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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계단의 이야다니지와 하이쿠차야의 오모테나시
아루키헨로미치는 잠시 타카세강둑길을 따른 후 221번현도에 합류, 타카세강교를 건넌다.
북상하는 이 현도를 따라서 222번현도와 교차한 후에도 계속해서 221번도를 고수하여 'V'
자 길의 시점에서 좌측 221번도를 택한다.
한가로운 농촌 미노초(三豊市三野町)가 71번이야다니지(弥谷寺)까지 계속되는 길이다.
긴장되는 지점마다 시코쿠헨로석주와 안내표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로지 221번현도로
일관하고 있으므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221번현도가 220번현도와의 교차점에서 끊기고.(220번따라 서쪽으로 이동?) 헨로석주와
헨로표지만 있는 마을길도 오래잖아 방향을 튼다.
작은 다리로 수로를 건너 직진하여 시골에서는 큰 잡화점인 모치야상점(三野町大見甲)을
끝으로 직각 우회전하는 헨로미치.
이야다니지에 근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왼쪽의 오치아이대사당(落合大師堂)과 오야시키(大屋敷) 버스스톱 앞을 지나 오미(大見)
마을 길을 지나다가 이미 낯설어진 장면에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꽤 너른 논에서 중년 여인이 홀로 낫으로 벼를 베고 있는 모습에.
전에는 당연했으나 지금은 부러 연출을 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장면인데 진즉 선진화,
기계화 된 일본 농촌에서 보게 되다니?
기계화에 맞도록 정지된 논들인데 잠간이면 끝낼 일을 저리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긴, 이베리아반도에서도 말 1필을 앞세워 밭을 갈고 있는 초로남을 본 적이 있지만.
시코쿠헨로안내석주와 안내표지를 따라 완만하게 올라가며 교차로(4거리)를 횡단했다.
길 양쪽가에 2개의 장석주(長石柱/四國第71番弥谷寺,弘法大師學問修行之遺跡)를 지나고
48번현도도 가로 건넜다.
좁은 주택사잇길을 따라서 오르다가 안내판 따라 왼쪽 도로 위로 올라섰다.
71번레이조 이야다니지로 가는 오르막길이다.
오르막 차로를 잠시 오르면 '弘法大師御學問の里 七十一番札所 弥谷寺' 안내판과 '弥谷寺
車道'석주가 있고 분기하는 이야다니지 보도(步道)가에는 '八丁目大師堂'이 있다.
그 옆에는 'ご自由にご利用下さい'(고지유니고리요쿠다사이/자유롭게 이용해 주십시오)
아루키헨로상들로 하여금 피로를 풀고 가라는 족탕(足湯)이다.
숲길을 오르면 차도의 정상부(주차장좌측)에 이야다니지 본당581m 석주와 본당 540계단
오르기가 벅찬 헨로상들이 이용하는 마이크로버스의 대기실과 휴게소, WC 등이 있다.
지근에 미치노에키(道の驛ぶれあいパークみの)가 있고 후다쇼경내에는 하이쿠차야(俳句
茶屋)도 있어서 준비성이 없다 해도 안심되는 지역이다.
더구나 하이쿠시(5. 7. 5 의 3구 17음으로 된 일본의 短型詩)로 가득 찬 하이쿠차야에서는
짐을 맡기고 다녀올 수 있도록 편의 제공을 하고 있다.
45대쇼무(聖武)천황의 칙원에 따라 교키보살이 당우를 짓고, 황후(光明)의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広仏華厳経)을 모심으로서 창건이 이뤄졌단다.
쇼무천황의 재위 기간은 724~749년이고 코보대사는 774년에 태어났으므로 창건 시기를
대사의 탄생 50~25년 전으로 볼 수 있겠다.
이야다니지와 코보대사의 인연은 코보가 7 ~12세 기간에 이 절(獅子之岩屋)에서 학문에
열중함으로서 시작되었단다.
다이도(大同) 2년(807)에 당(唐)에서 귀국한 코보대사는 이곳을 다시 방문, 가람을 재흥함
으로서 또 하나의 진언종이 더해진 것이고.
당초에는 산에서 시코쿠(四國)의 하치쿠니(八國)를 바라볼 수 있다 해서 렌게잔 야코쿠지
(蓮華山八國寺)라 했는데 코보대사가 켄고잔 이야다니지(劍五山弥谷寺)로 개명했단다.
마스터한 구문지법(求聞持法/密敎에서 기억력증진 등을 위한 修法)에 따르면 다섯자루의
칼이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계곡이 많다 해서.
이야다니지가 위치한 이야다니잔은 고래로 영산(靈山)으로 신앙되어 온다는 산.
일본 3대레이조(靈場/恐山, 臼杵磨崖仏과 함께)의 하나로 꼽혀왔으며 예로부터 사람들은
산에 부처나 신이 머물고 있다고 믿고 그 산을 영산(靈峰)이라며 신앙의 대상이 되었단다.
