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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준비자료실 스크랩 문서자료 주의 날(The Lord`s Day)에 대한 연구(왜 주일날 예배를 드리나?)
suleja 추천 0 조회 46 09.09.21 11: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료출처 :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

주의 날(The Lord's Day)에 대한 연구

리차드 보캄 | 영국 세인트 앤드류대학교 신약학 교수



"주의 날"(Lord's Day, kuriake hemera)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단 한번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기독교의 일요일 예배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해 고려할 때 반드시 다룰 수밖에 없는 중요한 표현이다. 이 글의 처음 두 장에서 우리는 이 표현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밝힐 것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요한계시록 1장 10절 이전의 시기에 드려졌던 일요일 예배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과 그 증거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장에서는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문맥이 우리가 기독교의 일요일에 대해 이해하는 데 어떤 빛을 던져 주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퀴리아코스(kuriakos, '주께 속한')의 용법
그 동안 퀴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에 대한 연구들이 수없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오해를 피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kuriakos라는 단어의 용법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단어는 칠십인경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교 문헌에서도 이 표현에 대한 어떤 힌트나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세속 헬라 문헌들과 신약성경, 2세기 기독교 문헌들, 그리고 이 말을 가장 먼저 폭넓게 사용하기 시작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의 글들에서 이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1

세속 헬라 문헌이 말은 파피루스와 비명(inscriptions)에서만 발견된다. 그래서 한 때 학자들은 바울이나 초대 교회가 이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록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이 이 단어가 언급된 가장 최초의 본문이기는 하지만, AD 68년에 처음으로 발견되는 세속적인 용법이 기독교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거의 모든 용례들은 황제의 통치, 특별히 재정과 연관된 것들이다. kuriakos는 phiskos나 psephos, logos, chrema, hupersia 등의 명사들과 함께 '황제의'(imperial)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리델과 스코트(Liddell and Scott)는 ho kuriakos가 '마술을 통해 불러내진 혼'(spirit invoked in magic)을 의미하는 경우와 kuriakos가 황제보다는 통상적인 의미의 주인을 가리키는 경우(AD 137년) 또한 언급한다. 그러나 세속 헬라 문헌에서 이 단어가 황제를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신약 성경kuriakos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과 요한계시록 1장 10절, 이 두 구절에서만 사용된다.

2세기 기독교 문헌kuriake hemera나 kuriake라는 표현은 2세기 기독교 문헌중에서 Didache 14:1; Ignatius, Magn. 9:1 ; Gospel of Peter 35, 50 등 총 열 세 구절에서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라틴어 번역만 남아 있는 이레니우스(Irenaeus), Haer.의 몇몇 구절에서 dominicus는 scripturae, scriptura, ministeria, argentum, bona, passio와 같은 명사들과 함께 사용되었다.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kuriake hemera가 두 번 사용된다: Str. 5:14; 7:12 (PG 9:161A, 504C). 클레멘트는 또한 kuriakos라는 말을 24가지 명사들과 함께 28번 사용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용법들로 미루어 볼 때, kuriakos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사용되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사용되는 (tou) kuriou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kuriakos는 어떤 한 가지 용법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는 분명 kuriakos와 (tou) kuriou라는 말을 상호교환가능한 방식으로(interchangeably), 거의 그 차이를 말하기가 어려울 만큼 유사한 의미로3 사용하고 있다.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 때에 와서 kuriake (hemera), '주의 날'과 kuriakai graphai, '주의 성경', 이 두 표현만이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후자는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에게서 각각 세 번씩 발견되고,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게서도 발견된다. 이레니우스나 클레멘트 모두 graphai (tou) kuriou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한편, kuriakon deipnon('주의 성찬')은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교부들에게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데,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을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정도로 그친다. kuriakos가 언급되는 또 다른 문헌인 파피아스의 kuriaka logia('주님의 말씀들')의 경우에서도 이 말은 전문적인 용어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우리는, 포어스터(W. Foerster)처럼 kuriakos는 (tou) kuriou와는 그 의미가 다르며, 이 말이 deipnon이나 hemera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예컨대 logos tou kuriou나 parousia tou kuriou에 비해 주님과의 연관성이 보다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tou) kuriou를 간접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지만(예, poterion, 고전 11:27), 파피아스는 kuriakos를 주님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표현하는 말(kuriaka logia)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 이전 문헌에서는 이 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우리가 설명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어떻게 확대되었느냐가 