뽄떼베드라를 벤치마킹한다면?
이즈음의 맑은 날씨는 비가 잦은 갈리씨아의 여름철로는 뻬레그리노스에게 많이 부조했는데,
굵은 비가 밤새워 줄기차게 내렸다.
한데도 가랑비로 바뀌었을 뿐 내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을씨년스런 6월 13일(토) 아침.
새벽같이 모두 떠난 후의 알베르게는 촌스럽던 분위기는 가셨지만 적막이 흐르고 다시 홀로된
나는 주체하기 힘들 만큼 허전한 아침을 달래야 했다.
왜 그랬을까.
정녕, 밤중에라도 마리벨이 다녀가 주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우, 초청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며, 아마도 그랬을 텐데.
부득이한 일 때문이었다 해도 결례한 결과를 초래했으니까.
아마도, 서로 다른 문화로 인한 불가피한 충격일 것이라고 이해는 하면서도.
당초의 내 계획은 뽄떼베드라에서 마리벨과 재회한 후 로저가 있는 뽀르뚜로 가는 것이었다.
로저를 만난 후 뽀르뚜에서 리스보아까지 역 코스 뽀르뚜 길 걷기를 마치고 세비야로 가는 것.
한데, 노르떼 길에서 막판의 가속으로 로저 교수와의 재회 약속일인 17일까지 4일간의 여유가
생김으로서 뽀르뚜 길의 해안로를 뽄떼베드라 해안에서 시작하려 한 것이었다.
전번에 프랑스 길을 단축한 1주일로 아라곤 길(Camino Aragones)을 걸었던 것 처럼.
이 곳(Pontebedra)에서 마리벨과 재회한 후 단절하지 않고 이어가려는 것.
그러나 출발지를 비고 해안으로 바꿨다.
간밤에 까사 뻬뻬에서 내게 관심 있는 분들이 권하는 중론을 따르기로 한 것.
뽄떼베드라에는 달리는 하이웨이가 있을 뿐 까미노가 없고,(뽀르뚜 길의 해안로는 Porto에서
Vigo까지를 말하며 Redondela에서 내륙길에 합류) 대서양은 우리나라의 서해안처럼 해안을
따라 걸을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두 하구(Ria de Pontebedra와 Ria de Vigo) 간에 서남으로 길게 위치한 반도형 도시라
해안을 돌아서 비고로 가려면 사고의 위험 외에도 꼬박 2일은 바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번의 내륙길 때는 뽄떼베드라~미뇨강(Valença) 구간에 2일, 발렌사~뽀르뚜(Porto) 4일 등
6일이 걸린 길을 4년이나 더 늙은 몸으로 4일 간에 끝내려는 것은 과욕 또는 무리가 아닌가.
서양의 발전하는 오래된 도시는 예외 없이 구도시와 신도시로 구분된다.
옛 것을 우리처첨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지 않고 온존하며 이에 조화된 발전을 도모한다.
시대감각을 따르는 새 도시는 구역을 달리해 건설하는데, 갈리씨아 지방의 4개 주(A Coruña,
Lugo, Orense, Pontebedra)의 하나인 주도(主都) 뽄떼베드라도 이에 해당한다.
12c에 중요한 상업중심지로 부상, 무역과 통신의 허브로 정점에 올랐으며 16c에 갈리씨아의
제1항구로 우뚝했으나 레레스 강(rio Lerez)의 퇴적물로 쇠퇴 일로였던 뽄떼베드라.
17, 18c에 반토막으로 위축 19c 초에는 소도시로 전락했다.
19c 중반에 지방수도로 변모한 후 20c에 들어서 갈리씨아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
했으나 스페인 내전(1936~39)과 프랑꼬 독재(1939~75)로 제동이 걸렸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주민이 타지역으로 떠났다.
1960년대에 일부 산업활동의 시작으로 지역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섰으나 심각한 환경 및 건강
문제를 야기함으로서 일부 분야의 폐쇄가 불가피해졌다.
급기야, 구 시가지와 도심의 대부분은 카 프리 시티(Car Free City/차없는도시)가 실현되었다.