또한, 이 믿음은 오헨로(お遍路/순례)의 기반이 되는'辺(遍)路信仰'(へじしんこう)의 하나
로도 알려져 있다고.
해발382m로 높지 않은 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나 분산된 540계단을 오르내리는 중에
훌륭한 뷰포인트(viewpoint)가 도처에 있다.
11시 30분에 108계단을 오르기 시작해 시코쿠88레이조 중에서 가장 많은 계단으로 되어
있는 본당까지는 10분이 소요되었다.
배낭을 맡아준 하이쿠차야의 오모테나시 덕일 것이다.
없느니만 못한 슛사카지(釋迦寺) 전설
초입으로 내려가 이야다니지를 떠난 시각은 정오쯤.
올라왔던 차로를 따라 내려가 48번현도로 다카마츠자동차도를 횡단, 11번국도(伊予街道)
에 진입하는 길은 차량헨로상들의 헨로미치다.
아루키헨로상들은 잠시지만 으뜸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산길(숲길)을 걸을 수 있다.
더 좋으면서도 옥에 티일 수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일부 죽림(竹林)을 걷는 것.
코보대사가 시코쿠88레이조를 만들 때나 에몬사부로가 88레이조를 20번이나 걸을 때 이
울창한 죽림이 있었는지는 기록이나 사진이 없으므로 단언적일 수는 없지만.
이 지역 외에도 울창한 대숲을 자날 때마다 생각했던 일이다.
겉으로는 낭만적일 듯 하나 송림(松林)과 달리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는 과거(科擧)길에 죽령(竹嶺) 코스가 제외된 것은 대나무
밭을 걷다가 미끄러져 구르기 일쑤인 것 처럼 시험에 굴러떠러진다는 것이 이유라잖은가.
산길을 걷는 동안에 행정구역이 미토요시에서 젠츠지시(善通寺市)로 바뀐다.
칸온지시와 젠츠지시는 시명(市名)과 사명(寺名)간에 선후와 주종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일본의 잦은 행정구역 개편과 개명(改名)의 속성으로 미루어 시(市)가 개편될 때 창건과
명명(命名)이 8c에 이뤄진 사명(寺名)을 시명(市名)으로 차명(借名)한 것 아닌가.
산길을 청산하고 내려선 헨로미치는 2개의 터널을 통해서 다카마츠자동차도를 건넌다.
인도용과 지근의 차도용 터널인데 선후 관계 없이 후자를 건넌 지점에서 만난다.
자동차도와 나란히 카미이케(上池) 둑을 따르다가 카미이케와 다음의 오이케(大池) 사이
둑길을 걸어 이요카이도인 11번국도에 들어선다.
잠시 후 11번국도개설 때 자투리로 남았을 것으로 보이는 좌측 우회로를 따르다가 국도를
횡단하면 48번현도에 진입하게 된다.
건넌 지점 우측공지에 '周辺札所案內圖'가 걸려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 후 48번현도
를 따라서 동진하다가 신호등사거리(三井之江東)에서 우측 길을 택했다.
직진을 계속하여 저수지를 둘로 가르는 둑길을 따라 직진을 계속했다.
'T'자 길의 안내판(七十三番札所出釋迦寺(右)800m/七十二番札所(左)曼茶羅寺) 앞까지.
왼쪽 우동집(さぬぎうぞん/うぞんの里 丸正)앞을 통과하여 만다라지(曼茶羅寺/善通寺市
吉原町)에 당도한 시각은 13시 44분.
전답과 과수원이 있는 평지 농촌에 자리한 사찰이다.
596년(33대천황 推古4년/재위592 ~ 628)에 창건되어 시코쿠88레이조 중에서 최고(最古)
라는 사찰이다.
사누키(讚岐)의 영주 사에키가(佐伯家/코보대사의 출신가문?)의 우지데라(氏寺/權門들이
자기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로 창건했다는 사찰.
당초에는 요사카지(世坂寺)였는데 만다라지로 개명되었단다.
코보대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금강계(金剛界)와 태장계(胎藏界)의 두 만다라
(부처가 증험한 것을 나타낸 그림)를 안치하고 사명을 만다라지로 개명했다는 것.
밀교 진언종이 하나 더 늘어났다.
만다라지를 나와 같은 마을에 자리한 73번레이조 슛샤카지(出釋迦寺)로 가는 중이었다.
거쳐 가게 되어 있는 사누키우동집 안에서 호객(?)하는 여인 뒤에 젊은이가 있을 줄이야.
전국을 상대로 주문 배송하는데 아루키헨로상에게는 사누키우동을 오셋타이한다는 집.
놓치기 쉬운 글귀인데 용케도 찾아가 앉아있는 젊은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이 사람도 공짜맛을 뒤늦게 알았는가.
1주일에 10만y을 썼다는 사람이 100y 안팎의 셋타이 우동에 목을 메고 있다니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의 실상을 보는 듯 했다.
