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우리나라 중부를 흐르는 한강의 관문이자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 째의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엇보다도 한강,예성강,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천연의 요새를 이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강화도는 원래 한반도 마식령산맥의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었으나 오랜 세월의 침강으로 내륙이 바다밑으로 가라앉은 뒤 낙조봉,고려산,혈구산,마니산등3-400백m의 산이 형성되면서 여러 개의 구릉으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그뒤 한강과 임진강의 퇴적작용으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으나 염하(鹽河,강화해협)가 한강에서 분류되어 머리 부분을 침식,물길을 이루면서 하나의 섬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에 개통된 693미터 길이의 강화대교가 있으나 낡았으며, 1997년 새 다리가 완공되어 강화해협을 가로지르며 육지와 섬을 잇고 있다.
행정 구역상 강화군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고, 사람이 살고 있는 11개 섬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16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도의 지형은 남북 길이가 28km, 동서 길이가 16km, 둘레가 112km인 타원형으로 총면적은 407.7km가 된다. 강화군의 행정 구역은 1개 읍, 12개 면, 16개 리이며 자연 촌락은 모두 313개이다. 여기에 2만 730호, 730,555명(92년1월1일 현재)이 살고 있다. 군청은 강화읍 관청리에 소재하고 있다. 강화군에 모두 31개 국민학교, 10개 중학교, 7개 고등학교가 있으나 아직 전문대학 수준 이상의 고등 교육기관은 없는 실정이다.
강화의 지질은 약80%가 경기편마암 복합체 가운데 화강암질 편마암(화강편마암)이며 대체로 흑운모편마암, 석영편마암, 장석편마암등으로 분류된다. 특히 강화도 남쪽 끝 마니산에는 마니산화강암 곧 흑운모화강암, 각석화강암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강화해안 지대는 30m에서 40m 높이의 완만한 경사면을 가진 구릉 모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른바 저위 침식면 가운데 아래쪽 끝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는 작은 하천에 참식당하고 있다. 이런 구릉지는 마을이 자리잡을 수 있는 좋은 입지를 제공하고 경작지로도 이용되며 홍수나 해일과 같은 자연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관개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하천은 충분하지 못하나 땅은 비교적 기름진 편이어서 농업 발달면에서 좋은 환경이 된다. 경기도 일대에 장마가 져도 강화에 큰 피해가 없는 것은 이러한 지형 조건 때문이다.
강화의 경작지는 하구 유역 안의 충적지와 간척한 농경지 및 저구릉지를 합쳐 전체 면적의 43.6%를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2/3 이상이 논이다.
강화의 기후는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지 않고 대체로 따뜻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도 11.1도이며 강우량도 연평균 1,005mm 정도로 농사짓기에 매우 좋다. 남쪽에서 주로 자라는 탱자나무가 화도면 사기리와 강화읍 갑곶리 일대에 자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와 제79호인 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강화군 서도면 바닷가에서 그 당당한 자태를 뽑내고 있는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강화의 특산물로는 강화 쌀을 비롯해서 인삼,고추,영지버섯,감,순무,새우젓,김 그리고 왕골과 화움석이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인삼은 1900년대 초에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강화도에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는 발이 덮인 인삼밭은 새로운 풍물적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 인삼 경작 인원은 1,190명이고 재배면적은 모두 1,676제곱 미터이다(1992.1.1현재). 또한 왕골을 곱게 물들여 짠 화문석은 그 촘촘하고 고운 문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화문석 장(場)이 따로 설 정도로 농한기 강화군민들의 주된 수입원이었으나 최근에는 중국산 대자리에 밀려 그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왕골 공예에 종사하는 가구는 1990년보다 반이나 줄어 모두 2,500가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화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
여 있으나 대부분 개펄이어서 어업 활동은 다른 섬에 비해 비교젂 부진한 편으로 현재 557가구, 2만여 명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1991.1.현재).
강화도 남단 길상면, 화도면 개펄(약1,500만 평)은 쇠청다리도요새사촌, 노랑부리백로 등 희귀 조류를 비롯하여 한국산 게 17종 가운데 13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민꽃새우, 젖새우, 딱총새우 등 희귀종의 갑각류와 38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개펄에서는 30여 종의 해안 식물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고 곤충류도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강화도는 우리나라 생태계 보고로 손꼽히고 있어 앞으로 해양 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될 전망이다.
강화도는 문화재가 많이 분포된 지역으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섬이다.
2. 역사
강화도는 역사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선사시대 유적이나 유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이 고인돌 무덤이다. 고인돌 무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강화에도 살았던 사람
들이 지배 계급에 속하는 인물들을 묻은 돌로 만든 무덤이다. 이런 무덤이 강화도에는 100기 가까이 있다. 이는 당시 사회 구성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대단위의 단단한 구조로 구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서울인 위례성(한성)의 관문에 자리잡은 요새였고 고구려와 교류를 하거나 바다를 통해 중국 등지의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가 되기도 했다. 한성을 도읍으로 한 백제 전기에는 서해 대도(大島)로 알려지기도 했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거느리고 한 강 어귀인 강화 부군에 와서 크게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최대 격전지였던 것으롤 알려진 관미성(關彌城)이 한강 유역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고구려는 강화해협을 뚫고 파죽시세로 아리수(우리하,한강)를 거슬러 백제의 서울인 한성(지금의 강남지구)을 함락시키고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이북 58개 성 700촌을 고구려에 내주고 말았다.
그 뒤 5세기 후반 475년에 다시 장수왕이 5만 대군을 몰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아들 문주왕은 그해 서울을 버리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한강 이남까지도 모두 고구려에 내주었다. 강화도는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는데 당시 군 이름은 혈구(穴口)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 되었다.
그 뒤 551년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553년에는 신라에게 다시 내주고 말았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구나 한강 어귀는 서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거점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때 신라의 대외 교통로의 첫번째 관문은 강화였을 것이다. 이때는 해구군(海口郡)또는 혈구진(穴口鎭)이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에서 우리 민족이 잊지 못할 역사가 전개되었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여 원종11년(1270)에 개경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39년 동안 몽고군사와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파란만장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강화는 강도(江都)로 불렸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화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했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의 군사적 뒷받침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삼별초(三別抄)는 원종의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대장경의 조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당시에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
과를 밝히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그런가 하면 고려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이 일제시대에 마구 도굴되어 그 폐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려청자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沙蓮花紋瓢形注子)는 바로 강화도의 최항 묘에서 도굴된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 사람들은 강화 남쪽 마니산 꼭대기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게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고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롤 피신하여 100여일 동안을 머무른 저거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1.26-4.10)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 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배도(背都)가 되어 유수(留守)와 경력(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 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한강 어귀 강화에 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3. 지정학적 위치
강화도는 단군신화의 근거지로서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에는 서해 방어의 요충지로, 고려 시대에는 대몽 항쟁의 수도로, 조선 시대에는 왜란과 호란 같은 외세 침입의 최일선이 된 섬이었다. 이렇게 강화도가 역사의 중심지에 자리잡게 된 것은 강화도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일 것이다.
강화도의 서쪽과 남쪽은 바다이다. 북쪽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와 맞닿아 있다. 동쪽은 물살이 빠르기로 이름난 염하이다. 한마디로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이다. 고려시대 이후 외세의 침략으로부토 왕권을 지키고 대외 항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염하의 물살이 거세, 갑곶 나루터 등 몇몇 지점만 방어하면 적군이 상륙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외세가 강화도를 침략의 첫 과녁으로 삼은 이유는 강화도를 점령하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과 내륙지방을 마음대로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화도는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구국 항쟁의 역사속에 우뚝 서게 되었다.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인 만큼 산성, 포대와 같은 전적지들이 많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인 정족산성은 단군이 자신의 세 아들을 보내어 성을 쌓게 했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고도 불린다. 광성진은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침입을 죽음으로 저지한 전승지이다. 이 밖에도 인화진, 철곶진, 월곶진, 갑곶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 강화성 등의 수많은 전적지가 강화에 있는 것도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1976년 부터 정부는 강화전적지보수정화사업을 시행하여 유적을 복원하였다.