뽄떼베드라는 그 정책의 효시(嚆矢)가 되었으며 동력 운송(自動車)은 거주자와 서비스로 제한
했고, 그나마도 시간당 30km 이하로 묶어놓았다.(2019년에는 10km이하로 감속?)
주도 뽄떼베드라 시는 스페인에서 보행자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메뜨로미누또'
(Metrominuto/도시의 각 지점 간의 거리와 도보, 운전, 대중교통 등의 대략적 시간이 포함된
回路圖)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뽄떼베드라는 세계의 관계된 상(賞)들을 싹쓸이하였고, 세계 유명 도시들(한국 제외)
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었단다.(머리는 빌리면 된다는데 한국에는 빌릴 머리마저 없는가)
한데도, 4년 만에 두번째 자고 가면서도 들른 곳은 알베르게와 까사 뻬뻬 뿐인 외고집 늙은이.
(전번, 비고대학교 뽄떼베드라 캠퍼스 방문 때 상당히 많이 살펴보기는 했지만)
다음에 한번 더 들를 구실이 마련된 것인가.
이른바 '카 프리 시티'를 시행하고 있는 뽄떼버드라는 주도(州都)지만 인구 8만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8만 인구라면 최소 단위의 지방시(市)다.
마음만 먹으면 '카 프리 시티'는 물론 불가능할 것이 없다.
그래서, 도처에 무수한 뽄떼베드라가 우후죽순처럼 태어날 수 있다.
십만 단위의 행정구역까지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수십만 단위에서 백만, 천만 단위의
대 도시가 뽄떼베드라가 되려 한다면?
이 또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역 방향 뽀르뚜 길 해안로 출발점, 뽄떼베드라에서 비고로, 비고에서 바이오나로
뽄떼베드라 역에서 08시 12분발 비고행 열차를 탈 수 있는데도 다음 차(09시06분)를 택했다.
왜 그랬는가.
정리할 미련이 무에 있다고.
인연이라 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인연이라잖은가.
잠시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일 것이련만.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 때문일까.
한여름의 주말(土)인데도 비고로 가는 열차 승객은 두 손에 꼽힐 정도였다.
차창(車窓)으로 들어온, 전번에 걸었던, 순방향 뽀르뚜길과 접근하거나 횡단하는 곳들이 있는
아르까데(Arcade)와 레돈델라(Redondela) 길의 주변은 눈에 설지 않았다.
특히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벙크의 1층이 없는 레돈델라의 알베르게.
장애인용 1인실로 안내한 오스삐딸레라와 내 크고 무거운 배낭을 보고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우체국의 15일 보관제도를 자상히 안내한 그 우체국 직원의 호의에 대한 고마움이 뭉클했다.
(메뉴<까미노이야기>59번글 참조)
멎는 듯 하던 비가, 내가 종착역 비고(Estacion de Vigo Urzáiz)에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비를 몰고 다니는 늙은이에 걸맞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사(驛舍)가 저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2층에 해당하는 도로에 오르면 비고항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미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항구의 환희는 억수같은 비의 훼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도움받으러 들른 관광안내소(Oficina de Turismo)직원은 다른 결단을 촉구했다.
전 번에 걸었으면서도 해안 따라 걸으려 하는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비가 그치고 날이 쾌청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럴 수 없다면 버스 편(대중교통)으로 바이오나로 가라고.
전자와 후자 중 택일에 잠시 망설여야 했다.
2년 전(2013년), 스페인 축구(Primera La Liga)의 시즌(Season/2012~13)이었다면 날씨와
관계 없이 하루를 묵었을 비고.
왜냐면, 한국인 현역 축구선수 중에서 내가 진지한 호감을 가진 유일한 청년이 뛰고 있는(잉글
랜드 아스날 팀 소속이면서 임대 형태로) 쎌따 비고(Real Club Celta de Vigo)의 연고지니까.
하루 묵으면서 전용구장인 발라이도스(Estadio Abanca-Balaídos)도 방문했을 것이다.
마드리드에서는, 인근을 지나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전혀 무관한 레알 마드리드 팀의 경기장
(Estadio Santiago Bernabeu)에도 들렀는데 하물며....