아니라 이 말이 어떻게 폭넓게 사용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이 말이 그토록 늦게 기독교의 전문적인 용어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말이 1, 2세기의 세속 헬라 문헌에서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말은 오로지 두 영역, 곧 황제의 통치와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만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이 말은 단수로서의 kurios('주')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kuriakos라는 형용사 형태는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kuriakos는, 초대 교회 저자들이 칠십인경에 이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고, 신약 성경에서도 이 말이 아주 드물게 사용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탓에 언어학적 보수주의(linguistic conservatism)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이 말의 사용을 확대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 이전에 kuriakos가 단 한 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더 나아가 왜 이 말이 많은 구절들에서 kuriake hemera라는 문구 형태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용어는 그저 단순하게 hemera (tou) kuriou라는 말과 상호교환가능하게 사용되는 표현정도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확정된 용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후자는 종말론적인 주의 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사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주의 첫 날(혹은 안식후 첫 날)을 그들의 주(kurios)의 이름을 본 따서 hemera (tou) kuriou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주의 날로 오해될 소지가 많은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kuriake hemera가 기독교의 일요일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kuriakos라는 말이 tou kuriou에 대한 동의어로 널리 사용되게 된 것은 아주 나중인 것에 반해, kuriake hemera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hemera (tou) kuriou라는 표현에 대한 대안으로 보다 일찍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나중에 kuriake라는 형용사만 가지고도 이 날을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은 kuriake hemera라는 표현이 그만큼 오래 전부터 널리 사용된 때문이다. 종종 어떤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kuriakos가 고린도전서 11장 20절과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만 나온다는 사실을 근거로 kuriakon deipnon과 kuriake hemera, 이 두 용어의 상관성에 대한 이론을 펼친다. 특별히 전자로부터 후자가 파생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주의 날의 기원에 관한 로도프(W. Rordorf)의 논증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의 측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견해는 신빙성이 별로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1) 위에서 살펴본 kuriakos의 2세기 용법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전 시기 문헌에서 이 말이 그다지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1세기 크리스천들이 이 말을 단지 위의 두 문구로만 제한하여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약 성경에서 kuriakos를 언급하는 두 구절은 이 용어의 매우 제한된 용법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여러 용법들 중에 우연히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2) 바울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거나 (tou) kuriou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말을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사용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서 kuriakos를 사용하는 것보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그렇다면 바울이 deipnon tou kuriou나 to kuriakon ergon이 아니라 kuriakon deipnon(고전 11:20)이나 to ergon tou kuriou(15:58; 16:10)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서는 문체적인 이유, 곧 kuriou과 diamonion을 분명히 대비시키기 위해, 바울이 kuriakon poterion이나 kuriake trapeza라는 표현을 피했을 수 있다. (4) kuriakon deipnon이나 deipnon tou kuriou 모두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경우를 제외하면 히폴리투스(Hippolytus, Apost. Trad. 26:5; cf. 27:1)4 이전의 기독교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말이 어떤 전문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있는지(아마도 고린도인들은 단순히 to depnon이라고만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용어인지 아니면 고린도인들의 용어인지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말이 그 당시에 얼마나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기가 어렵다. (5) 이교의 제사 음식과 주의 성찬을 의도적인 대조하고 있는 그 문맥을 살펴 볼 때, 신비 종교들에서 제의의 여러 요소들, 곧 성전이나 제사, 제사장, 예배자 등을 표현하고자 신의 이름에서 따온 형용사들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바울이나 고린도인들이 kuriakos를 그런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수 있다. 비록 이와 같은 가능성은 하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만일 고린도인들이 기독교의 제의적 제사를 이를테면 Dionusiaskon deipnon과 구별시키려고 의도적으로 kuriakon deipnon이라는 말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의미가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관성은 후대의 저자들이 특별히 기독교의 제의적인 성찬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방으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때 왜 이 표현을 포기하거나 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다. (6)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kuriakon deipnon의 사용과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kuriake hemera를 사용한 때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어떤 날의 이름이 성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펼 수 있기 위해서는 kuriakon deipnon이라는 용어가 그 40년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지리적으로 볼 때 소아시아와 시