* 전등사(傳燈寺)
1. 창건의 역사
강화도 남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마니산(摩尼山, 해발 469m)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닫다가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정족산이란 산명은 이 산의 형상이 마치 솥의 세 발과 같이 생긴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장족산에는 단군이 그의 세 아들에게 명령하여 쌓았다는 삼랑성 (三郞城)이 있다. 이성은 정족산에 위치하여 때로 장족산성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주위 약 2km, 높이 2.3~5.3 m 의 석성이다. 이 성의 축성 년대는 단군의 연대가 여전히 안개 속인 것처럼,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알수 없는 어느 시대에 삼랑(三郞)이라는 신하를 시켜 성을 쌓았다는, 근거가 불확실한 설도 구전되고 있다.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후 가 궁궐을 삼랑성 밑 신니동 (神泥洞)에 정했다는 '고려사'의 기록(고종 46년, 1259)이 있어 고려
고종 이전의 축성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이 단군을 제사드리던 곳이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이상 단군의 세 아들이 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을 무시해 버리기도 어렵다.
삼랑성에는 4개의 성문과 누각이 있었는데, 종해루인 남문은 1976년에 중수, 복원했고, 현재 전등사 입구인 삼랑성문은 당시의 동문이었다. 나머지 두 문과 종루는 없어지고 성곽만 남아 있다. 705 개소의 화살터 등이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파손되기도 하고 많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성 대부분이 토성인데 비해 삼랑성은 견고한 석성(石城)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정족산의 삼랑성내에 전등사(傳燈寺)가 자리잡고 있다. 전등사의 창건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에 아도화상이 개산하고 진종사 (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이것은 아도화상 초창(初創)이라는 전설을 더 부연하여 그 창건의 연대를 설정한 것이고, 어떤 단정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했다는 아도(阿道)가 신라 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곳 강화도까지 와서 절을 세웠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정적으로 그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도 없고 보면, 일단 이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당시 이곳은 백제 땅, 아도화상은 태백산 줄기를 타지 않고 평양에서 이곳 백제로 곧장 내려와 신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함.) 그리고 이
때만 해도 강화도는 백제의 영토였고 이로부텨 백 년 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 땅이 되었으니 역사적 사실에 빗나간 모호함 도 있다.
이후 전등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려때 몽고족의 침략으로 강화도가 도읍지로 경영되고서부터이다. 고려 고종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최씨 무신 정권이 항몽의 기치를 내걸고 해전에 익숙치 못한 몽고병의 약점을 이용,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다. 험난한 강 해협의 물살을 이용하여 사직을 지켰으며 39년 간(1231~1270)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끝내 국운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도부의 내분으로 항복하게 되는데, 이때 마지막 수단으로 주술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운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재 전등사가 자리잡은 위치에 가궐(假闕)을 짓고 대불 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베풀면 8개월이 못 되어 반드시 반 응이 있어 친조(親朝)하라는 것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한 (三韓)이 진단(震檀)이 되어 대국이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고려 고종은 그 즉위 46년(1259)에 命하여 삼랑성과 신니동에 가궁궐을 조영케 했다.('고려사'卷 24) 원종 5년(1264)에는 이곳 삼랑성 가궁궐에 대불정오성도량을 베풀어 4개월 동안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왕은 황제를 배알하는 수모를 당함으로써 아무 효험도 보지 못하고 만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삼랑성 내에 현존하는 모습과 같은 전등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면 가궐을 세우지고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궐 옆에 사찰이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위 2km밖에 되지 않는 성내에 가궐과 사찰이 함께 세워지기는 어렵고, 만약 전등사가 있었다면 '고려사'의 기록에 한 번쯤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마도 고려 고종과 원종 때까지 이곳에 전등사가 세워지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은 고종 때 이곳 삼랑성에 가궐이 세워졌고 원종 때 이곳에서 법회가 열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등사의 창건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찰측의 문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 밖 에 없는 노릇이다. 이 페허의 가람(伽藍) 터를 새롭게 일으킨 이가 바로 충렬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원나라 至元 19년에 충렬왕비 정화궁주 王氏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바다를 건너 宋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하여 이 절(전등사)에 보관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비로소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충렬왕비 정화 궁주임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의 시에 또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은 절로 맑고
전등사 노승은 나의 행차 인도하네
창 밖의 먼산은 하늘 끝에 벌였고
누(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세월 속의 역사는 오태사(俉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구나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하서 고쳐 세우리
벽기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정화궁주가 宋나라에 스님을 보내 대장경을 인출해 오던 시기는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지(1270) 12년 뒤인 1282년이었다. 이로써 고려 고종이 삼랑성에 세웠다는 그 가궁궐이 그대로 전등사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 하나 사찰측의 전설에 의하면 정 화궁주가 옥등(玉燈)을 이 절에 시주했기 때문에 사명을 고려 이때부터 전등사라 한다고 하지만, 그 옥등마저 전해지지 않는 지금 이러한 전설을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없지도 않다. 더구나 전등사 가 자리잡고 있는 장족산이 고려 시대에는 전등산(傳燈山)으로 불리고 있었던 사실('고려사'卷 56)을 상기한다면 寺名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설을 그대로 믿기에는 의심이 따르게 된다. 결코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등사라는 사명을 전등산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견으로는 진리 의 등불은 시공(空)에 구애됨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는 불교 본래의 의미로 '전등사'라 불렸으리라 여기기도 한다.
02. '실록 원본의 보장처(保藏處)'로서의 전등사
전등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이었으므로 고려시대에는 계속 왕실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등사사적기략(傳燈寺事蹟記略)'에서 충숙왕 6년(1337)과 충혜왕 2년(1341)의 중수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세(寺勢)과 극도로 쇠미해 갔던 듯하다.
다만 임진왜란 때 강화는 왜병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병화는 면할 수 있었지만 전등사는 난후인 선조 38년(1603)에 불이 나서 사찰 건물의 절반쯤을 태우고 이어 광해군 6년(1614)에는 건물 전체를 불태우는 불행을 연속 당하여 한때는 폐사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사주(寺主) 지경화상이 재건을 시작하여 7년 뒤인 광해군 13년에 준공을 마쳐 사세를 복구한다.
이 후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란하여 일시 수도가 되기도 하고, 병자호란 때에도 조정이 강화로 피란하여 고려 때 몽고에게 저항하였던 것처럼 항쟁하려 하였으나 왕이 미처 피란해 오기 전에 전로(前路)가 차단되어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 하고 뒤어어 강화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어 왕실 귀문의 일족들이 일거에 포로가 됨으로써 결국 인조가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니 이후로 강화도는 다시 전략적 요충지로 조정의 관심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전등사도 크게 주목되어 현종 원년(1660)에는 강화 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장차 왕실 세보(世譜)와 문적(文籍) 및 역대 조종 실록 을 이곳으로 이관 보장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삼랑성도 크게 수축하면서 정족산성이란 이름으로 개명하는 듯하다.
원래 강화도 마니산 사고에는 실록의 원본인 전주 사고본이 보장되어 있었는데 이제 이렇게 장사각이 지어지자 숙종 4년(1678)에 이 마니산 사고의 실록 원본을 이곳 정족산 사고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璿源世譜)를 비롯한 왕실 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관하게 되니 일약 전등사는 국가와 왕실의 사적 원본을 수호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어 조정의 비호와 관심의 대상이 된다. (1707년 강화유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했으며, 이곳을 왕조 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인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한다.)