접대 받기 전에 73번레이조를 다녀오기 위해 빈 몸(배낭을 내려놓고)으로 나섰다.
해발95m라 겨우 느낄 정도로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다.
개창과 관련된 괴이쩍은 전설이 있다는 슛샤카지.
쿠카이(空海/弘法大師)가 7세때 와시노야마(倭斬濃山) 산정에 올라 한 서원을 했다는 것.
"불문에 들어가 중생을 구하고 싶습니다.
장차 제 소원이 이뤄질 것이면 석가여래님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요.
이뤄질 수 없다면 제 목숨을 부처님께 공양하겠습니다."
하고 산정 단애에서 계곡으로 뛰어내렸다.
이 때 떨어지는 쿠카이 앞에 석가여래와 선녀들이 나타나 쿠카이를 끌어안고
'일생성불' 이라고 선언했다.
소원성취로 감격한 쿠카이는 훗날 이 산을 현현한 석가여래를 뵌 산이라는 뜻으로 '가하이
시잔(我拜師山)으로 개명, 석가여래의 존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하여 슛샤카지를 세웠다나.
예수는 쿠카이 보다 774년 전에 태어났다.
악마는 40주야를 단식한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험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는 말이 성서에 있지 않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악마의 요구를 일축한 예수의 대답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일축했고 8c 후의 쿠카이는 스스로 부처님을 떠보았다.
만유의 인력을 정지시키기 전에는 뛰어내리면 죽거나 다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만유를 다스리는 분에게 그 질서를 잠시 깨뜨려달라는 요청에 다름아닌 말을 한
사람과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히 물리친 예수.
불교의 이치에 백지인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제자가 사생결단으로 스승을 떠본
이 전설은 코보대사를 위해서는 물론, 일본 불교를 위해서도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장차 일본불교의 대기(大器)가 되려는 야망을 가진 소년이 할 짓은 아니지 않은가.
목숨을 담보로 한 소년의 스승과의 도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사누키우동의 오셋타이녀 타가타에코의 눈가에 맺힌 이슬
젊은이가 떠났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내려왔으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는 그.
이 일본 청년에게 이런 끈기가 있다니?
이른 아침에 내가 통증 때문에 걷지 못할 때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가버리던 이 사람에게
이토록 끈끈한 동지애가 있는가, 공짜의 위력인가.
오후에 접어들면서 내가 필요해진 것?
오셋타이 여인인 중년녀 타가타에코(多賀妙子)는 상냥할 뿐 아니라 헌신적이었다.
특히 한국영감이지만 자기 아버지 연배라며 지극하고 정성껏 도우려 했다.
내가 이미 고인이라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한 셈인가.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히는 듯 한 그녀.
타에코는 츠야도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스스로 75번후다쇼(善通寺)에 전화를 걸었다.
풀(full/滿員)이란다.
알아본 결과를 말하는 타에코의 무거운 목소리.
그런데도 젊은이는 나와 동행하겠다?
나를 따르면 길이 있다(어제처럼?)는 믿음이 생겼는가.
우리가 타에코의 우동가게를 나설 때, 그녀는 대안이 있는지 여의치 않으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살짝 내게 주었다
자기네 일본 청년에게 주지 않고 왜 외국 늙은이인 내게 그랬을까.
청년에 대한 비호감 때문이라기 보다는 눈가의 이슬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풀'이라는 타에코의 전화 확인은 츠야도가 아니고 슈쿠보(宿坊)였을 것이다.
88레이조 중에서 가장 광대한 데에 걸맞게 슈쿠보의 규모 또한 가장 큰 데도(정원350명?)
이용객(투숙객) 역시 최고로 많기 때문인가.
츠야도는 정원(定員)의 개념이 없으므로 만원사례도 없으며 풀이라면 예약제를 의미하고
예약이라면 슈쿠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동집의 오셋타이를 받은 우리는 코야마지(74번甲山寺)를 향해 길을 떠났다.
아루키미치로 2.2km인 이 길도 2코스로 나뉘어 있다.
마을길을 요리조리 옮겨 48번현도를 횡단하는 길과 요시와라(吉原)우편국이 자리한 48번
현도로 나가 현도를 따르다가 현도의 분기점에서 전자와 합류해 코야마지로 가는 길로.
우리가 후자를 택하여 74번레이조 코야마지에 당도한 시각은 15시 28분.
히로타초(善通寺市弘田町)의 히로타 강변에 위치한 후다쇼다.
이(甲山寺) 주변은 코보대사의 고향으로 유소년시대에 잘 놀았다는 곳이란다.
헤이안(平安/794~1185) 초기, 장년기에 든 코보대사는 젠츠지와 만다라지 사이에 가람을
세울 영지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코야마(甲山)을 걷는 중에 산록 암굴에서 나온 노인을 만났다.
"나는 옛날부터 여기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행복과 이익을 주며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널리
전해온 성자다.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면 내가 영원히 지켜줄 텐데"
코보대사는 이 노옹이 비사문천(毘沙門天/4천왕의 하나)의 화신임을 깨닫고 비사문천상
(像)을 새겨 암굴에 안치하고 공양했다.
