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찬바람이 겨울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계절입니다. 빨갛게 물든 단풍도 제 역할을 다한 듯 땅으로 내려앉는 조락의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풍수 답사하기 안성맞춤인 계절이 오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스승님께서 강조하시는 자연을 볼 때는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작은 차이를 보아야 한다는 깊은 가르침을 이 계절에 적용하면 좋을 듯 하여요.
한국 위인전의 중심에 서 있는 '오성과 한음'의 한 분이신 '백사' 선생님의 삶을 풍수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풍수인의 시각으로 조명할 수 있음이 풍수학의 묘미가 아닐런지요.
쌀쌀한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일시 : 2012년 11월 11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김질 선생 묘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1리 산92)
김질은 본관 안동. 자 가안(可安). 호 쌍곡(雙谷). 시호 문정(文靖).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증손자. 음보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 주부에 제수된 뒤 사간원우정 ·병조좌랑을 지냈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司藝)가 되고, 다음해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의 거사를 꾀하였다.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그 공로로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가 되고, 이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여졌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右參贊) ·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1468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74년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2) 양사언 선생 묘(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93)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 평안남도 강동 지역)·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의 군수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 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 황해도의 다른 이름)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 저서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다. 한편,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8,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한동 前국무총리 생가 및 선영(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231, 산12)
이한동 전 총리는 1934년 12월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서 이정호씨와 채병숙씨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 아버지를 대신하여 장남으로 생계를 맡기도 했다. 1958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에 임용,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특수 1부장, 형사 1부장을 지냈다.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재직 중 이던 1980년 정계에 입문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고민 끝에 검사장 진급을 눈앞에 뒀던 이 전 총리는 81년 1월 청와대 한 비서관으로부터 선거법 개정으로 신설된 연천. 포천. 가평 지역구의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 12,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의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거쳤다. 야당과의 타협을 거절하던 여당내 강경파와는 달리 6.29 선언과 직선제 개헌, 5공 청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민주화.개혁 입법화와 제도화 등의 현대사 격변기에 총무를 맡으며 대화와 타협을 존중, 여야 의원들로부터 ‘이한동 총무학’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1988년 12월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6월 항쟁이후 노동자들의 요구가 분출되던 88년부터 12월부터 89년 8월까지 내무부장관을 맡아 풍산금속과 현대 파업사태를 강경 진압했다. 그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 민주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민주자유당에 가담하였다. 3당 합당 이후에도 김영삼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14,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95년에는 제14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이회창, 이인제에 이어 3위에 그쳤으며, 그 후 한나라당 부총재, 총재 권한대행 등을 지냈으나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를 지냈다.[출처]위키백과
4) 이항복 선생 묘 및 선영(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2, 산2)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이며, 성무(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신(禮臣)이고,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윤(崙)의 딸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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