그래서 숙종 39년(1713)에는 영조가 20세의 청년 왕자로 선원록 (璿源錄) 봉안 도제조가 되어 이곳 전등사에 친림하기도 한다. 이때 장사각과 선원각의 별관으로 사책의 포쇄와 검열을 위해 지어진 집인 취향당의 편액을 친필 휘호하여 남겨 놓아 지금도 사중에 전해진다.
이렇게 전등사는 국가와 왕실에서 보호하는 국찰이 되니 이로부터 선두포(船頭浦)일대의 토지를 하사받고 경기 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 결과 장차 일제시대에 조선 사찰령의 제정(1911)으로 30본산 제도가 시행되자 전등사는 강화, 김포, 파주, 장단, 개풍 등 5개군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는 대본산이 된다.
3. 가람배치(伽藍配置)
누각(樓閣)이 대웅전 바로 앞에 위치함에 산지 가람의 경우와 동일하나, 전통적인 산지사찰 배치는 깊이가 깊든가 폭이 넓든가 하여 강한 방향성을 갖는데 비해, 이 절은 폭이 좁고 깊이가 얕아 긴 공간감이 없다. 원래는 대웅전 마당과 약사전 마당 사이에 ㅁ자형의 요사채가 있어서 두 영역을 분리시켜 대각선 방향으로 통하게 했으나, 현재는 요사채가 철거되어 휑한 마당만이 있을 뿐이다. 대웅전 영역과 약사전 영역을 매개, 연결해 주는 것이 향로전으로서 세 건물은 남향으로 나란히 서있지만,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튀어나와 있다.
(1) 대웅보전(大雄寶殿)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각 기법은 그보다 한참 후대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정면 3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후기적 양상을 띠어 곡선이 심한 지붕과 좁은 정면은 수직적 상승감을 강하게 추구하고 있다. 모서리 기둥 높이를 약간 추켜세워 처마끝이 날아갈 듯 들리도록 했고, 후기 다포계 건축에서는 보기 힘든 배흘림 기둥도 특이하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집 형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다 전등사만의 독특한 변화를 준 것이 있다. 앞서 말한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인물상을 조각해 얹은 점이다. 공포 위로는 동물조각, 귀면, 연꽃봉오리가 눈에 띄고, 발가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나녀상,裸女像)이 애처롭기에 앞서 매우 해학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도편수의 증오가 부처의 넓은 도량에서 예술로 승화되면서 전등사만의 특별한 양식이 된 것이다.
이 나녀상에 얽힌 전설을 살펴보면...........
전설인 즉 광해군 때 이 대웅전을 짓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 주막집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도편수는 노임으로 받은 돈을 그때그때 여인에게 맡겼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마음이 변한 여인이 그 돈주머니를 가로채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래서 도편수가 추녀 밑에 이 벌받는 나녀상을 조각하여 법당의 네 귀에서 추녀를 떠받치게 하였다. 풍경소리와 부처의 설법을 들으며 평생토록 뉘우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등사의 혜경 스님은 일개 도편수가 부처님의 법당을 지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 그런 조각을 하였을 리는 없고 호 국 도량인 전등사의 대웅전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으로 조각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절 집의 수호신상으로 보기에는 그 표정이나 위기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고 다른 사찰에서는 그러한 예가 없으므로 전등사만의 어떤 사연과 결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전등사의 역사를 시작하던 때 이 도량을 통해 자신의 간절했던 염원을 기구했을 한 여인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그이인데 몽고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의 총애마저 원나라의 제국공주가 차지해 버리자 별당에서 한으로 살았던 비운의 왕비였다. 어쩌면 이 나녀상은 이방인으로서 고려의 왕실을 차지하고 오만방자했을 원나라의 제국공주를 징벌하기 위해 깎아넣은 조각이 아닐까........?
또 다른 생각으로는 팔만대장경을 주조해 불법의 힘을 빌어 원나라를 물리치고자 했던 고려 사람들의 마음이 전등사의 벌받는 나녀상에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내부를 살펴보면..... 불단 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華麗精緻) 한 아름다움은 건축 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라 하겠으며, 그 안에 용과 봉황, 비운(飛雲)등이 서로 어우러져 재현해 낸 천상의 모습은 족히 극락정토를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공포로 층층이 쌓아올려 장엄한 사면의 벽 천장에서는 극락도가 날아오르고 들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蓮), 모란(牡丹), 당초(唐草)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또한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정교하고 아름답게 목조각으로 조성된 불단 위에 석가모니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는
고종 17년(1880)에 조성된 후불탱이 안치되어 있다. 1544년 정수사 (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2)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서쪽 옆에 있는 목조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조선 중기의 다포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건축년대는 알려져있지 않다.(대략 18세기경으로 추정) '전등본말사지'에 "고종 13년(1876)에 대웅전과 함께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건물의 내부나 외부 형식이 거의 대웅전과 같은 형식의 건물로 보이나, 구조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포계냐, 주심포계냐 하는 논한이 있는 건물로 전면은 다포계 형식이지만 가장 특징적 부대인 평방이 없고, 게다가 전면을 제외하고는 공포 대신 화반을 주간(主間)에 얹었다. 일종의 절충식 구조라 하기도 한다. 약사전의 본존은 약사여래좌상이다. 다소곳이 내리뜬 눈, 유난히 큰 귀가 중생의 아픔을 충분히 섭수하여 병의 근원을 치료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3) 대조루(對潮樓)
대조루는 대웅전 바로 앞에 위치한다. 아침저녁 밀려오는 潮水를 대하고 있어 대조루인가, 2층 건물로서 그 모양이 당당하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문루 역할을 하고 있으며, 2층에 '傳燈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조루는 영조의 시주로 대웅전과 함께 중수했으나, 헌종 7년 (1841)에 다시 지었다. 그 후 두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건물로 남아있다. 대조루 안에는 지금도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보각(譜閣)의 현판인 선원보각, 장사각, 추향당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4) 전등사 범종
전등사에 소장된 높이 1.64m, 밑지름이 1m인 중국 송나라때 동종이다. 종몸의 아래 위에 8개의 사각형 구획을 마련하고 그 안에 새긴 뚜렷한 명문이 남아 있다. 명문 내용으로 이 종이 북송(北宋) 철종 소성 4년(1907)에 제작한 하남성 백암산(百巖山) 숭명산(崇明山)의 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 말기 군수물자 징발에 전등사 범종을 강제 공출당했다가 우연찮게 지금의 동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범종을 잃어버린 전등사 주지스님은 해방이 되자마자 일제 때 빼앗겼던 종을 찾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천 항구를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가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있다고 일러주어 달려갔더니 전등사 종은 아니었다. 주지스님은 어떻든 임자 없는 이 종을 가져가야겠다며 운반해왔다고 전하는데, 전등사 범종보다 큰 대종이었다. 국내에는 중
국종이 몇 있으나 그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힌다.
이 종은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음통이 없다. 쌍룡이 등을 마주 해 꼭지를 이루고, 용두 주위에는 16잎의 연꽃이 둘러져 있다. 종몸을 상중하로 나눠 띠를 두르고 매화문을 새겼으며, 띠 윗부분에 8 괘를 배치한것도 특이하다. 종몸 아래로 4개의 당좌(撞座)가 있다.