그 후 사가천황(嵯峨/809~823)의 칙명(別当)을 받고 저수량1.540만t, 둘레약20km인 일본
최대의 저수지(滿濃池/仲多度郡滿濃町소재) 개보수공사를 거뜬히 완수했다.
갑산의 암굴에서 완성을 기원하며 약사여래상을 새겨 수법(修法/密敎에서 단을 설치하고
행하는 加持祈禱法)했는데 대사를 사모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합력함으로서.
전문가들도 실패한 공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아 경영능력을 인정받을만 하며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조정이 내린 하사금(金二万錢)중 일부로 건립한 것이 이 사찰의 시작이란다.
산의 형상이 비사문천의 갑옷과 투구를 닮았다 해서 코야마지(甲山寺)라 했다는 절.
고향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일본
코야마지를 나온 시각은 15시 38분.
코야마지에서 동남방향 1.6km 지점, 빤히 보이는 젠츠지에 들어가기 위해 그 코앞의 다리,
사이세이교(濟世橋)를 건넌 때는 16시 9분.
유의해야 할 대상이 없는 길 1.6km에 30분을 바쳤다면 시간을 넉넉하게 즐긴 것이다.
총 거리는 25km 미만이지만 주마간산식으로 일별한다 해도 6개나 되는 레이조에 바치는
시간을 감안하면 녹녹하지 않은 하루일 것으로 예상되었던 아침과 달리.
방향만 바로 잡으면 아무 길로 가더라도 도심(善通寺市)의 1.6km 저쪽을 찾아가기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굳이 헨로미치를 고집한다면 헨로석주와 안내표를 주시해야 한다.
코야마지를 나와 히로타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다가 다리를 건넌다.
히로타강변을 따르다가(南東向) 나카타니강이 분기하는 히로타나카타니교(弘田中谷橋)를
건너 나카타니강을 따라 동진한다.
첫 다리를 통과한 후 안내판 따라 우측 골목길을 직진하여 좌회전, 차로를 따라서 젠츠지
양호학교 앞을 지나라는 안내판을 따랐다.
셍유초(仙遊町)에 들어섰으며 젠츠지 길은 '코보대사요지레이조셍유지(幼時靈場仙遊寺)'
입구 간판 앞에서 우측길인데 내 걸음을 붙든 헨로미치 외적인 일 2건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즐긴 것이 아니라 이 때문이었던 것.
88레이조의 90%가 코보대사를 받드는데 유소년때의 행적까지 레이조로 등극하는가.
예수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코보는 자기 고향(讚岐國
多度郡屛風浦/現 香川縣善通寺市)에서 이처럼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비결이 무엇일까.
서로 다른 토양의 상이한 문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한 민족들의 정서를 하나의 장(場)에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므로 답이 나올 수 없겠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예수의 말 오래 전, 구약시대부터 그래왔지 않은가.
우회전한 길가(좌측인도) 담에 밀착하여 서있는 간판 '犬塚'이 또 하나의 브레이크였다.
에이후쿠지(57번)와 셍유지 간의 이누즈카이케(犬塚池)의 전설은 애석한 사연이다.
그러나 여기 이누즈카는 실물은 보이지 않고 해설문도 충격을 줄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 걸음을 붙들고 있는 것 아닌가.
"작자 불명이나 가마쿠라시대작으로 추정된다.
쿠카이가 당에서 가지고 귀국한 약초(보리의 종자)에 얽힌 의견 전설이 있다"
(作者は不明で鎌倉時代の作と推定される。
空海が唐から持ち帰った薬草(麦の種子)にまつわる義犬伝説があり)
는 말 뿐이니.
<당나라 유학을 마친 쿠카이가 밀 씨앗을 가지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밀의 국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때라 관리들이 밀가루 탐지견(이즈음의
마약탐지견?)을 앞세워 국외 반출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쿠카이는 자신의 다리 종아리 부분을 찢어 거기에 밀씨앗을 숨겼는데 개가 짖기는 했으나
적극적이지 않아서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귀국했다.
쿠카이는 고맙고 안쓰러운 이 개를 일본에 데려와 길렀다.
명을 다하여 죽은 개를 묻었는데 묻힌 곳이 이 이누즈카다.
집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풍화가 심한 이누즈카지만 시대를 느끼게 하는 좋은 유적이라고
판단하여 젠츠지시교육위원회가 유적으로 지정했다.>
<코보대사는 묘약을 구하러 천축(天竺)까지 가서 약의 씨앗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감시견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까워 한 대사는 개의 사체를 장안으로 운반, 진언의 비법으로 소생시킨 후 개와 함께
귀국했으며 명을 다하고 죽은 개를 기려 만든 무덤이 이 이누즈카(犬塚)다.
