일 텐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날씨가 좋아져 등반이 계속됐다.
루트에 별로 어려움이 없어 첫등반을 잘 해냈는데 비박을 하는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타트라 산군이라면 4급이나 5급 정도였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그 정도의 난이도라도 큰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암벽과 작은 암릉,
설벽과 그리고 빙벽에서 떨어져 부서진 돌무덤 위에 쌓인 거대한 얼음더미를 차례로 극복해 나갔다.
깎아지른 암벽에는 빙벽에서 부서져 떨어진 눈덩어리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자일없이 올라갔는데, 이렇게 오르니까 빨리 오를 수 있었다.
팔찬 캉리를 알파인 스타일로 극복하려면 이런 방법이 필수적이었다.
텐트칠 곳을 찾지 못해서 앉은 채로 밤을 지샐 것을 생각하니 오후 내내 안절부절 했다.
그러나 마침 플랫폼처럼 생긴 데를 찾아내어 비교적 기분좋게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튿날 북봉에 닿았는데 이번에는 브로드 피크의 중앙봉과 북봉을 잇는 안장같이 생긴 곳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일찍부터 비박할 곳을 찾았다.
그러한 이날의 비박은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비박으로 바람도 없고 하늘도 조용하기만 했다.
카라코룸이 극장의 무대처럼 그 모습 전체를 눈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K2가 남벽을 보이며 그 한가운데 군림하고 있었다.
가셔브룸 왼쪽과 발토르 빙하의 거대한 말단으로 초골리와 갈라진 아름다운 초골리가 있었고,
그보다 더 왼쪽으로 가셔브룸 산군이 그 위용을 자랑했다.
뒤쪽으로는 말루비팅, 쿤양 취쉬, 라카포쉬, 쉬스파레 그리고 바투로 등 연봉이 들러리처럼 솟아 있었다.
최단거리로 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낭가 파르바트의 고고한 모습이 수많은 봉우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했다.
산들이 마치 장식용 케이스 같이 서 있었다.
하늘은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과 어우러져 오렌지에서 연분홍으로 그리다가 빨강과 보랏빛으로 물들고,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한 적막이 지배했다.
이 목가적인 광경은 다음날 우리가 브로드 피크의 중앙봉에 도달한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암릉에 올라서자 바람에 날려갈 듯이 몸이 눈보라에 휘말렸다.
우리는 거세지는 눈보라에 밀려 콜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는데,
붙잡고 몸을 멈출 만한 곳이 없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제동을 걸었다.
바로 그때 9년전 여기서 일어났던 비극의 유물과 부딪쳤다.
보이테크가 먼저 카라비너가 걸린 하켄이 암벽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금 아래쪽에서 눈속에 박혀있는 피켈이 내눈에 띄었다.
우리는 1975년 눈보라의 기습을 받고 브레슬라우 원정대가 도망하던 바로 그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콜에 도착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내려오던 노박지크가 중국쪽(동쪽)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며 자일이 끊어졌다.
대원 넷이 다음날 아침 동료를 찾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렀는데,
이러한 결정이 또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밤을 지새면서 그들의 체력과 인내력은 점점 약해졌다.
날이 샐 무렵 눈보라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자 그들은 가지고 있던 줄과 끈들을 임시 변통하여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산기슭에 내려선 것은 둘뿐, 나머지 케식키와 시코르스키는 떨어져 죽고 말았다.
글라자크와 쿨리스도 추락하였으나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심한 동상에 걸렸지만 강인한 의지력으로 버텼다.
그들은 동료들이 들으라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으나, 소리는 메아리칠 사이도 없이 바람에 휩쓸렸다.
그들은 8월 1일 밤 동료들의 도움으로 베이스캠프에 도달했는데,
베이스는 이미 비통에 잠겨 있었다.
팔찬 캉리의 한 바위에 묘비명이 새겨졌다.
1975년 7월 29일이라는 날짜와 폴란드인 셋의 이름이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바람이 수그러들어 우리가 1982년에 처음으로 택했던 루트를 따라 주봉을 향해서 전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올라갔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것만 가지고 갔다.
비박용 장비는 콜에 남겨두었다.
돌아올 때에는 초등 루트로 우리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원정대가 위험이 큰 곳에 남겨둔 고정로프를 만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매우 편리하다.