전체적으로 큰 무늬 때문인지 장중한 맛이 있으며, 또한 소박한 솜씨도 엿보인다. 종소리도 맑고 청아하다
정수사(淨水寺)
강화도 남단에 해발 467m의 높이로 우뚝 솟고, 동서로 약 20리에 걸쳐 나래를 펴고 있는 마니산. 그 마니산 동쪽 기슭에 천년 고찰 정수사가 고즈넉히 안겨 있다. 전등사에서 참성단으로 이르는 산길에 있는 조그마한 절로 사찰이라기 보다는 암자와 같은 성격이다. 사찰의 입지로 서는 드물게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여,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사찰 영역에 도달한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한다고 여러 책들에서 말하고 있지만, 이같은 기록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정수산영각중건기(淨水山靈閣重建記)'(1903년의 기록임)에는 <창건 년대를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 시대 창건설은 전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강도지 (江都誌)'에도 정수사(淨水寺)의 창건을 어느 때 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 창건설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로선 유력한 듯 하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수했는데, 법당 서쪽의 맑은 샘물이 솟아나 사명을 정수사(淨水寺) 라 고쳐 부르게 된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진, 만홍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면서 중수, 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가 있고, 근년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1848년 무렵에 조성된 아미타불 후불. 지장. 칠성 탱화각 있고, 삼성각에 1878년에 조성한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평대군이 썼다는 법화경. 은중경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정수법당)은 세종 5년(1423)에 중창했다.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퇴칸이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이해 할 수 밖에 없다. 우선 맞배지붕의 용마루가 전체의 중앙에 걸리지 않고 몸체부분의 가운데에 걸려 앞쪽 낙수면의 크기가 뒤쪽보다 크며, 측면 박공부분의 길이와 높이도 다르다. 또한 퇴칸과 몸체 부분의 공포구 조가 확연히 달라 시대적 차이를 뚜렷이 알 수 있다. 따라서 평면비례도 정방형에 가까운 결과가 되었다. 몸체부분은 조선초 주심포계의 전형으로서 간결한 모습이나 퇴칸의 공포대는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뚜렷하다. 전면에 퇴칸을 설치한 법당으로는 안동의 개목사 원통전(開目寺 圓通殿)을 들 수 있으나 그 건물은 처음부터 퇴칸이 계획된 것이다.
건물 내부는 마루를 깔아 정면 중앙에 불단을 두고 천장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전면의 문 가운데 사분합문은 마치 요술단지 꽃병에서 소담스럼 목단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그 유래가 드물다.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을 묘사해, 조각된 연꽃줄기들이 창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꽃병은 청자와 진사도자기이고, 네 개의 꽃병 문양이 다르다.
* 몽고의 고려 침략사 및 고려의 대몽 항쟁사
1. 13세기 초의 고려 주변 정세
1206년 테무친은 중국 북방에 산재해 있던 몽골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어 칭기스칸이라 하였다. 징기스칸은 몽골 서쪽에 있
던 티베트족의 나라 서하를 정벌하고 이어 금을 공격하였으며 만주, 중
앙아시아, 동유럽, 남러시아 등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무렵 몽고세력의 팽창으로 금나라가 무너져 가는 틈을 타 만주지방
에는 두 나라가 서게 되었다. 거란족이 세운 대요수국과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가 금나라를 배반하고 세운 동진국이었다.
이때 고려는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집권하여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
었으며 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아 최씨 무인독재
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독재정치와 무신들의 부패로 고려의 국력은 약
해져 있었고 전국에서는 농노들의 반란이 잦아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2. 고려와 몽고의 형제 동맹
몽고에 쫓긴 거란족은 1216년 8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하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상장군 노원순, 오응부와 대장군 김취려로 하여금 거
란군을 방어토록 하였다. 그러나 김취려를 제외한 나머지 군사는 효과
적인 방어를 하지 못하였고 거란군은 개경근처까지 밀려 들었다. 원주
와 예천을 함락시킨 거란군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고려와의 싸움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218년 고려는 대공세를 취하여 거란군을 강동성
으로 패주케 하였다.
한편 몽고는 동진국을 병합하고 동진과 연합하여 거란의 본거지 강동
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저항이 강하여 오히려 보급로가 끊긴
몽고는 고려에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고려는 이에 호응하였으며 군사
적으로는 연합세력을 구축하였다. 고려, 몽고, 동진국의 연합국이 거란
을 치자 거란을 한달 간 버티다 1219년 정월 강동성을 열고 항복하였
다.
거란이 항복하자 몽고의 원수 합진은 고려에 강화를 요청하였고, 고
려 조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몽고와 고려는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합진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수하 40여명을 의주에 남게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가을에 몽고군이 다시온다는 소문이 파
다하게 퍼졌다. 또한 몽고군과 동진군은 변방지대에 무력시위를 하며
고려에 대해 공납을 독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3. 몽고의 고려 칩입
몽고와 고려의 통교이후 몽고는 외교관례를 무시한 무례한 행위와 요
구를 함으로써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1219-1225년 사이 무려 15차례
나 고려에 사신을 보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예컨데 1221년 사
신으로 온 저고여는 수달피 10만장, 비단 3,000필, 모시 2,000필, 종이 10
만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1219년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하자 최우는 가능한 몽고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몽고의 요구는 끊임이 없
었고 고려 민중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25년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가에서 도적들에게 살해되
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일과 무관함을 주장하였으나
몽고는 이를 구실로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이때 몽고에서는 징기스
칸이 원정중에 죽고 그 아들 오고타이가 집권하였고 그는 살리타로 하
여금 고려를 치게 하였다.
가. 제1차 침입과 농민군의 결사 항전
1231년 8월 몽고는 원수 살리타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건너 내침을 감
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몽고 침략군은 삽시에 청천강 이북의 여러 지
역을 유린하였다. 그들은 먼저 함신진(의주)과 철주성을 점령한 후 부대
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귀주성을 포위,공격하고 다른 한 부대는 서
경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이 땅의 민중들은 조국
을 침략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무신들의
수탈에 고통을 당하고 있던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해야 했지만 나
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나로 뭉쳤던 것이었다. 9월초 서북면
귀주 부근 마산의 농민군 지휘자 2명은 스스로 개경의 최우를 찾아와
자신들이 이끄는 5000명의 농민군과 함께 방어군에 참여하였다. 이제까
지 봉건 지배층의 학정과 수탈에 맞서 싸우던 농민군이 조국과 민족의
위기 앞에서 그 투쟁의 창 끝을 침략자에게 돌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몽고군이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방어군을 편성
하였다. 고려 방어군은 9월 20일 동선역(황해도 봉산0에서 몽고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동선역 전투에서 고려군은 몽고군의 기습으로 큰 위기
에 빠졌지만 마산 농민군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나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는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어진 10월 하순의 안북부
(평남 안주)전투에서 몽고군의 주력 부대에 패배하였다. 안북부 전투가
실패로 끝나자 고려 조정은 침략군과 전투를 피하면서 특사 민희를 파
견하여 강화를 서둘렀다. 최우는 몽고군의 선봉 부대가 예성강을 넘어
개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병을 수도 방어에 참가시키지 않
았으며 적극적인 방어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강화 교섭에 주력하였다.
최우의 생각은 적의 요구를 일부 들어주면서 전쟁을 빨리 마무리 하자
는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침략군을 개경을 포위하는 한편 광주(경기
도), 청주, 충주 등 국내 깊숙히 침입하였다.
최우 정권의 소극적이고 비겁한 태도와 달리 지방의 군민들은 침략자
에 맞서 불굴의 의지로 항전을 전개하였다.
귀주성 군민들은 서북면 병마사 박서의 지휘아래 1231년 9월 초부터
다음해 1월 적이 물러갈 때까지 4차례에 걸친 적의 집요한 포위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고수하였다. 김경손은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밖에 나
가 적의 장수를 활로 쏘아 떨구는 등 4-5차례에 걸친 접전을 승리로 장
식한 후 귀환하였다.