리아에 있는 교회들에서도 keruake hemera라는 용어가 바로 이 말에서 유래할 수 있을 만큼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kuriake hemera라는 드문 표현보다는 주의 성찬에 대한 다른 용어들(eucharistia과 agape)이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볼 때 도미티안 치하의 소아시아 교회들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므로 로도프의 이론은,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입증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kuriake hemera를 단순히 '주의 성찬의 날'의 축약형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1세기 후반의 크리스천들이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는 말을 '주의'(the Lord's)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그 이름 자체만 가지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는 이 말들을 그런 식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2. 퀴리아케 헤메라(kuriake hemera, '주의 날')라는 용어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kuriake hemera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4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종말론적인 주의 날; (2) 안식일(토요일); (3) 부활절; (4) 일요일. 처음의 두 해석은 kuriake라는 말이 위에서 인용한 2세기 문헌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가정한다. 세 번째 해석은 kuriake라는 말이 2세기 문헌들에서 어떤 때는 부활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또 어떤 때는 일요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고 가정한다. 2세기 문헌들이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나오는 kuriake의 의미를 확정짓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2세기의 문헌들의 증거는 분명 우리의 논의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증거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Didache 14:1 'Kata kuriaken de kuriou'종종 "주님의 날에"라고 번역되는 이 표현에 대해 배치오치(Bacchiocchi)는 여기서 암시된 명사는 hemera('날')가 아니라 didache('가르침')이며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의 주권적인 가르침을 따라"(according to the sovereign doctrine of the Lord)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티바웃(J. B. Thibaut)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디다케의 독자들이 didachen을 넣어서 읽었을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kuriake('주의')의 수식을 받는 명사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또 다른 경우에 그 암시된 명사가 다름 아닌 hemera('날')이기 때문이다. Apostolic Constitutions(7:30:1)도 이와 같은 식으로 해석한다. 더욱이 티바웃의 제안은 그 뒤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kuriou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오데(J.-P. Audet)는 kuriaken이 원래 본문에 있던 hemeran대신 나중에 설명구로 삽입되었다고 보고, 이 구절을 kath' hemeran de kuriou로 수정한다. 이 제안은, hemera kuriou가 다른 모든 곳에서 종말론적인 주의 날보다 예배의 날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면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kuriou라는 중복적인 표현이, 로도프가 제안하듯 그 날의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구절에서 kuriake가 이미 주 예수를 지칭하는 의미가 퇴색된 하나의 상투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비록 그 문맥으로 볼 때 교회에서 매주 일정한 날에 규칙적으로 예배가 드려졌음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로도프처럼 kuriake는 "부활의 일요일을 가리키고 있음에 분명하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 Magnesians 9:1"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meketi sabbatizontes alla kata kuriaken zontes). 그리고 우리의 생명 역시 바로 이 날에(en he) 그를 통해, 그의 죽음을 통해 온다(aneteilen)."그 동안 이 구절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헬라어 사본에서 이 구절은 kata kuriaken zoen zontes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생명을 따라 산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라틴어 텍스트(secundum dominicam)를 따라 zoen을 생략하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로 번역한다. zoen을 텍스트에 포함시키려 할 때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 다음 구절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크리스천들이 일요일에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직역: 올라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서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보다는 천체들이 올라가는 것을 가리키는 aneteilen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이그나티우스가 이교도들이 일요일을 명명하는 이름, 곧 "해의 날"을 염두에 두고서 일요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해가 올라오는 것과 비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그나티우스가 주의 날을 직접 보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희박한 구약의 선지자들을 이 문장의 주어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주석가들은 이 문장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 개종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 문장이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고 해도, 이그나티우스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얻을 수 있게 된 새 생명의 소망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의미했는지도 모른다.