이로서 일본인들이 고루 묘약의 혜택을 받게 되었고 이누즈카에 자라는 이끼가 병(オコリ
病/학질?) 치료에 큰 효험이 되고 있다.>
이상은 나도는 여러 설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다는 2가지 설이다.
코보가 당나라에 간 것은 804년(延曆23).
20년으로 규정된 견당사(遣唐使)의 유학승 신분으로 갔으나 806년에 귀국했다.
20년 룰(rule)을 깨고 2년만에 돌연 귀국함으로서 양국간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에게 밀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었을까.
그보다, 쿠카이(空海)는 장차 불가의 대기가 될 유학승(留學僧)이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범법인 밀수를 무마할 수 있는가.
하기는, 우리나라(고려말)의 문익점(文益漸/1329~1398)도 원(元)나라 사신의 신분으로
목화씨를 밀수했지만.
개와 보신탕 단상
1)
한국의 각지에 있는 견총은 일본과 달리 의견(義犬)과 충견(忠犬)으로 일관되어 있다.
위기에 처한 주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설화들이다.
그런데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개를 주축으로 한 펫 묘지공원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사람 묘지는 단조로운 꽃이 고작이지만 펫 묘지는 호화판이다.
우리나라가 잠잠하겠는가.
그것(펫공원)은 아직 미미하나 급증하는 애견가들의 기세가 등등일로(騰騰一路)에 있다.
어떤 부류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 적을 상태로 일전을 벌이려는 듯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온 보신탕이라는 이름의 개고기 문제다.
한국 충견 설화의 본산이며 효시로 지명에 충견 전설을 담고 있는 오수(獒樹/전북 임실군
오수면) 마을은 전국 으뜸의 보신탕을 자부하고 있다.
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는 동물이므로 맛으로도 으뜸이어야 한다
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강변 같으나 그들 역시 강경하며 둔남면(屯南面)이던 면명(面名)
까지 의견 전설의 뜻을 담고 있는 오수면(獒樹)으로 바꿨다.(1992년)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롯해 서양의 유명연예인들이 개고기를 이유로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대회의 한국 개최를 반대했었다.
그러나 단정컨대 바르도의 나라 프랑스는 개고기를 먹지는 않아도 동물 사랑은 거짓이다.
대중 앞에서 하는 온갖 모션(motion)은 위선이고 허위라고.
개가 역상(轢傷)으로 신음해도 보는 눈이 없는 곳이면 아무도 구조하려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의 나라다.
피레네산맥의 프랑스 땅은 자기네의 생명줄에 다름아닌 온갖 가축 시체들의 야적장이다.
죽으면 묻어주기는 커녕 마구 버려서 앙상하게 박제가 된 시체들의 나라.
우리나라의 신흥, 성장산업으로 자리매김되어 가는 듯한 애완동물의 실상은 어떤가.
펫코노미(pet+economy), 펫티켓(pet+etiquette), 펫팸(pet+family)등의 신조어가 양산될
정도로 펫 신드롬(pet syndrome)에 걸려 애완 이상의 극존칭 반려(伴侶)가 되었다.
노부모는 먼 여행지에 버리거나 요양원에 유폐하면서도 집 나간 펫을 찾기 위해 사례금을
건 방(전단지)을 붙이고 찾아나서는 기현상의 나라로 변했다.
애완견과 개 용품 값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애완견 인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유기견도 그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한 통계에 의하면 2014년에 80.000마리였던 유기동물이 2017년에 100.000마리를 넘었다.
버려지는 개가 하루에 262마리(年95.630?)로 애견 후진국이란다.
보호소에 머무는 23일(평균) 이내에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로 처리되고 이 과정의 관리
비용도 2015년 현재 128억8천만원이 들었으며 크게 증가하고 있단다.
죽을때까지 기르는 개는 12%에 불과하며 날로 늘어나는 이 많은 유기견을 누가 버렸는가.
보신탕 애호가들이 그랬을 리 없고 유기라는 단어는 소위 애견가들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러고도 애완이니 반려니 하며 보신탕과 그 애호가들을 비난하고 규탄할 수 있는가.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자신의 취향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모방의식이다.
내 딸이 십수년 기른 개는 노환(?)으로 병원 출입이 잦다가 거금을 들여서 입원과 수술을
거듭했음에도 사망했는데 딸의 처신을 이해하면서도 동의할 수 없다.
화장장에서 화장하기까지 몇날을 울고불고, 장지(pet묘원)가 마련될 때까지 거실에 제청
을 차려놓고 추모(?)하고 있는데 단언하건대 내가 죽으면 저렇게 애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가시적인 열도와 강도에서는 펫에 뒤진다 해도 부녀의 관계는 펫을 포함한
다른 무엇도 비교하고 우열을 논하는 짓를 허용하지 않는 천륜(天倫) 관계다.
(인격적 관계라는 사람을 펫으로 대체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다른 기회로 미룬다)
2)
1941년 여름에 개복수술로 살아난 7세 소년의 가족에게 집도의의 한 당부가 있었다.