집요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이 끄떡도 않자 한 늙은 몽고군 장
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성들에 대
한 공격전을 무수히 보아 왔지만 이처럼 공격을 받으면서도 항복하지
않는 곳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귀주성 전투는 몽고와의 제1차 전쟁에서 고려측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귀주성이 건재함으로 해서 적은 주력 부대의 상당 부분을 계
속 청천강 이북에 주둔시켜야 했으며 끊임없는 배후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귀주성 이외에도 지방 군민의 항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자주성,
서경성의 군민들은 헌신적으로 투쟁하여 성을 사수하였으며 철주성의
군민들은 장렬한 전투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철주성의 낭장
문대는 적에게 사로잡혀 성의 군민들에게 투항을 설득하라고 강요받자,
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 앞에 이르자 오히려 끝까지 항전하라고 격
려하다가 희생되었다. 또 판관 이희적은 식량이 떨어지고 형세가 위급
해지자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른 다음 병사들과 함
께 끝까지 항전하다가 산화하였다.
충주에서도 적극적인 항전이 이루어졌다. 1231년 11월 몽고군의 한
부대가 충주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지방 양반들로 구성된 양반 별초,
노비로 구성된 노군(奴軍), 그리고 천민으로 이루어진 잡류 별초(雜類別
抄)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 몽고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양반 별초들은 모
두 줄행랑을 쳐버렸지만 누군과 잡류별초는 끝까지 항전하여 성을 방어
하였다.(몽고군이 물러가자 그제야 돌아온 양반 별초들은 전투 기간중
은그릇 등 재물이 없어졌는데 이는 노군이 소행이 분명하다며 노군의
지휘자들을 죽이려 하는 등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노
군들은 1232년 1월 봉기를 단행, 노군을 모해하고 박해하는 데 앞장선
양반 관리들을 처단한 다음, 수개월 동안 성을 장악하고 지배층에 대항
해 투쟁하였다). 그 결과 침략군의 진격은 여기서 멈추고 삼남 일대가
무사하게 되었다.(충주는 몽고와의 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가장 집요하게
저항하여 끝까지 성공적으로 방어한 지역이다)
이와같이 중앙의 집권 세력과는 달리 지방의 군민들은 어려운 조건에
도 불구하고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각지의 항전에 부딪힌 몽고군
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231년 12월에 이르러
강화교섭에 적극 나서기 시작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 진영에 회
안공 왕정을 보내어 화의를 추진하였다. 화의 요청을 받은 몽고는 저고
여 살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고 고려측은 저고여 살해는 금나
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고려는 몽고군 지휘관에게 황금,
백은 등을 주어 달래고 양국간 평화를 지속시키는 약조를 성립시켰다.
몽고군은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역의 40여개 성에 다루가치(원나라에
서 총독 등을 호칭하는 관직명)를 남겨두고 1232년 정월에 철수하였다.
나. 강화 천도
몽고는 물러간 후에도 약탈적인 물자 강요, 내정간섭이 계속되었다.
몽고는 서북 지방의 40여개 성, 심지어 개경에까지 다루가치라는 관리
를 파견하여 고려 내정을 공공연이 간섭하였으며 몽고 사신들은 귀주성
전투의 지휘자인 박서를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 하는
등 갖은 횡포를 부렸다. 뿐만 아니라 살리타는 압록강 대안에 머물면서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최우 정권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몽고의 내정간섭은 무
신정권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막대한 물자 강요는 고려 정
부의 재정파탄, 나아가 민중의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민중의 반정권 투
쟁을 폭발시킬 소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최우는 항전
을 결의하고 1232년 7월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였다.
강화도 천도는 당시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우선 고려군의 역량을 따져 볼 때 개경 사수가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몽고 기병은 해전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우 정권은 천도를 행하면서 육지의 주민들에게 산성이나 섬
으로 옮겨 살도록 지시하는데 그쳤을 뿐, 각지에서 치열하게 항전을 전
개하고 있는 민중의 힘을 하나로 끌어 모으기 위한 대책과 국가적인 차
원의 항전 대책은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사실 최우 정권의 입장은 적
극적인 항전보다는 소극적인 항전에 있었고 근본적으로는 무신정권의
안전에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강화도로 이
어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최이가 강화도로 옮겨가야 한
다고 강요하는 데도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최이는 천도를
반대하던 김세창을 죽이고 녹전차 백여 대를 동원하여 자기 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토록 하고 기일을 정하여 궁궐의 모든 기관을 강제
로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다. 그는 강화도를 떠나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1231년 6월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아랑곳 않고 무릎까지 쑥
쑥 빠지는 진창을 헤치며 백관과 그들의 가족들은 강화로 떠났다. 최이
의 강압에 못 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궐로 들어갔다.
다. 제2차 침입과 김윤휴의 활약
내시 윤복창과 서경문수사 민희 등이 각각 서북면과 서경에서 몽고
잔병인 다루가치를 습격하고, 최우가 수도를 강화로 옮기자 1232년 8월
몽고는 2차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살리타가 거느린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간 전투를 피하면서 속전
속결로 개경까지 다다랐다. 당시 개경에는 유수 병마사 휘하의 수천 명
의 군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민들과 힘을 합하여 성을 끝까지 지켜냈
다.
개경 점령후 강화도를 공격하려던 애초의 계획이 무산되자 살리타는
남쪽으로 방향알 잡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광주(경기도) 민중들이 이를
막고 나섰다. 광주 민중들은 지방관 이세화의 지휘 아래 일장산성(남한
산성)에서 방어 전투를 수행하여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일장산성에서 혼이 난 살리타는 주력 부대의 일부를 이끌고 1232년
12월 처인성(경기도 용인)으로 접근하였다. 당시 처인성에는 지방관이나
군사 지휘관이 없었지만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대열을 편성, 용감하게
싸웠다. 이 때 중 김윤후는 활로 살리타를 쏘아 죽였다. 지휘관을 잃은
몽고군은 혼란에 빠져 허둥지둥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 전쟁은 고
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라. 제3차 침입과 전국토의 황폐화
제2차 침입에 실패한 몽고는 1233년 4월 사신을 보내 고려 국왕의 출
륙친조(出陸親朝:왕이 강화도를 나와 직접 몽고를 방문하는 것을 이름)
를 요구하였다. 군사적 방법으로 어렵게 되자 외교로 고려의 항복을 받
아 보자는 속셈이었다. 고려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국제 정세는 고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233년 9월 동진국이 멸망하고 1234년 1월에는 금이 몽고군에 의해 멸
망함으로써 동아시아에는 고려와 남송만이 몽고의 대립 세력을 남게 되
었던 것이다.
더 많은 역량을 대고려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된 몽고는 1235년 동
진군을 끌어들여 서북면과 동북면으로 침입해 왔다. 몽고군은 빠른 속
도로 진격하여 8월에는 남경, 평택, 아주(아산)에까지 이르렀다. 엄중해
진 상황에서 최우는 강화도 방어에 주력할 뿐 육지 전투에는 소극적을
대처하였다. 그는 각 도의 산성에 군관인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
여 산성과 섬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고 실제 전투병력으로는 160명의 야
별초만을 강화도에서 내보냈다. 고려 강토가 몽고군에게 도륙되고 있다
는 소리를 듣고 최우는 강화도와 육지간에 운하를 굴착하려는 시도도
하였고, 울릉도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
주시키다가 풍랑으로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울릉도 이민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각지의 군민들은 국가적 규모의 방어군도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야간기습, 매복습격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굽힘없이 항전
을 전개해 몽고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1235년 10월 지평현(양평),
1236년 7월 개주, 요덕, 정변, 같은 해 8월 자주, 석도(황해도 은율), 같
은 해 9월 온수군(아산), 죽주성(안성)등이 바로 이처럼 적에게 타격을
가한 지역이었다. 특히 보름 간에 걸친 적의 집요한 포위 공격을 물리
치고 끝내 성을 지켜낸 죽주성 전투는 제3차 전쟁기간중 가장 빛나는
승리를 기록한 전투였다.