우중의 비고~바이오나를 생략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까미노 뽀르뚜길의 산길, 숲길, 오솔길 등 내륙의 루트는 이미(전번에) 걸었다.
그래서, 비고~뽀르투 간의 해안로에서는 해안에 밀착하여 걷기로 작심했는데 비고~바이오나
해안이 무의미해졌다면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
비고의 열차역에서 최단 코스를 택해도(해안로를 포기하고) 5시간 남짓 걸린다는(20km 상회)
바이오나(갈語-Baiona/스語Bayona) 해변.
안내받은 대로 마이크로 버스를 탔다.
해안을 들락거리는 빗길을 달려서 당도한 바이오나의 초입에서 대서양의 남하하는 해안로를
걸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5시간여의 무의미한 낭비를 막아준 그 안내직원의 고마움을.
바이오나는 뽄떼베드라 주(갈리씨아 지방)의 62개 지자체( Municipios) 중 하나로 비고 만의
하구에 위치한 인기 있는 관광, 낚시의 미니 해안도시.
주민은 12.000명 미만인데 성수기(여름철)에는 45.000명으로 폭증하는 인구가 이를 입증하며,
또한 통과인구가 연 30.000명을 넘는 것은 까미노 뽀르뚜 길의 해안로 효과가 적지 않단다.
그런 까닭에, 일부 구간의 까미노를 통째로 옮기거나 각종 명목의 새 루트 개설에 지자체들이
서로 다투거나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새 도로가 개설될 때마다 서로 끌어가려는 지자체 또는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다툰 뒷얘기가 회자되기 마련인데 까미노라 해서 다르겠는가.
빼앗긴 구간 주민들의 불만이 없을 리 있는가.
갈길 바쁜 외국 늙은이라도 붙들고 쏟아내야 할 정도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빠르또 펠리스 후베닐 맘마(parto feliz, juvenil mamá)
바이오나 해안의 끝 부분에 축조되어 있는 몬떼레알 성(Castillo de Monterreal).
거센 풍우도 아랑곳없이 내뿜는 인력(引力)에 갈길 바쁜 늙은 나그네임도 까마득히 잊고 빨려
가다가 관광안내소(Oficina de Turismo)에 들어갔다.
성의 출입구에, 성을 위한 부속건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소형 건물이다.
비바람이 하도 세찼기 때문인데 비를 피했을 뿐 아니라 젊은 여직원의 자상한 안내도 받았다.
해산일(解産日)이 임박했는지 유난히 부른 배 때문에 거동이 몹시 불편한 임산부(姙婦)인데도
해맑은 얼굴로 소임을 다하려는 듯 앳된 여인의 부드러운 안내였다.
'까스띠요 데 몬떼레알'은 12c에 착공해서 16c에 완성했다니까 4c의 공기(工期) 끝에, 3개의
탑(Torre/Reloj, 칠각기단 위에 세운 Tenaza, Principe 등)을 갖춘 성이다.
로마황제 시저(Julius Caesar)가 바이오나를 정복한 BC 60년부터 기록에 등장했다는 성.
(當時에는 어떤 형태였는지는 기록이 없는 듯)
가톨릭 군주(Catholic Momarchs)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 성에는 로마인 외에도 서
고트족(Visigoths), 무슬림(Muslims) 등이 자기네 흔적((marks)을 남겨놓았단다.(確認不可)
지배한 순서대로?
빗줄기에 힘이 빠진 듯 해서 오른 성.
현재는 관광명소가 된 이 성에서 또 한번 놀란 것은 그들의 돌다루는 솜씨다.
워낙 경탄한 세고비아의 아꾸에둑또(acueducto/水道橋) 이후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데.
북한산성은 1711년(이조19대 숙종37년)에 쌓은 우리의 성이다.
겨우 300여년에 폐허처럼 남아있기 때문에 복원하느라 법석을 떨어야 했던 석성.
천년, 2천년의 연륜만 느끼게 할 뿐 온존되고 있는 그들의 성과 다리, 거대한 석축건물들.
슬프도다. 감히 비교할 엄두를 낼 수 없음이어.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전망대에 올랐을 때 비고만을 덮었던 우중충한 구름이 비켜주려는 듯
했지만 뻬레그리노스의 일정에는 관광을 즐길 겨를이 없다.
