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 육 소 감
재영 엄마, 김 창임
그래도 공부는 꽤 한다고 했던 나에게는 공포스러운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처음으로 교내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봄’이 글제로 나왔다. 교과서에 있는 글이 아닌 내가 스스로 지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색했다. ‘뭘 쓰지?’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써야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결국 원고지에 교과서에 나오는 봄에 관한 동화 한편을 그대로 적고 말았다. 그런 기억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조금 희미해져 갔다. 넷중 하나만 고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또 그것만으로 스스로도 만족했다. 여고 시절 많은 아이들이 문학소녀를 꿈꿀 때, 수학을 잘하는 것으로 충분히 뻐길 수 있었고, 그렇다고 국어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의 이런 자만심과 글짓기에 대한 약간의 무시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무참히 깨어졌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지도교수의 한마디, “대체 너는 초등학교 때 글짓기도 안했니?”, “말로하면 다 아는 것 같은데, 너의 글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결국 말이 아닌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글을 통한 대화에 서툰 것은 앞으로 교수를 하겠다고, 평생 논문으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했던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 일로 정말 글짓기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을 유심히 읽게 되었다. 지금도 논문을 쓸 때면 내가 써 놓은 글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읽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내 아이만은 절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생겨났다. 어릴 때 책도 열심히 읽어주고, 많은 이야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우선 어릴 때부터 손가락에 힘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그래서 글씨 쓰는 것을 너무 힘들어 했다. 그리고 너무 못썼다. 책을 읽고 느낌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쓰는 것은 힘들어 했다. 애가 엄마의 가장 나쁜 부분을 닮은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열심히 훈련을 시켜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대전으로 이사를 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게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로써는 팀 수업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지원 엄마가 ‘도룡동 글짓기’말씀을 하실 때 그냥 무조건 응했다. 사실 별 기대도 없이. 좋은 선생이란 좋은 학생을 만났을 때 저절로 되는 것이지만, 참 좋은 선생 나쁜 아이도 좋게 바꾸는 것인데 내 아이에게 그런 좋은 선생님이 오실 수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아이들도 8명이면 너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3월 첫째 주, 금요일 드디어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같이 수업을 하게 된 남자아이들은 장난이라면 빠지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그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께 제압당했다. 특히 재영이는 글씨로 선생님께 지적을 당하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또박또박,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글씨로, 생각을 정리하고, 노트 필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선생님의 낡은 글씨 판을 보면서, 저 글씨 판처럼 낡은 수업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또 아이들이 너무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다. 첫날 수업이 끝나고 재영이는 재미있다는 말을 했다. 글씨 쓰는 것에도 긍정적으로 말했다. 역시 엄마가 말하는 것은 잔소리여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은 교훈이구나 싶은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내 아들이 바뀐다면 뭔들 어떠리.
한번한번 수업은 진행되었고, 재영이의 글이 점점 좋아졌다. 일단 글씨가 여전히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써나갔고, 글도 길어지고, 묘사가 풍부해졌다. 책을 읽는 것도 즐거워 졌다. 재영이는 노트를 끝까지 써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기공책도, 글짓기 노트도 한권이 꽉차있었다. 이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다 알아 볼 수 있는 글씨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선생님의 지도력 때문에 가능했다. 칭찬과 격려, 그리고 해야 할 일과 아닌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을 주심으로 아이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로썬 하기 힘든 칭찬을 참 많이 해주셨다. 여린 재영이를 착하고, 맑고, 선하다는 표현으로 칭찬해주셨고, 앞으로 잘 될 거란 말씀으로 불안하고 마음 바쁜 엄마를 안심시켜주시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공부가 끝난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도룡동에서 노은까지 30분정도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또래 아이들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늘 엄격하게 ‘안돼’를 연발했던 엄마로써 그냥 또래 아이들이 다 게임도 하고, 약간의 거친 언어도 가끔씩은 내뱉음을 알게 되었다. 또 어떤 아이가 “아줌마, 또 재영이 야단 치실려구요”라는 눈치 빠른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 내가 많이 야단치고, 아이가 주눅들게 하는구나 하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7월 한달간 유럽여행으로 수업을 빠지게 되었다. 많이 아쉬웠다. 미리 계획이 되어 있던 일이고, 7월이든 8월이든 한 달 정도는 여행을 다녀와야만 했다. 선생님께 미리 부탁을 드렸다. 일기형식의 기행문을 잘 써오라는 말씀을 해달라고. 재영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독일에 머무르던 보름간은 시간이 많아서 일기를 쓰기에 별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는 호텔에 들어오면 10시경이 되는 날도 있었다. 아무리 빨리해도 씻고 나면 10시 30분, 평소 같으면 자야하는 시간인데도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정리하였다. 영어식의 문자가 눈에 잘 안 들어 올 법도 했지만, 그래도 일기를 통한 정리 덕분에 역사적,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재영이의 일기에는 유난히 화장실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동전을 내라니? 우리와는 가장 큰 차이였다. 수많은 건물과 조각, 그림, 문화재보다도 아이가 직접 겪은, 그리고 긴급하게 겪은 일일테니까. 모든 일이 자기 입장에서 가장 필요할 때, 갈급할 때 경험한 것은 바로 자기화 될 것이다.
이제는 수업을 마칠 시간이 되어간다. 아쉽다. 재영이가 빠진 수업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자기는 한달 빼먹어서 보충을 해야 한다고. 다른 학원은 잘도 빼먹던 녀석이. 축구하다가 손이 삐었을 때도, 학교에서 늦게 끝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타고 가는 차를 놓쳤을 때도, 엄마에게 전화해서 도롱동 가야 된다고 울상을 짓기도 했다.
문집을 만드느라 열심히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의 꿈’을 쓴 글을 읽을 땐 아이가 많이 자랐음을 알 수 있었고, ‘나의 아버지’를 읽으면서 아빠에 대한 존경심이 베어 나와 안심하기도 했다. 아빠는 늘 바빠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도 못해서, 혹시 좀 멀리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영이가 이런 기회를 가진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기본 적인 글짓기가 된 아이들은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수업을 받기도 하겠지만, 남자아이들의 대부분은 5학년 시기에 가장 적절한 수업이었다고 추천하고 싶다. 약간은 낡게 느껴졌던 수업방식은 ‘기본’적인 수업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기본적인 수업을 끝내고, 앞으로 더 생각의 폭을 넓히고, 같은 책을 읽더라도 고급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의 꿈을 이루는데,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글로 남의 생각과 논리를 이해하고, 지신을 표현할 때 오늘의 이 수업이 단단한 주춧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수업을 소개해준 지원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이들의 오가는 길을 책임져 준 엄마들과 함께 수고 많았다고 자화자찬하고 싶다. 다들 잘 따라준 우리 아이들에게도 칭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현세 선생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윗글내용이 파일에 들어서 불편하고 또 인쇄가 흐려서 복사해 그대로 또렷하게 옮긴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