이그나티우스는 안식일과 일요일, 이 두 날을 서로 대조하기보다 두 가지 생활 방식,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다시 말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따라 사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따라 사는 것"을 대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그나티우스가 유대교를 특징지우는 안식일과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새 생명을 상징하는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새 날, 이 두 날 사이의 대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가장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kuriake가 부활의 일요일이 아니라 매주의 일요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강조점이 생활 방식에 있으므로 이그나티우스가 매주의 안식일을 폐하기 위해 기독교가 매주 모여서 예배하는 날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5 동시에 우리는 마치 이그나티우스가 매주의 기념보다는 매년의 기념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언급만 가지고 부활절을 말해서도 안된다.

Gospel of Peter 35, 50여기서 he kuriake는 복음서의 부활 기사에서 사용되던 mia (ton) sabbaton('안식 후 첫 날')이라는 표현 대신에 사용된 것이다. 우리는 kuriake가 어떤 날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말이 일요일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부활절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2세기 후반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주교가 로마의 소테르(Soter) 주교에서 보내는 서신에서(약 170년 경) 매주 드리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분명하지는 않다: "오늘 우리는 주의 거룩한 날(kuriake hagia hemera)을 지키면서 당신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Acts of Peter(Act. Verc. 29)의 한 구절에서 dies dominica('주의 날')는 분명 '안식일 후 첫 날'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Acts of Paul은 사도들이 "주의 날을 바로 목전에 둔 날, 곧 안식일"에 기도했다고 묘사한다. 이 구절들 가운데 우리가 주의 날을 1년에 한번 있는 모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Epistula Apostolorum 18(콥트어)은 그리스도께서 "나는 옥도아드(Ogdoad), 곧 주의 날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옥도아드를 주의 날과 동일시하는 예가 클레멘트에서 인용되는 발렌티니안의 글에서도 발견된다(Exc. ex. Theod. 63; "주의 날이라 불리는 옥도아드"). 반영지주의적인 색채가 두드러지는 Ep. App.는 그리스도께서 옥도아드에 존재하게 되셨다는 보다 명백한 영지주의적 개념에 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8일'에 부활하셨다는 것 또한 이차적으로 언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옥도아드와 주의 날을 연계시키는 영지주의적인 개념은 기독교에서 kuriake가 일요일, 곧 '제8일'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사용했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영지주의 저자들은 기독교가 제8일을 종말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이 용법을 받아들여 이것을 옥도아드의 우주적 역할과 융화시켰음이 분명하다. 이 두 영지주의적인 용법의 예들은 2세기 후반에 kuriake가 일요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더 나아가 kuriake의 이러한 용법이 심지어 이집트로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조 증거가 된다. kuriake hemera가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이 사실이지만, 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 표현(과 그 라틴어 동의어인 dies dominica)이 보다 기독교 세계 전역을 통해 매주 마다 예배하는 날에 대한 통상적인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일요일인가 부활절인가?그러므로 2세기 후반의 증거는 일관성을 띄고 있으며 전혀 애매모호하지 않다. 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결론은 이 후대의 용법이 디다케(Dicache)나 이그나티우스, Gospel of Peter에서 발견되는 초기 용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문헌들에서도 kuriake는 일요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초기 문헌들이 일요일이 아니라 부활절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기독교가 매년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절은 지킨 것이 매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일요일을 지킨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며, 따라서 매주 모여 예배하는 일요일은 부활절을 지키던 것이 발전된 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kuriake라는 이름도 원래는 부활절에만 적용되던 것인데 나중에는 일요일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1) 일요일을 kuriake로 불렀다는 분명한 증거들이 주로 2세기 후반 이후의 문헌들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활절을 단순히 kuriake라고 불렀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 기독교의 일요일과 그 이름인 kuriake가 부활절 일요일(Easter Sunday)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이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세기 크리스천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로마의 관습을 따라 일요일에 부활절을 기념했지만, 콰르토데시만이라고 불리는 이들(Quartodecimans; 라틴어 quartus deciman [14번째]에서 온 말)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기념했다. 2세기 초반에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교회들은 분명 콰르토데시만이었으며, 시리아에 있던 교회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Didache와 Gospel of Peter, 이그나티우스의 마그네시아인들(Magnesians)에게 보내는 서신(계 1:10 또한)이 기록된 것은 바로 이 지역들에서다. (3)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매주의 일요일을 지키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학자들 사이에 콰르토데시만의 부활절 전통이 보다 오래된 것인지, 아니면 로마의 관습이 보다 오래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세비우스의 증거만 가지고는 부활의 일요일의 유래를 2세기 초반 그 이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매주 드리던 일요일 예배 역시 최소한 부활절 일요일보다 시기적으로 뒤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0장 7절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Barn. 15:9이 늦어도 2세기 초반의 증거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스틴이 First Apology(약 152년 경)에서 이제 막 시작된 관습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4) 이 견해는 어떻게 매주 지키는 절기가 매년 지키던 절기에서 유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2세기 후반부터는 일요일이 각처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매주 모여 예배하는 날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배를 일요일에 드려야 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것과 모든 기독교권이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지켰다는 보편성 자체가 이와 같은 관습이 기독교의 초창기에 유래한 것임을 강력하게 지지해 준다. 