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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장 6-8절) |
들어가면서
현대 교회는 유행에 매우 민감하다. 이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가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유행에 따라 교회의 역할과 방향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그 근거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시대철학과 시대의 흐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유행에 민감하며, 또한 일반 대중문화와 같이 유행을 선도하는 교회와 유행을 따라가는 교회들이 존재한다. 유행에 민감한 교회는 유행을 따라 그들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므로, 유행에 따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큰 변화가 나타난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교회에 유행한 사역을 들라고 한다면 "외국인 사역"이다. 3 D 업종에 대한 기피현상이 늘어나던 시기에 제 3 세계 국가에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왔고, 또한 영어 교육에 대한 영재 교육의 필요성의 증가를 따라 영어 강사로 한국에 오는 서양 선진국가의 사람들이 대거 한국 땅에 들어오면서 외국인 사역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영어예배를 비롯해, 중국어 예배, 일본어 예배, 러시아어 예배 등과 같은 예배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영어 예배는 단순히 외적 필요 뿐 아니라 내적 욕구도 만족시켜주는 것이어서 그 확산은 더욱 괄목할 만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사역 역시 하나의 유행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시작하던 외국인 사역은 시작된지 4-6년 정도가 흐른 지금에는 거의 흐지부지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현재까지 영어예배를 실시하고는 있지만, 교회가 위치한 지역 내의 중대형교회들끼리 일종의 경쟁의식을 갖고 시작한 탓인지, 교인빼앗기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우리교회에서는 영어예배를 하고 있다"라는 자랑 섞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영어예배를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 교회는 많지 않다. 하나의 유행으로만 끝나 버린 것이다.
이 외에도 요즘에, 그 중에서도 특히 고신교회 내에서 유행(?) 하고 있는 사역 중에 하나가 바로 "장애우 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장애우 사역이 현대교회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을 감지하고 장애우 사역이 정말로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것인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고신교단 내 장애우 사역들
고신교단에서 장애인 사역으로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부산장애인전도협회(이사장 안민 장로)의 책임 간사로 수고하고 있는 남동우 목사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현재 고신 교단 내에는 모두 17개의 교회에서 장애인 부서를 두어 사역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직동교회 소망부 (http://www.somang91.com)
담임: 김철봉 목사 교역자: 남동우 목사
2. 부산삼일교회 소망부 (http://somang31.new21.net)
담임: 박영주 목사 교역자: 박일환 목사
3. 분당샘물교회 사랑부 (http://sarangbu.or.kr)
담임: 박은조 목사 교역자: 이헌주 목사, 오국진 강도사
4. 서울영동교회 사랑부 (http://www.sydc.net/main.php?me=mnu1_sub8)
담임: 정현구 목사 교역자: 이영우 목사
5. 서울시민교회 희망부 (http://seoulshimin.or.kr/)
담임: 최한주 목사 교역자: 현재우 강도사
6. 부민교회 사랑부 (http://www.bumin.org/sarang
담임: 교역자: 이정일 전도사
7. 부곡중앙교회 소망부 (http://cafe.daum.net/hopeallin)
담임: 인태웅 목사 교역자: 김경숙 전도사
8. 진해동부교회 사랑부 (http://jdongbu.or.kr)
담임: 김기해 목사 교역자: 박종현 목사
9. 부산소망교회 사랑부 (http://bssomang.org)
담임: 김영환 목사 교역자: 이상필 강도사
10. 밀양삼문교회 사랑부 (http://www.sammun.org)
담임: 교역자: 이환득 목사
11. 대구대신교회 사랑부
담임: 김윤종 목사 교역자: 최석제 강도사
12. 울산교회 백합부 (http://www.upc.or.kr)
담임: 정근두 목사 교역자: 진현삼 목사
13. 한영교회 사랑부 (http://www.hypc.org)
담임: 김낙춘 목사 교역자: 김효진 전도사
14. 잠실중앙교회 야베스부 (http://www.jamjoong.org)
담임: 박삼우 목사 교역자:
15. 다니엘 교회 사랑부 (http://www.danielchurch.or.kr)
담임: 정인석 목사 교역자: 장승철 간사
16. 창원한빛교회 늘푸른 교실 (http://hanbit.finesugar.com/)
담임: 윤희구 목사 교역자: 최규태 목사
17. 울산시민교회 소망부 (http://usm.or.kr)
담임: 이종관 목사 교역자: 이진욱 전도사
과거에는 대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가 따로 있었다. 주로 "벧엘", "베데스다", "실로암" 등과 같은 이름을 사용한 교회들이었는데, 그러한 교회들에는 일반인은 없고, 장애인이 성도의 주를 이룬 교회들이었다. 대개 담임교역자도 장애인인 경우가 많이 있었고, 기성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여서 따로 무리를 이루어 교회를 세운 경우가 상당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차츰차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애우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고 있는 것들이다.