대수술로 살아나기는 했으나 회복하려면 보신탕을 꾸준히 먹여야 한다고.
현 시대와 달리 명약이 없던 당시의 실정은 그랬다.
소년의 조부는 손자를 살리기 위해서 기르던 백구를 용인(用人)을 시켜 잡게 했다.
길 동무에 보디가드, 메신저 등 3역으로 애지중지 했지만 손자에 비할 수 있는가.
하루 세끼의 식사때마다 곁에 앉아 계셨기 때문에 소년은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보신탕이 역겹고 보신탕 기피증에 걸릴 정도의 힘겨운 반년 생활 끝에 살아난 소년.
그후 77년을 더 살아 오늘에 이른 그가 바로 나다.
이처럼 내게 보신탕은 애호라기 보다 운명적이다.
그 77년 사이에 배를 4번이나 더 열어야 했는데 보신탕은 그 때마다 나를 회복시켜주었고
기피하다가도 사활이 걸린 결정적 순간에는 해결사로 받아들였으니까.
다른 음식도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지는 시도해 보지 않았으므로 모르지만.
가축과 야생 불문하고 동물들에게도 인간에 비해서는 워낙 낮은 단계지만 나름의 충효가
있고 질서와 예절도 있고 의리와 사랑 등 정서가 있다.
못된 사람에게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판이 따르지 않는가.
개 외에도 충우(忠牛) 의우(義牛)의 전설도 있고 맹수에게도 보답하는 의리가 있다.
새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놀고 다람쥐도 산(山)사람에게는 밥달라고 조른다.
의견, 충견이라지만 남은 물론 제 주인까지 물어뜯는 못된 개도 있고 식탐(食貪)과 성욕(性
慾)으로는 개를 당할 동물이 없다.
까미노에서 세계 각국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게 될 때가 자주 있었다.
특히 유럽인들이 말고기 정식을 주문할 때 나는 말고기 외의 아무것이나 좋다고 응수했다.
그들은 말고기 기피 이유를 내게 물었다.
딱히 내세울 이유 없이 정서적 거부일 뿐인데,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자식 사랑의 정서가
말을 능가할 동물이 없다는 점이라 할까.
보신탕에 대해 부언하면, 우리 조상의 개에 대한 정서와 서양인과의 보신탕 논쟁이다.
많은 농촌에서 겨울이 지나면 겨울에 낳은 강아지를 수소문해서 얻어다(공짜) 길렀다.
한여름 복날에 대비한 사육이었기 때문에 많은 개가 초복까지만 살았다.
초복에 무사하면 중복까지 연명하고 중복을 넘기면 말복까지 갔다.
초. 중, 말 등 3복에 무사하면 3번의 한숨 끝에 1년 더 살 수 있었다.
그 시대와 다른 점은 그 때는 복날의 특별 영양식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사철식이라는 것.
육류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는 서민들에게 복(伏)날은 복(福)날이었으나 이 시대는 갖은
고기류를 포식함으로서 과잉 섭취가 되레 문제가 되어 있다.
이에 더하여 화장발이 잘 받는다는 이유로(사실 여부를 나는 모름) 남성 전용식에서 성인
여성 애호가의 증가가 괄목할 수준이다.
서양인들은 이같은 우리를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다.
개를 잡아먹는 미개인 또는 야만인이라고 물고 늘어지는 그들에게 한방 먹인 얘기가 있다.
우리는 '똥개'라는 식용개를 사육해서 복날이라는 특정일에 먹는다.
그러나 요긴하게, 실컷 부리던 말도 잡아서 먹고 개구리를 비롯하여 먹지 않는 것이 없는
너희야 말로 야만인이 아니냐.
다시 사라져버린 젊은이
비록 스쳐갔을 뿐이라 해도 이런 생각들로 인해 지연된 걸음이 젠츠지 직전 헨로상휴게소
(おへんろさん休憩所/도로좌측)에서 다시 멎었다.
'의료센터 앞 조제약국'(医療センタ- 前 調剤薬局) 건물 앞면에 가건물로 달아낸 듯 한데
"헨로상, 수고 많으십니다.(お疲れ様です)로 시작해 다양한 오셋타이를 제공하겠단다.
점내(약국?)에 비치되어 있다며 열거한 오셋타이가 흡족한지 들어가려 하는 젊은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공짜에 빨려들어가다니.
목적지(善通寺)가 목전인데도 서두르는 내가 몹시 야속했을 것이다.
숙박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작이 반" 이라는 우리 속담보다 "99%를 이뤄야
반에 도달한다는 그들의 속담이 현실적이기 때문인데.
이 지점에서 48번현도를 건너 남동으로 계속 가면 젠츠지 인왕문 앞(우측)에 당도한다.
한데, 뻔한 길을 두고 90도 우측의 48번현도를 따라 걷고 있는 나.
공중에 걸려있는 젠츠지 입구 안내판과 맞닥뜨려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왜 그랬는지?
내가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도 젊은이는 왜 고분고분 따랐는지?