1236년 10월 침략군의 일부가 전라도의 전주, 고부 지역에까지 이르
자 그곳의 군민들은 1236년 10월 부령(부안), 같은 해 12월 대흥현(충남
홍성)등 각지의 산성에서 더욱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236
년 소강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1238년 말부터 강화 교섭이 본격화되
고 몽고 내부에서는 권력암투가 벌어져 이듬해 4월 화의가 성립되어 몽
고군은 물러갔다.
제3차 전쟁은 4년간의 장기간에 걸쳐 벌어졌고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이 불에 탄 것도 이때였다. 또 강화
교섭에서 고려측은 몽고의 출륙친조 요구까지 받아 들여야 했다. 그러
나 몽고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왕족들을 대신 몽고에 파견하면서 출륙친
조의 이행을 거부하였다. 국왕의 몽고 방문은 곧 완전 항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최우는 국왕이 항복하면 무신정권이 끝장 난다고 생각하고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의 성립 후에도 고려와 몽
고 사이에는 팽팽한 외교적 대결이 계속되었다. 어쨌든 제3차 전쟁이후
고려에는 7-8년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평화의 기간이 찾아왔다. 이 평화
의 기간은 국가의 방위력을 정비하고 강화할 수 있느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최우는 이를 소홀히 한 채 여전히 호화스런 생활을 하고 걸핏하
면 주연을 열어 먹고 마시는 일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는 그의 강
화도 행이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일임을 확인
시켜주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최우는 부처의 힘을 빌어 나라를 지킨다
는 명분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당시
육지의 마을들은 침략군의 말발굽 아래 쑥밭이 되고,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여기저기서 죽어가는데 왕을 비롯한 강화도의 지배층은 교
정수확원(敎定收穫員),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등을 각지에 보내 가
혹하게 수탈하고는 이를 자신들의 호화 사치 생활에 쏟아 부었던 것이
다. 이러한 지배층의 부패는 1237년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뒤흔든 이
연년 농민군의 투쟁에서 보듯 민중의 반봉건 투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마. 제4차 침입과 최우의 사망
몽고는 1247년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하였는데 염주(황해도
연안)까지 이르렀던 몽고군은 1248년 봄 몽고왕 정종이 갑자기 죽고 지
배층내에 내분이 발생함에 따라 곧 돌아갔다. 그 사이 고려의 실권자
최우가 1249년 11월 사망하였고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권력을 승계하였
다.
바. 제5차 침입과 김윤후의 결사항전
최우가 죽고 그 아들 최항이 집권하자 그도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몽고군은 1251년에 다시 출륙환도(出陸還都:왕이 육지로 나오고 도읍을
원래대로 옮김)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환도의 뜻을 품었지만 최항
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출륙환도를 놓고 왕실과 최항간
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고와
화친하기를 바랐지만 최항은 끝까지 강화도에 머물면서 항전할 생각이
었기 때문에 출륙환도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몽고군
은 1253년 다시 제5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야굴, 송주가 거느린 몽고군과 동진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 8월에 전
주 근방까지 접근하였다. 이번에도 지방의 군민들은 1253년 8월 금교(황
해도 금천), 반석역(전주 부근), 양산군, 같은 해 9월 충주, 같은 해 11월
평주성 등 곳곳에서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최우의 대를 이어 정권
을 잡은 최항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육지의 군민을 지원하기보다
는 적을 회유하거나 강화 교섭을 벌이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각지의
군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완강히 싸워 나갔다.
등주(안변)의 군민들은 1253년 2월 동진군이 쳐들어온 이래 7-8개월
간이나 성을 지켜 용감히 싸웠으며, 같은 해 9월 춘주(춘천)성의 민중들
은 적의 집요한 포위 공격으로 전투가 장기화되고 마실 물마저 떨어지
자 소와 말의 피를 마시면서까지 항전하였다. 춘주성의 군민들은 형세
가 급박해지자 성안의 곡식을 불태운 다음 안찰사 박천기의 지휘하에
결사대를 조직,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다가 모두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1253년 10월 충주성의 민중들은 제5차 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충주성 군민들은 적장 야굴이 직접 침략군을 이끌고 성을 포
위하자 제2차 전쟁에서 살리타를 쏘아 죽인 바 있는 김윤후의 지휘하에
70여일 간이나 성을 지켜 싸웠다(김윤후는 제2차 전쟁의 처인성 전투
이후 방호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투로 식량이 떨어짐에 따
라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이때 김윤후는 "누구든지 힘을 다하여 싸우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겠다"고 외치면서 관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노비를 비롯한 성안의
모든 민중들은 결사적으로 싸워 끝내 성을 사수하였다.
이처럼 각지 군민의 치열한 항전이 계속되자 1253년 11월 야굴은 개
경부근으로 퇴각해 고려 국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몽고 사신을 접견하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항복 요구와는 다른 제안이라고 판단한
고려 조정은 이를 받아 들였다. 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승천부로 나와 몽고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몽고군은 철군하
였다.
사. 제6차 침입과 최씨 무신정권의 몰락
몽고는 1254년 7월 또다시 침입하였다. 그들의 출륙환도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침입이유였다. 1254-1259년 사이에 진행된 제6
차 침입은 그 이전의 어느 침략보다도 잔인 무도하고 횡포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그들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침략군은 고려 민중들을 대량 납치하고 살륙을
일삼았는데 그들이 납치한 고려 백성은 20만에 이르렀고 죽은 사람은
셀 수 조차 없었다. 또한 고려민들의 공격으로 몽고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침략군은 고려 민중들을 대량 납치함으로써 고려 민중들의 항전
기세를 꺾고자 하였으며 강화도와 삼남 지방의 연계를 끊어 고려 정부
를 완전히 굴복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또한 서경 이북 지방을 장기 강
점하고 둔전군(屯田軍-농사를 지으면서 싸우는 군대)을 배치하여 자신
의 의도를 기어이 실현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애국적인 고려의 군민
들은 다시 한 번 결사적인 투쟁으로 침략자에 맞섰다. 괴주(괴산), 충주,
상주, 등주, 철령, 다인철소(다인철소는 충주 부근에 있었는데 향, 부곡
과 같이 천민 거주 지역으로서 철 수공업에 종사한 지역이었다. 다인철
소는 대몽 항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그 후 익한현으로 승격되었다), 입암
산성(정읍 남쪽 지점), 의주, 인주(인천), 온수현, 압해도(전북 무안), 애
도(평북), 창린도(옹진군), 성주(평남 성천), 금강성, 한계성(강원도 인
제), 춘주 등 각지에서 전개된 군민들의 투쟁은, 1256년 5월 몽고군의
우두머리 차라대가 고려 사신에게 "만약 화친을 바란다면 어찌하여 우
리 군대를 많이 죽이는가. 죽은 자는 할 수 없지만 생포한 자는 돌려보
내 달라"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 적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고려 군민의 완강한 항전은 침략자의 의도를 꺾기에 충분했다. 이는
1256년 4월경 차라대가 이제까지 집요하게 요구하던 고려 국왕의 몽고
방문 대신 고려 태자의 몽고 방문을 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데서 잘 드
러난다. 몽고측의 새로운 요구 조건은 고려에게 일정한 굴북을 강요하
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군사적 종복이 사실살 불가능함을 시인하고 고려
의 주권을 인정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던 것이다.
