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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협 평위원 2023년 1월 1일
역사는 미시적으로 보기보다는 거시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미시적으로 보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칼 막스는 미시적으로 보고 불쌍한 노동자들을 위해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 적개심을 고양하여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서 부르조아(유산)세력을 분쇄해야 하고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인간을 동물농장으로 만든다는 것을 선견 있는 지식인들은 알고 있었다. 결국 공산주의 정치를 한 소련, 동구, 그리고 공산 중국, 베트남은 몰락했고 공산당의 충동질에도 의연(毅然)하게 대처한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유럽 국가, 캐나다 그리고 미국 등은 꾸준히 성장하여 선진국으로 남아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8.15해방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던 선지자(先知者)였다. 1945년 당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물결이 거셌으며 중국, 월맹, 북한이 공산주의로 넘어가 공산화 물결로 도미노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고 자유민주주의 세계는 우려하고 있었다. 이 때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곳이 한반도였다. 당시 남한의 지식인은 조선 조정의 부패와 지주들의 폭리에 지쳐서 공산주의 환상에 젖어있었다. 그 결과 대구 10.1폭동을 기점으로 제주 4.3폭동 그리고 10.19여수 순천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생각하기에는 현시점에서 친일 인사는 더 이상 위험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제 강점기에 근무했던 경찰 및 수사 전문가를 등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단호히 척결했다. 그리고 북진통일을 구호로 삼았다. 6.25 북한 남침을 우여곡절 끝에 UN군이 참여하여 공산군을 물리치고 자유 대한민국은 살아남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4.19의거로 물러났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에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물러났던 것이다. 그가 물러나면서 남긴 말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의 목표는 조국 근대화에 있었고 잘 살아보자는데 있었다. 그는 군사정부, 독재자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을 잘 살게 하려는 의욕을 고양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 노동력을 이용하여 국민자금을 축적하여 포항제철, 창원중공업공단, 거제조선소, 울산공업단지 및 여수공업단지 등을 건설하여 한국경제를 살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한국경제를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남겼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 식민지 국가로는 세계 최초로 저개발국가로 경제개발에 성공시켜서, 세계의 어느 경제전문가도 이루지 못한 후진국 경제개발 모델 즉,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을 성사시켜 지금도 후진국들은 한국을 찾아 경제개발을 배우고 있다. 그는 김제규에게 저격 당하면서도 “나는 괜찮아!“ 라고 했으며 경제개발 과정에서 야당이 사사건건 반대만 하며 걸고넘어지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하는 말을 남겼다.
서양에서는 국민을 잘 살게 하려고 독재하는 정치가는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국민들을 못살게 하고 우민정치를 하면서 최고직위를 누리는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른다. 로마 시저(카에자르), 프랑스 나폴레온, 독일 빌헬름 1세,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등은 국가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독재자이지만 독재자로 부르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야당의 두 거두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 다투어 부마사태와 광주사태가 일어났고,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 정치를 하기에는 여전히 미개하다고 보았다. 차제에 전두한 장군이 급부상했다. 여기에 한국 민주주의 정치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1980년 8월 8일에 <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Lemming; 나그네 쥐)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하여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앞날이 어두움을 내비쳤다.
전두환 장군은 주위에 의해 떠밀려 대통령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잠실대통령으로 비하(卑下)를 받으며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의욕은 대단했다. 그리고 인재를 영입하는데 탁월한 점이 있었다. 김재익 경제장관을 영입하여 “네가 경제 대통령이다.”라고 하며 경제를 맡겼다. 당시에 경제 성장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김재익은 달랐다. 인플레이션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하여 전두환 대통령 말기에 한국 경제는 제 2의 도약이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성공시켰으나 안정시키지 못한 한국경제를 안정시키면서 만성 적자를 흑자로 돌리고 한강오염을 방지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새마을 정신은 망쳐버렸다.