자기가 믿고 따르는 내비의 지시를 외면하고?
모두 불가사의한 해프닝이었으나 되돌리는 것 보다 진행하는 편이 나은 젠츠지 입구 대형
주차장에 당도해 있는 우리.
차량 참배객들의 주 출입구인 히로타 강 위의 사이세이교(濟世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코보대사가 중국유학시절에 낙양의 낙수에 놓여있는 천하의 명교인 천진교를
건넜는데 그 고사에 의해서 이 곳에 천진교를 복원하여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유래판을 달고 있는 돌다리, 인도교를 건너 정각문(正覺門)을 통과했다.
인왕문(동문?)의 반대편(서문?)으로 입장한 것이다.
당(唐)에서 귀국한 코보대사가 사누키(讚岐)의 호족(豪族)이었던 부친(佐伯直田公善通)이
기진(寄進)한 장전(莊田) 4만5천평방m의 광대한 대지에 세웠다는 사찰이다.
당에 유학중 스승이었던 혜과화상(惠果和尙)의 청룡사(靑龍寺)를 모델로 하여 다이도(大
同)2년(807)에 착공, 코닌(弘仁)4년(812)에 칠당가람을 완성했단다.
사명(寺名) 젠츠지(善通寺)는 부친의 휘(諱)인 '善通'를 따서 지었고.
코보대사가 태어난 곳, 진언종의 총본산사(總本山寺) 답게, 워낙 광대해서 어데서 어데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선후를 가리기 엄두가 나지 않은 젠츠지.
이런 때 먼저 찾아가는 곳은 당연히 납경소가 되겠지만 방향을 슈쿠보로 틀었다.
최급선무는 숙소문제의 해결인데 형식은 다르지만 숙박소라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숙소 문제가 해결되면 여타는 모두 하여가(何如歌/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가사에 불과하니까.
참배객과 탐방객이 몰려들어도 워낙 너른 경내라 의식이 되지 않았으나 슈쿠보는 달랐다.
사누키우동집 여인이 전화로 확인한 대로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350명 정원의 슈쿠보.
젊은이는 밖에 대기하고 들어간 내가 표현이 부족했나.
예약하지 않았으면 말도 꺼내지 말라는 식으로 내쫓듯 했으니.
이 상황을 지켜본 젊은이의 표정은 완전히 변했고 길을 찾아보자는 내 말이 가소로운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렸다.
타에코의 오셋타이 우동집 이후 함께 걷는 동안에 예상한 일이라 충격은 없지만 괘씸한 것
만은 분명했다.
정상인이라면 어제는 내가 해결했으므로 오늘은 자기 차례라는 자세일 텐데.
'타케모토 아키코'와 '젠콘야도 타케모토'
아루키헨로상 야숙일람표를 다시 꺼내어 보다가 여간 아닌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점 찍은 숙소는 75번츠야도 아닌 젠콘야도타케모토(善根宿武本).
어쩌다 이처럼 경솔한 짓을 하게 되었을까.
"젠츠지사무소(善通寺寺務所)에서 소개받으시요"
사무소가 어데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 들어가서 프런트(front)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조금 전에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남(男)이 민망한 듯 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여기가
사무소라며 몇사람이냐고 물어왔다.
젊은이를 찾아볼 요량으로 2명이라는 내 응답에 열쇠와 약도를 주며 전후 사정을 말했다.
츠야도를 물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라는 것.
츠야도와 젠콘야도는 용도가 전혀 다른 집임을 알면서도 내가 실언한 것이다.
그렇다해도 내 착오인 것을 바로 알았을 텐데 바로잡아주지 않고 내쫓은 것은 오모테나시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짓이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미안해 한 것이리라.
젠콘야도는 이 사무소에서 2분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2층 단독주택 통째로다.
1. 2층 방과 주방 등이 일반주택 그대로다.
"도착후 현관에 있는 전화로 집주인에게 연락해 주세요. 전화번호)" 라는 이용자 준수항목
이 있는데 내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인가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그녀(?)가 다녀갔다.
외국영감이라 말이 잘 통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는지'오야스미나사이'(お休みなさい/편히
쉬십시오) 정도로 말하고 돌아갔는데, 이 때부터 내 할 일(推理)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시코쿠헨로 최대의 사찰이라 해도 초대형 슈쿠보를 운영하면서 츠야도 아닌 무료
젠콘야도를 운영할 리 없다.(善根宿는 개인 또는 사찰과 무관한 단체가 운영하는 숙소다)
"무료숙박시설을 이용하기 원하면 젠츠지의 사무소(寺務所)에 신청하세요"
"도착하면 집 주인에게 연락하세요"
이같은 요망은 집(善根宿) 주인이 사찰 사무소에 위탁 운영하고 있음을 뜻한다.
조금 전에 다녀갔으며 일본여인 중에서는 장신에 건장하기가 남자 못지 않은 여인이 바로
'젠콘야도타케모토'의 여주인 '타케모토아키코'임이 틀림 없다.