양측과 강화 교섭은 1258년 3월의 정변(무관 김인준, 문관 유경 등 문
무관료들이 일으킨 정변. 이 정변으로 최의가 살해됨으로써 60여 년에
걸친 최씨 정권이 끝나게 되었다. 정변 이후 왕권 회복이 선포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권은 여전히 무신 김인준이 장악하였으믈 무
신 정권은 존속되었다)이후 본격화되어 이듬해 3월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의 성립과 함께 몽고군은 물러가고 그 해 4월 고려 태자 전은 몽고를
향하여 강화도를 출발하였다. 태자 전을 만난 몽고의 쿠빌라이는 기뻐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고려는 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 당 태종이 친
히 쳐들어갔어도 정복할 수 없었는데 지금 그 나라 태자가 찾아왔으니
이는 하늘이 시키는 일임에 틀림없다"
몽고의 침략및 대몽항쟁 2
아. 개경환도와 무신정권의 종말
몽고의 화의가 성립된 후 강화도 정권 안에서는 개경환도 문제를 둘
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1258년 3월의 정변에서 보듯 정
권 장악에는 실패하였지만 예전에 비해 그 세력이 크게 자라난 문신 관
료들이 원종(몽고에 가 있던 태자 전은 고종이 죽은 후 1260년 4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원종이다)을 중심으로 개경환도를 강
력히 주장하였다. 이들이 개경환도를 주장한 것은 개경으로 수도를 옮
길 경우 몽고와 결탁을 통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계산한 때문이
며, 몽고는 국왕 일파의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이에 반해 소극적이나마 반몽의 입장을 견지해 온 김인준 등 무신 집
권층은 개경으로 돌아갈 경우 몽고와 결탁한 국왕 일파에게 정권을 내
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도 끝장이 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개경환도를 극력 반대하였다. 무신 집권층의 이러한 입장
은 김인준의 뒤를 이어 임연(1268.12), 임유무(1270.2)가 집권한 후에도 계속 고수되었다.
개경환도와 강화도 고수의 첨예한 입장 대립이 계속되고 있던 1269년
말, 몽고를 찾아간 원종은 무신 집권층 제거와 개경환도를 위해 몽고군
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민족 반역적 입장을 노
골화하였다. 몽고의 재침 위기가 닥치자 임연, 임유무 등은 항전 대책을
서둘렀으나 그간의 학정과 수탈로 인해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270년 5월 드디어 몽고군의 호위속에 귀국한 원종은 곧장 임유무의
부하들을 매수하여 임유무 일파를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100년에 걸친
무신 집권 시대는 막을 내리고 원종은 5월 23일 개경환도를 선포하였
다.
자. 삼별초 항쟁
이제 고려 왕정은 40년 동안 비워 두었던 본래의 도읍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의 개선이 아니었다. 개경환도는 외세와 결탁한 고
려 왕정의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30년 가까이 이 땅을 참
혹하게 유린한 몽고 침략자가 이 땅에 다시 들어옴을 뜻하는 것이었다.
개경환도 이후 고려 민중들은 몽고 침략자만이 아니라 그와 결탁한
고려 왕정을 상대로 해서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민중들은 이를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것은
삼별초의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을 말한다. 1219년 최우는 농민군
의 투쟁이 왕성해지자 야별초를 만들어 야간 순찰과 농민군 진압에 동
원하였다. 그 후 야별초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 편성하였는데, 이는 무신 정권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
서 좌별초와 우별초는 기본적으로 무신 집권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군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무신 집권 세력의 반몽적 입장은 농
민 출신인 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애국적 감정을 가지게 했다. 한편, 신
의군은 몽고군에게 납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장정들로 구성된 부
대로서 처음부터 강한 반몽 의식을 갖고 있었다.
애초부터 개경환도 반대, 항몽의 입장을 갖고 있던 삼별초는 국왕 일
파가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1270.5.29)하자 이를 거부하고 6월 1일 봉기
를 단행하였다.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삼
별초 항전군은 강화 민중들을 국왕의 놀이터였던 격구장에 불러 모아
대몽 항전을 호소하고 무기고를 풀어 투쟁의 대열을 확대하였다. 몽고
가 파견한 회교 승려와 항전을 반대하는 양반 관료들을 처단하고, 민중
의 지지에 힘입어 순식간에 강화 전역을 장악한 항전군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후 삼별초는 투쟁에 동참한 민중들과 함께 장
기적인 항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술적으로 유리한 진도로 근거지를 옮
겼다. 항전 개시 3일 째인 6월 3일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강화
도를 출발한 이후 남하하면서 서해 연안의 민중들을 투쟁에 불러일으킨
항전군은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하였다. 항전군은 진도에서 성(용장성)을
쌓고 수도를 건설하는 한편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
하였다. 또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항전할 것을 호소하고 전라도 안찰
사는 조세로 거든 곡식을 진도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삼별초의 호소
에 다라 각지의 민중들이 진도로 몰려드는 상황에서 9월 이후 항전군은
장흥, 나주, 전주, 등 전라도 일대에 대한 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11월에
는 제주도의 개경 정부군을 격파한 후 이를 장악하였다. 개경 정부군과
몽고군은 12월 말 김방경과 아해(몽고군)의 지휘하에 진도에 대한 대규
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명량 해협에서 항전군으로부터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당황한 개경 정부와 몽고군은 1271년
1-2월 사신을 보내 회유 공작을 벌였으나,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교섭에 응하겠다며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항전군은 1271년 2월에 장흥부 조양현, 3월에는 합포(경남 마산), 동
래, 김주(김해) 등지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남해도, 거제도, 제주도 등
30여 개의 섬을 장악하여 남해한 일대에서 힘차게 투쟁하였다.
삼별초 항전군의 줄기찬 투쟁은, "진도에 근거한 삼별초의 세력이 심
히 강성하여 주, 군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합류하였고 혹은 진도로 가서
적장을 만나기도 하였다"(고려사 권219, 열전 김응덕)라는 기록이 말해
주듯, 육지의 민중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그들을 투쟁에 나서게 하였다.
1271년 1월 밀성군(밀양)에서는 방보, 계년 등이 봉기를 일으켜 개경 정
부가 파견한 지방 관리를 처단하고 여러 고을에 통첩을 보내 진도에 호
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시기에 개경에서는 관노들이 다루가치와
봉건 관료들을 처단한 후 진도로 들어가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가 밀
고로 발각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2월 초 대부도의 민중들은 섬에 들어
와 약탈을 일삼던 몽고군을 처단하였으며 3월 초 양주(양양)에서도 봉
기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삼별초의 투쟁이 거세지고 육지 민중의 호응이 높아지자 위기감을 느
낀 개경 정부와 몽고군은 1271년 5월 수천 명의 병력과 100여 척의 함
선을 동원하여 진도에 공격을 가하였다. 항전군은 이에 맞서 용감히 싸
웠다. 그러나 당시 적지 않은 역량이 남해 연안에 나가 있었고 항전군
안에 있었던 일부 양반 관료들이 내부 사정을 적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
에 형세는 항전군에게 불리해졌다. 결국 배중손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
은 피해를 입은 항전군은 제주도로 이동하여 김통정의 지휘하에 전열를
재정비하였다.
1271년 2월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 항전군은 제주 민중을 끌어들여
역량을 보강하고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 등의 섬을 장악하여 전초 기지
로 삼았다. 항전군은 제주도로 투쟁 기지를 옮긴 후 약1년 동안 서해
중부 해안으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바
탕으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개경 정부와 몽고군을 1272년 봄부터 제주도 공격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사절을 보내 회유 공작을 벌였다. 이에 항전군은 회유 공작을 단
호히 물리치고 투쟁 결의를 다시 한 번 확고히 하였다.