정오가 임박해 가는데 뽀르뚜갈과 국경을 이루는 지자체 아 구아르다(A Guarda/스페인어는
La Guarda)까지 평탄한 길이라 해도 28km가 넘으며 6시간이 소요된다는 거리다.
아 구아르다에서 국경인 미뇨강의 선착장(Transbordador de La Guardia á Camiña)까지도
1시간 거리라니까 만만한 노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을 나와서 관광안내소에 다시 들렀다.
1박할 숙소(albergue)를 안내받는 것이 이유였는데, 터질 듯 부른 배를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환한 미소로 반긴 그녀.(이름이 적힌 종이도 도둑의 손에서 버려졌을 것)
지도에 미뇨강 양쪽(스페인의 A Guarda와 뽀르뚜갈의 Caminha)의 알베르게를 표시해 준 후
양 손을 모아 집은 한 움쿰의 사탕(내방객용?)에 함박웃음을 담아 내 숄더백에 넣어주었다.
그녀에게 나는 뽀르뚜 길 첫 날부터 허약한 늙은이 꼴이었는가.
"아니모 세뇨르"(animo señor/어르신 힘내세요)
답례로 "parto feliz, juvenil mamá"(빠르또 펠리스 후베닐 맘마/순산해요 젊은 엄마)
"젊은 엄마"(juvenil mamá)라는 호칭이 쑥스러웠는가.
큰 모션으로 밝게 소리내어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카메라에 담고 함께 촬영도 하였
건만 도둑은 그 메모리칩을 무자비하게 버렸을 것이다.
100€의 사례금을 걸고 돌려달라는 호소의 전단을 곳곳에 부착했는데도.
컴퍼스 보기를 등한한 벌
우악했던 비는 우비 없이 걸어도 될 만큼 내리다 그치기를 이따금 반복하는 가랑비로 변했다.
이 때만은 무더운 여름 낮에 더위를 잊고 속도감 있게 걷기 알맞을 만큼 부조하는 날씨였다.
정상이 해발 652m인 그로바 산맥(Sierra da Groba) 따라 난 바이오나 ~ 아 구아르다 해안로
(Estrada Baiona~A Guarda/PO552).
금명간에 엄마가 될 젊은 여인이 안내한 대로 길 안내를 자임하는 까미노 마커가 등장했다.
이 마커는 산록으로도 안내하지만 산길은 전번에 걸은 내륙길로 갈음하고 해안로만 고수했다.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가시덤불로 덮히기는 했으나 경사가 심하지 않은 왼쪽 산비탈에 조성된
광대한 목장들에서는 말과 양떼가 자유를 만끽하며 평화롭게 뛰놀고 있다.
해안의 산자락을 절단함으로서 자연은 파괴되었지만 절경의 단애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충분히 확보되어 있으므로 불편이 전혀 없는 인도를 걷는 보행자나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워낙 적어서 무료하기 때문인지 대소 단위의 자전거 팀들이 되레 반가운 길.
노르떼의 해안로를 비롯해 지금까지 걸어온 대서양의 모든 해변길의 하루 구간 중에서는 가장
편하고 평화롭게 걸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는 길이다.
그럼에도, 6시간 내의 주파가 불가피한 28km의 중압감 때문에 앞만 보고 달리듯 걸어야 했다.
길 사정에 무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고 있었다 해도, 내게서는 유유자적하고 만만디로
즐기며 걸어도 될 만큼 여유있는 일정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순례자'(Pilgrim/Peregrinos)라는 신분에 대해서만은 유난히도 융통성이 없는 축자적
협의(逐字的狹義)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일로매진함으로서 아득히 먼 거리로 느껴졌던 28km가 사라지고
아 구아르다가 지호지간으로 다가왔다.
한반도의 서남동(西南東) 3면 해안을 따라 걸으며 묘미를 만끽한 늙은이라 애오라지 대서양을
걷는 것 외에는 무념상태였기에 가속적이었는가.
여의하게 동구 밖에 당도했지만 어디에 숨어있던 먹구름이 홀연히 나타난 것일까.