고신 교단 안에서는 1998년 11월 부산 사직동교회에서 남동우 목사를 담당교역자로 하여 "소망부"를 개설한 이래로 2002,3년 들어와서 아주 많은 교회에서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위에 열거한 교회의 사역들은 대개 정신지체 장애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 오전 예배 프로그램으로서 각 교회들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정신지체 장애아동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조기교실의 형태를 첨가한 방식의 예배를 진행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장애인 복지의 목표를 2가지 말한다고 하면, 1) 개인의 능력 강화와 2)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을 들 수 있다. 장애인 개인의 능력강화를 통해서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재활능력과 자활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 그리고 장애인과 일반인간의 사회적 격차 해소를 통한 사회통합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켜 주는 것. 이 두가지를 통해서 장애인 복지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언급한 2가지 방향은 장애인 복지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실천이론에 있어서 가장 큰 두가지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 복지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복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첫번째 주안점인 "개인의 능력 강화"가 지나칠 정도로 중요시되어서 첫째의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회통합"이 등한시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반성에 기초하여 오늘날 장애인 복지에서는 탈시설화, 정상화가 강조된다. 장애인을 사회의 구석으로 몰아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중심으로 끌어내는 사회통합의 방법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학교에서의 통합교육을 들수 있다.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특수학교"로 몰아놓는 것이 아니라 일반학교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함으로서 장애와 비장애 간의 gap을 극복하고, 비장애 학생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함으로서 사회통합을 이루는 목적을 지닌 것이다. 현재까지는 시행착오의 단계이지만, 특수교육학이나 사회복지학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사회복지관이나 일반초등학교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때, 교회가 언제나 사회보다 뒤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움을 느낀다. 앞서 열거한 교회들의 장애우 사역에 초점은 "개인의 능력 강화"에 두고 있다.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아동들을 따로 모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들의 신체적 특성을 백분 고려하여 따로 예배드리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장애우로 하여금 개인의 역할 강화를 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교회 안의 사회통합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장애우"를 위한 부서를 "따로" 둠으로서 비장애우 성도와의 "구별"을 만들게 된다. 또한 그 대상이 성인이 아닌 아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주일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장애와 비장애간의 벽을 어릴적부터 형성하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교회 안의 장애우 사역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그 중심이 되기 보다는 "교회"가 그 초점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모든 성도가 평등한 것처럼 장애인도 한백성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볼때 그것이 바로 장애라는 말이 있듯이 장애인을 따로 분류하는 것은 교회가 장애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와는 달리 어린 아이들도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여 일반성인 성도와 동일하게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개혁교회에서는 어린 아이들도 일반성도와 동일한 성도로 여기고,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일학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공예배 전이나 혹은 후에 지도교사와 함께 따로 모여서 설교시간에 배운 내용을 함께 자세히 공부하고, 그 외에 성경공부 하는 시간을 가진다.
장애인 사역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두다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어려움"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알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아무리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장애인 부서는 장애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데에 효과적이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장애인 부서에서 예배생활에 참여하는 장애아동과 장애아동 없는 비장애아동만 참석하는 예배에 참석하는 비장애아동 모두에게 있어서 반쪽 복음만을 접하도록 하는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다. 비장애 아동들은 장애아동이 따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서, "저들과 우리는 다르구나"하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 부서의 존재는 모든 성도가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역에 섬기는 사람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게 만든다.
결론
필자가 영국에 어학연수차 머물고 있을때 흑인교회에 출석하였었다. 주로 아프리카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 출신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는데, 오순절 계통의 교회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반주자로 봉사하였는데, 한번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백인이 런던에서 내가 살고 있는 브라이튼으로 이사를 와서 내가 출석하고 있는 흑인교회에 참석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간단한 소개를 하고 나서 그 다음주에 나는 그 백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또 다른 한명이 언젠가 찾아왔는데, 예배시작 전에 목사님이 그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대충 들으니 "여기는 흑인교회인데, 상관없으시면 여기서 예배드리셔도 됩니다" 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목사님과 새로운 분이 대화를 나누더니 그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마저도 흑백의 구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교회가 따로 존재하고, 장애인을 위한 예배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나마 장애인 사역이 기성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죄많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앞서 필자는 장애인 교회가 사라지게 되고, 장애인 부서가 교회 안에 들어온 것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아쉬움이 있음을 말하였고, 동시에 장애인 부서도 역시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 사역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인 사역이 갖고 있는 긍정적 요소를 교회 안에 충분히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장애인 사역이 갖고 있는 역기능적 요소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글을 시작하기 전,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인 천국의 그림자로서 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눕고,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독사가 물지 않는 그러한 나라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사역, 이제는 하나의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단순한 유행으로 끝날 거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교회의 진정한 관심일 거라고 낙관한다. 오늘날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이제 관심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전문성도 충분히 확보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교회는 관심과 전문성을 백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교회에서 옮겨간 장애인 사역. 이제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일반성도들간이 차이를 깨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2004. 6. 4. 손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