물론 보이테크가 극적인 일을 당해야 했던 것처럼 반대 경우도 없지 않다.
나는 한 바위 모서리 뒤에 서서 그를 기다렸는데 그가 늦어 걱정했다.
바로 이때 보이테크가 눈이 휘둥그래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하마터면 끝장날 뻔 했다"고 중얼거렸다.
바로 조금 전에 나는 그에게 주의력이 부족해서 미워했지만,
나도 이용한 고정로프가 마치 종이로 만든 것처럼 그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이테크는 균형을 잃고 한바탕 공중제비를 하더니 배낭 무게에 이끌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십여 미터를 날다가 설사면에서 기적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그리고 내려오다 다시 한번 깜짝 놀랐는데, 이번에는 아주 기쁜 일이었다.
바로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율리 톨리스 일행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을 보자 지난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살아났다.
그들은 브로드 피크를 오르면서 K2의 장대한 피라밋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K2 이야기를 하며 온 정신이 K2의 피라밋에 쏠렸다.
이것을 보아도 그들이 K2에 사로잡혀 있으며 K2를 다시 찾으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대로였다.
결국 초고리는 그들의 운명의 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위험에 부딪치지 않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빛나는 벽'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출발이 늦어질 것 같았다.
여기에 날씨마저 울의 말버릇처럼 "시원치 않아서" 바람이 강풍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일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죽어 베이스캠프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기가 싫어 7일 간의 장비와 식량을 챙기고 떠났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일이 깨졌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보이테크의 걸음이 차차 느려지더니 마침내 얼이 나간 사람처럼 돌 위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말을 잊고 꽤나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결국에 가서 일을 망친 것은 바로 보이테크였다.
그는 머리를 들더니 "제기랄! 더 이상 못가겠다!"며 투덜거렸다.
벌써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이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마치 애써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에서 갑자기 공기가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2년 전부터 '빛나는 벽'을 시등하자고 나를 설득하던 보이테크가 이렇게 여기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제기랄!" 한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보이테크, 자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나?
우린 모두 원기를 되찾아야 해!"
이점에 대해 누구든 이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벽에서 돌아오면 카라코룸 깊은 구석에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같이 원정 가기로 했는데
이순간 우리의 길이 서로 갈릴 것이 뻔했다.
야누즈 마이에르와 젊은 대원들은 보이테크와 내가 돌아와야 하는 날짜에 구속을 받지 않도록
우리 물건들을 가져 가기로 하고 있었다.
결국 보이테크는 쉬스파레 방향으로 떠나고 나는 가셔브룸으로 갔다.
그 무렵 나는 혼자 조용히 있기를 원했는데, 처음 3일 동안은 그야말로 혼자였다.
그때 나는 높이 6,800미터의 미답봉과 마셔브룸 라(마셔브룸 파스)를 올랐지만
그렇게 어렵고 위험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때 이 일로 나는 인간의 공동체가 다시 그리워졌는데,
갑자기 빙하의 균열과 빙탑이 그물친 듯이 나타나 몸의 균형 잡기가 어려워져 오도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섰다.
피켈과 아이젠 그리고 자일 한 동만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틀을 더 가고나니 처음으로 목초지가 나와 비로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떼지어 몰려왔다.
내가 마치 산에서 내려온 예티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가 마셔브룸 라를 혼자 넘어온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언제 오느냐고 종일토록 물었다.
나는 그들과 아주 유쾌한 하루를 보내면서 나에 대한 찬사를 즐기면서 염소 젖을 맛있게 마셨다.
나는 스카르두에서 보이테크와 다시 만나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아무도 간 적이 없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눴다.
처음에는 우리 사이의 모든 일이 옛날로 돌아가고,
지난날의 상처가 깨끗이 아문 듯했다.
정말 우리 사이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고 이런 이상한 일이 이슬라마바드에서 벌써 소멸된 것으로 알았다.
보이테크는 다음 해에 K2를 목표로 하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이와 달리 초오유와 다울라기리를 동계에 오르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원정대를 공동으로 편성하는 길을 다시 검토했다.
그러나 이런 우리 계획에 근본적인 의견차이가 드러나서 나는 손을 뗐다.
결국 경주쪽으로 후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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