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김백봉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가 지희영씨
"학창시절 열차 통학 때까치발로 서서 갈 정도로춤만 생각한 예순 인생…
'전통춤 계승자' 호칭 싫어나는 나만의 춤을 춘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5동 아파트 한 칸이 갑자기 복사꽃 잎 흩날리는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변했다. 어깨 짓을 타고 흐르던 흥이 퍼져 온몸에 물결치더니 입에서 '정저키정처쿵', 그리고 부채를 쫙 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한국무용가 지희영(池熙榮·60)의 춤사위는 스무 살 청년처럼 강렬했다. 1m76, 67㎏의 몸을 더듬으니 찰 고무 같았다. 그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와 '한국 신 무용의 대모(代母)' 김백봉(金白峰·82)의 맥을 잇고 있다.- ▲ 날렵한 발놀림, 역동적이고 박력 있는 지희영의 춤사위 는 환갑의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때론 먼 곳을 응시하고 때론 눈을 감으며 춤의 열락 에 빠져드는 그를 보고 있으 니 몸 안의 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그 의 스승 김백봉이 춤추는 모 습.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감정 표현 하나에도 혼(魂)이 있어야지요. 동작의 나열은 한낱 유희에 불과한 것! 보는 사람의 살갗이 저릿하고 솜털 하나까지 곤두서게 하는 그런 춤을 춰야 해요."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에 빳빳한 심이 들어갔다.
지희영은 "춤만 잘 추면 되지 남녀를 따져 무엇하나. 누가 추건 춤은 그저 춤일 뿐"이라고 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서너 살 무렵부터 국악 소리만 나오면 몸을 들썩였다고 한다.
농악패나 국극단이 찾아오는 날이면 종일 뒤를 쫓아다니던 아이는 동네 어르신들의 회갑·칠순 잔치에 단골로 불려갔다. 춘천중 시절에는 군부대 공연에도 나섰다. 수업시간 그의 머릿속은 춤에 대한 공상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학교 밴드부 색소폰 주자가 노들강변이나 양산도 가락을 뽑아내면 난 거기 맞춰 즉흥 춤을 선보였지요. 학교에서 빡빡머리 중학생에게 무대용 한복을 입히고 가발까지 씌울 정도였으니까."
'신기(神氣) 넘치는 춤은 어디 있을까.' 부모님 몰래 찾은 무용학원에 답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명문 춘천고를 다닌 아들의 약대진학을 원했던 부모에게 아들은 1967년 서라벌예대 무용학과 합격증을 내밀었다.
"김백봉 선생과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해요. 이름만 듣고 남자 분인 줄 알았죠. 곱디고운 여자 선생님이 어깨 동작, 손동작을 지도하시는데 빨려들어가듯 했어요. 무용이 주는 완벽함이 그분에게 있었어요."
경춘선 열차로 통학할 때 그는 빈자리가 있어도 두어 시간을 까치발로 서 있었다. 다릿심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홍수가 나 공지천 물이 넘쳤지만 스승의 지도를 빼먹지 않기 위해 흙탕물에 뛰어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다. 지금 그는 김백봉 춤 보전회를 이끌고 있다.
국립무용단에 입단했지만 꽉 짜여진 무용단 춤은 펄펄 끓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에서 학생도 가르쳐봤다. 강단의 무용가가 대접받는 현실이었지만 움직이고 춤춰야 직성 풀리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지희영은 '무당춤의 1인자'로 통한다. 1972년 명동 국립극장의 첫 발표회는 그가 한국 무당춤의 상징으로 나선 계기가 됐다. 그는 "방울 들고 뛰면서 춘다고 다 무당춤은 아니다"라며 "무대에서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들썩였다. "가슴으로 신을 받을 모습이에요. 다소곳이 이렇게 손을 모으고…. 이건 신을 거부하는 모습." 그의 손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는 어느새 무당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접신(接神) 안 하면 출 수 없는 것!"
40여년 동안 춤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생활이 계속됐다. 학연·지연으로 얽히고설킨 국내 무용계가 그를 보는 눈길은 곱지 않았다. 역동적이고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은 외국에서 훨씬 호평받았다.
70년대 중반 한국민속예술단원으로 3개월 동안 미국 순회공연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튀니지, 인도양의 모리셔스까지 수십개국에서 공연했다.
"무용가들이 왜 제자들 지도한다며 무대를 떠나는 줄 아세요." 그가 물었다. 대답할 틈도 없이 그가 몰아쳤다. "힘이 없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그러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동작을 몸이 체현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무용가로선 거기서 끝!"
첫 무용 발표회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스승이 가르쳐 준 '기본'을 매일 빼놓지 않는다. 걷고 뛰고 달리고 풀어헤치고…. 온몸 근육 가닥가닥을 유연하게 풀어주며 힘을 불어넣어 강화시키는 40여개 동작을 100분 정도 하고 나면 기가 샘솟는다고 했다.
미혼인 그는 "춤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술가의 삶은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춤은 자신의 신앙이라고 했다. 40대에 접어들면서는 아침에 고기 150g을 갈아서 죽처럼 먹고 영지버섯 달인 물에 홍삼 가루를 타서 마시며 저녁에는 검은콩 검은깨 은행 말린 것을 갈아서 먹고 있다.
지희영은 작금의 한국 무용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젊은 한국무용가들이 국적 불명의 춤을 춘다는 것이다. "괜히 돌고 뛰고. 기본이 안 돼 있지요. 연습 안 하고 춤이 아니라 말로 다 하려고 해요. 김백봉 선생께서 그러셨어요. '요즘 젊은 무용가들은 배반만 하면 창작인 줄 알고 있다'고. 창작이라는 용어 속에 관객들에게 독약을 주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것을 관객에게 들이밀면서…."
'한국 신 무용의 계승자'라는 호칭에 대해 그는 "이제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신 무용은 최승희 김백봉 송범 선생으로 끝났어요. 이제는 지희영의 창작이 있어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것, 그걸 남기기 위해 창작하는 거예요. 전통의 계승은 오히려 쉽지요."
그의 창작춤인 '북망산에 새 사람 있으니'는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부제(副題)인 '온 세상 불우했던 천재들을 위한 몸짓'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진짜 춤꾼의 조건을 얘기했다. 태어날 때부터 신기를 타고나야 하고, 그걸 끊임없이 갈고 닦아 품위가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완성은 거기에 예술적 가치가 있는 메시지가 담겨야 이뤄진다고 했다.
"주위에서 다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왜 그 어려운 춤을 추느냐고. 전 그럽니다. 내가 왜 당신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고. 무용은 제게 종교인 것 같아요.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잖아요. 누구도 못 만드는 나만의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