마침내 1273년 4월 김방경이 이끄는 개경 정부군, 흔도, 다구 등의 몽
고군 등 도합 1만여 명의 제주 원정군이 전함 16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총공격을 해왔다. 항전군은 상륙하는 적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하였다.
항전군은 적이 쏜 불화살로 방어성 안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는데도 굴
하지 않고 싸워 나갔다. 하지만 워낙 중과부적인지라 방어성은 결국 함
락되고 마지막까지 남은 김통정 이하 70여 명의 항전군은 한라산에 들
어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리하여 3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차. 대몽고 항쟁의 의의
몽고와의 전쟁은 애초부터 몽고군과 고려군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즉
몽고군과 고려 민중간의 싸움이었다. 몽고가 국력을 키워 대제국을 건
설하고 있을 때 고려 조정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고, 무신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쟁탈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그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였지 국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
었다. 게다가 무신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수탈하였고 계속되는
무신들의 수탈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무신들의 집정이 계속되어 부패할대로 부패한 조정은 몽고군이 침략
하였을 때 이를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몽고군이 쳐들어 오자 무신
정권은 백성을 남겨두고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
니라 무신정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40여 년동안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
로 고려 민중들의 거센 저항정신 때문이었다. 그렇잖아도 무신들의 수
탈에 피폐해진 백성들은 몽고의 침략에 이중고를 겪게 되었지만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
이다. 정부군이 변변한 전투를 하지 못하는 가운데 전국의 민중들은 곳
곳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중들의 거센 저항은 몽고로
하여금 고려 복속의지를 한 풀 꺾이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고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가장 힘들었던 나
라중의 하나가 바로 고려였다. 30년간에 걸쳐 6차례나 정벌을 온 것에
서 볼 수 있듯이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로서도 고려만은 결코 쉬운 상대
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개경환도를 하고 고려왕이 몽고왕을 친조하
여 몽고에 복속되긴 하였으되 몽고가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할 수 있었
던 것은 고려 민중의 거센 외세 투쟁정신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와 몽고 사이에 화의가 성립된 후 몽고의 쿠빌라이(원 세조)는
1260년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몽고군의 철수와 함께 원종을 고려의 국
왕으로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고려뿐이다' 이처럼 상대국
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화의를 맺은 것은 몽고 침략 역사상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그러면 세계 최대의 단일 제국을 건설한 몽고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고려의 주권을 인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려가 원(몽고는
1271년 국호를 원으로 바꾸었다)제국내의 다른 민족이난 국가와 달리
자신의 영토와 주권, 군대를 지닌 채 독립국가로서 체모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1231년 제1차
침략으로부터 삼별초의 항쟁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
진 고려 민중의 영웅적인 항전 때문이었다. 무신관료들이 장악하고 있
던 고려 중앙 정부는 강화도 천도를 통해 항전 결의를 표명했지만 중앙
군이 전투다운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은 점, 국가적인 차원의 항전
대책을 세우지 않은 점, 투쟁에 나선 육지 민중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
를 별달리 취하지 않은 점 등에서 드러나듯 적극적인 항전보다는 기본
적으로 정권 수호에 급급했으며, 강화 교섭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만 주
력하였다. 이에 반해 농민, 천민, 노비, 애국적인 군인 등 고려의 민중들
은 중앙 정부의 별다른 지원이 없는데도, 농경지는 황폐화되고 기근이
휩쓰는 속에서도, 더욱이 봉건 지배층의 학정과 수탈이 계속됨에도 불
구하고 몽고 침략자들에 맞서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들의 투
쟁은 침략자의 진격을 곳곳에서 멈춰 세웠으며 강력한 타격으로 침략자
의 야욕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한마디로 몽고와의 전쟁 주체는 바로 빼
앗기고 억눌리던 고려 민중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몽고로 하여금 군
사적 정복의 불가능성을 인식케 하고 나아가 고려의 주권을 제한적이나
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는 컷다.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던 몽고 침략군은 엄청난 피해를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였
다.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파괴하였으며 20만을 넘는 고려인을 잡아
갔다. 나아가 고려 왕정이 침략자와 결탁한 가운데 온갖 민족적 굴욕이
강요되었다. 우선 원은 고려를 통제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충렬왕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은 원의 공주를 왕
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말하자면 고려왕은 원 황제의 사위, 즉 부마가
된 셈이었다. 당시 고려의 세자는 다음 왕위에 오를 때까지 연경(북경)
에 머물렀는데, 원은 고려왕이 자주적인 입장이나 정책을 취하는 경우
그를 폐위시키고 세자를 새 왕으로 내세웠다. 또 원은 일본 정벌 -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 을 위하여 설치했던 征東
行省)을 존속시키고 감찰 기관인 순마소, 군관인 다루가치를 배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원은 고려의 관제와 왕실 용어에 대해서도 그 격을
낮출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중앙 행정 기관인 3성 6부는
첨의부와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 등 1부 4사로 축소하였고, 왕
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 朕은 孤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각
각 격하되었다. 왕의 廟號역시 종래의 조나 종 대신 왕이라 하고 원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앞에 忠자를 붙여야 했다.
정치적 지배 및 간섭과 함께 원은 막대한 물적, 인적 수탈을 강요하
였다. 고려는 원의 일본 정벌 당시 수백 척의 병선과 수십만 섬의 양곡,
무기 그리고 병력을 제공해야 했으며 그 후에도 원은 여러가지 명목으
로 금, 은, 포, 인삼, 약재, 매, 심지어는 나이 어린 처녀까지 요구하였다.
뿐만아니라 몽고는 1258년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이
북 지역을, 1270년에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자비령 이북 지역을
직속령으로 편입시켜 직접 지배하였다.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1273년
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군마를
기르는 목마장으로 삼았다.
죽을 때까지 몽고 침략자를 達旦頑種(몽고족을 야만시하여 고려인이
부른 이름)이라고 부르며 저주한 이규보는,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을 통
해 고구려 건국의 영웅 동명왕(고주몽)의 사적을 칭송하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리라"고 절규하였고,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1281년경 완성)'에서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 조선까지 끌어올리고, 단군 신하를 통해 그것을 天과 결부시킴으
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과 독자성, 나아가 문화의 우위성을 고취하였
다(삼국유사에 이르러 구전되던 단군신하가 최초로 문자화 되었다). 이
승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제왕운기'에서 단군을 중국의요와 대등한 국
조로 파악하고 동방의 모든 종족이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이제까지 도외시되어 온 발해를 우리 역사에 끌여들여 그 판도를
넓혔다. 이처럼 몽고와의 40여 년에 걸친 전쟁, 그에 따른 전쟁의 상처
와 피해, 민족적 굴욕은 뼈아픈 민족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몽고와
의 전쟁이후 단군의 자손이라는, 즉 같은 조상의 동일한 후손이라는 단
일민족 의식이 급격히 높아지고 단군은 민족의 시조로 자리를 잡았다.
그후 단군 숭배가 고조되는 가운데 고려 말에는 단군이 開國始祖로서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의 뒤를 이어 이성계가 신왕조를
수립했을 때 나라 이름은 조선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편 몽고와의 전쟁은 고려 왕조의 멸망을 알리는 명백한 전
조가 되었다. 자신의 정권 회복을 위해 침략자와 결탁하고, 나아가 몽고
와의 항전에 나선 군민들을 침략자와 힘을 합쳐 토벌한 고려 왕정은 민
중들로부터 그 권위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 왕
정은 우리 민중의 피로 붉게 물들여진 침략자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서
서히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