또한 젠콘야도의 벽에 걸린 감사장(香川縣敎育委員會가 武本明子에게 준/ 내용 : 귀하는
여러 해 동안 교직에 종사하여 우리 현 교육의 향상에 기여 . . )의 연도가 1985년(昭和60)
이므로 그 때까지 교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곧 알게 된 것은(거실 탁자의 책자들을 종합해) 그녀는 고등학교 영어교사였으며 '쿠카이
노 푸케이'(空海の風景/(司馬遼太郞 著)를 영역, 출판했는데 증쇄 3판까지 나왔다.
코보대사의 열광적 팬(pan)인 타케모토는 젠츠지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단독주택(民家)을
구입해 도보 또는 자전거 헨로상들에게 무료숙소로 제공하는 오셋타이를 하고 있다.
그 까닭(무료 젠콘야도를 운영하게 된)은 지극히 단순한 것 같다.
코보대사를 열렬히 흠모하는 그녀는 코보에 관계된 책을 번역(영역)했다.
이 일로는 흡족하지 않은 그녀는 코보대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려 했는데, 그 일이 바로
이 젠콘야도(무료숙박시설)의 자비 운영이라는 것.
코보대사의 팬들을 돕겠다. 도보 또는 자전거 헨로상들은 코보대사의 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데 그 도움이 무료숙박시설의 제공이라는 논리다.
팬이 아닐뿐 아니라 건건사사 시비하는 내가 이 도움의 수혜자가 된 것은 이변이겠지만.
예수까지도 고향땅에서는 존경받지 못했다.
그러나 코보대사의 고향땅은 이처럼 열광적이다.
이스라엘과 일본의 토양(土壤)에 그 까닭이 있을까
사찰경영의 귀재인 코보대사가 인간경영에서도 성공했음을 의미하는가.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거리의 준비를 겸해서 젠츠지 주변(旅館과 民宿, 골목길 등)을 두루 살폈으나 보이지
않은 젊은이.
행실은 괘씸하기 짝 없고, 외적 이미지는 물론 매정한 품성까지 담임선생이었던 구로타와
한판임에도 그를 찾아나선 까닭은 너른 집을 독점하는 민망함을 줄이려는 것 뿐이다.
코보의 팬이 아닌 내가 타케모토아키코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고 싶기도 하고.
이 젊은이가 벼룩의 간 만큼이라도 후덕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이 밤이야 말로 거져 주는
행복에 취하는 밤이 되었으련만.
내가 젠콘야도나 츠야도에서 1박할 때는 일본 청년 니시오와 동행했던 초기의 며칠과 58
번셍유지의 츠야도 외에는 공교롭게도 늘 나홀로였는데 이 밤 역시 그랬다.
선착자로서 후래자를 막는 심술을 부리거나 어떤 훼방을 놓지 않았는데도 내가 이용하는
날에는 아루키헨로상이 가뭄에 콩나듯 했으니 무슨 기연인가.
젊은이 찾기를 포기하고 경내외를 두루 살펴본 후 인근 대형마트(마루나카)에서 맥주1병,
소량의 김치가 포함된 저녁거리를 준비해 돌아왔다.
시코쿠헨로 종반에 들어서 헨로 최초의(유일한) 완벽한 주방이 있는 집이지만 이용할 일
없는 것이 유감인 저녁 식사를 마쳤다.
일본인 집을 방문한 적이 없으므로 평범한 서민의 집 구조를 모르는 내게는 일본의 보통
가정생활 형편을 들여다 볼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체 하며 외화내빈인 우리와 달리 겉은 빈약하나 내실 위주인 그들의 삶이 이 작은 집을
통해서도 엿보인다 할까.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시작이 반'이라는 사고(思考)지만 99%를 성취해야 반을
이뤘다고 보는 저들이라 집 구조도 축소지향적이면서도 낭비 공간이 없고 꽉찬 느낌이다.
2층의 방, 1층의 거실과 방, 주방 모두가 훌륭한 침실이 되므로 몇개의 팀이라도 부족함이
없겠는데 해결되어야 할 의외의 조건 때문에 활용도가 어이없게 떨어지고 있다.
"동숙의 경우에는 동성으로 제한합니다"(同宿の場合は, 同性にかぎります)
저녁식사 때에도 헨로상이라고 밝인 여인이 선착자인 내가 혼자지만 남자라는 것을 확인
(전화로)하고는 포기한다고 할 때 얼마나 미안했는지.
그 여인도 솔로(solo)였기 망정이지 다수의 팀이었다면 얼마나 큰 손실인가.
더구나 코보대사의 팬이 아니며, 따라서 결격자인데도 단지 선착했다는 이유만으로 다수
의 코보대사 팬들을 몰아냈다면 내가 그들의 권리를 유린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이 여럿이고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룰(rule)의 1항목을 바꾸고 그에 맞게
집 구조를 조금 고치면 양성이 이용할 수 있고, 활용도가 배로 늘어나련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