전두환 임기 말기에 자유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한국 국민의 열망은 대단하여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여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거듭나게 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역시 야당의 두 거두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집회에 끌려 다녀서 힘없는 대통령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갑작스런 경제 도약으로 부족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분당과 일산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자유화 물결을 완충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노동자들의 반발로 많은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에 중국과 소련과의 물고를 트는 노력으로 북방정책은 성공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대통령으로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으며, 외환관리 미숙으로 외환재고가 바닥나자 1997년도에 IMF 구제금융신청을 했다.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고 그 이후 한국경제는 IMF가 요구하는 경제체제를 수용하고 그 요구에 따라 대대적인 국가경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전 1995년 한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때,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언급하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 총리 당시 일본 총리 橋本 龍太郎(하시모토 신타로) 버르장머리가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묵묵히 있었다, 한국이 외환관리에 문제가 생기자 그래도 가까운 일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총리 신타로는 이 요청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특히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말을 삼가고 다른 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야 하는데 투쟁만 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그것을 몰랐다.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북한의 핵 문제는 긴박한 대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선제 북한 핵시설 초토화의지를 설명했고 당시 한국 안보팀은 북한이 휴전선 가까이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반대의견을 피력하여 김영삼 정부는 이를 받아드렸다. 미국은 클린턴은 고심 끝에 선제 북한 핵시설 초토화는 취소하고 말았다. 북한 공격에 미리 겁을 먹고 조그만 순을 자르지 못한 결과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초의 호남 대통령으로 호남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진정한 민주화 대통령으로 그 이름을 드높였다. 이때 한국 경제가 성장하여 로비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풍언씨 등 많은 로비스트 들이 활개를 쳤다. 권노갑은 김대중 대통령을 방패로 부정을 저질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고생한 사람들을 주로 중용하여 한국안보와 국민경제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고 광복 이후 처음으로 햇빛정책을 펴서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는 도외시하고 김정일에게 거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어 북한 김씨 정권은 숨통을 트고 핵개발을 하도록 하였다. 김정일은 김대중에게 허울 좋은 노벨평화상을 안겨주 꼴이 되었다, 그는 북한의 핵이 한국 국민을 볼모로 할 줄 몰랐고 핵 보유를 수단으로 북한 주민의 자유를 계속 억압할 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peace keeping(평화유지) 만 외쳤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에 대처하는 상식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사모라는 집단과 참여연대라는 집단을 만들어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운영을 하면서 대북한에 대한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을 답습했다. 북한의 핵개발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군에 가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비하하여 국가 안보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 도시로 선회하였다.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다. 국가안보라는 중요한 과제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행위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중 4대강 수중보를 설치하여 강물을 조절하여 주변지역 강물 사용 효율을 높였다. 그러나 다스와 관련한 비리가 드러나 감옥 생활을 했다.
박근혜(朴槿惠)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 최초로 박정희와 부녀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어 경제 살리기에 혼신을 다했으나 세계 경제가 바닥이라 성과가 미미했다. 박대통령 재임 중 통진당 해산, 이석기 구속, 전교조 법외노조화, 퍼주기식 대북지원억제, 개성공단 철수, 사드배치, 북한인권법통과, 김영란법, 종교인 과세, 코레일계혁으로 흑자전환, 30년 동안 해결 못한 한미 핵연료 재처리 등의 업적을 남겼다. 창조경제를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부모횡사로 사람 기피증)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바개통령은 60대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정권의 기반을 유지하다가, 세월호 사건 부실 대응으로 논란이 일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소추 및 심판을 거쳐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깨끗한 대통령이 어이없게도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동안 북한에 대해 내간(內間) 역할을 했었다. 이를 나열하면, 1) 탈원전, 2) 북한 석탄수입 의혹 3) 비무장지대(DMZ) 공중정찰활동금지, 4)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를 존경, 김원봉 찬양, 5) 김정은에게 USB건너 줌, 6) 귀순어부 즉시 북으로 송환 6) 서해공무원 피살 탈북으로 조작, 7)대북전단 금지, 8) 석유제품 북한 반출 의혹 9)사드배치 모호한 태도 9) 탈북자들 홀대, 10)울산시장 송철호의 선거부정 사건 그리고 4.15 국회의원와 3.9 대선 때 투표용지에 QR와 투표관리관 실인사용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 4.15 사전선거 서울,인천,경기 63대36 비율로 더불어 민주당이 승리,11) NLL 무력화 합의문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포기하고 헌법 66조 1항에 명시된 영토보존에 반하는 이적행위이다. 12) 군병력 감축 13) 군복무 1년 6개월로 단축, 14) 국정원법 개정하여 무력화, 15) 전국 해안에 설치된 군 철책과 관련 초소 등 군사시설 제거, 16) 기무사 해체 17) 국가 경제 퍼주기 정책으로 나라경제 파탄으로 몰고 감, 18) 국가자산 5년간 33조 감소, 19) 국가부채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5년간 760조원 넘게 증가했다.
위 내용울 보면 문재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아니고 나라를 망치려고 획책한 내간(內間) 역을 했음이 틀림없다.
끝으로 한국 대통령을 평가하면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 발전을 위한 뚜렷한 비젼(vision)을 갖고 이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역사 이래로 잘살게 돼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 투사였으나 국가발전을 위한 비젼이 없었고 국가안보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약자 편에 서는 정책을 펼치면서 국가안보에는 무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애섰으나 측근을 잘못 다루어 그들의 노력은 퇴색되고 말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당원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문재인은 처음부터 한국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하여 평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한국 대통령 및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자유 그리고 인간 기본권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그 중요성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친인척과 지인들을 관리하여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한비자(韓非子) 책을 읽었으나 인의 장막을 벗어날 수 없어서 뒤 끝이 좋지 않았다. 전두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은 한비자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친인척과 측근(대통령 만들기에 힘쓴 사람들)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 문재인은 내간(內間)이라 나라를 망치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앞으로 한국에서 정치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유를 실천하려면, 풀루타크 영웅전을 읽고, 친인척 및 측근들을 관리하려면 한비자를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 더불어 민주당 같이 잔꾀를 부려서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앞날은 암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