이그나티우스와 저스틴 사이의 어떤 때에 시작된 관습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에비온파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일요일에 예배하지 않았던 기독교 그룹이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을 만큼 통일성을 띤 채 확산될 수 있었겠는가? 사실 부활절을 니산월 14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지키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이미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던 일요일 예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개연성이 높다. 이제 우리는 Didache와 이그나티우스, Gospel of Peter에서 언급되는 kuriake가 적어도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상당히 널리 사용되고 있던, 기독교가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하는 안식 후 첫 날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kuriake hemera 역시 일요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개연성이 훨씬 커졌다. 요한은, 그 당시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키는 콰르토데시만이었을 수도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편지를 썼다. 만일 요한이 도미티안 치하에서 그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면, 그는 이그나티우스가 똑같은 지방의 마그네시아인들(Magnesians)들에게 보내는 편지보다 약 20년 앞서 쓰고 있는 셈이다. 요한이 보다 일찍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날을 지칭하는 똑같은 이름이 하나의 종교적 축제에서 다른 축제를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었다고 보기는 지극히 어렵다. 2세기 저자들은 하나같이 kuriake를 일요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일요일인가 종말론적인 주의 날인가?아직 우리가 다루지 않은 한 가지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kuriake hemera가 종말론적인 주의 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환상을 받는 가운데 그 자신이 종말의 때로 인도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배치오치(Bacchiocchi)가 이 견해를 지지하는 논증을 펼쳤지만,6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의 관찰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1) 왜 요한은 여기서 다른 신약 성경 저자들처럼 hemera (tou) kuriou라는 칠십인경에도 언급되는 보다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가?7 이것은 요한이 kuriake hemera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이 말은 아직 안식 후 첫 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결정적인 논증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의 용법이 독특하다는 것 자체가 이 말을 종말론적인 주의 날과 연관시키는 위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kuriakos는 통상적인 혹은 전문적인 문구들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며, 위에서 살펴본 예들 중 다수가 사실은 독특한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kuriakos hemera라는 다소 생소한 문구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요한 당시에 kuriakos라는 말이 "황제의"(imperial)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주목하고 워드플레이를 하려는 동기에서였을 수 있다. (2) 그러나 만일 kuriake hemera가 이미 일요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면, 요한이 스스로 혼동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 말을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Didache나 이그나티우스, Gospel of Peter에 나오는 kuriake의 용법은 이미 확정된 어떤 용법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kuriake hemera라는 말이 도미티안 치하에서 이미 일요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을 개연성은 훨씬 커진다. 그리고 만일 요한이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요한계시록을 썼다고 한다면 위의 견해는 그다지 큰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의 문맥 역시 위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주의 날"은 요한의 모든 예언들의 내용을 기술하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6장 17절과 16장 14절에는 요한이 "하나님의 큰 날"을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날은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리키지, 그 날에 이르는 어떤 예비적인 심판을 가리키지 않는다. 일곱 교회가 처해 있던 그 당시 상황이나 21∼22장에 나오는 새 창조 그 어느 것도 이 용어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최후의 심판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오히려 그의 예언은 이 최후의 때를 지시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가는 것 같다. 요한 자신이 환상이 바뀔 때마다 시간적인 관점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kuriake hemera가 가지는 종말론적이고도 반제국적인 함축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이 말이 일요일을 의미한다는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도 보다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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