삽시간에 아 구아르다의 하늘과 바다를 뒤덮고, 우산이나 비옷을 챙길 겨를도 주지 않고 쏟아
붓는 장대비에 흠뻑 젖은 몰골이 되고 말았다.
불시의 공격이 비일비재한 갈리씨아 지방이기 때문에 방어장비(雨備)가 필수지만, 선전포고도
없는 공격에는 유비무환의 효과도 빛이 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리한 진행이기 때문에 초조가 빚은 결과일까.
굵은 빗줄기 속에서 뽀르뚜갈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미뇨강(Miño/뽀르뚜갈어 미뉴/Minho)과
대서양에 접해 있는 스페인 최 남서단의 지자체 아 구아르다를 지나 한참을 달리듯 걸었다.
빗속에서도 대서양에 합류하는 너른 하구(河口)가 보일 때까지.
곧, 당도한 곳은 미뇨강의 하구.
이럴 수가?
방향 감각을 상실할 경우에 대비해 24시간 목에 걸고 있는 컴퍼스(compass)를 1번만 들여다
보았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련만.
컴퍼스 보기를 등한한 벌이었다.
6시간 전에 불과한 안내소에서도 전번에 국경을 넘었던 발렌사(Valença/Portugal)~뚜이(Tui
/Spain)를 상기하며 다리가 놓여있는 그 곳과 달리 강폭이 넓은 미뇨강의 도강을 걱정했건만.
건너야 할 강, 340km로 갈리씨아 최장이며 뽀르뚜갈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이 강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이 황당한 현실에 얼마나 당황한 늙은이였던가.
하구의 너른 사장(沙場)에 세운 한 텐트의 청년이 달려왔다.
충격(?)에 쓰러질 듯 기진맥진해 보였는지 냉수 페트병을 들고.
길을 잘못 들었다는 내게 자상하게 길 안내를 한 후, 잠간 사이에 텐트로 달려갔다 올 때는 양
손에 초콜릿과 보까디요(bocadillo) 1쪽이 들려 있었다.
예전에 기독교국가였으며 지금도 그 영향권에 있는 까닭인지 평소에는 얼음장 같이 매정해도
도움이 필요한 병약자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이 발현되는 그들임을 재확인하게 했다.
아 구아르다에서 동남쪽 페리여객선선착장(Transbordador de La Guardia á Camiña 또는
Estación marítima-Ferry A Guarda)에 있어야 할 시간에 3km 서쪽 하구에 있는 늙은이.
체력이 바닥나 지쳐있는 몸에 전혀 예정에 없는 가외 3km는 아득한 거리다.
더구나, 대부분이 해수욕장과 해변수목원 등 배가의 체력이 요구되는 모래밭 길임에랴.
미뇨강과 나란히 북상하는 이 길을 걸을 때는 소나기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내게 낭패를 안겨주고도 시치미를 떼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소나기.
그래도, 일각이 여금(一刻如金)인 때 남은 석양을 돌려주고 간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니.
(그 놈은 어딘가에서 제2, 제3의 낭패한 나를 만들고 다닐 텐데도?)
또한, 강심의 퇴적물 때문에 카페리의 운항시간이 일정치 않은데다 결항이 잦다는데 뽀르뚜갈
(Ferry Boat Caminha)로 가기 위해 출항(19시?) 준비를 하고 있는 마지막 카 페리.
이 배가 늙은이의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 했다.
아뿔싸, 내가 황급한 중에 "한 쪽 문을 닫을 때는 다른 쪽 문 열어놓는 것을 잊지 않는 그 분"을
잠시 잊었음을 깨달음으로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은 듯 했다.
지호지간이라 해도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선(船)
항해 거리(강폭)가 4km에 불과하며, 20분도 되지 않은 짧은 항해시간이지만 국제 여객선이다.
스페인과 뽀르뚜갈의 국경을 넘나드는 카 페리(Car Ferry)
갈리씨아 지방 뽄떼베드라 주의 깜뽀산꼬스(Camposancos/지자체 A Guarta의 교구마을)와
노르뜨(Norte/Portugal) 지방 비아나 두 까스뗄루(Viana do Castelo)현의 까미냐(Caminha)
를 잇는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